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가득 채워짐의 한 가지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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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행 4:23-31
제목 : 성령으로 가득 채워짐의 한 가지 양상
오늘은 석가탄신일입니다. 2018년 이후에는 석가탄신일이 부처님 오신 날로 공식 명칭이 변경되었죠. 이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씁쓸하지 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영광 받으셔야 하는 이 때에 여기 저기 연등이 장식되어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참 아픕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다시 한번 이 나라와 이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굳은 결의를 다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이 고귀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려면 반드시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하는데요. 참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성령 충만에 대한 비성경적인 이해가 널리 퍼져있습니다.
예컨대, 성령 충만함을 은사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교회들이 참 많습니다.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방언을 받게 된다든지, 아니면 방언하는 사람을 가리켜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든지. 이런 은사주의적인 이해를 가진 교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왜냐하면 보여지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과연 성령에 대한 은사주의적인 이해가 성경적으로 바른 이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 시간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성령 충만함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성령 충만의 한 가지 양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성령 충만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관용어구처럼 이해되어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성령 충만이라는 표현은 세 가지의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가득 채우다”라는 두 가지의 동사를 수동태로 표현하거나, 가득찬, 완전한, 충만한 이라는 형용사가 수식하는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의 경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오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4장 31절 말씀인데요. 필요한 부분만 먼저 살펴보면, (in) “무리가 다 성령으로 충만하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NIV 성경에서는 성령으로 가득 찼다. 라고 번역되어있죠.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수동태로 기록되어있습니다. 4장 31절 말씀을 직역하면, 그들이 가득 채워졌다. 모든 사람이 성령으로. 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out)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능동적인 현상이 아닌 수동적인 현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컨대, 신자 개개인이 뜨겁게 기도하면서 심령에 불을 지펴서 능동적으로 성령을 집어넣는다거나, 아니면 무슨 초혼 의식처럼 성령을 받는다거나 하는 이해는 명백하게 비성경적인 이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가지의 경우를 보면 성령 충만함이 능동적인 행위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행전 6장 3절 말씀 보세요. (in)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이 말씀을 보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애매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충만한 이라는 표현은 가득 찬이라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입니다. 그러니 이 표현만 놓고 보면 성령 충만함을 능동적인 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이죠. 이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6장 8절 말씀을 보면 (in)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물론 깊게 들여다 보면 어떻게 충만한 건지, 스데반 자신이 성령 하나님을 자기 속에 집어넣은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은혜 가운데 성령으로 채워진 것인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out)
따라서 이런 경우는 원어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의 문맥을 통해 파악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삼위일체 하나님은 태초부터 스스로 존재하셨습니다. 또한 구약시대에 성령 하나님은 때때로 역사하셨을 뿐, 구약시대의 인물들에게 항상 임하진 않으셨습니다. 특별한 상황에만 임재하신 것으로 기록되어있죠. 하지만 신약시대에 성령 하나님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각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진 것이죠. 사람이 받겠다고 한 것도 아니요. 직접적으로 성령을 요청한 것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말씀 보세요. (in)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out)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성취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임재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성령 충만함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과의 만남, 성령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짐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능동적인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면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성령으로 충만해져라 충만해져라. 이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충만에 대해서 어떤 성경적인 사고를 지녀야 할까요. 우리는 성령 충만의 독특한 특징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in) 먼저 첫 번째 특징은 성령 충만의 지속성입니다. 말 그대로 성령 충만함에는 지속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이 지속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실 겁니다. 기도회 나와서 뜨겁게 기도하면 성령으로 충만해진 것 같은데, 집에 가서 정신없이 집안일하고 남편하고 투닥거리다 보면, 성령 충만함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네 살짜리 아들과 시간 좀 보내다 보면, 헷갈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 그래서 일상생활 가운데 삶에 치이다 보면, 아... 다시 기도회 가서 성령 충만함 받아야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기도하는 자리에 있을 때에만 성령 충만함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교회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은 성령으로 가득찬 상태라고 볼 수 없겠죠.
다시 성령 충만함의 첫 번째 특징으로 돌아와서요. 제가 앞서 성령 충만함의 능동적인 표현, 형용사로 표현되는 두 가지 구절, 사도행전 6장 3절과 8절 말씀을 소개해드렸죠. 사실 이 두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령 충만함이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아주 약간 어려운 설명을 드리자면, (in) 사도행전 6장 3절과 8절에는 헬라어 구문론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라고 되어있는데, 헬라어를 있는 그대로 읽으면, 성령의 그리고 은혜의 충만하여.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당연히 말이 안되죠. 또 사도행전 6장 8절은, 은혜의 그리고 능력의 가득한 스데반이. 이런 식으로 읽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말이 안 됩니다. 이는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헬라어의 소유격을 수식어 용법으로 기록한 것인데요. 이 용법은 상태의 지속성을 나타내는 용법입니다. (out) 그러니 앞서 설명해 드린 대로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 전체가 성령 충만함은 주시는 것을 받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저자의 의도는 그리스도인이 자발적으로 성령을 가득 채우는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에 의해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냐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에 기록된 대로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가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어서 성령 충만의 두 번째 특징은 반복성입니다. (in)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상태에서 또다시 성령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득 채워져 있는데 왜 또 가득 채우느냐. 글쎄요. 가득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이유는 제가 설명해 드릴 수 없습니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도행전의 문맥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 강림 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건 직후에 베드로가 말씀을 선포해서 3천명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에 소환됩니다. 사도행전 4장 8절 말씀 보세요. (in)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이 구절에서도 충만하여라는 표현은 수동태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성령으로 가득채워져서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사도행전 4장까지의 흐름을 볼 때, 사도들의 성령충만함이 지속되었습니까 지속되지 않았습니까? 지속되었다는 말은 없지만, 분명히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걷지 못한 사람을 일으킬 때, 성령으로 가득채워졌다는 언급은 없지만,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베드로와 요한의 상태는 어떤 상태입니까? 성령으로 가득채워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4장 8절에서 공회에 소환된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채워졌다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성령 충만에는 반복성이라는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성령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상태이지만 또다시 가득 채워질 수 있구나. 이러한 현상을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지 간에 반복될 수 있구나. 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in)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성령충만은 동사 두 개와 형용사 한 개로 표현되는데, 동사로 표현될 때에는 수동태로 표현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성령 충만은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죠. 스스로 가득 채우고 싶다고 해서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종의 초혼의식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성령 충만함이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여겨져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이러한 성령충만에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는데, 성령 충만함이 지속될 수 있으며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성령 충만함이라는 것,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적지가 아닌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인 상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에서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하는 것이 마땅할까요. 성령으로 가득 채워짐에는 여러 가지 양상이 있습니다만, 오늘은 본문에 나타난 한 가지의 양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4장 23절 말씀 보세요. (in)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out)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에 소환되었다가 풀려난 직후에, 사도들이 공동체로 돌아가서 공회에서 전달 받은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끔찍한 협박 내용을 공유한 것이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이라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한 사도 공동체였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설교 한 번에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얼마나 기대되겠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 산헤드린 공회원들. 이런 사람들 모두가 회개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은 사도들이 소환당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구체적인 협박을 받게 됩니다.
자,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보통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정상입니까? 복음 전파를 잠깐 멈추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산헤드린 공회에서 너 이거 하지마. 너 이거 하면 죽어. 이런 무시무시한 얘기를 방금 전에 듣고 풀려났는데, 밖에 나가자마자 예수 믿으세요.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되겠죠. 그런데 사도 공동체는 이러한 협박의 내용을 상세하게 공유한 뒤에 즉각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24절 말씀 보세요. (in)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여기서 “소리를 높여”라는 표현에서 소리는 단수 명사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다같이 기도하는데 한목소리로 기도했다는 거예요. (out) 보통 합심기도하면 웅성웅성웅성하지 않습니까? 절대로 하나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목소리로 기도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 주신 고귀한 사명, 복음 전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 한마음 한 뜻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한 목소리라는 단수 명사를 사용한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대주재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눈앞에 놓인 산헤드린 공회의 협박이 충분히 겁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한 분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아무리 폭력적으로 날뛰더라도 하나님보다 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굳게 믿는다는 사실이 담겨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서는 사람의 노력이 헛되다는 믿음이 담겨있는 것이죠.
자 그렇다면, 사도 공동체가 박해의 위협 가운데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올려드렸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4장 2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29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out)
이 내용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나눠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도 내용은 (in) 첫째로,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 상황을 지켜봐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인간적으로 너무나도 밋밋해서 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셔서, 그 명령 하나 때문에 목숨 걸고 복음 전파하는데, 산헤드린 공회에서 대놓고 복음 전파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겠습니까? 저 독사의 자식들 죽여달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솔직한 말로, 하나님께서 죽이시든 안 죽이시든, 이렇게 기도라도 해야 좀 두려움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말로만 무슨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말로만 이렇게 고백하는 척하고 실제 기도 내용은, 하나님, 저 마귀새끼들 다 죽여주십시오. 그러면 복음 전파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런 식의 기도는 모순적인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인정해야지, 하나님의 칭호만 창조주 위치에 가져다 놓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내가 오더하는 대로 역사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역겨운 모순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바람직한 기도가 아닙니다. 사도 공동체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맡겨드립니다. 하나님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기도하면서 사람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제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적자들을 죽이시든 살리시든지 간에 행위의 결정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서 만큼은 선을 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사도 공동체의 기도 내용, 하나님께서 대적자들의 구체적인 위협을 관심 있게 지켜봐달라는 기도 내용을 본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 공동체의 기도 내용 두 번째는, (in)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입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도에는 대적자들의 물리적인 박해에 대한 그 어떠한 내용도 담겨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독사의 자식들 다 죽여주십시오. 이런 기도는 너무나도 극단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시겠습니다만, 박해에 대한 기도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우리 가족이 몰살당한다거나, 고문 당한다거나,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괴롭고 슬프겠습니까? 그러니 대적자들을 죽여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더라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불을 내려 주십시오. 지진을 일으켜주십시오. 이런 요청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결혼 전에는 정말이지 순교자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도 순교의 상황에 놓여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와 아들이 생기고 나서 보니 이전보다 순교에 대한 열망이 현저히 낮아진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저뿐만 아니라, 최근에 아들을 출산한 우리 신목사님도 유사하더군요. 신목사님께 동의를 구하고 여쭤보았는데요. 신목사님도 이루가 태어난지 얼마 안 돼서, 한참 귀여울 때라서 순교하더라도 이루 얼굴을 조금만 더 봐야 하지 않겠나. 라고 하셨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인용했습니다만, 사실 순교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만남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 그래도 복음전파는 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죽어가는 영혼들이 태반입니다. 제가 기꺼이 손모가지 하나는 내어드릴 수 있지만, 제 목숨만은. 뭐 이런 기도라도 저는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공동체는 어떤 기도를 올려드립니까? 어떤 위협이 있든지 간에, 담대하게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너 예수 이름으로 복음 전하면 진짜 죽어. 이 얘기를 듣고 왔는데, 담대하게 하나님 말씀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공동체의 기도에 대해서 클라레스 라킨이라는 침례교 목사님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기도는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 수 있는지에 대한 믿음과 이해다.” 이 설명에 따라, 하나님께 내 뜻과 내 의지대로 함부로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굳게 신뢰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공동체가 이런 기도를 올려드리자, 하나님께 세 가지 응답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4장 3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첫 번째 응답은 기도하던 장소가 흔들렸다는 것인데요.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 시대와 사도 시대의 독특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동일하게 발생하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동일하게 받을 수 있는 기도 응답은 두 번째 기도 응답입니다. 한마음 한 목소리로 기도하던 모든 사람이 성령으로 가득 채워졌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기도 응답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그 과정은 사람이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기도 응답 두 가지 내용보다, 기도 응답의 결과에 집중해야 합니다.
기도 응답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들을 노골적인 위협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공동체 전체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out) 이것이 성령 충만함의 증거이며, 성령으로 가득 채워짐의 한 가지 양상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냥 아무렇게나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자들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마지막으로 예화 두 가지만 들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가 2주 전에 사랑의교회에서 실시한 전도폭발 임상훈련을 다녀왔습니다. 전폭 훈련을 받으면서 생애 최초로 복음 전문을 암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전도였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4박 5일 동안 지내면서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3일 동안 전도하는데, 화요일과 수요일은 관계전도. 목요일은 노방전도를 합니다. 화요일에는 훈련자가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복음을 전합니다. 쉽죠? 그리고 수요일에는 관계 전도를 하는데, 복음 제시 부분을 훈련생 두 명이 파트를 나눠서 전합니다. 이제 여기서부터가 문제에요. 전도하러 나가기 전에 훈련자 한명과 훈련생 두명이 손 붙잡고 뜨겁게 기도하고 전도하러 나갑니다. 성령으로 가득 채워져서 복음 전파의 현장으로 나가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제가 복음을 제시하기로 한 은혜 인간 하나님 파트가 헷갈리기 시작하면서 멘탈이 흔들립니다. 예화 내용이 뭐였더라. 토씨하나 틀리지 말고 복음 제시해야한다고 하더데, 잘 기억나지 않는데. 어떡하지. 이런 생각이 들면서 자신감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더 긴장되게시리 하필 지하철 타고 목적지에 가는데, 만원 지하철에서 이 복음 제시 책을 들고 주위에서 이상하게 쳐다보든 쳐다보지 않든, 주술 외우듯이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암기하면서 가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있겠습니까? 없던 긴장도 생기겠죠.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전도 대상자를 만나고 나니까,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암기가 부족한 부분은 더듬거리긴 했습니다만, 복음 전파를 향한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으니, 어려운 부분이 생겨도 하나님께서 극복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 예화는, 저와 함께 전폭 훈련에 다녀온 이천성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천성 집사님 조가 노방전도할 때, 저 멀리서 어디 무슨 시커먼 사람이 두꺼운 옷을 입고 여러 보따리들을 주렁주렁 들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답니다. 누가 봐도 노숙하는 분이죠. 같은 조였던 목사님 한 분과 훈련자 권사님께서 그분과 대화를 시도하다가 반응이 별로 없는 것을 보고 서로 싸인을 주고받았답니다. 그만하고 가자고. 그런데 이때 이집사님이 바톤을 이어받고, 식사 안하셨냐고 질문합니다. 식사 안했다고 대답하자, 주머니에 있는 만원짜리를 손에 쥐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길거리에서 복음을 제시하기에는 시간도 부족하고, 자리도 마땅치 않아서 바로 결신기도에 들어갔습니다. 노숙하시는 분이 처음에는 대답도 안하고 미동도 없었는데, 결신기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따라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노숙하시는 분이 복음을 받여들였는지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집사님께서 노숙하시는 분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제가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듣고보니, 이집사님께서 본래 후각이 예민하셔서 노숙하시는 분 곁에 잘 있지 못하신다고 합니다. 악취가 나면 그럴 수 있죠. 또 노숙하시는 분이어서 그런지 손이 굉장히 얼룩덜룩했는데, 그 손을 붙잡고 결신기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셨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본인의 평소 생각이나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에서, 평소였으면 더러워 보이고, 악취로 느껴질 부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져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성령으로 가득 채워짐의 한 가지 양상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 신앙생활의 목표가 아닌 과정이며, 우리의 평소 상태여야만 합니다. 그러니 부디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그렇게 대단하게 취급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할 점은, 성령으로 가득채워진 상태에서, 그러한 상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의 역사하심에 따라 복음을 담대하게 전파하느냐, 아니면 현실에 안주하고 마느냐. 이 부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적인 바른 이해를 가지고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를 지속하고 반복하며, 부르심에 따라 복음 전파자의 인생을 온전히 살아내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무리 기도]
기도하시겠습니다.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있던 우리를 주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복음 전파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죄악된 본성을 가진 우리이지만, 이런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성령으로 가득채워주시며, 담대하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주어진 환경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인생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하오니, 우리의 매일의 삶을 주관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찬송가 321장 함께 찬송하시겠습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새로 지으심의 중요성을 기억하며 그 심령 가운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나아가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설교 원고 11~12페이지
예화
1) 노숙자 만원, 냄새 안 남
2) 두려움 극복, 합심 기도
3) 어딜 가든 복음의 증인으로 – 숭실대 캠퍼스 전도
(in)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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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NT
4:23 “그 동료에게 가서”
두 사도는 지도자들의 경고(21절) 후에 풀려남. 치유된 사람도 함께 풀려난 것으로 보임.
사도들이 돌아간 집단의 규모와 장소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음. 사도들은 “이들 자신의 것”, 곧 이들의 공동체로 돌아감. 행 21:6, 24:23에서도 “이들 자신의 것”이라는 관용구를 사용하여 이들의 장소나 가족이나 친지를 나타냄. 이 표현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가 얼마나 자신들을 서로 의지가 되는 친구들의 공동체로 보았는지를 강조함. 이 사도들은 돌아온 데 이어 자신들과 제사장과 장로들의 경고를 전달함.
4:24
공동체 구성원들은 당면한 난관을 기도로 주님께 고함. 이들은 기도로 한목소리처럼 말함(포넨, 단수명사). 이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수행하는 데 필요한 권능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감. ‘호모뒤마돈’은 노력의 하나 됨을 강조함(행 1:14; 2:46 참고). 긴박한 상황에서 이들은 즉각적으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의지함. 이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대적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노력이 헛되다는 것 또한 앎.
이 공동체의 기도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한 확언으로 시작함. 기도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데스포타)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지위를 표현하는 주권자에 해당되는 단어임. 이 단어는 신약에 10회 등장, 누가-행전에서 2회 등장하는데 모두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됨.
이 단어는 흔히 인간 지배자를 가리키지만, 신약에서는 주로 노예-주인 관계를 나타냄. 주인은 지배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음. 하나님은 창조자의 지위에 있으며 주인으로 표현됨.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이며, 하나님의 주권이 최종 상소 법원이 됨. 따라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는데, 적을 섬멸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자신들이 가진 역할과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기도함.
4:25-26
하나님을 창조자로 부른 뒤에 기도는 시편 2:1의 표현에 호소함으로써 간청에 신학적 근거를 마련함. 이 시편은 헤롯과 빌라도뿐 아니라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예수님께 한 일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임. 하나님의 계획이 실제로 실현되고 있음(28절). 이 시편의 요지는 하나님의 계획을 적대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적대감은 이제 사도들의 공동체로 확대되었음. 사도들의 공동체는 기도함.
예수님께서 거부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하나님의 손에 의한 활동 안에, 하나님의 의지와 권능 안에 포함됨(눅 1:66; 23:46; 행 4:30; 7:25, 50; 11:21; 13:11). 이 적대는 놀랍게 여겨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것.
하나님의 계획에 해당하는 단어(불레)는 신약에 12회 등장하며, 누가-행전에만 9회 등장함.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진행하시는 일에 적대감을 드러내며 방해하기도 함. 따라서 이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이 이런 적대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가 문제가 됨. 이들은 적대를 따르지도 이에 침묵하지도 않을 것이며, 선포 때 담대해지도록 하나님의 권능을 구할 것.
4:29-30
공동체는 기도의 요망 사항을 표현함. 기도는 처음에 하나님의 정의에 호소함. 대적들의 위협을 주시해달라는 간청이 이루어짐. 여기서의 위협은 산헤드린의 위협을 가리킴(4:21). 공동체는 하나님께 대적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맡겨드림. 그러니 이 기도는 대적자들을 격파해달라는 기도가 아님. 적대로 인해 해를 입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도 아님. 공동체는 적대와 고난을 신실하게 대면하기를 간구함.
두 번째 간청은 하나님께서 공동체에게 말씀을 전하는 담대함을 달라는 것.
공동체가 전하는 동안 하나님이 당신의 손으로 권능을 보여줄 것이 확신됨.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치유되고 표적과 기사를 행할 것.
** 기도는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믿음과 이해다. (Clarence Larkin 클라레스 라킨) 침례교 목사.
4:31
기도를 마치자 표적 세 가지가 나타남. 1) 기도하던 장소가 흔들림 2) 모든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해짐 3) 담대하게 말씀을 전함
기도 장소가 흔들리는 것은 확증을 말하는 독특한 표적임(사 6:4, 출 19:18 시내산이 하나님의 임재에 흔들림). 그러나 확증이 항상 이런 식은 아님(왕상 19:11-12). 행 16:26에서 지진은 옥문을 열고 감옥을 흔들리게 함. 지진은 박해 받는 사람들을 구해주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보여줌.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은 말씀을 선포하기 위한 권능이 부여됨을 의미함. 이들은 말씀을 담대하게 전함. 이 공동체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임. 사명을 위해 권능을 받는 공동체의 목표는 충족됨.
요약하면, 이 기도는 하나님에게 완전히 의지한다는 표현이며, 그분의 주권을 인식하고, 노골적인 적대감 가운데 하나님의 권능과 주시를 요청하며, 사명을 위해 권능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역사하여 치유와 표적 가운데 있는 예수님의 이름 전파 뒤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보여달라고 간구함. 이 기도는 사 37:16-20에 나오는 히스기야 기도에 뿌리가 있음.
이 공동체에게 구성원이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길을 걷고 거부당하는 것은 성공의 표시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하며, 기꺼이 박해를 당하고, 예수 전하기를 소망하며, 하나님께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구하는 것은, 이 모두가 건강한 공동체의 표지임. 거부와 적대가 존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또 추구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을 때, 고난은 기꺼이 받아들이게 됨.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은 담대함으로 이어짐.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이들의 지도자들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할 것. 이들이 기도를 위해 함께 모인 것은 이들의 하나됨에 대한 중요한 표현임. 이들은 한 하나님 앞에서 한 목소리로 연합하여,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명령하신 것, 곧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고 이 일을 전파하기를 구함. 이 모든 것이 두 가지 주요 신념에 근거함.
1) 하나님과 추종자 사이의 주종 관계
2) 하나님께서 이 공동체에 명령하셨던 핵심 사명, 곧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을 통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는 일의 완수에 대한 집중.
초기 신자들의 자기 이해와 하나님 의지는 이들로 하여금 적대를 담대히 맞서게 함. 이들은 또한 적대를 함께 견디고, 각자 자기 식으로 행동하는 개인의 노력만 나오는 것은 아님. 공동체의 하나됨이 이들에게 힘을 더하고,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 줌. 하나님께서는 이 공동체를 위한 권능으로 응답하심. 하나님의 말씀은 전해지고 또 살아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맡으라고 명령하신 임무를 위해 권능을 받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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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pp.85
성령으로 충만하는 것은 일반적인 용례들과 달리 특이한 성격 한 가지를 가짐. 그것은 이미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 경우에도 다시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이 표현을 쓴다는 점. 이 단어는 성령 충만의 반복성을 나타낼 때 사용됨. 이것은 특별한 일이 있기 전에 일어나기도 하고, 특별한 일이 있은 후에 일어나기도 함. 베드로가 공회에서 대답할 때(행 4:8), 초대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기도한 후에(4:31).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표현의 특징은 급작성과 반복성임. 초대교회 일곱 집사는 오순절 성령으로 충만한 이후에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한 상태에 있었음. 또 어떤 사람은 오순절에 성령으로 충만한 이후에 반복해서 성령 충만함을 얻기도 하였음. 성령 충만은 여태까지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이 상태에 있게 되는 것.
그 이후 그리스도인은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 있게 됨.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상태임. 모든 그리스도인은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 있어야 정상임.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상태는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임. 그러나 어떤 특정한 일을 하게 될 때에나, 어떤 특정한 일을 하고나서 다시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음. 성령으로 충만하는 것은 반복되는 행위임.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갑작스러운 성령충만이나 반복되는 성령충만에는 특별한 현상이 동반되기도 하고 동반되지 않기도 한다는 점. 사가랴에게는 예언이(눅 1:67), 오순절에는 방언(행 2:4)이 동반되었음. 그러나 엘리사벳에게는 축복이(행 1:41), 공회에 선 베드로(행 4:8), 기도 후의 성도들(행 4:31), 바울(행 9:17)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것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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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 – 박형용 (pp.~83)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구절은 주관적인 구원론을 지지하는 구절로서 개인 성도의 중생과 회심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음. 이런 까닭에 이 구절은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폭풍 같은 인생의 마음속에 생긴 내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음. 그러나 게할더스 보스는 다른 각도로 이해하였음. “완전히 새로운 환경, 더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창조되었으니, 해당되는 사람은 그 세계 안에 거주자이며 참여자이다. 물론 변화된 주체의 내면성이 배제되지는 않았지만, 이 구절의 일차적인 의미는 변화된 주체의 내면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변 세계 전체가 새로운 국면과 특성을 갖게 된 것이다.”
바울의 언어에서 크티시스라는 단어는 전체 창조물(골 1:15)에 관하여 사용되었으나, 크티스마는 개별적인 창조물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우리는 이 구절에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함축적인 의미가 나타나있다는 사실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세계 질서의 대조를 발견한다. 새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질서를 가리키나, 옛것은 구속받지 못한 비참한 세상을 가리킴(갈 6:15).
리델보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속한 자들을 위해 먼저 죽고, 그들은 단지 후일에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서 죽으셨을 때, 성도들도 역시 그분과 함께 죽었으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다.”
바울 사도가 고후 5:17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사용할 때에, 그는 그것을 개인의 주관적인 상태에 관하여 사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이전 것들”과 “새 것들”은 모두 중성 복수로 사용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단어를 중성으로 사용함으로써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구속역사를 가리키는 데 사용했다. 옛 질서는 지나갔고 새로운 질서가 이미 시작된 것.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 안에서 새로운 창조, 즉 새로운 존재질서를 성취하셨다. 리델보스는 말하기를 “이전 것”은 죄와 곤경에 있는 구속되지 않은 세상을 의미하고, 새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동시에 임한 구원의 때와 재창조의 때를 의미한다. 새 시대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옛 시대로 침입하여 들어왔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세대로 옮겨졌다.
보스는 카이네 크티시스를 새로운 피조물(성도 개인을 지칭)보다는 새로운 창조물(전체 세상)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카이네 크티시스는 한 개인의 변화를 가리키지 않고 종말론적인 변화를 가리키며 오는 세상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 사도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새로운 창조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설립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받는다.
바울 사도의 구속사에 대한 사상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새로운 창조라는 말로 요약됨.
보스 “그 새로운 피조물은 모든 종말론이 절정에 달하는 세계 갱신의 시작을 의미한다”라고 말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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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 조병수(pp.232~)
1. 대적자 (6:12-13)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대적자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지 지적함.
바울은 대적자들을 가리켜 “육체로 잘 보이려고 하는 자들”이라고 부름. 이들의 특징은 내용보다 외면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내용을 아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할례라는 외면을 나타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 속보다 겉에 치중하는 자들은 항상 이런 오류를 저지름.
대적자들은 성령을 알지 못하고 믿음도 알지 못함. 그들은 오직 육체에만 관심을 가졌음. 사람과 행위에만 관심을 가졌음. 따라서 대적자들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였음.
이들의 목적은 두 가지.
1)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핍박받지 않게 하기 위함
할례를 받는 것은 유대인과 동일하게 행동하는 것이며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은 유대인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는다면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 그러나 그들이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상하게 여기고 핍박할 것. 대적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할례를 강요했던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핍박 받지 않으려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님. 이것은 매우 값싼 신앙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불신자들에게 걸리는 것과 어리석은 것. 십자가로 인해 핍박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은 좁은 길을 가는 자들임.
2)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기 위함.
대적자들은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성도들에게는 할례를 강요함. 무엇보다 이것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는 생각에서 나오는 시도. 자신의 부족함을 은닉하기 위해 남에게 잘못된 것을 강요하는 것. 이는 성도를 이용해서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에서 나오는 시도. 이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성도를 잡아먹는 것.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행위.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타인에게 잘못된 것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만 함.
2. 사도 바울(6:14, 17)
바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 자랑함.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바울의 자랑임.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기 때문. 그러므로 바울은 세상에 대해 연연할 것이 없음.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면하려 하지 않고, 세상에 대해 자랑하려 하지도 않음. 따라서 바울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지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에 빌붙기 위해서 어떤 아첨도 할 필요가 없음. 바울에게 오직 십자가만이 자랑거리일 뿐. 바울의 자랑거리는 오직 그의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뿐.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다면 세상으로부터 핍박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음. 그런 자에게 있어 세상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함.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입장을 결정하는 표준이 됨.
3. 신자(6:15-16)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구별이 사라짐. 바울은 이미 앞에서 이 사실을 천명하였음(3:27-28).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는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헬라인이라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음. 할례를 받았느냐 할례를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 할례를 받았을지라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은 사람은 무의미하며, 할례를 받지 않았을지라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의미가 있는 것. 새로운 피조물은 “이 규례를 따라 생활하는 자들”임. 그들에게는 새로운 규례가 주어졌음. 그것은 그리스도의 법(6:2)임. 또한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임.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민족이며 복음의 사람임. 사람을 좋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을 구하는 사람임.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언어, 새로운 행동이 나옴.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새 피조물인 신자들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기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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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NT – 모이세스 실바 (PP.597-)
바울은 친필로 편지 쓰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며 결론을 시작함. 바울이 글자 크기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편지 쓸 때 자신의 마음에 일어난 격동을 부각하는 방편일 것. 큰 글자라는 것은 바울이 제기하는 문제와 결과에 대해 바울이 투자한 노력이 시급한 문제라는 사실을 암시함.
바울은 자신이 이미 쓴 것(갈 1:1-6:10)을 되돌아 봄. 친필로 쓴 자기 편지의 성격에 대해 반성하고, 자신의 전도로 회심한 자에게 그들 앞에 있는 편지의 내용과 똑같이 행하도록 촉구함으로써 교인에 대한 마지막 호소를 시작하기 때문.
6:12
바울이 격동한 원인은 13,14절의 주제. 대적자들이 억지로 할례 받게 하는 것은(아낭카주신)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음. 할례를 강요하는 일이 사도 바울이 기록하는 시점에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님을 함축한다. 따라서 번역은 “그들이 너희를 억압하고 있다”가 된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시점에서 대적자들의 행위가 실현되지 않은 목표로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거짓 선생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한 호의적인 동기가 아니라 자기들의 이득을 위한 이기적이고 비겁한 동기에 따라 활동하고 있다고 비난함. 거짓 선생은 복음을 따르는 것을 자기들이 존중하는, 아니 사실은 자기들이 두려워하는 사람들(비기독교 유대인)에게 좋게 보이는 것에 맞추고 있다. 자기들을 더 좋게 보이도록 만들거나 명성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이와 같이 행동하는 것.
거짓 선생은 기독교 운동을 유대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율법에 대한 순종에 있어서 더 자유롭게 만드는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에 맞추어 유지되는 운동으로 보게 만들고 이방인까지 이에 순응하게 만든다면 동료 유대인이 기독교를 더욱 쉽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음.
(거짓 선생은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은 갈라디아 전체에 나타난 육체에 대한 부정적 의미를 그대로 담고 있음. “모양을 내다”라는 표현은 육체를 단순히 외모로 보는 것을 암시함. 거짓 선생의 중심적인 관심사는 바울의 관심사, 즉 성령과 성령이 인도하는 삶보다 부정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제시됨.
결론적으로 거짓 선생은 박해를 피하고자 한 것.
갈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이 동기는 본질적으로 모양을 내려고 하는 자들의 욕망이 가진 이면을 보여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이 보기에 복음의 진리가 더 이상 정결함과 오염에 대한 율법 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혼합 공동체에서 유효하게 일어나는 십자가의 걸림돌을 가리키는 압축된 표현임. 비기독교 유대인은 단순히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 관념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의 특수한 함축적 의미 때문에 이 복음을 전파하는 유대인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하도록 동기를 얻었을 것. 바울은 메시아가 온 이후로 율법의 역할이나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기초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가 지닌 함의가 무엇인지 그들에게 말했기 때문.
거짓 선생은 확실히 자기들은 율법에 대한 충실함을 보존하고 확대함으로써 경건한 삶을 추구했다고 믿었음. 그러나 바울은 자신과 거짓 선생의 활동에 있던 역학 관계에 대해 그림을 더 크게 보는 위치에 있었음. 바울은 유대 기독교 공동체에 가해진 압력을 잘 알고 있었음.
바울은 매질과 돌팔매질을 당하며 그 압력을 몸소 느꼈음. 바울은 이방 그리스도인을 유대 그리스도인처럼 변화시키려고 애쓰고 디아스포라 지역에 퍼져 있는 기독교 집단 속에 율법에 대한 충성으로 최소한 모양을 내려고 했던 유대인 기독교 선생의 동기를 평가할 때 이런 압력도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함.
거짓 선생은 바울이 주장하듯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가?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유대교 생활 방식을 가장 엄격하게 실천하는 당파인 바리새인의 일원으로 자신이 신실하게 지켰던 율법의 정확한 기준에 따라 거짓 선생의 활동을 판단할 수 있었음. (행 26: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행 26: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바울은 대적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함. “그들이 너희의 육체(너희의 할례 받은 생식기)로 (다른 유대인의 눈에) 자랑하려 함이라” 거짓 선생은 회심한 갈라디아 사람들을 통해 자기들의 개인적인 기념물로 만들고 싶어 함. 따라서 거짓 선생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부여할 수 있는 것 속에서 자기들의 자랑할 것, 곧 자기들의 명예에 대한 권리를 찾는 사람들의 본보기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자신을 위한 기념품으로 만들고자, 또는 자신의 목회적인 성공의 통계 속에 집어넣고자 하는 것과 같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함.
바울이 기꺼이 명예를 주장하는, 자랑하는 유일한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 바울은 고후 11:21과 빌 3:4-14에서 자신의 자랑거리에 대해서 말함. 바울은 자신의 이스라엘 혈통과 율법 준수에 대해 언급하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명예와 가치를 찾는 것을 포기함. 그 대신 자기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자기에게 그리고 자기를 위해 이룬 것에서 자랑거리를 찾고, 세상의 가치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며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함.
바울은 “자랑” 개념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희생 심상을 나란히 배치함. 그리스도인은 여러 세기에 걸쳐 십자가를 아름답게 꾸민 무수한 형태를 보았기 때문에, 나무에 나체로 매달려 피흘리며 죽어가는 그 비참함과 죽음에 대한 고통과 통증은 제대로 상상할 수 없음.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 따라서 십자가가 세상의 가치와 지도 원리를 어떻게 완전히 뒤집어 놓는지 완벽하게 보여주는 상징이 됨. 예수님에 대한 심판을 의미했던 십자가가 그 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세상에 대한 심판이 됨.
바울은 세상이라는 말을 세상의 다양한 범주인 민족, 계급, 성별,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초등학문을 통해 이 세상 질서의 부당하고 폭력적이고 속박적인 관습을 영속화하는 인간 사회의 다른 작용 원리를 통해 규제되는 삶의 질서를 가리키는 데 사용함. 세상은 악한 세대이며 뒤틀리고 타락한 옛 피조물이며, 향락과 야망의 영역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는 선언은 이러한 구조와 세상 논리가 바울에 대해 가지고 있던 권세가 끝난 것과 바울이 이 구조와 세상 논리에 복종하는 일이 끝났음을 의미함. 이는 모든 제자가 공유해야만 하는 죽음임. 모든 제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육체와 함께 그 충동과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함. 유대인과 이방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중시하는 악한 세대의 옛 법규를 초월하여 온전한 자유 가운데 살기 때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악한 질서와 구조의 규칙과 규례를 죽이는 도구가 됨. 예수님의 십자가는 새로운 피조물을 낳기 때문. 바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랑하기에 합당한 근거인 이유는 엄밀히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 악한 세대의 권능과 이 권능이 인간 생활 및 공동체를 지배하는 억압에서 해방하는 도구이기 때문.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행위자인 성령이 예수님을 믿는 자 가운데 들어가고 그들 가운데 거함으로써 그들 안에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의로운 이가 살게 함.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은 각 그리스도인 속에,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 속에 내주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이다.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은 새 아담인 그리스도의 형상이 신자 안에 충분히 이루어질 때(2:20; 4:19), 따라서 신자가 옛 아담이 아니라 새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될 때 형성된다. 이 진술은 바울이 앞에서 비슷하게 진술한 선언을 즉각 환기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 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5:6). 이 두 진술 사이의 평행 관계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새로운 피조물의 동장에 필수 요소라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함축적인 의미로 보면 이는 바울이 5장 13절 -6장 10절에서 믿음이 사랑으로써 역사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해설하는 것처럼 바울에게 핵심 관심사인 “성령 가운데 걷는 것” 또는 “성령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바울은 2장 14절의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걷는” 이라는 말을 환기하는 심상인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 평강과 긍휼의 복이 있기를 하나님에게 기원한다. 이 조건적 복은 독자에게 바울의 규례에 맞추도록 권고하는 한편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복의 길 바깥으로(그리고 저주 아래에, 갈 3:10-12) 떨어짐을 의미한다고 그들에게 은연중에 경고한다. 이 두 본문에서 하나님 이 그리스도 안에서 초래한 새로운 현실에 맞게 행하는 것은 옛 피조물의 경계표지, 특별히 유대인 ( ‘할례” ) 과 이방인( ‘무할례” ) 을 구별한 경계표지인 규례와 원리를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따르다”로 번역한 동사( ‘스토이케수신’ )는 비슷하게 명령한 행동인 “성령으로 행하는 것 ( 성렁에 보조를 맞추어 걷는 것 ) ”( 5:25 )을 떠올리게 함.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은 것이 그의 진정성을 증명했다(6:17), 바울의 몸에 난 상흔이 그의 사명과 그에게 사명을 준 분에 대한 그의 신실함을 입증하는 증거였다. 바울의 몸에 난 상흔은 반대와 대적을 피하고자 곳곳에서 복음의 진리를 바꾸는 것이 훨씬 수월하고 편안했을 때 바울이 무엇보다 자기에게 사명을 준 분에게 순종했다는 것과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실천하는 데 신실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십자가 목걸이를 하거 나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것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고 성 령을 열매를 맺는 것에 있다( 5:22-23).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예수가 우리가 되기를 바라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삶 속에 낙인이 찍힌 예수 자신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다른 면에서도 흔적을 남긴다. 곧 우리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흔적을 남긴다.
그리스도인의 신실함은 또 십자가를 통해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6:14) 라는 바울의 관례에 맞추어 사역하거나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목사와 제자는 민족 집단, 특권 계층, 사회 경제적 계층 등과 같은 세상의 구분선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스도인은 그들 자신의 관계와 실천 속에 서 이런 변화를 증언하기 때문에 이런 구분선을 여전히 그들 자신의 정체성과 질서 의식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이웃에게 조롱이나 악의가 가득 찬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신실함의 문제는 자신의 실천을 세속적 사상가의 요구에 맞추어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성령의 요구와 새로운 피조물의 규례에 맞추어
적응하는 것에 있다. 오직 이런 길을 통해서만 기독교 공동체도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증언을 유지해야 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