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의 기름부음, 심판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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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왕하 9:1-13
제목: 예후의 기름부음, 심판의 시작
열왕기하 8장 25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아람과 전쟁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북이스라엘의 왕 요람이 부상을 입고 이스르엘로 돌아오고,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스르엘에 병문안 갑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열왕기하 9장에서는 엘리사 선지자에 의해 은밀한 일들이 진행됩니다. 이 단락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묵상하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후가 기름 부음 받았으니 왕이 되겠구나. 이 정도만 생각하고 넘어가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열왕기하 9장 1절에서 13절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어떻게 진전되는지, 또 사람의 편에서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이 세 가지의 포인트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적용점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열왕기하 9장 1절 말씀 보시면,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엘리사 선지자가 무명의 제자를 불러서 명령합니다. 명령의 내용은 예후를 찾아가서 골방에 데리고 들어가 은밀하게 기름을 붓고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합 왕가에 대한 성경의 역사적 사실을 알고 계신 분들은 뭔가 의아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열왕기상 19장 16절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서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는 일은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았던 특별 지령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 역할이 엘리야 선지자의 후계자인 엘리사 선지자에게 이양되었고, 또 엘리사 선지자는 본인이 완수해야 하는 임무를 선지자의 제자 중 한 사람에게 전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엘리야 선지자도 그렇고 엘리사 선지자도 그렇고, 본인들이 해야 하는 일을 왜 자꾸 다음 사람에게 떠넘기는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에 따르면, 이 당시에 엘리야도 그렇고 엘리사도 그렇고, 이들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선지자들이었기 때문에 예후를 직접 찾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진행해야만 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왜 그렇게 은밀하게 일처리를 해야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라면, 위풍당당하게 어깨 펴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어명이오. 예후는 나와서 무릎을 꿇으라.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라고 하신다. 뭐 이런 식으로 진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을 제자가 대신해서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신중을 기합니다. 3절 말씀 뒷부분을 보십시오. “...곧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하지 말지니라 하니”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을 수행하는 것 뿐인데,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기름 붓고
명령을 전달한 뒤에 곧바로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하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아니 모양이 빠져도 이렇게 모양이 빠질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보면, 무명의 선지자가 예후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일종의 미리 보는 대관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진행해야겠습니까. 대대적으로 엄청난 스케일로 장식하진 못하더라도 주위에 있는 지인들 정도는 참석해서 충분히 축하하도록 안내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의 명령에 따르면, 이 무명의 선지자는 예후 한 사람만 데리고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하게 기름을 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뒤에 지체하지 않고 급히 도망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해야만 할까요. 그 이유인즉슨 이 상황이 그만큼 위험천만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열왕기하 8장 28절에서 요람 왕이 아람과 전쟁할 때 부상 당해서 이스르엘로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람 왕이 사망한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예후는 요람의 아들이 아닙니다. 아합 가문의 사람이 아닌 것이죠. 열왕기하 9장 2절 말씀 보시면 예후는 님시의 손자이며, 여호사밧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예후에게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왕조가 뒤바뀐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요람에 이르기까지, 오므리 왕조가 48년간 북이스라엘을 통치했고 이제 예후를 통해 새로운 왕조가 북이스라엘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므리 왕조의 네번째 왕인 요람이 생존해 있는 상태에서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 엘리사 선지자가 직접 길르앗 라못에 찾아가서 예후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사실이 사마리아에 알려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런 죄가 없는 예후는 반역자로 지목당해 사형당할 것이 자명하며, 엘리사의 목숨도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 2절 말씀을 보면 이와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다윗을 찾아가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을 하셨을 때, 사무엘이 하나님께 여쭙습니다.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면, 왕에게 죽임 당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사 선지자 역시 너무나도 위험한 상황임을 충분히 인지했기 때문에 제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 것입니다.
이제 무명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떤 내용으로 전달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열왕기하 9장 7절에서 9절 말씀 보십시오. “7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리라 8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9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지라”
하나님은 예후에게 특명을 내리셨습니다. 바알 숭배로 북이스라엘을 타락시킨 아합의 가문을 멸망시키고 이세벨을 죽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예후가 하나님께 받은 특별한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잔인한 명령을 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합이 통치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북이스라엘에 바알 숭배가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은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이 선지자들을 극심히 탄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세벨은 수많은 선지자들을 살해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오바댜라는 인물이 선지자를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다고 기록되어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세벨의 선지자 박해는 굉장히 극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서 나봇을 무참히 살해했죠.
또 아합은 어떻습니까. 마누라 잘못 만나서 인생 망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죠. 이세벨의 치마폭에 놀아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이세벨이 날뛰도록 풀어놓은 사람은 아합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에서 기름부음 받아 세워진 왕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도록 왕이 먼저 모범을 보이고, 백성들에게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장려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아합은 이와 정반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합 왕은 길르앗 라못에서 심판의 일환으로 전사한 것이었고, 예후를 통해 아합 왕가의 남은 자들, 바알 신앙에 물들어 있는 남은 자들이 다 죽임당할 것이라는 말씀이 선포된 것입니다.
자 그래서, 예후는 무명의 선지자에게 기름부음 받고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뒤에 일행에게 돌아옵니다. 11절 말씀 보십시오. “예후가 나와서 그의 주인의 신복들에게 이르니 한 사람이 그에게 묻되 평안하냐 그 미친 자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냐” 여기서 우리가 주의깊게 살펴봐야 하는 표현은 “그 미친 자”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이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후에게 기름 부은 무명의 선지자를 가리키죠. 이 표현은 이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친 사람이 예후에게 기름부었다는 사실을 말하자 이들은 즉각적으로 예후를 왕이라고 칭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예후가 그들에게 따를만한 인물로 각인되어 있었으며, 아합 왕조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이 이미 떠나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세 가지의 적용점을 나누면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죄악을 묵인하거나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부패한 사회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이는 죄인들의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그들의 죗값을 하나 하나 묻고 보응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과거 아합 왕이 통치하던 북이스라엘 왕국은 잘 사는 나라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망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나라였죠. 그런 나라로 만든 아합 왕의 권력은 어떠했겠습니까. 지지 않는 태양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악인들이 심판 받을 미래를 선포하게 하시고, 그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있고, 그 말씀을 우리는 묵상합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는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보면, 악인들이 너무나 많아 보입니다. 힘있는 자들이 약한 자들을 갈취하고 탄압하는 일들이 있으며, 약한 자들 가운데 악한 자들은 범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르기도 합니다. 돈이 많냐 적냐의 문제가 아니죠. 어딜 가든 죄악이 성행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주님 다시오시는 그날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소원합니다. 때로는 악한 자들이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현실과 말씀의 괴리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만, 아합 왕조의 멸망을 예언케 하시고, 예후의 손을 통해 가문의 멸망을 실현시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그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가 되어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험한 상황을 피하지 않고 지혜롭게 처신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선지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을 예후에게 보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길르앗 라못에 가기 귀찮았을까요? 날이 더웠을까요? 그렇지 않죠. 신중하고 은밀하게 일 처리를 해야만 했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언제 어디서나 지혜롭게 처신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신다고 해서 위험한 곳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일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위험한 장소에 가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선택지가 있을 때, 안전한 방식이 무엇인지를 지혜롭게 고민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결정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요구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턱대고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며, 마음대로 사는 것은 비성경적인 신앙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신생아를 안고 있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시라면,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성전 꼭대기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하는 말에 예수님은 지체하지 않고 뛰어내리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시험에 응하지 않으셨죠. 이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피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에 따라 사람을 선택하시고 세우시고 상황을 이끌어 가시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어가시는 그 순간을 알 방법이 없으니, 각자 자신의 삶에 충실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 만능주의자가 아닙니다. 기도만 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지 않는 것이죠. 기도와 삶은 균형을 이뤄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후의 동료들이 선지자를 미친사람 취급했지만, 예후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자 동료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예후를 왕이라고 칭하기 시작했죠. 선지자는 미친 사람으로 여기지만, 예후는 인정합니다. 그들의 태도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조차 인정받는 예후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위에 있는 가까운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인정받을 생각으로 살아가선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떠한 인생이 되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이 내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인식을 가지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매일 매일 충성스러운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회를 손가락질하며 욕하는 불신자들에게조차 인정받는 인생을 살아가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며 공의로운 분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수많은 우상들과 탐심이 혼재하여 죄악이 만연한 이 세상 가운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만족과 안녕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귀중한 인생을 복되게 살아가게 하시고, 충성된 일꾼으로 칭찬받을만한 인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 또 어떻게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에 영적인 유익을 끼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빛과 소금된 역할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하심으로 새벽기도회를 마친 뒤에 교회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개인의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시다가 귀가하시면 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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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날개 아래 pp. 876
예후의 등극
여호람과 아하시야 연합군이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 왕 하사엘과 전쟁하는 배경을 설명한 후에 열왕기 저자는 엘리사 선지자가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는 비밀 작전을 거행하는 모습을 기록함. 엘리사는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기름 병을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예후에게 기름을 부은 후에 도망하라고 지시함.
선지자가 기름을 부음으로 왕을 세우는 것은 사울 이후 이스라엘의 전통이 되었지만, 왕국의 분열 이후 북방 이스라엘의 왕을 기름 부어 세운 경우는 이번이 처음. 특별히 바알 숭배를 이스라엘 안으로 깊이 끌어들인 아합의 집을 심판하기 위해 세우는 왕이었기 때문에 저자는 이 점을 특별하게 강조하는 것.
우리는 여기서 북이스라엘 사람들도 여호와의 백성으로 불리는 것을 주목해야 함. 오랜 세월 동안 배도와 불순종의 길을 걸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부르시며 포기하지 않고 계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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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C pp.303
아합의 아들 여호람의 통치 기간인 12년이 끝이 났고 심판의 때가 도래했음. 왕상 19:15-18에 언급된 인물 중 예후만 남았음. 마침내 이스라엘 땅에 아합의 집과 아합의 집이 들여온 바알 숭배가 제거될 것. 유다 역시 정화될 것.
예후가 들은 바를 동료들에게 말하자, 그들은 즉시 예후를 왕으로 선포함. 그들은 예후가 왕이 되는 것을 기대했거나 열망했을 것으로 보임. 아마도 여호람이 군사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이 군대를 동요하게 만든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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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주해 pp.328
아합 왕가의 지배 하에 이스라엘은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타락했음. 그들은 바알 숭배에 깊이 빠져있었을 뿐 아니라 모세의 율법이 가르치는 정의로운 삶에서 멀리 떠나 있었음. 이런 부패현상의 중심에 아합 왕가가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아합 왕가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왕상 21:17-26). 아합이 심판의 위협 앞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일시적으로나마 회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던 까닭에 마지막 파국의 순간이 뒤로 연기된 상태에 있었을 뿐(왕상 21:27-29). 이 은혜의 기간 동안 아합 왕가가 여호와께로 온전히 돌이켰더라면 연기된 심판이 취소되었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음. 아합의 아들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아비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음. 이제 때가 무르익어 예고된 심판의 날이 이르렀음.
9:1-13
이 당시 이스라엘은 아람과 전쟁 중이었음. 이스라엘 왕 요람은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 왕 하사엘과 전쟁을 벌이다가 부상당해서 이스르엘의 왕궁으로 돌아온 상태였음. 이때 엘리사는 선지자의 아들들 중 한 사람을 길르앗 라못으로 보냄. 요람의 군대 지휘관 중 한 사람인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기 위함이었음. 예후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아합 왕가를 심판하리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알려주셨던 것(왕상 19:15-17).
엘리사는 젊은 선지자에게 어떻게 해야할지 알려줌. 엘리사가 직접 길르앗 라못으로 가지 않은 이유는 그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일 것. 즉, 엘리사는 가급적이면 은밀하게 일을 진행하기 위해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선지자를 자기 대신 예후에게로 보냈을 것. 무명의 선지자는 예후를 따로 불러내서 골방에 데려가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시는 말씀을 전해야 함. 그 말을 전한 뒤 그는 곧장 문을 열고 도망치되 지체하지 말아야 함. 이 지시는 이 선지자가 해야 할 일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말해줌. 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일은 명백히 반역에 해당하는 일이기 때문. 과거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방문해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에도 사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음(삼상 16:2).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새로운 왕이 세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임. 선지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명령에 순종해야 함.
젊은 선지자는 예후가 아합의 집을 쳐서 이세벨이 선지자들과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흘린 것을 그대로 갚아주라고 말함.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바알 종교를 퍼뜨리기 위해 많은 선지자들을 죽였음(왕상 18: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또한 이세벨이 나봇을 무참히 살해한 것은 경건한 여호와의 종들이 이세벨로부터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임.
아합은 이세벨의 치마폭에 놀아남으로써 이세벨의 죄악을 장려하고 후원한 장본인이 되었음. 왕권이 악을 통제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오히려 악을 조장하고 강화시키는데 사용되었음.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한 것은 이에 대한 응분의 대가였음. 이제 아합이 없는 상태이므로 심판의 칼날은 아합 왕가의 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이세벨에게로 향한 것.
8-9절의 심판 선고는 엘리야가 아합을 찾아가 한 말과 같음(왕상 21:21-22). 선포된 예언은 성취되기까지 그 효력을 잃지 않음. 또한 하나님은 나봇의 억울한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심.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불의한 일을 묵과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 불의에 상응하는 형벌을 내리심.
젊은 선지자는 예후와의 만남을 마치고 급히 도망감. 예후가 동료들에게 돌아오자 그들은 젊은 선지자를 “미친 자”라고 표현함. 이 표현은 선지자의 말과 행동이 그 당시 일반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시사함. 예레미야의 경우에도 “미친 사람”으로 간주되곤 했음(렘 29:26). 예후는 동료들의 질문에 답을 피했음. 그들이 재촉하자 그제서야 사실대로 털어놓음. 이 말을 듣자 그들은 급히 각자의 옷을 가져다가 예후를 왕으로 칭하기 시작함. 이들의 행동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들은 선지자를 미친 사람 취급했지만, 선지자의 기름부음을 인정하고 예후를 왕이라 외쳤음. 그런데 이들의 반응은 예후가 그들에게 이미 강력한 인물로 인식되었다는 것과 아합 왕가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이 바닥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줌.
1)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됨.
- 악인에 대한 보응과 심판은 필연적인 숙명임. 누구도 피할 수 없음.
2)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험한 상황을 피하지 않고, 지혜롭지 않게 처신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행위임.
- 엘리사는 선지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을 보냈으며, 그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상세하게 알려주었음.
3)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에 따라 사람을 선택하고 세우시고 상황을 이끌어 가시지만, 사람의 편에서는 그 순간을 알 방법이 없으니, 각자 자신의 삶에 충실해야 함.
- 만약 예후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선지자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주위 동료들이 예후를 왕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오히려 예후를 반역자로 고발하거나, 힘으로 그를 제압해서 체포하고 아합 왕가의 총애를 받으려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주위 동료들은 예후를 왕으로 세웠음. 선지자는 신뢰하지 않지만, 예후는 인정하는 듯한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임. 불신자일 것으로 보이는 동료들이지만, 그런 사람들에게조차 그리스도인은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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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C pp.199
51:54-58
땅으로부터 큰 파멸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릴 것. 그 성을 공격하는 적 병사들의 함성인 그 소리는 물의 요동하는 것 같이 들리며, 그들의 포효하는 목소리는 다른 어떤 전쟁에서보다 크게 들릴 것. 이 침입자들은 바벨론의 용병들을 포획하여 그 군대의 힘을 파괴시킬 것(그의 활이 꺾일 것). 바벨론에 있는 모든 계층의 방백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포도주를 억지로 마시게 되어 결국은 영원히 잠들어 깨이지 못하게 될 것. 그런 바벨론의 지도자들과 용병들의 완전한 파괴는 바벨론이 메데 바사에게 함락됨으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될 것(단 5:29-6:2).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미래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음.
바벨론의 성벽이 불타고 무너질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막기 위해서 방어벽을 튼튼히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려줌. 더욱 견고하게 쌓기 위해 무언가를 덧대거나 무게를 더하는 행위는 결국 그들이 맞이하게 될 최후의 때에 불속에 휩ᄊᆞ여 죽게 되도록 더 많은 탈 것을 제공하는 꼴이 될 것.
51:59-64
바벨론에 대한 예언의 절정은 왕의 시종장인 스라야에게 메시지를 준 것이었음. 스라야가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이라는 것에 주목하면서 예레미야는 스라야가 그의 서기관 바룩의 형제였음을 지적함. 스라야는 시드기야 통치 4년에 시드기야와 함께 바벨론에 갔음. 시드기야가 왜 B.C. 594~593년에 바벨론에 여행갔을까? 월리암 쉐아는 강력한 증거를 제공하면서 주장하기를, 느부갓네살 왕이 기원전 594년에 그의 속국 왕들을 바벨론에 불러 모아 얼마 전에 있었던 바벨론의 전복 시도가 있은 직후 그들의 충성을 보증받으려 했다는 것. 쉐아는 이 회합에 관한 기록이 다니엘 3장에 언급되어있다고 주장함. 정확한 원인이 어떻든지간에,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공식적으로 방문했고, 바룩의 형제 스라야를 대동했음.
51:60-64
예레미야는 그가 바벨론에 관해 기록했던 모든 예언들을 두루마리 책에 편집해서 기록했음. 그리고 그 두루마리를 스라야에게 주어 그가 바벨론에 가서 큰 소리로 그것을 낭독하게 했음. 바벨론을 파괴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확인시킨 다음에, 스라야는 그것에 돌을 묶어 유브라데 강에 던져 두루마리 책과 돌이 물 아래에 가라앉은 것처럼 바벨론도 그처럼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할 것(계 18:21).
예레미야 52장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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