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죄의 상관관계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24 views
Notes
Transcript

본문 : 롬 7:7-12
제목 : 율법과 죄의 상관관계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국어 시험 볼 때 단골 문제로 이런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지문에서 등장하는 화자는 누구인가? 지문에 등장하는 나는 누구인가?” 이런 문제가 거의 매 학기마다 출제되었습니다. 사실 뭐 이런 문제는 굉장히 쉬운 문제로 분류되는데요. 왜 그런가 하면 이런 문제는 단순 암기 영역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암기하지 않은 경우에는 지문을 읽고 화자가 누구인지 또는 나는 누구인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험 공부하지 않은 친구들은, 시험지를 받고나서야 화자가 누구인지 찾기 시작하죠. 하지만 이런 문제는 보통 점수를 주는 문제이기 때문에 지문을 꼼꼼히 읽어보고 신중하게 답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대로 암기한 대로 문제를 보자마자 바로 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수능시험까지 보면, 화자가 누구인지, 나는 누구인지. 이런 문제를 풀 일이 거의 없어집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이런 문제를 접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오늘 본문 말씀인 로마서 7장 7절 이하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로마서 7장에 등장하는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가의 문제는 신학적으로 계속해서 논란이 되어왔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로마서 7장 7절에서 12절 말씀을 원어성경으로 보면, “나”라는 일인칭 단수 대명사가 무려 다섯번 씩이나 사용됩니다. 로마서 1장 편지 서문에서 일인칭 단수 대명사가 몇 차례 등장하긴 했습니다만, 정작 로마서 본론에서는 한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로마서 7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인 로마서 7장 7절에서 12절에 등장하는 ἐγώ, 나는 누구일까요. 대표적인 견해 네 가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in)
먼저 첫 번째 견해는 가장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이 취하는 견해인데요. 나는 사도 바울이라고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과 죄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죠.
이어서 두 번째 견해, 나는 아담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죄에 대한 경험과 고민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어서 세 번째 견해, 나는 이스라엘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1인칭 단수 대명사 나는, 율법을 받기 전과 후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데, 특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율법과 씨름하는 것에 관하여 설명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out)
이렇게 세 가지의 견해가 있는데요. 신학자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이런 주장을 학술지나 본인의 서적에 싣는 것이 아닙니다. 다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예컨대, 나는 아담이라고 보는 견해는 어떤 근거가 있을까요? 로마서 7장 9절 말씀 보세요. (in)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 내가 살았더니 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오직 아담만 해당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담이 어기기 전까지 아담이 살아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아담만 해당됩니다. 계명이 이르기 전에는 아담만이 살아있었으며,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고 선악과를 먹었을 때,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out) 이렇게 로마서 7장 9절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나는 아담을 가리킨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이 율법과 죄의 관계를 설명할 때, 7절 말씀에서 십계명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 보세요. (in)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탐심에 관한 계명은 십계명에서 열번째 계명에 해당하죠. (out) 자 그런데, 아담이 십계명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못 받았죠. 십계명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인류 최초로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7장 문맥에서의 나는 아담으로 해석할 수 없으며, 아담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해석학적 장치인 문자적인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세 번째 견해, (in) 나는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견해는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으나 이스라엘이 범죄한 뒤에 이스라엘이 죽임당한 것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out)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까지 죄를 지었을까요 안 지었을까요? 죄 지었죠. 많이 지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자마자, 마라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물이 써서 물을 마실 수 없게 되자 백성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요즘 마라가 젊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기있는 음식인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마라물이 써서 못마셨습니다. 네. 아주 재치있는 유머였고요. 또 이스라엘 백성인 신 광야에서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지 못한다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르비딤에서는 물이 없다고 원망고요.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기 전부터 하나님을 계속해서 원망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서 로마서 7장 9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in)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나를 이스라엘로 해석하면 7장 9절 말씀은 모순이 됩니다. 왜 그런가하면,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 이스라엘이 살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out)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에 시내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지독하게 원망했던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죽은 상태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로마서 7장의 나는 누구일까요. 소거법에 따라 세 가지의 견해 중의 두 가지의 견해가 성경적으로 모순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첫 번째 견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요? (in) 첫 번째 견해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말씀인 로마서 7장 9절 말씀이 문제가 되는데요. (in) 로마서 7장의 내가 사도 바울이라면, 사도 바울이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 살았고, 계명이 이르매 죄가 살아나고 사도 바울은 죽었다는 것인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out)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모순투성이의 해석이 되겠습니다만, 생명과 사망에 대해 고찰할 때, 관계적이고 경험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사도 바울의 경험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더 자세하게 설명 드릴 수 있습니다만, 분위기를 봐서 간략하게 정리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칼빈 선생님은 이 난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로마서 7장 7절에서 12절까지의 나는 사도 바울인데, 바울이 거듭나기 전의 상태를 가리킨다. 칼빈 선생님의 설명대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의 나는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사도 바울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불신자에게 있어서 율법과 죄는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로마서 7장 7절 말씀 보세요. (in)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 수신자들에게 전합니다. 율법이 죄냐. 결코 그럴 수 없다. 로마서 전체 문맥을 이해하지 못하신 분들은,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갑자기 왜 이렇게 전투적인 말투가 나오는지 당황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죄냐고 물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수신자들 앞에서 이런 식의 논증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5장 20절 말씀 보세요. (in)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또 6장 14절 말씀 보세요. (in)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out)
두 말씀에 따르면 율법은 죄와 협력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뭔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로마서 7장 4절 말씀에 따르면, (in) 그리스도인이 율법에 대해서 죽임 당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에 따르면, 율법? 말씀? 그런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오직 은혜만 중요하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만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7절 이하의 문맥에서 율법과 죄의 상관관계를 재규명합니다. 율법이 죄라는 해석과 율법이 구원의 도구라는 상이한 해석 사이에 올바른 해석을 제시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죄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율법과 죄는 사람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서 다르게 작용하는데요. 세 가지의 단계로 나눠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in) 불신자에게 율법은 적극적으로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로마서 7장 8절 말씀 보세요. (in)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여기서 죄가 기회를 탔다는 것은, 적군이 전쟁에서 요충지를 차지했다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out) 사도 바울은 죄가 자신의 삶을 침공하는 적군으로 묘사하고, 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서 자신으로 하여금 모든 종류의 유혹에 빠져들게 만들어서 영적으로 쓰러뜨리려고 한다는 것이죠.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죄인들이 범법 행위를 저지르고 체포되었을 때, 십중팔구는 자기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핑계를 댑니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변명이죠. 사람의 머리와 손이 분리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죠.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때, 주먹만 죄를 지었고, 주먹만 분리해서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그 자체가 죄인인 것이죠. 사람과 죄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영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과 죄의 관계를 규명함에 있어서 대표적으로 탐심을 예로 드는데요. 탐심 뿐만 아니라 모든 죄들이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대표적인 예시로 탐심은 굉장히 적절한 예시입니다. 오늘날에도 탐심과 같은 악한 마음들이 얼마나 편만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본인들의 탐심에 대해서 극구 부정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탐심 같은 것없다. 탐심 때문에 돈 쓴게 아니라, 돈이 있어서 있는 것 적당히 쓴 것뿐이다. 갖고 싶어서 산 게 아니라, 과시하려고 산 게 아니라, 그냥 살 때가 돼서 산 것뿐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기만에 빠져있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렇게 악하고 썩어있는 죄성을 정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율법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이 악한 것인지를 배워야만 그런 생각과 행동을 멈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불신자들이 이런 부분에 있어서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누가 정했어? 이런 식으로 반문합니다. 제가 관계 전도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에 하나가 이런 질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은 거면, 애초에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면 되지 않았느냐.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참으로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고, 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습니다. 벌금을 내든, 징역을 살든, 법에 따라 처벌받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야 이거 누가 이런 식으로 정했어? 나는 이거 인정 못해. 이따위로 법 만든 사람 나오라고 해. 아무리 이렇게 말해봐야 소용없죠. 그 나라가 정한 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율법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의 규범을 제시하는 내용을 따르지 않고, 본인의 욕구대로 살아간다면, 패역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내용을 생각해 볼 때, 불신자들 혹은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말씀의 내용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의 많은 교회들은 율법주의를 배격함과 동시에 율법의 순기능까지 간과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은 강조하지만, 하지 말아야 하는 잘못된 말과 행동에 대해서 제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리적인 부분을 더욱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교리적인 내용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 가운데 완성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의인의 신분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하고 현실에 안주해도 될까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자가 아무런 변화없이 불신자들과 다를 바 없이, 죄인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저 사죄의 은총에만 감사드린다고 기도로 인사치레만 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엄청난 영적인 착각과 오류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온갖 탐심을 이룬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단계는, 고군분투하는 신자의 삶에 작용하는 율법과 죄의 관계인데요. 이 단계에서 제가 말씀드리는 신자는, 성화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신자를 의미합니다. (in) 그런 신자에게 율법은, 죄에서 비롯되는 신앙양심의 거리낌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합니다. (out)
불신자가 신자가 된다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오직 은혜로 뭘 하지 않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 이런 식의 이단적인 사상과 거짓에 물든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부인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고자 하는 철저한 몸부림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율법과 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배워야만 합니다. 로마서 7장 10절 말씀 보세요. (in)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로마서 7장 10절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율법은 어떤 존재입니까?
첫째로, 율법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선한 목적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둘째로, 율법을 어기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면, “나”라는 존재는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죄의 존재는 내가 소유했던 삶을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탐욕은 탐욕을 낳고 그 탐욕은 또다른 탐욕을 낳습니다. 더 많이 갖고자 하는 그 죄악된 마음에는 한계점이 없습니다. 하나를 가지면 다른 하나를 더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죄인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당장은 별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안일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죽음과 점점 더 밀접해진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의 사실을 성경적으로 이해한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고군분투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그리고 저와 같이 젊은 목회자들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인생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발생합니다.
예컨대, 신앙의 연륜이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모르고 하는 실수, 부지중에 저지르는 실수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알고 저지르는 잘못된 말과 행동들은 교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아들을 키우면서 아들의 모습 가운데 이와 유사한 모습들을 종종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제 아들이 한두살 때, 차량으로 이동할 때 신호 대기하는 것을 힘들어했습니다. 차가 멈추면 가야돼 가야돼. 이런 말을 하더군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화처럼 빨간 불인데, 사고날듯말듯 아슬아슬하게 묘기를 부리면서 운전합니까? 그럴 수 없죠. 그래서 당연히 차분하게 말로 설명합니다. 앞에 빨간 불 보이지? 빨간 불이 보이면 멈추는거야. 이렇게 알려줬더니 아들이 말하기를, 싫어 가야돼. 라고 답하더군요.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문제인데, 좋다 싫다의 측면으로만 이해한 것입니다. 나는 답답하니까 가야겠다. 에비야 가라. 뭐하고 있냐.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또 바깥에서 식사할 때, 식당에서 물을 주지 않습니까? 컵에 물을 따르면, 가끔 이놈이 컵에 손을 넣습니다. 정상인가요? 그럴 수 있나요? 애를 처음 키워보는 입장에서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오자마자 손을 넣어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병에 걸리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뭔가 찝찝하죠. 하지만 이 아이는 그게 재밌는 겁니다. 물이 있네? 손 넣으면 재밌겠다. 하고 손을 넣는 것이죠. 손으로 뭘 만졌든지간에, 물이 담겨있는 컵에 손 넣고 휘휘 젓고, 그 물을 마셔도 보고 뱉어도 보고. 아주 별 짓을 다합니다. 저는 애기 때 안 그랬는데 말이죠. 이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 제가 죄인이라는 증거이겠죠.
자, 제가 두 가지의 예시를 들었는데요. 그리스도인이 율법과 죄에 대해서 생각할 때, 첫 번째 예시대로, 신호등 빨간불이 불편하고 답답하다고 해서,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면 안되는 것처럼, 말씀이 지시하는 바에 대해서 답답하고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멈춰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처음부터 완벽하게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에 따라서 실패할 때도 있고, 죄에 대한 욕구를 참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욕구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해서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제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정결한 마음 주시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며 고군분투하는 것이 바로 신자의 삶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두 번째 예시에서 말씀드렸듯이, 애기가 물컵에 손 넣는 것? 뭐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율법과 그리스도인으로 적용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보통 불신자들이나 믿음이 연약한 초신자들이 율법과 죄에 대해 말할 때, 호기롭게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담배 피우지 말라고 성경 어디에 있어. 마약하지 말라고 성경 어디에 있어. 술 마시지 말라고 성경 어디에 있어.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언제 술 마시지 말라고 했어. 몇 장 몇 절? 아니. 정확히 말해. 몇 장 몇 절에 써 있냐고.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아니 뭐 그건 알겠는데, 그게 술 마시지 말라는 거랑 똑같아? 이런 식으로 문자적인 접근 방식을 취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애기가 물컵에 손 집어 넣고, 그걸 입에 넣었다가 자기 몸에 뱉고, 이런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죄에 대해서 위와 같은 접근 방식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 양심에 죄책감을 일으킵니다. 사소한 실수와 잘못에도 스스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이죠. 이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적인 이물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마치 컨텍트 렌즈를 한번도 껴본 적 없는 사람이 렌즈를 처음 껴보고 눈에 이물감을 느껴서 불편을 토로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의 인생에 적용될 때, 모든 영역에서 영적인 이물감을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죄인의 추악한 본성에 대해 자기혐오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신앙양심의 거리낌과 불편함은 신앙 성장의 자양분이 됩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하나 하나씩 해결해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신앙생활만 상상하는 것은 동화책의 신데렐라와 같은 인생을 꿈꾸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보람찬 신앙 성장을 이루기 위해 성품과 언행과 믿음에 있어서 율법과 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시는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in)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지향해야 하는 목표, 율법을 즐거워하고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이런 인물은 대표적으로 다윗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율법을 대하는 자세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in) 첫 번째 자세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인생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35절 말씀 보십시오. (in)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 함이니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out) 믿음이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어떤 징계를 받을까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서, 억지로 말씀을 지키는 것과 다윗의 행위에는 얼마나 큰 온도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단계는 율법과 죄의 관계에 있어서, 율법에 대해서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그 자체를 즐거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내심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수요예배 설교 일정이 한 두달 전에 미리 정해지기 때문에, 혹을 하나 달고 살아온 것이죠. 또 기질상 설교나 뭐 성도님들 앞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설교 일정이 다가오면 부담감에 몸서리 치게 됩니다. 그런데 어제 우리 담임목사님께서 물어보셨습니다. 장목사님은 삶의 낙이 무엇입니까? 저는 삶의 낙이 딱히 없는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다윗처럼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이렇게 답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거 해야돼 저거해야 돼. 이런 생각들에 치여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부족한 목회자의 모습을 돌아보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자 이어서 다윗이 율법을 대하는 두 번째 자세는, (in) 율법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9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이어서 시편 119편 12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out) 불신자들은 세상에서 본인의 가족과 건강과 돈을 가장 많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영화의 단계에 거의 근접한 그리스도인은 다윗과 같이 말씀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이 율법을 대하는 세 번째 자세는, (in) 말씀을 신속히 지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59절과 60절 말씀 보세요. (in)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out)
사람이 말로는 못하는 게 없습니다. 말로는 무얼 못하겠습니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돈 안들죠? 결혼하기 전에 달이고 별이고 해고. 뭐든 다 따주겠다고 말씀한 분 계시죠? 말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않았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본 로마서 7장 7절에서 12절 말씀은 신학적으로 논란이 되는 단락이었습니다만, 실제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부분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율법과 죄의 관계를 고찰하고, 이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젊은 시절이든 노쇠한 시절이든지간에 관계없이 언제나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고 신앙양심에 거리끼는 삶의 문제가 없는지를 매일 매일 돌아보며, 고군분투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 인생에 영적인 이물감을 느끼게 하는 문제들이 한순간에 해결되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쉽게 편해지는 길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말씀대로 살아가는 인생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그리스도인, 말씀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말씀을 신속히 지키고 순종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사도 바울이 밝힌대로,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고백하고 회개하기보다 이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자신의 기준과 관점으로 판단하려 했던 우리의 교만함을 주님 앞에 고합니다. 바라옵기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화평의 공동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모이기를 힘쓰며 교제하는 재미에 만족하고 그치는 공동체가 아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매일 매일 닮아가며 영적 성장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가는 우리 화평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찬송가 286장 함께 찬송하시겠습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주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인생을 즐거워하고 사랑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또 그렇게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화평의 모든 지체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설교 원고 11~12페이지
설교 개요
1. 서론 - “나는 누구인가?”
국어 시험 단골 문제. 화자는 누구인가? 시험 잘 보려면 일단 외워야 함. 시를 느껴봐. 문학 작품의 맛을 느껴봐. 이런 것 없음. 진도 나가기 바쁨. 나는 누구고 주제는 무엇이고 줄거리는 어떻고. 중요한 내용 일단 외워. 공부 안한 애들은 시험볼 때 화자가 누구인가 객관식 질문 보면, 그때부터 화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시작.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갖기 시작하는 것. 내신 주입식 교육 받은 아이들은 문제 읽자마자 답 적음. 고등학교까지만 나는 누구인가 공부하면 되었음. 그러나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음.
2. 본론
1) “나는 누구인가?” 두 가지의 문제
(1) 롬 7:7-12(~15) 나는 누구인가?
(2) 롬 7:16-25 나는 누구인가?
문제 배경 설명. 롬 3-6장 율법의 이미지, 사도 바울의 의도?
결과적으로 에고는 누구인지 밝혀야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에고의 정체가 아닌 이 단락의 주제, “율법의 선함”에 있음.
2) 죄와 율법의 상관관계 – 불신자에게 율법과 죄는 어떤 관계인가?
- 율법, 죄에 대한 정의
(1) 공존할 수 없는 관계
- 계명이 없을 때 살고 이르면 죽음
(2) 율법은 죄에게 종속되지 않음. 그러나 죄는 율법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만듦.
예화 1. 신호등
아들 한두살 때, 차량으로 이동할 때 신호대기하는 것을 힘들어 했음. 가라고 짜증을 내는데, 설득함. 빨간 불이 바뀌면 가는거야. 그랬더니 싫어라고 대답함. 아니 이게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닌데, 싫어. 가야돼. 이렇게 대답하는 것.
이뿐만 아니라 식사 자리에서 물컵에 손을 넣어. 그리고 그 물을 마셔. 안 될 것은 없으나 하지 않는 것이 좋지. 판단의 근거는 어디에?
예화 2. 불신자들의 반문 – 인지적인 거부반응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왜? 죄 지으라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 이해못함. 그걸 왜 그렇게 정해? 선악과 먹으면 죽는다고? 왜? 만들지 않으면 됐잖아.
- 법치 국가마다 처벌의 정도가 다름. 무단 투기한다고 해서 똑같이 구형하지 않음. 살인범에 대한 처벌도 다름. 사형선고, 무기징역, 100년형. 모두 다름. 이 법은 누가 이따위로 만들었어? 나는 인정 못해. 나 안 해. 법 만든 사람 나오라고해. 사장 나와. 이렇게 할 수 없음.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는 할 말 못할말 다함.
3) 율법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함께 있으면 불편한 존재인가? 괜히 눈치 보고 괜히 꺼림직해지는가?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 불편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말씀을 멀리하게 됨.
본인의 죄성과 악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며 노력하기 보다,
말씀을 멀리하게 되는 것. 왜? 그게 속편하니까.
사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로 인생을 시작했음.
누구든지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 그래서 사람의 영적 성장 단계를 크게 네 가지로 나누면,
(1) 불신자
-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음. 모든 것을 자신의 기준대로 판단하고 살아감.
(2) 연약한 그리스도인의 단계
- 이게 죄냐 아니냐에 예민함. 성경에 있어 없어? 어디? 몇장 몇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면 이렇게까지 해야 돼? 생각해볼게.
(3) 말씀과 씨름하며 고군분투하는 단계
-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양심에 죄책감을 일으키고 일상생활에 있어서 영적인 이물감을 느끼게 됨. 그렇다고 하더라도 피하지 않고 몸부림 침. 하나 하나씩 해결하며 나아가려고 노력함. 처음부터 완벽하고 행복할 수 없음. 대부분 이 단계에 속해 있을 것.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모여서 교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음. 그런 재미가 없으면 안 되겠지만, 무엇보다 신앙 성장의 재미를 느껴야 됨. 과거의 삶에서 변화된 삶을 점검하며 확인해야 함. 성품과 언행과 믿음의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
(4) 말씀대로 살아가는 인생을 즐거워하며 사랑하는 단계
불가능해 보이지만 성도가 마땅히 지향해야 하는 목표. 다윗과 같은 영적 상태를 지향해야 할 것.
① 즐거워함
시편 119:35 계명을 즐거워 함.
시편 119:47-48 계명을 즐거워하고 사랑함.
② 사랑함
시 119:97 사랑함, 119:113 사랑함, 119:127 순금보다 더 사랑함,
시 119:163 사랑함
③ 빨리빨리 지켜.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빨리 빨리 시 119:60
시편 119:60 계명을 빨리 빨리 지켜 꾸물거리지말고. 즉각적인 순종.
3. 결론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나의 자유를 속박하고 옭아매는 사슬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나의 자유는 박탈당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율법은 하나님을 닮아가며, 거룩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지켜주는 가이드라인.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사망의 길로 빠져들수밖에 없음.
그러니 이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느껴선 안 됨. 하지만 우리의 죄성은 이를 불편하게 여김. 이를 말씀에 비추어 인지하며, 다윗과 같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즐거워하며, 사랑하며, 지체없이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 끝.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