영적인 사고와 실천의 불균형과 자가당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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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롬 7:13-20
제목 : 영적인 사고와 실천의 불균형과 자가당착
로마서 7장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많은 논란을 만들어 냈습니다.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도 그렇고 전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로마서를 신학적으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실 로마서 7장은 큰 흐름에 있어서는 이 내용이 있든지 없든지 크게 상관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로마서를 관통하는 중심적인 주제는 칭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집중적으로 조명되어야 마땅한데, 7장에서는 갑자기 율법과 불신자의 관계에 대해서, 율법과 신자의 관계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1인칭단수대명사인 에고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일하심이 강조되어야 마땅한데, 이러한 내용이 등장하기는커녕 내가 율법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나의 생각과 행함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러더니 로마서 8장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다는 선언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로마서 7장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로마서 6장과 8장의 흐름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로마서 7장 말씀을 묵상할 때, 로마서 7장 24절 말씀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말씀만 주로 언급하고 나머지 말씀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로마서 7장 말씀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가급적이면 힘이 되고 평안을 얻고, 위로 받는 말씀들을 찾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합신 교단과 화평교회는 사람의 시선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계시의존사색의 측면에서 말씀을 해석하고 전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사람의 취향이나 기분에 따라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씀 안에 담겨있는 진리의 빛을 발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로마서 7장의 우중충하고 어두컴컴한 분위기에서도 그 분위기를 찬란하게 관통하는 진리의 빛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어떤 부분을 집중해서 살펴봐야 할까요. 로마서 7장 7절에서 12절 말씀에는 율법과 불신자의 관계에 대해 기록되어있고, 13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는 율법과 신자의 관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흐름을 읽을 때 우리는 불신자와 율법의 관계를 뛰어넘어 율법과 신자의 올바른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과 신자의 관계는 본문 말씀에 따르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알고 보니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고 고백한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이성적으로는 인정할 수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상 율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패역한 죄인을 그분의 자녀로 삼으시고 믿음을 부어주실 때, 죄인들의 삶에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변화는 동화 속의 신데렐라가 12시가 되었을 때,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변화하듯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변화하는 이 과정에는 한 두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내적 갈등을 필연적으로 수반합니다. 그렇다면 이 영적인 내적 갈등이란 무엇일까요? 머리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이론으로는 빠삭하지만, 정작 삶의 현장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할 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할 때, 그럴 때 내적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불균형은 모든 신자에게 동일하게 발생합니다.
물론 영적인 불균형에 치우쳐 있다고 해서 정죄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반대로 영적인 내용을 배운 대로 즉각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치열하게 몸부림치며 말씀대로 살아가려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말씀과 삶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흐르다 보면, 진리의 말씀이 삶의 기본값으로 자리 잡은 줄 알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죄성에 영향 받아서 하지 말아야 하는 말과 행동을 일삼게 되는 영적으로 모순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때에 신자는 영적으로 내적인 갈등을 겪음과 동시에 자신의 모순적인 영적인 상태로 인해 통증을 느껴야만 합니다.
만약 신앙생활하면서 이러한 내적 갈등이 일어나지 않거나, 신앙적인 불균형을 인지하지 못한 분이 계신다면, 그래서 그로 인해 영적인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분이 계신다면, 그분은 위기감을 느끼셔야만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런 영적인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는 영적인 자가당착에 빠져있는 상태라고 진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객관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우리가 반드시 느껴야만 하는 영적인 내적 갈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당 내용을 살펴볼 때, 세 가지로 나눠서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고찰해 보겠습니다.
(in) 첫째로, 율법은 영적이고 나는 육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로마서 7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이 말씀에서 “알거니와”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 혹은 진실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out)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내용을 말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떤 내용이 당연합니까? 율법은 신령하고 나는 육신에 속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마치 지구는 둥글다, 사람이 호흡하지 않으면 죽는다. 이러한 사실과 같이 율법과 사람의 성격을 규정합니다. 율법의 성격은 어떻습니까? 개역개정 성경에 의하면 율법은 신령합니다. 여기에서 “신령한”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뉴마티코스인데요. 성령 또는 영혼이 헬라어 명사로 프뉴마이지 않습니까? 이 단어가 형용사가 되면 프뉴마-티코스가 됩니다. 영적인 이라는 의미의 형용사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율법은 어떻습니까? 영적이라기보다, 어떤 법령으로써 지키지 않으면 큰일나는 것. 어기면 벌받는 것. 이런 인상을 주지 않습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이 줄임말을 많이 쓰는데요. 줄임말 중에 엄근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엄은 엄격, 진은 진지, 근은 근엄입니다. 별걸 다 줄이죠. 마치 율법은 이런 엄근진의 이미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율법은 어떻습니까? 영적입니다.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율법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지죠.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런 말씀들은 표면적인 행위로서 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로 구분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율법이 명시하고 있는 내용이 어떻든지 간에 우선 율법의 성격은 영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 때문에 죄가 죄로 여겨지게 되었으니, 율법이 잘못했네. 율법만 아니었으면 이건 죄가 아닌데. 다 율법 잘못이야. 율법은 너무 고루하고 고리타분해. 이런 식으로 율법의 가치를 평가절하할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변하지 않는 영적인 성격을 인정하고, 율법에 우리 자신을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로마서 7장 14절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굉장히 충격적인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대교 문헌들과 초대 기독교 문헌에서 율법을 영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며 대단히 혁신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을 제외하고는 신약성경의 저자 가운데 율법을 영적이라고 표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율법이 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며, 이와 동시에 우리가 율법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음을 기억해야 겠습니다. 율법이 세상이나 인간 세계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역, 다시 말해 영적인 영역에 속해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다시 14절 말씀을 보세요. (in)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in) “우리는 율법이 영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육체적이다. 나는 죄 아래에 팔렸다.” (out)
율법이 영적인 데 비해 우리의 존재와 성격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육체적입니다. 여기서 육체적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 번째 의미는, 인간의 육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요.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에 대해 죄를 짓거나 반역하는 특징을 가리킬 때 “육체적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육신적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에 우리가 구별되지 못한 채로 종속되어 있으며, 이 세상의 죄악된 영향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이 있는데요. 제가 앞서 14절 말씀을 직역한 내용을 말씀드릴 때, “우리는 율법이 영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육체적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서 “그러나”라는 역접의 의미를 가진 접속사가 우리말 성경에는 누락되어 있습니다. 영어성경 보시는 분들은 14절에서 but이라는 단어를 보시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헬라어를 잘 번역한 것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제가 지금 이 역접의 의미를 강조해서 말씀드린 이유는, 율법과 사람의 성격이 완전히 대조된다는 사실이 원어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잘못했다고 지적 받으면 기분이 좋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잘했다고 칭찬 받으면 기분 좋을까요? 일반적으로 후자가 기분이 좋겠죠.
그런데 사도 바울이 14절에서 “우리가 안다”라는 표현을 통해 일반적인 사실을 서술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일반적인 사실이 무엇입니까? 율법은 영적이고 나는 육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더욱 죄되게 만드는 율법이 죄인들에게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자꾸만 멀어지려고 하고, 죄 짓는 데 앞장서며, 죄 짓는 행위로부터 기쁨과 만족감을 누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 하반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의 존재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in)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out) 죄 아래에 팔렸다는 말씀은 죄의 통제 아래에 소속된 노예로 우리가 팔린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생존한 시대, 1세기 로마에는 노예 제도가 성행했습니다. 부유한 계층들에 의해 노예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사고 팔리는 일들이 비일비재 했던 것이죠. 이때 노예로 판다는 표현이 죄 아래에 팔렸다는 표현과 같은 표현입니다. 경매장에서 쇠사슬에 묶여서 죄라는 새로운 주인에게 팔리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상태는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15절 말씀 보세요. (in)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어떻게 보면 이 말씀은 굉장히 모순적인 말씀처럼 보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하는 행동을 내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알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생각은 원리적으로 또는 단편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내가 하는 행동을 모두 다 안다면, 살면서 그 어떤 오해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타인에게 오해 산 적이 단 한번도 없다. 하는 분 계십니까? 이 자리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물론 나의 의도를 다른 사람이 오해할 수 있습니다만, 반대로 나의 의도를 잘못 표현하거나 충분히 설명하지 않아서 오해를 사는 경우가 종종 있을 수 있겠죠. 이러한 점에서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오늘 본문 말씀의 대상이 우리인데,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말씀 말미에 적용 부분에서 다루겠습니다만 중간 적용을 하자면, 우리의 기본적인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이자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아서 그 유익을 즉각적으로 누리게 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인이 죄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본질적으로는 죄의 노예가 될 수 없죠. 그러나 사도 바울은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마치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된 것처럼 시각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우리의 영적인 정체성을 마음대로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힘으로 신앙생활하려고 하는 성도들,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이 죄의 노예로 팔려있는 것과 같은 연약한 사람들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사도 바울은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악의 세력과 우리를 너무도 쉽게 노예처럼 조종할 수 있는 죄의 위험성에 대해 견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고찰할 때, 두 번째 내용도 기억해야 합니다. (in) 둘째는,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17절과 1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영적인 근간을 뒤흔들고 위협하는 존재가 누구입니까? 1번. 죄. 2번 나 자신. 누구일까요? 1번 죄입니다. 18절 말씀만 읽으면 죄가 아니라 내가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17절 말씀에 따르면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죄를 행하는 것은 맞는데, 엄밀히 따지고 보면, 죄를 행하게 만드는 주체가 내가 아닌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죠. 죄가 나를 유혹하고 미혹시킬 때, 그 죄를 분별하고 선한 것을 선택해야만 하는 책임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에게도 동일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에서 2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out)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매일 매일 입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변화해서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거룩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죄의 위험성은 사방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한순간이라도 믿음의 길에서 떠난 것처럼 살아간다면, 제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육적인 삶을 살면, 죄라는 엄청난 강적이 우리 인생에 똬리를 틀고 주인행세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in) 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죄와 육신에 의해 그리스도인의 의지가 꺾이는 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로마서 7장 15절 말씀 보세요. (in)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 말씀은 18절에서 거의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18절 말씀 보세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행하기를 원하는 것은 선입니까 악입니까? 선이죠. 선을 행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선한 행동 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말씀의 대상은 그리스도인에 해당된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지고의 선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참으로 선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상, 선에 대해서 언급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주체인 나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데, 그리스도인이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이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청지기의 직분을 온전히 감당해 내기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치열하게 노력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흘러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말씀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너무나도 모순적인 자신의 삶을 발견하게 됩니다. 삶에 치여서, 바쁘고 힘들어서, 여러 가지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들에 의해서 신앙생활조차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바쁘고 정신없는 인생 가운데, 선한 것을 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상대평가로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여겨주시지 않습니다. 로마서 7장 18절 말씀 다시 보십시오. (in)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상황이 어떻고 저떻고를 떠나서,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선을 행하는 것이 없으면 없는 겁니다. 아무리 생각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애매하게 행한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선을 행하는 척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여겨주시길 바라는 것은 착각이요.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지난 휴가 때, 오랜만에 치과에 가서 치석을 제거하고 왔습니다. 저는 감각적으로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입니다. 다 그렇겠습니다만, 피곤하면 잇몸도 붓고 피도 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치석 제거할 때마다 끔찍한 통증을 느끼는데요. 이번에 치석 제거하고 나서 원장님이 간호사 선생님께 한마디 하시더군요. “양치하는 법 좀 가르쳐 드리세요.” 이 말을 듣고 제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원장님. 저 양치했습니다. 치석이 왜 많은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지만 양치, 저 했습니다 선생님. 안 한 사람 취급하진 말아주십시오. 순간 이렇게 악한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결과가 이미 증명했습니다. 마치 양치를 하지 않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이 특정 부위에 많이 쌓여버린 치석이 저의 잘못된 양치 습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죠. 선을 행한다는 것은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선을 행하기를 원하고, 실제로 내가 생각하는 선한 행위를 실천했다고 할지라도, 내 삶의 루틴에 따라 규칙적으로 수차례 행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 행위는 선한 행위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선행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선한 행위는 그리스도인이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이에 대한 칭찬과 대가를 하나님께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17장 7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는 생사여탈권을 빼앗긴 천박한 노예와도 같습니다. 이런 노예가 주인에게 노동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가치 평가를 합당하게 받아내겠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애초에 그런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에 선한 것 하나 없는 죄악된 존재이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할 수 없을뿐더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선한 행위를 감당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그 무엇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선한 행위를 요구하십니다. 신앙의 열매로서, 감사의 표현으로서, 신앙의 확신으로서,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선한 행위를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선한 행위의 실천은 신앙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나의 힘으로는 온전히 감당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을 의지해야만, 온전한 순종 가운데 선한 행위를 감당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영적인 사고와 실천에 있어서 두 가지의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매일 매일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이는 우리의 영적인 사고를 구성하고 삶에서의 행함으로 연결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사고와 실천에는 긍정적인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우리 자신의 힘만 의존해서는 부정적인 결과만 낳게 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두 가지의 결과를 낳게 되는데요. 하나는 불균형이고, 하나는 자가당착입니다.
영적인 불균형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힘과 내 뜻대로 신앙생활하다 보면, 영적인 생각과 행함에 있어서 불일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만,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 것 뿐이지,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해진 것은 아닙니다. 그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고 최고의 여건을 조성해 주시는 상황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죄인이며, 죄인의 속에는 선한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7장 14절,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7절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절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이러한 무능력함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적인 사고와 실천의 불균형을 토로하며 엎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우리는 신앙의 모순으로 가득찬 죄인입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완벽할 수 없으며, 완벽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영적인 기대치와 기본값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가치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불균형을 고통스러워하며 불편하게 느낄 줄 아는,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만약 이러한 영적인 불균형을 느끼지 못하는 분이 계신다면, 하루속히 하나님 앞에 더욱 엎드리시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사고와 실천에 있어서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은 가장 큰 영적인 질병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질병에 대한 문제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질병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병원에 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손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떻게 그 질병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양치질했다고 아무리 주장한들, 치석이 쌓여있으면, 끔찍한 고통에 내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건강관리 잘했다고 생각한들, 잘못된 식습관으로 인해 큰 질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한 마음과 자세로, 영적인 사고와 실천에 있어서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리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죄인입니다. 영원하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치켜세우고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익숙한 자들임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감히 무엇을 요구할 것이며, 무엇을 받아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간구할 것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는 은혜뿐이라는 사실을 겸손히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건강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의 유익을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찬송가 357장 함께 찬송하시겠습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전적인 무능력함 가운데 오직 주님 한분만 의지하며 말씀대로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화평의 모든 지체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본론
1. 율법은 영적이고 나는 육적이다.
2.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
3. 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
적용
영적인 사고와 실천의 불균형
불균형이 정상적인 상태. 그러나 이를 인지하지 못하면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어있음. 나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 아무런 위험성도 인지하지 못한다면, 나의 악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반드시 자가당착의 오류를 겪을 수밖에 없음. 내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런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
1. 영적으로 우리는
11페이지
[찬송가]
찬송가 장 함께 찬송하시겠습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 결단하는, 화평의 모든 지체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설교 원고 11~12페이지
설교 개요
(in) (out)
📷
7:14-17
율법은 신령하고 나는 그렇지 않다. 7:14
율법은 계속해서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음.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 이 표현은 2:2, 3:19 등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 혹은 진실을 가리킴. 바울은 진실을 토대로 자신의 논리를 펴 나가고 있음.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으로 12절에 나와 있는데, 14절에서는 신령한 것으로까지 표현됨. 다시 말해 율법은 영적인 것이며, 영적인 세계의 필수적인 요소들을 다루는 것. - 단순하게 금지 명령을 모아놓은 헌법 정도가 아님.
반대로 나는 육신에 속해 있음. 이는 바울이 이 단락에서 나를 여섯 번 강조한 것 중에서 첫 번째임. 이 문구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기본적인 성향과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속성을 일컫는 것.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자기 자신의 육체적 혹은 죄를 선택하고자 하는 세속적인 성향과 결부시킴. 우리는 바울의 고백처럼 이 땅에 속해 있으며, 죄와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음. 바울은 이런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을 3:3에서 언급하고(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들이 세상적이고 육신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말함. 우리는 모두 삶 속에서 이런 성향과 매일 싸우고 있기에 매일 각성하고 성령의 힘으로 죄의 압박에서 보호받을 필요가 있음.
신령하지 않은 혹은 육신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에고는 죄 아래에 팔렸음. 이런 참담한 모습은 경매장에서 사슬에 매여 죄라는 새로운 주인에게 팔리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함. 이러한 개념은 6:16-23을 상기시킴.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죄 아래에 팔린 “나”라는 존재가 구원받은 자인지 구원받지 못한 자인지 논란이 됨. 죄의 종이 더이상 아니라고 선언하는 6장의 내용과 비교해 볼 때, 종이 구원받은 자를 의미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음. 그러나 반대로 이 종 개념이 널리 행해지는 죄와,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지속함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위험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음.
7장에서 이 부분은 그리스도인을 염두에 두고 썼는지에 대한 논쟁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임. 그러나 오스번은 믿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라 주장함. 왜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죄의 종으로 만드는 권세에서 해방되어 성령 아래에서 육신의 죄된 성향들을 이길 수 있지만, 죄는 율법과 육신을 통해 지속적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점거지로 삼으려 하기 때문.
바울은 종 개념을 비유로 사용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죄가 때때로 통제하려고 하는 모습을 강조함. 이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님. 바울은 자신의 힘으로 신앙생활하려고 하는 성도들이 빨대처럼 쉽게 꺾이고 마는 연약한 사람들임을 시각적으로 표현함. 바울은 우리를 공격하는 악의 세력과 우리를 너무도 쉽게 노예처럼 조종할 수 있는 죄의 위험에 대해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고 있음.
문제 :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함 – 7:15
신령하지 않은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혼동 가운데 있음.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위 말씀을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와 합해서 생각해 보면, 바울은 모두가 율법이 신령한 줄 알지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조차 행하지 못하고 있어서 혼란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것.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정작 내 삶에서 그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음. 이를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갈등, 죄책감, 혼란, 의심 등이 이 구절들의 중심 기둥임. 바울은 선한 것을 하고 싶으나 육신의 장벽을, 자신의 육적인 성향을 넘을 수 없었음. 이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 사이의 괴리이자 갈등임.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바울은 세 가지 동사를 사용하는데, 모두 ‘한다’를 의미함. 이 단어들은 15-23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함. 이 단어들은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이 구절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나는 하고 있다.”가 됨. 이 동의어들이 합쳐져서 선한 일을 하고 싶으나 할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
바울이 소개하는 단어 중 또 다른 주요 단어는 “원하다”임. 15-21절에서 7회 등장함. 의지는 그리스도인의 사고 체계 중심에 있는데,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영적인 열망과 실제로 행하는 행동을 구분함. 선한 일을 계획했으나 미워했던 행동을 실제로 행하고 있는 것. 이 도덕적인 실패는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죄에 굴복하려는 육적인 경향과 함께하는 죄의 산물임. 죄냐 육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둘이 함께 역사하는 것. 죄는 유혹을 가져오고, 육체는 거기에 항복함. 이러한 싸움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복판에 있음. 우리 안에 있는 악과 나쁜 것인 줄 알면서도 그것에 항복하려는 육신의 성향과의 싸움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
율법이 선하다는 증거 7:16-17
바울은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지 못했지만, 좋은 것을 하고 싶어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율법은 선하고 영적’이라는 것을 증명함(12, 14절). 그가 열망하는 바와 다르게 행동할 때라도, 바른 것을 하고자 하는 그 사실이 율법의 도덕적인 선함에 대한 내적인 동의를 드러냄.
이 모든 것의 이유는 17절에 나타남.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미 보았듯 바울은 율법은 선하지만 자신은 아니라고 말했음. 그의 결론은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임. 율법처럼 나는 죄의 권세에 속고 있음. 나는 유혹에 넘어가고 죄책감을 가지지만 죄를 만들어 내는 주체는 아님. 잘못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은 있어도, 다른 권세가 영적인 갈망을 방해하고 그것들을 거꾸로 가게 만듦.
죄는 옛 사람이 죽고 거듭날 때 쫓겨남(엡 4:22-24). 하지만 계속 우리를 침략하고 무너뜨리고 우리 안에 새로운 집을 세우려고 함. 패배한 세속적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다시 한번 현실이 되었음. 우리는 바울이 분명히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기억해야만 함. 우리는 결코 이런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처럼 살아서는 안 됨. 바울은 이런 힘없는 삶이 아닌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음. 하지만 이런 승리의 삶은 8:1-17에서 보여주듯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야만 가능함. 바울의 요점은 제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육적인 삶을 살면 죄가 똬리를 튼다는 것.
3) 죄의 권세에 속박된 자아 7:18-20
우리가 문제의 중심에 있음. 문제는 죄의 권세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 안에 다시 집을 짓고 있다는 것. 6장에서 바울은 죄가 어둠의 세상에서 쳐들어오는 군대처럼 우리를 정복하고 노예로 삼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표현했음. 죄는 우리의 삶을 점거하려고 함. 7:14-20에서 죄는 우리를 넘어뜨리고 우리 안에 집을 만들었음. 이는 죄의 노예가 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서(14절), 자유롭고 싶지만 그 속박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고, 죄가 주인 노릇을 할 뿐만 아니라 속사람 안에 거하고 선한 것들을 다 내쫓음.
내속에 선한 것이 없다 7:18
내면에 있는 죄 때문에 바울은 두 가지를 깨달음(“아노니”)
첫째, 그는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은 줄을 알게 됨. 죄가 집을 지으므로 선한 것을 찾아도 속에 남지 못함. 그러므로 이제 선하지 않은 죄는 나의 죄성, 즉 문자 그대로 내 육신에 거함. 율법은 선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요소이고, 내면을 통제하는 힘은 선한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 내면을 다스리는 통제권은 더이상 성령이 아닌 육신에 있고, 죄성대로 하나님보다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세상과 일치하는 경향이 지배권을 가짐.
둘째, 바울은 죄를 지으려는 성향의 원인이 자신 안에 있는 갈등이라는 것을 깨달음.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이 문구는 15절의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라는 구절을 달리 말하는 것. 에고는 육신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싫어하는 것을 선택하고 행함. 참된 열망은 사라지고, 자신이 왕좌를 차지하려 함.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의지와 행동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
육신은 물리적인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 여기서 육신은 죄가 활성화하게 하는 기본적인 요소를 말하며, 개인 의사 결정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을 뜻함.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음 7:19-20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절) 그는 자신의 열망을 “선”으로 자기가 사실상 하고 있는 것을 “악”으로 정의내리고 있음. 얼핏보면 바울은 완전히 포기한 것처럼 보임. 하지만 사실 바울은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25절에서 완전히 반전이 있을 것을 독자들에게 준비하게끔 하고 있는 것. 우리 인생 가운데 가끔씩 죄가 너무 강해서 결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있음. 그래서 바울처럼 계속 죄가 우리 육신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때마다 우리가 하지 않으려는 악한 일들을 계속하고 있음. 하지만 우리가 성령 하나님께 순복할 때 그분으로부터 새 힘을 얻고, 승리를 맛보게 될 것.
바울은 20절에서 부정적인 측면알 간단하게 정리함.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6-17절의 모든 요점을 여기서 찾을 수 있음. 바울이 내면 깊이 행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행했을 때 죄책은 내가 아니라 자신 안에 거하는 죄에 있다는 점.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그가 순결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 그도 역시 굴복하기로 선택한 것. 중요한 것은 자신이 범죄자인 것을 알게 될 때 구원의 역사가 시작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