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잠깐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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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벧전 5:5-11
제목 : 영원과 잠깐의 사이에서
베드로전서 5장 5절에서 11절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로마 전역에 흩어져 있는 나그네들과 택하심 받은 자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권면의 말씀입니다. 4주 전에 제가 이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는데, 시간관계상 다루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같은 본문으로 말씀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2023년에 전했던 말씀이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실텐데,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베드로전서 5장 5절 하반절 말씀에 따르면, 두 가지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의 성격입니다. 5장 5절 하반절 말씀 보세요. (in)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여기서 대적하신다는 표현과 은혜를 주신다는 표현은, 생생한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행동으로 옮기시는 일들에 대한 분명한 표현이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궁금한 적 있지 않으십니까? 베드로전서 5장 5절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계속해서 대적하고 계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계속해서 은혜를 주고 계십니다. 과거에는 겸손한 신앙의 선배님들께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오늘날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또한 미래에 우리 자녀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어김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의 성격은 교만한 자와 겸손한 자에 따라서 구별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로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분하시는 방법이 교만과 겸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람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분합니다. 성별로 구분하느냐, 자산으로 구분하느냐, 직업으로 구분하느냐, 연령대로 구분하느냐. 여러 가지 구분 방식이 있죠. 어떤 목적과 어떤 용도로 구분하느냐에 따라서 구분 방식은 제각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실까요. 쉽게 생각해 보면, 천국 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베드로전서 5장 5절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과 교만한 사람을 구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겸손이라는 영적인 옵션을 자신의 기호에 따라 선택하거나 말거나 하는 성품이 아닙니다. 겸손함이라는 성품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받았느냐, 구원받지 못했느냐의 척도를 판단하는 시금석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구원받았는데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했는데, 대적한다는 표현은 주적으로 삼아서 반드시 섬멸한다는 표현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교만한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원받았다고 볼 수 없겠죠.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 이 부분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지. 또 공동체 안에서 겸손한 말과 행실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아름답게 섬기고 있는지. 이런 부분을 가지고 냉철하게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파악하고 겸손한 성품을 지니고 유지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겸손에 대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본인 스스로 돌아볼 때 하는 평가일 뿐이지, 상대방의 겸손함을 본인의 잣대로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소리에 너무나도 쉽게 흔들리고 오해합니다. 예컨대, 집에서 부부싸움하고 나오면, 겸손한 사람도 예민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어려운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인사를 했는데 상대방이 시큰둥하게 반응할 경우, 어? 뭐야. 니가 내 인사 안 받아? 뭐야. 말투가 네 가지가 없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되겠죠. 그러니 우리는 공동체 내에서 누군가를 영적으로 평가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하냐. 교만하냐. 이 부분을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우리가 그 일을 가로채는 것은 명백한 월권행위이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패한 본성은 타인을 정죄하고 깎아내리는 데 특화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두 가지 부류, 겸손한 사람과 교만한 사람으로 나누십니다. 교만한 사람을 적대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교만한 사람이 될 것이냐.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이냐에 대해 고민할 필요 없이, 무조건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베드로전서 5장 6절 말씀 보세요. (in)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 전능하신 그 손 아래에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겸손함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 자기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단순하게 영적인 측면에서 그럴듯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out) 이는 우리의 삶에서 적극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부분인데요.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5장 7절 말씀 보세요. (in)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온전히 인정하고, 하나님을 참되게 신뢰함으로 우리 삶에서 겪는 모든 고충과 고민과 걱정거리들을 다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겸손함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께 본인의 염려를 맡겨드리되, 악한 영의 세력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만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실 것을 굳게 믿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한 영의 세력을 방관하며 나태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과 9절 말씀 보세요. (in)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out)
근신하라. 술취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경건함과 거룩함을 방해하는 모든 종류의 중독과 부주의함과 태만으로부터 벗어나라. 그리고 깨어라. 영적으로 깨어있어라. 죄의 유혹과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서 영적으로 깨어있어라. 믿음을 굳건하게 함으로써 마귀를 대적해라. 이렇게 마귀를 대적하기 위한 명령이 나온 뒤에, 뭔가 애매한 진술이 등장합니다. 5장 9절 하반절 말씀 보세요. (in)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out) 베드로전서 5장 5절부터 9절 상반절까지 어떤 내용이 주를 이루었습니까? 겸손이 주된 내용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5장 9절 하반절에서 “고난”이라는 주제가 등장합니다. 사탄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먹잇감을 찾기 위해서 돌아다니고 있는 상황을 그리스도인이 인지하고, 사탄을 대적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여기서 고난에 대한 내용이 갑자기 등장하는 것입니다. 내용상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베드로전서라는 회람용 서신 전체 맥락에 따르면, 고난은 핵심적인 주제로 등장하기 때문에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베드로전서에 등장하는 이 고난이라는 주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 본문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온전히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겸손함과 고난의 상황을 연결해서 본문의 말씀을 이해해야 하는데요. 먼저 베드로전서에 나타난 고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는 로마의 다섯 번째 황제인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극심하게 핍박하기 직전인 주후 64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가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절정에 달하기 직전에 기록되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가 기록되기 전에도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자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를 기록하면서 박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소망의 근거를 제시한 것입니다.
자 그래서, 이 당시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얼마나 심각했는가 하면,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죽음에 처하는 것은 차치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강제로 쾌락을 주는 대상이 되었다. 짐승의 가죽이 입혀진 그들은 들개들에게 찢겨 죽임을 당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밤을 밝히게 화형에 처해졌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박해의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순교하는 것이 아니라, 순교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순교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으므로, 순교보다 순교하기 직전의 상황이 너무나 잔인하고 처참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고난과 박해 가운데 고통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베드로전서를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겪었던 고난과 박해를 온전히 공감할 수 없고, 그들의 심경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믿음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믿음 때문에 직장을 잃어버리고, 믿음 때문에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끔찍한 박해의 시대에,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겸손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하면 겸손한 게 좋다. 이런 식으로 안일하게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지금 당장 목숨을 빼앗겨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무엇보다 먼저 겸손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지역 사회에서 추방당한다면, 삶의 모든 부분들이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이사도 가야 하고, 새로운 일자리도 알아봐야 하고, 이사 간 지역에서 새롭게 적응해야 하고, 그런데 이사 간 지역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지역이고. 이도 저도 못하는 어려운 상황이 지속된다면, 가정 형편도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 이런 상황이 찾아온다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겠습니까? 상황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마음도 가난해지고, 눈물도 많아지고. 그러니 표면적으로 볼 때 겸손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만할 거리가 모두 사라졌으니 당연히 겸손해지겠죠.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고난의 상황 때문에 마음이 가난해져 있고 무너져 있을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겸손하라고 명령합니다. 교만할 거리가 하나도 없는데, 물질적으로도 가난하고 심적으로도 가난해서, 하나님의 손만 바라보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겸손하라고 명령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인즉슨 상황이 어려워졌다고 해서, 마음이 가난해졌다고 해서, 본인의 외적인 형편과 재정 상태가 초라해졌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겸손함이 갖춰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하면 착하고, 부유하면 탐욕스럽습니까?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죠.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착하다거나, 부유하기 때문에 탐욕스러운 것은 아니죠.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되는 부분입니다. 겸손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교만할 거리가 없다고 해서 겸손하다?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려고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끊임없이 교만함을 향해 나아가는 법입니다. 따라서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겸손해야만 하는 그리스도인의 필수적인 덕목과 성품은 본인이 갖추기 위해 얼마나 어떻게 노력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가 마지막 권면의 단락에서 힘주어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9절 말씀 다시 보세요. (in)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앞서 설명해드린 베드로전서의 고난의 상황을 연결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겸손의 실천의 일환으로 믿음을 굳건하게 함으로써 마귀를 대적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의 정도와 고난 당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이 5장 9절 말씀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아, 나만 혼자 믿음 때문에 고난받는 것이 아니구나. 나만 이렇게 억울하게 박해당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믿음 때문에 고난받는 삶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견뎌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겸손과 고난을 연결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고난의 정도에 대해서 표현할 때 동일한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모두 똑같은 정도의 고난일까요? 그렇지 않죠. 아주 간단한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 남성의 경우에 군대에서 고생한 경험담은 이야기 보따리 채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끼리 모이면 군대 얘기, 축구 얘기. 이런 이야기들 참 많이 하는데요. 군대 얘기의 경우에는 누가 누가 더 빡센 군생활을 했는가. 이런 보이지 않는 자존심 싸움이 이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객관적으로 누가 더 빡센 군생활을 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만, 당사자는 어지간해선 인정하지 않죠. 왜냐면 본인 군생활은 본인만이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 특수부대에서 죽을만큼 고생했다고 하더라도 본인 군생활이 힘들었으면 힘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난 역시 이와 유사합니다. 예컨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고난이라고 했을 때, 고난이 직접적으로 순교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누군가는 순교하고, 누군가는 사회적인 추방을 당하고, 누군가는 물질적인 손해를 보기 마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난의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죠.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표현할 때, 동일한 고난이라고 표현합니다. 겉으로 볼 때 고난의 정도가 달라 보이더라도 동일한 고난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동일한 고난이라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세상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 때문에 고난 당한다는 그 사실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가 누가 더 고난 당하는지, 누가 누가 더 힘든지. 이런 부분 때문에 서로 재거나 평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믿음 때문에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탈출구는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베드로전서 5장 10절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5장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out) 믿음 때문에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전서 5장 10절 말씀은 위로를 주고 소망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 내용을 두 가지로 나눠서 살펴볼텐데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 두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in) 첫째로,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다른 존재로부터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은혜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는 모든 고난의 상황에서 충분한 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비록 고난의 상황이 즉각적으로 종결되지 않고, 끝없이 지속되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 본인이 체감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에 대한 첫마디를,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리스도인은 차고 넘치는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in)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이는 구원에 관한 문제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향까지도 주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부르심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불쾌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뭔데 나의 자유를 침해하는가, 하나님이 나한테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누구 마음대로 내 삶의 방향을 정하는가. 내 인생은 내가 정한대로 가는 것이고, 내 방식대로 진행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뭔데 내 인생을 하나님 마음대로 정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겨주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신실하게 관리하는 청지기이며, 하나님께 부르심 받은 주님의 자녀라는 자의식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in)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 자신의 나라의 영광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영광,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눌 영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광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 내용은 무엇일까요. 참 안타깝게도 성경은 영광 그 자체의 내용에 대해서 상세하게 서술하지 않습니다. 다만 베드로전서 문맥에서의 영광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과 연관되어 있으며, 영광의 면류관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훗날 우리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 영광의 내용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며, 지금으로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있었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던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습니다.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접할 자격조차 없었던 흉악한 죄인이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들어가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얻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생 가운데 잠깐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차고 넘치는 풍성한 위로와 소망을 안겨 줍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in) 첫째로, 하나님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의 상황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온전하게 하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원어로 볼 때,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다. 상황을 바로 잡다. 회복시키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물론 이 단어는 “완벽하게 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만 베드로전서 5장 10절의 문맥에서는 “상황을 바로잡아주신다. 회복시켜 주신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을 바로잡아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고난의 규모와 정도가 상황마다 다르겠습니다만, 잠깐 고난 당한 그리스도인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친히 기억하시고, 그 상황을 바로잡아 주신다는 것, 그렇게 일하실 하나님을 변함없이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어서 둘째로, (in) 하나님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을 굳게 서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영원한 영광으로 부르셨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 상황을 모두 포기하고 내버려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바로잡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주어진 자리에서 견고하게 설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인내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해 주십니다.
이어서 세 번째로, (in) 하나님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을 강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고난이 다가온다고 해서 믿음의 시험을 당한다고 해서 섣불리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5장 10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는 표현은, 어떤 일을 넉넉하게 해낼 수 있도록 넘치는 활력과 좌절하지 않는 끈기로 기어코 해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in) 하나님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의 터를 견고하게 하십니다. 견고한 터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있습니다. 견뎌내기 힘든 고난을 당하면서 아... 내가 굳이 믿음 때문에 이런 고생을 자초해야 할까. 내가 이걸 굳이 감내해야 할까. 이런 고민이 들 수 있겠습니다만, 그런 의심 대신에,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하시는 터 위에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믿음의 확신 위에서 든든히 버텨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적용하면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적용점,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 처해있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겸손한 성품은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며 소망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위로와 소망이라는 표현은 참 훈훈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표현입니다만, 위로와 소망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 믿음을 지켜내야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베드로는 겸손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겸손함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힘드니까 좀 괜찮겠지. 고난받는 상황이니까 괜찮겠지. 고난 당해서 마음이 어려우니까 마음 추스를 때까지 괜찮겠지.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주시겠지. 이런 식의 반응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겸손함을 갖춰야만 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과 같이 극단적인 고난의 상황에 처해 있지 않기 때문에, 겸손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겸손한 성품을 지닌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어서 두 번째로, 우리 삶을 통치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무작정 해주시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부르신 분이시고,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십니까? 우리의 상황을 바로잡아 주시며, 우리를 굳게 서게 하시며, 우리를 강하게 하시며, 우리의 터를 견고하게 하십니다.
고난의 싹을 잘라서 우리 삶에 고난이 없도록 원천 봉쇄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견뎌낼 수 있도록, 이겨낼 수 있도록,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굳건하게 믿을 수 있도록 힘 주시고 능력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감내할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믿음이 아닌 나태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는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영원과 잠깐의 사이에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 생존한 사람 중에 사후에 접할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거나, 성경이 말하는 영화의 상태를 경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말씀으로 약속하신 바를 굳게 믿음으로 따를 것을 결단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잠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단 하루도 되지 않는 시간이 우리의 인생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우리의 삶을 계획할 때, 믿음의 삶에 얼마나 비중을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루도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겸손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데 소요되는 노력을 얼마나 들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베드로전서 5장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필수적으로 갖춰야할 겸손함과, 능력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마땅히 감당해야 할 바를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영원과 잠깐의 사이에서, 장차 나타날 영광을 고대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불러주시고,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만을 온전히 높여드리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뻣뻣하게 굳은 목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상황을 바로 잡아 주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하게 하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86장 함께 찬송하시겠습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고난의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함을 갖추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온전히 살아내기로 결단하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개인적으로 핍박을 받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겪었던 핍박에 근접하지 못할 것.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돌에 맞고, 매를 맞으며, 감옥에 갇히고, 사형을 당하는 등, 온갖 시련들을 발견할 수 있음.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전하기 때문에 생겨난 어려움들임. 가장 혹독한 박해 중 대표적인 박해를 꼽으라면 로마의 황제 네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음. 네로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믿음을 말살하는 데 집착했음.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말함. “죽음에 처하는 것은 차치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강제로 쾌락을 주는 대상이 되었다. 짐승의 가죽이 입혀진 그들은 들개들에게 찢겨 죽임을 당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밤을 밝히게 화형에 처해졌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어마어마했음. 베드로전서는 로마와 로마 통치 하의 아시아 전역에 걸쳐 살고 있는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임. 이 편지는 신자들에게 굳건함을 유지하라고 격려함. 어려운 때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설명함. 믿음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망을 제시함. 베드로전서는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게 말함.
베드로전서는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극심하게 핍박하기 직전인 주후 64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임.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주후 67년에 네로에 의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전해짐.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처럼 죽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했기 때문.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결국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두려움 없고 거침없이 말하는 종이 되었고, 끝내는 그의 믿음 때문에 죽기까지 했음. 하나님은 베드로를 이렇게 변화시키셨음.
악트마이어
“그리스도인이 동시대 비그리스도인에게 받는 박해는 특정 상황을 회피하거나 행실을 바꾸거나 믿음을 상황에 적응하는 것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복음과 복음으로 형성된 공동체를 철저히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반대하는 사탄의 세력에 복종해야만 독자는 본인이 직면한 박해를 벗어날 수 있다.”
벧전 1:6-7; 4:12
계 1:9-20
lab
1:6-9, 2:19-21, 3:14-17, 4:12-19, 5:10
벧전 수신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 때문에 고난받고 있었음. 베드로는 이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핍박들이 네로의 재위 중 몇 년 안에 엄청나게 증가할 것임을 알 고 있었음.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때문에 모욕 당하고 거절당할 것을 예상해야 함. 무엇보다 진리의 가치는 세상과 크게 대조됨. 핍박은 신자들을 더욱 가앟게 만듦. 그 이유는 핍박이 믿음을 정련할 수 있기 때문.
찬송가 212장 함께 찬송하시겠습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성경적인 겸손함을 갖추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