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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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막 10:13-22
제목: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입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담고 있는 제목입니다.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이 등장할지 감이 오시죠. 이러한 내용은 신앙의 내공이 쌓인 우리 성도님들께는 너무나 쉬운 질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사람들, 예수님의 구속 사역과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전인격적으로 믿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과 관련된 대표적인 명제들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각 성경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상고해야만 합니다. 이 시간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마가복음 10장 13절 이하의 내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의 시선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마가는 오늘 본문 말씀을 두 개의 단락으로 구분해서 기록했습니다. 하나의 단락은 어린아이들이 등장하고요. 다음 단락에서는 재물이 많은 부자 청년이 등장합니다. 아무런 의미없이 어린아이들과 부자 청년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방식을 취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먼저 어린 아이들이 등장하는 단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3절과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을 접할 때 이질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오늘날 굉장히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엇을 양보해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의 배경에 적합하지 않은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 사회에서 어린이들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성인 남성과의 관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교 문헌이나 초기 기독교 문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아이들에게 보이신 사랑과 연민은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으며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행보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십니까? 예수님을 향한 어린아이들의 접근을 강제로 막고 꾸짖는 제자들에게 강한 분노를 표출하십니다. 14절 말씀 다시 보시면,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마가복음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분노하셨다고 기록하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굉장히 특별한 구절이죠. 여기서 예수님께서 노하셨다는 표현은 “화를 끄집어내다, 화를 표출시켜 터뜨리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토록 제자들에게 분노를 표출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어린아이들은 유대 사회에서 의지할 데 없고 연약하면서도 가장 힘이 없는 계층이었기 때문입니다.
힘 없고 연약한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을 가로막는 자들이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분노를 표출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깊이 묵상하기 위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오해를 덜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허용하시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어린아이들을 직접적으로 연결시켜서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의 어떤 부분을 보시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아이들의 순수함? 천진난만함? 예수님의 말씀을 스폰지처럼 쭉쭉 빨아들이는 마음? 뭐 이런 식으로 어린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의 어떤 기질이나 특성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어린아이들 역시 예수님 앞에서 무언가 보여드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어떤 믿음의 고백을 한 것도 아니고, 어떤 행동으로 믿음을 증명한 것도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은 그저 어른들의 손길에 따라 예수님께 다가가려고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근거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칭찬하시는 주된 이유가 어린아이들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또 한 가지 있는데요. 마가복음 10장 14절 말씀 다시 보세요.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누구의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렇지 않죠.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린아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어린 아이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 이런 자들은 어떤 사람을 의미할까요. 예수님 시대에 어린아이들은 사회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존재가 아닌 무기력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아이들은 사회 구성원으로 취급받지 못했으며 하찮게 여겨졌습니다. 이런 어린아이들은 인위적으로 자신을 꾸밀 것도 없이 너무나 작고 무력한 그 상태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어떤 사람에게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아이처럼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명성도, 그 어떤 영향력도, 그 어떤 권리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은혜로 받아들임과 같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예수님께 드릴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또한 어린아이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받든지 간에, 예수님께 무언가를 받는 이유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장점이나 공로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원래 그런 계층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죠.
따라서 아이들이 예수님께 무언가를 받는다면, 칭찬을 받든 축복을 받든 무엇을 받든, 어린아이들은 자신들의 지극히 궁핍한 상태와 결핍되어 있는 상태에서 받는 것이기 거저 받는 것이기 때문에, 순전히 은혜로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마음으로 은혜를 받는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의 두번째 단락에 대해서 살펴볼텐데요. 두 번째 단락은 어린아이들과 대조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인물은 마태복음에서 젊은이로 등장하고, 누가복음에서는 관리로 등장합니다. 이를 종합하자면 부유한 청년 관리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이 부유한 청년 관리는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외적인 조건으로만 놓고 보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보입니다. 이 남성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갈급함이 있으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갈망함이 있습니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이 허황된 소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 남성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완벽하게 지킨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복음 10장 21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표현은 단순하게 쳐다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보다”라는 평범한 단어에서 생긴 강화된 합성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골똘히 바라보다. 조사하다. 찬찬히 살펴보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이 부유한 청년 관리의 말발에 속아 넘어가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부유한 청년 관리의 위선 없는 진실함과 영생에 대한 갈망함을 보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참으로 역설적이며, 우리의 이성으로는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부유한 청년 관리는 유대인 사회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완벽한 남자로 보이지만, 이 남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이전 단락에서 등장한 어린아이들은 사회적으로 가진 것이 전혀 없었지만, 예수님께 부족하다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이 남성은 부자이며, 나이도 젊고 계명도 완벽하게 준수하며 살아가는, 굉장히 훌륭해 보이는 남자입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여전히 부족합니다. 이 부족함이라는 것은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부족함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의 결격사유로 여겨지는 부족함입니다. 따라서 이 남성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부족한 점을 보완해야만 합니다. 보완하는 방법은 본인의 재산을 모두 처분한 뒤에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완전히 맡기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이 남성은 연약한 아이들처럼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남성은 근심하며 돌아가고 맙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신 그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가지의 실례는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첫 번째 실례는, 가진 것 없고 사회 구성원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실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한 부유한 청년 관리였습니다.
이 두 가지의 실례에서 어린아이들은 애초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취약계층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자 청년 관리는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를 굳이 평가할 필요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면 누가 천국에 가겠는가? 하는 소리가 나올 법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인간적인 사고방식이나 단순한 조건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르게 부자 청년 관리가 아닌 어린아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우리는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어린아이들과 부자 청년 중에 우리가 어떤 부류에 더 가까운지 생각해야만 합니다. 내일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분들이 아니라면, 넓은 범위에서는 부자 청년과 가깝다고 보시면 되겠는데요. 여기서 문제는 예수님의 구체적인 요청 내용입니다.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는 요청은 매우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소유에 대한 포기 요청이 부자 청년만을 위한 요청이었을까요. 아니면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시는 말씀이었을까요. 마가복음 전체 맥락에 따르면, 이 말씀을 어디까지 적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는 제자들조차 엄밀히 따지면 자산을 완전히 처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가버나움에 자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고깃배와 낚시 도구들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레위 역시 자택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면서 여러 후원자들이 제공하는 물질을 공급받았습니다. 베다니에 사는 마리아와 마르다 또는 누가복음 8장에 등장하는 여인들과 같은 후원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제자들의 자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 알고 보니 집이 있네? 알고 보니 배가 있네? 알고 보니 예수님 버리고 어부로 복귀할 만한 건덕지를 다 마련해 두고 있었네? 비빌 언덕이 있는데 버리긴 뭘 버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떤 삶인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두 가지의 내용을 반드시 기억하고 적용해야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가난과 궁핍함을 이상적인 것으로 가르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가난은 신앙적으로 합리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가난에서 비롯되는 절실함은 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가난은 기댈 곳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자들이 주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듭니다. 또한 가난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값지고 귀한 것인지를 깨닫게 만듭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팔고 순례자처럼 살아갈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지를 점검하려면, 우리의 심령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돌아봐야만 합니다.
이어서 둘째로, 믿음과 순종의 가장 큰 적은 자기만족과 교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흔들리고, 쉽게 판단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부자 청년 관리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지 못한 점은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부자 청년 관리는 본인이 어려서부터 지켜왔던 계명 준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 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한 목적으로 지킨 것이 아닌, 자기만족을 위한 계명 준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외적으로 이 남성은 행위상으로 계명을 준수한 것이 사실이었으나, 본질적으로 이 남성은 제자도와 무관한 율법 준수라는 자기만족에 취해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본문에 이 남성이 자기만족과 교만에 빠져있었다. 이런 표현은 없습니다만, 율법의 참된 준수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이 아닌, 일반인의 삶에서의 계명 준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무관한 계명 준수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계명 준수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헛된 것이며,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우리는 외적으로 부자 청년 관리의 인생을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부자 청년 관리의 믿음의 결핍을 반드시 분별해야만 합니다.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부자 청년의 율법 준수는 예수님의 제자의 삶과 무관하며, 예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사회의 취약 계층이자 소외 계층으로서,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고만 해도 제자들에게 꾸짖음 당하는 그런 계층으로서,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깨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으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아멘.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어떤 사람이 상속받을 수 있는지 깊이 상고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자격없는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릅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도 우리가 그 은혜만을 바라보며, 그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자기만족과 교만함을 내려놓고, 이정도면 됐지. 이정도면 충분하지라는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주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합당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하심으로 새벽기도회를 마친 뒤에 교회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개인의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시다가 귀가하시면 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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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TC (pp.372)
현대 서양 세계는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미덕으로 여김. 하지만 고대 유대 사회는 이와 같은 애정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하지 않았음. 어린이들은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위치를 성인 남자와의 관계에 의존했음.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은 찾아볼 수 없음.
아이들을 가로막는 제자들에게 분노를 표출하시는 예수님.
제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음.
막 10:14은 예수님께서 분노했다고 말씀하시는 유일한 구절임. “분노하다”(아가나크테인)은 “화를 끄집어내다”, 즉 단순히 화를 품는 것이 아니라 화를 표출시켜 터뜨리는 것을 의미함. 예수님께서 화를 내신 것은 의지할 데 없고 연약하고 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보호를 보여주심.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참된 상속자라고 말씀하심.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칭찬하신 것은 아이들의 순수함과 스폰지처럼 받아들이는 그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쉬움. 그런 이유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주된 이유는 아님. 아이들(파이디온)은 책임이 부여되는 나이가 아님. 이들은 사회에서 무력하고도 무기력한 존재. 아이들은 사회에서 간과되고 박탈당한 구성원으로서 인위적인 것 없이 작고 무력한 그 상태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옴. 하나님의 나라를 아이처럼 받는다는 것은 어떤 명성도, 어떤 영향력도, 어떤 권리도 없는 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 어린아이들은 예수님께, 하나님께 드릴 것이 전혀 없으며, 무엇을 받든지 자기 안에 있는 어떤 장점도 아닌 순전한 곤궁과 궁핍과 결핍에 의거하여 은혜로 받아들임. 오직 비어있는 손이 채워질 수 있는 것음.
제자도와 소유(10:17-31)
제자의 길로 부르심 받는 것은 제자도에 대한 대가를 포함함. 어부는 배와 그물을 그냥 두고 가야 하며, 세리는 세금 징수대를 남겨놓은 채 떠나야 한다. 베드로는 메시아에 대한 본인의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또 다른 제자는 구경꾼의 안전한 위치에서 벗어나 방관자가 아닌 행위의 주체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들어야 할 것.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은 인생의 추가적인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맞춰드리고 그분께 본인의 삶을 철저하게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함. 이 과정에서 부모에 대한 효, 가정에 대한 어떤 의무라고 할지라도, 방해가 되는 것은 해악한 것이 됨.
이 단락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은 앞 단락에 등장하는 소박한 아이들과 뚜렷하게 대조됨. 이 부유한 사람은 마가복음에 등장한 인물들 가운데 외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보임.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갈급함이 있으며, 영생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갈망함이 있음. 그러나 모든 이가 부러워할만한 그의 부유함은 앞 단락에 등장한 어린아이들의 결핍과 무기력보다 훨씬 더 심각한 걸림돌이 됨. 왜냐하면 아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담고 있는 반면에, 이 남자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로부터 돌아서기 때문.
이 남자는 계명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온 사람이었으며, 그의 행위와 생각에는 위선이 눈꼽만큼도 존재하지 않았음. 예수님께서는 이 남자를 보시고 사랑하셨음. “보시고(엠블레페인)”라는 단어는 “보다”라는 평범한 단어에서 생긴 강화된 합성어임. 의미는 골똘히 바라보다. 조사하다. 찬찬히 살펴보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음. 예수님께서는 이 부유한 남자에게 속은 것이 아님. 예수님은 이 사람의 속을 보고 사랑하셨음. 이 사람에게 보기 드물고 감탄할 만한 무언가가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역설적임. 이 남자는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음. 앞 단락에 등장한 어린 아이들은 가진 것이 전혀 없었지만, 부족하다는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아이들의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음. 반대로 이 남자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것이 있음. 이 사람은 자신이 가진 전부를 팔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완전히 맡기고 따라야만 함. 그렇게 해야 이 남자는 연약한 아이들처럼 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이 남자는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될 것.
율법의 참된 준수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 만약 어떤 사람이 완벽하게 율법을 준수하며 살더라도, 그 인생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율법 준수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헛된 것이 되고 말 것.
예수님은 가난을 이상적인 것으로 가르치지 않으심. 그러나 가난에서 기인하는 절실함은 복이 될 수 있음. 기대할 곳이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자들이 전적으로 주님께 의존하는 것은 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 믿음과 순종의 가장 큰 적은 자기만족과 교만임. 가난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이런 철옹성과 같은 자기만족과 교만을 허물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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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C (pp.236)
부자 청년은 가난 그 자체를 위해서 부르심 받은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음. 이 단락은 단순히 부유함에 대한 비판이 아니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구약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나 사회적인 신분, 자산 가치의 정도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대신하지 못함. 이 남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전 재산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따르겠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 여기서 그의 재산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덫이자 걸림돌이 되었음. 재물 때문에 주님을 따르라는 초대에 응하지 못했기 때문.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사명에 참여하는 일이 다른 모든 관심사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단락의 핵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