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창조하신 새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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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렘 31:10-22 (봉독 렘 31:15-22)
제목: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 일
오늘 본문 말씀인 예레미야 31장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은 예레미야 전체 말씀 중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단락에 속합니다. 본문 말씀의 앞뒤 문맥에 따르면, 본문 말씀은 바벨론 포로기 귀환과 관련된 말씀이며, 절망에 빠져 있는 남유다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안겨주는 예언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신학적으로 논란이 되는 부분은 제외하고,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어떤 은혜인지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레미야 31장 15절 말씀 보세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성경을 다독하신 우리 성도님들께서 이 라마라는 지명을 보시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드실 겁니다. 에브라임 산지 성읍인 라마를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길르앗 라마를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아셀 지파 경계에 있는 라마를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납달리 지파의 요새인 라마를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베냐민 지파의 성읍 라마를 의미하는 것인가?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이 드실 겁니다. 그런데 학자들에 따르면 본문의 라마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 또는 에브라임 산지 성읍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의 라마가 어디 라마냐. 이런 부분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 선지자가 라마라는 지명을 비유적으로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레미야 40장 1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포로를 바벨론으로 옮기는 중에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라마에서 풀려난 후에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라마라는 지명이 어디냐를 떠나서, 라마의 상징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족장시대나 사사시대, 통일 이스라엘 시대와는 다르게, 바벨론 포로기 시대에 라마는 포로들이 집결해 있다가 포로로 끌려가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니 포로들에게 있어서 가장 끔찍한 곳이었겠죠. 예를 들어 군입대할 때, 부모님들이 어디서 슬퍼하십니까? 아들이 군대간다고 머리밀고 왔을 때 짧아진 머리 보면서 눈물 흘리시는 분들 많지 않죠. 일반적으로는 보충대에서 부모님들께 경례하고 돌아서서 부대 시설 안으로 들어갈 때 많이들 우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라마는 포로로 끌려가는 대표적인 장소로 여겨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비유적인 표현이 등장한 것이죠.
이어서 15절 말씀 중간 부분을 보시면,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헬이 누구입니까? 야곱의 부인이자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이죠? 구약시대로 말하자면 족장시대 사람입니다. 그러니 남유다가 멸망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던 시대에 라헬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누가 봐도 실존 인물이었던 라헬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라헬이라는 이름은 비유적으로 이해해야 하는데요. 라마에서 포로로 끌려가는 아들들을 바라보며 슬퍼하며 통곡하는 어머니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이 언제 어떻게 얼마나 애곡했는지. 이런 내용은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그렇게 슬퍼하는 어머니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16절과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16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행위, 노동, 수고를 의미합니다. 어머니들이 포로로 잡혀간 자식들을 기억하며 슬퍼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행위이자 노동이자 수고로 여겨주신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구절에는 담겨있지 않지만, 매우 높은 확률로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주저 앉아서 슬퍼하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본인들이 믿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께 자식들의 처지를 아뢰고 도움을 간청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어머니들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행위와 수고로 여겨주신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부분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라헬의 울음 소리, 다시 말해 어머니들이 애곡하면서 흘린 눈물을 그들의 행위와 수고로 여겨주셔서 그에 대해 보상해 주신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과정과 절차가 당연하게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당연히 보상해 주셔야만 하는 일일까요? 엄밀히 말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어머니들이 눈물 흘리며 슬퍼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주실지는 몰라도, 이에 대해 보상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식들이 행했던 죄악에 대한 징계로 바벨론 포로기가 시작된 것인데, 어머니들이 슬퍼한다고 해서 그에 대한 보상으로 포로기 귀환을 약속하시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죄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세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는 죄인에게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1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18절과 19절은 포로로 잡혀간 에브라임의 반응인데요. 18절에서 에브라임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주께서 나를 징벌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징벌을 받게 된 데에는 분명한 근거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에브라임이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와 같은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말씀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는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인생을 추구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압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과 그분의 통치 아래에 살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동행하시는 은혜가 없다면, 자신의 인생은 반드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다 죄인이고,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패역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지우시는 멍에에 익숙한 인생을 살아감이 마땅합니다.
물론 멍에라는 표현에서 거부감을 느낄 수 있겠습니다만,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을 옷 입는 것, 새 사람을 입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에브라임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삶, 새 사람을 입고 살아가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포로기라는 엄중한 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가운데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18절 제일 뒷부분을 보시면,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회개의 1차 원인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죄인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본인 뜻대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의 삶의 방향성을 돌이켜 주셔야만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성도님들은 모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신줄 압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하는데요. 회개할 때,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능력하고 패역한 본성과 죄성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간구하지 않습니까? 이런 일련의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선행했기 때문에 회개가 가능한 것입니다. 본인이 느끼든 느끼지 못했든,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돌이켜주셔야만 돌이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는 둘째로, 죄의 비참함과 수치심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이 말씀은 에브라임이 회개하며 무엇을 느꼈는지를 분명하게 나타냅니다. 성경적인 회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회개를 너무나도 쉽고 가볍게 생각합니다. 눈감고 손모으고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말 한마디면 끝나는 줄 아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적인 회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본인의 죄악된 삶을 완전히 청산하고,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는, 삶의 방향성 전환을 전제로 하며, 이와 동시에 과거에 불신자의 삶을 살아가던 때의 수치스러운 세월들을 떠올리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회개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19절에서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는 죄인에게 불쌍히 여겨주시는 한없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자들을 구원하시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지와 다를 바 없는 하찮은 피조물인 인간을 귀찮아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들이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징계하실 때, 감정적으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격정적으로 체벌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어떻게 대하신다고 합니까?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하나님께서는 말실수하는 분이 아닙니다. 인생의 채찍을 허락하실 때, 삶의 고난을 안겨주실 때, 완급 조절에 실패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자가 들끓는 사랑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그분의 자녀들을 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화평의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어머니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향해 주어진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기를 허용하시기까지 참으로 많은 세월들을 인내하셨습니다. 오래참으시는 사랑으로 계속해서 기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패역함과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사랑을 기만했으며, 하나님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 포로기가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 어머니들과 포로로 잡혀간 당사자들의 비극이 불가피해진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의 책임은 당사자들에게 있습니다.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심판자로서 죄에 대한 형벌을 집행하신 것 뿐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라헬의 눈물을 행위로 여겨주시고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죄에 대한 처벌로 바벨론 포로기를 맞이한 남유다에 아무런 소망이 남아있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전적인 은혜로 죄인들의 마음에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을 부어주시고, 죄에 대한 비참함과 수치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 모든 일을 애끓는 사랑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와 동일한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절망에 빠져있는 채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던 죄인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부어주시고, 살아갈 이유와 기쁨을 선사해주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어떠한 삶으로 반응해야 할까요. 이 새벽에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이유를 다시한번 묵상하시며, 전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께 삶으로 영광올려드리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들에게 먼저 손내밀어 주시고, 회개할 수 있도록 삶의 방향성을 돌이켜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과거에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죄인이었을 때를 돌아보면, 남는 것은 부끄러움과 수치심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죄성으로 어그러진 시절들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바라옵기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책망과 진노를 다시금 맛보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매일 매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복된 주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 하나님, 우리의 심령을 주장하여 주시어 성령을 근심케 하는 자들이 아닌, 새사람 입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하심으로 새벽기도회를 마친 뒤에 교회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개인의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시다가 귀가하시면 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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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C pp.304
31:15-22
이 신탁은 심판에 대한 성찰로 시작하여 그 뒤에 구속의 약속이 뒤따름.
초점은 북왕국 이스라엘에 있는 것으로 보임.
이 신탁 첫머리에서 하나님은 “라마”의 애통하는 울음을 언급하심.
라마는 베냐민 지파에 위치해 있음. 현재 문맥에서 이 라마의 중요성은 이곳이 추방 본부였다는 데 있음. 따라서 이스라엘은 여기서부터 배에 실려 바벨론으로 추방당했음. 라마는 큰 슬픔의 장소였음.
라헬은 북쪽 지파를 나타냄. 라헬의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이 낳은 지파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 베냐민은 잘 알려진 북쪽 지파였기 때문. 이들이 애곡하는 라헬의 자녀들임. 그들은 이제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 라헬의 무덤이 이 베냐민 지역에 있다는 전승이 있음(삼상 10:2). 창 35:19은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위에 그녀를 매장했다고 기록함.
주님은 이 억울한 눈물에 소망의 음성으로 대답하심. 하나님은 라헬을 위로하시면서 울음을 멈추라고 말씀하심. 하지만 라헬의 수고(개역개정 “일”)는 무엇인가? 이는 포로 기간 중 그녀의 노동을 가리킬 수 있음. 혹은 회개의 수고를 가리킨다고 여길 수도 있음. 더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이것이 자녀들의 회복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 그러나 우리는 이 표현이 수수께끼임을 인정해야 함. 수고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모호하지만, 소망의 이유는 그렇지 않음. 소망은 포로 귀환에 초점을 맞춤. 구체적으로 수신자의 자녀들이 그 땅으로 돌아올 것!
이제 가장 주도적인 지파, 라헬의 아들 중 하나인 에브라임이라는 표현으로 북쪽 지파들을 가리키면서, 주님은 다시 그들의 신음을 듣는다고 말씀하심. 이 신탁은 에브라임의 불평을 인용함(18-19).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이지 않은 송아지(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에게 하듯이 하나님이 자기를 징계하셨다고 진술함. 그런 송아지를 길들이려면 거칠게 다루어야 하지만,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징계가 성공적이었다고 인정함. 이제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선한 은혜로 회복되기를 원함. 19절은 사건의 순서를 보여줌. 에브라임이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사건이 시작되었음. 하지만 그 뒤 그들은 회개하고 자신들의 배신으로 인한 부끄러움을 느낌.
16-17이 라헬의 울음에 대한 응답이듯이, 20-22은 에브라임의 신음에 응답함. 20은 첫머리에서 에브라임의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제시함. 하나님은 에브라임의 지위가 자기 아들이라고 인정하심(31:9). 그리고 아들에게 하듯이,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아들처럼 징계하셔야 했지만, 그를 향한 사랑을 결코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음. 사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기억하시는데, 이는 인지적 기억력 이상을 의미함. 이 말은 하나님이 에브라임을 향해 자애롭게 행동하실 것임을 암시함. 이 자애로움은 하나님의 큰 긍휼(불쌍히 여기리라)에서 흘러나올 것.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이 표현은 아주 놀랍고,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차갑고 무자비하다는 거짓 정형화를 폭로함(호 11:8-9).
21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돌아올 길을 구상하라고 말씀하심. 하나님은 처녀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성읍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심. 불성실한 딸은 방황을 멈추고 귀향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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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C pp.134
31:15-20
라마에서 들려오는 슬퍼하며 애곡하는 소리를 예레미야는 마치 라헬이 그 자녀들을 위해 울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음. 예레미야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라마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마일 떨어져 있는 읍이었고, 라헬은 요셉과 베냐민의 모친이었음. 요셉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아버지인데,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스라엘 북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두 부족이 되었음.
따라서 예레미야는 B.C722년에 그녀의 자식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울고 있는 북왕국의 여인들을 묘사하고 있음. 그러나 예레미야는 라마가 느부갓네살의 추방을 위한 집결지였기 때문에, B.C. 586년에 역시 유다의 패망도 볼 수 있었음.
십중팔구 이 여인들은 그녀의 자식들을 이제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에 울고 있는 것.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의 여인들이 포로로 잡혀간 자식들을 위해 울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던 것. 그래서 그들은 자식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올 것에 대한 미래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음.
예레미야는 이 부분을 이스라엘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때 고백할 회개의 외침으로 기록하면서 마무리 함. 이스라엘이 비록 방황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것에 대해 후회하게 될 것.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수치와 부끄러움을 받게 될 것.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정도를 벗어난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호 2: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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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커 예언서 개론 pp.291
라마에 대한 언급은 예레미야 시대에 그곳이 바벨론 군대가 유다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기 전에 한 군데 모아 놓은 포로 집결지였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렘 40:1). 라마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에게는 포로로 사로잡혀감을 의미했을 것.
그러나 이 이야기는 눈물과 슬픔으로 끝나지 않음. 라헬의 심한 통곡은 그 대가를 지불받을 것이요. 그녀의 자녀들은 포로로붙처 귀향할 것(16-17절). 시편 기자들은 탄식을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들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시게끔 이끄는 것으로 활용함. 그들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들은 그러한 기도들이 하나님의 개입을 이끌어내는 촉매제가 된다는 사실을 입증함. 라헬의 자녀들의 귀향이 일로 불리는 그녀의 탄식에 대한 보상 내지는 대가 지불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 포로생활하는 이들(에브라임)은 자기들이 죄에 대해 징계 받는다는 것을 인식하고서는 자기들의 죄를 회개함(18-19절). 에브라임을 아들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긍휼로 응답하심(20절). 포로민들에게 지체하지 말고 고국으로 돌아오라고 청하심(21-22a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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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데일 (로고스)
희망 찬 미래에 대한 묘사 후에 라헬의 절망적인 그림이 뒤따른다. 라헬은 요셉의 두 아들들인 북 왕국을 대표하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그리고 북 왕국와 남 왕국의 경계에 살았던 지파인 베냐민의 모계 족장이다. 라마는 포로들이 바벨론으로 가는 도중에 멈추어서 울었던 장소였다(40:1). 마태복음에서 이 절이 헤롯이 유아들을 살해한 것에 적용된다(마 2:17–18).
라헬은 원수에 의하여 자신들의 아이를 잃은 모든 어머니들의 상징이다. 야곱의 아내로서 라헬은 자신의 아들 베냐민이 자라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 그러나 16–17절은 어머니들이 자신들의 자녀들이 자라는 것을 다시 볼 것이라고 약속한다.
16, 17절의 돌아오다는 동사는 다시 슈브(šûb)이다(위를 보라). 네 후손들에게 혹은 ‘네 미래에’ 소망이 있다(17절). 이 경우 네 미래는 후손들을 가리킨다.
〈18–20〉 18–20절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라헬의 후손 중의 하나인 북 왕국의 이름을 나타내는, 에브라임의 탄식에 찬 간구를 들으셨다. 하나님은 그것을 분명히 들으셨다. 동사 ‘듣다’가 강조를 위하여 2회 사용된다.
백성들은 멍에로부터 도망치려는 길들여지지 않은 송아지 같았다(2:20 참조; 또한 호 4:16; 10:11). 그들은 포로됨으로 말미암아 ‘길들여졌거나’(tamed) 훈련되었다. 17:14처럼 하나님이 동사의 주어이다(즉 ‘훈련시키다’). 그리고 나서 사람이 주어이다. 이것은 ‘데려오다’와 ‘돌아오다’(슈브[šûb]의 형태)의 경우도 그렇다.
이 언어적인 장치는 하나님이 행하시면 그것은 완전한 행위이고 완전히 성취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나를 회복하소서(문자적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소서’; 나를 돌이키소서-개역개정) 그러면 내가 돌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이들이 ‘돌이키도록’ 하소서. 그리하면 그들이 ‘돌아올 것입니다’(회개하다. 혹은 [아마도 암시된] 땅으로의 귀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의 마음속에서 일하고 계시다.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후에(딴 길로 들어서다는 슈브[šûb], ‘내가 떠나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깨달았다.
(19절에) ‘볼기를 치다’(NRSV) 혹은 (누구의) 가슴을 치다(TNIV)는 수치 혹은 양심의 가책을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이다(겔 21:12을 보라). 이들은 젊을 때의 치욕(즉 자신들이 초기부터 쭉 저지른 자신들의 죄의 결과)을 짊어진다. 20절은 중요성을 강조하는 수사학적인 질문이다. 에브라임은 정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식이다(9절). 내가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내가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긴다는 어구는 둘 다 강조를 위하여 히브리어 동사를 반복한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다(출 2:24; 삼상 1:19 참조). 하나님의 마음이 자신의 사랑하는 자식을 간절히 사모한다(‘그러므로 내가 그를 위하여 감동한다’[NRSV]; 내 창자가 들끓으니-개역개정). 문자적으로 읽으면 ‘그러므로 내 내장이 그를 위하여 소리를 낸다’(강한 신인동형적인 표현이다)이다. 이 말은 에브라임에 대한 격렬한 슬픔과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극도의 감정을 표현한다(비슷한 본문을 위하여 호 11:8을 보라).
에브라임이 돌아오고 회개하는 근거는 백성들의 선한 행위에 놓여 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만 가능하다(3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