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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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왕하 6:15-23
제목: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오늘 본문 말씀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이 등장하는지 살펴보고 오늘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돌아보면서 말씀을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열왕기하 6장 8절 말씀 보세요. “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북이스라엘의 아홉번째 왕인 여호람 왕이 통치하던 때에 북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는 국지적인 분쟁이 있었습니다. 아람 왕은 북이스라엘 영토에 들어와서 은밀하게 진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람 왕의 시도는 매번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북이스라엘이 첨단 장비로 아람 군대의 이동 경로를 미리 파악해서 대비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 선지자가 여호람 왕으로 하여금 아람 왕이 침범할 지역들을 방비하도록 안내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람 왕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아람 내에 북이스라엘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고 의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첫 번째 부류를 발견하게 되는데요. 첫 번째 부류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이 부류에 해당됩니다. 오늘날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가운데, 세상적으로 지혜로워 보이고, 탁월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가와 사회, 기업을 운영하고 이끄는 리더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생각이 깊어 보일 수 있고 똑똑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이 운행하는 원리와 법칙을 파악할 때, 영적인 영역을 배제하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영적인 영역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영역에 대한 가능성을 하나도 인지하지 못합니다. 본인이 배운 범위 내에서 사고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이 정답인 줄로 아는 것이죠.
본문에 등장하는 아람 왕은 영적인 영역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람 내부에 밀고자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역사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에, 아람 왕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아람 왕의 신하 중의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열왕기하 6장 12절 말씀 보세요. “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여기서 두 번째 부류가 등장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적인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 순복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류입니다.
아람 왕의 신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의 침실에서 나누는 대화까지도 이스라엘의 왕에게 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물론 오늘날에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별 것 아닌 일이죠. 요즘에는 손톱보다 작은 사이즈의 도청 장치부터 시작해서 홈캠까지 가정집에 설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날로그 시대에는 어떨까요. 왕과 왕비, 두 사람이 침실에서 은밀하게 나눈 대화를 바깥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이런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겠습니까.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으니, 본인이 알 수 없는 어떤 영적인 영역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람 내에 밀고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청 장치와 같은 특별한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능력 외에는 이러한 현상을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람 왕은 신하의 말을 듣고 엘리사 선지자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해서 군대를 보냅니다. 다시 첫 번째 부류로 돌아가서 설명을 보충하자면, 이 첫 번째 부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14절 말씀 보십시오.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아람 왕은 이전에 물리력으로 해결하지 못했던 일을 물리력으로 해결하겠다는 대단히 우둔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을 알지 못한 채로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합니다. 권력으로 해결하지 못한 일을 권력으로 해결하려하고, 돈으로 해결하지 못한 일을 돈으로 무마시키려 합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합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는 자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우둔한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답습합니다.
자, 다시 두 번째 부류로 돌아와서요. 아람 왕이 엘리사를 잡기 위해서 군대를 보낼 때, 엘리사 선자자의 존재에 대해서 조언한 신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두 번째 부류가 첫 번째 부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영적인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안다고 한들, 물리력으로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견에 동조한다면, 영적인 영역에 대한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지식은 죽은 지식에 불과한 것이죠.
이제 세 번째 부류에 대해 살펴볼 텐데요. 세 번째 부류는 지근거리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목격했으나,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15절 말씀 보세요.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5절에서 엘리사의 사환은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냥 사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은 어떠해야 할까요. 본인이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람이 보여준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했다면, 위기의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겠습니까. 엘리사는 열왕기하에서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는 기적과 나아만 장군의 나병 치유를 포함해서 총 11번의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들이었죠. 엘리사의 사환이 이러한 기적들 중 일부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전능하심에 대해서 의심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본인의 눈으로 보기도 하고 엘리사를 통해 듣기도 했을테니,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환은 영적인 눈으로 상황을 판단하지 못한 채로 도단을 둘러싼 아람의 군사와 말과 병거의 모습에 압도되어 탄식합니다. 15절 말씀 다시 보십시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엘리사의 사환이 탄식하는 모습은 본인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는 불신자의 모습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믿음으로 반응해야 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기는커녕 발만 동동 구르는 것이죠. 이러한 점에서 구원의 확신을 점검할 때, 지금이라도 생을 마감한다면, 천국 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과 더불어, 가장 위급한 순간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런 순간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마지막 네 번째 부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엘리사가 네 번째 부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고 탄식했을 때, 엘리사는 이렇게 답합니다. 16절과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16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엘리사는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엘리사 선지자 본인이 하나님께 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아도,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자신의 사환을 위해서 기도해 준 것입니다.
자, 이렇게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한 네 가지 부류를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첫 번째 부류는 영적인 영역에 완전히 무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영적인 영역에 대해 안다고는 하지만, 물리적인 힘으로 영적인 힘을 제압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부류는 첫번째 부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죠. 그리고 세 번째 부류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역사하심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했지만,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부류는 어떠한 상황에도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하는 부류였습니다.
이 내용을 우리 삶에 적용하면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이 네 가지 부류에서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부류에 해당되는지 삶을 통해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본인이 네 번째 부류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명제 하나만으로 단언하지 마시고, 더 나아가서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 대해 오판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온갖 범죄와 질병과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을 것이고, 죄인들의 탐욕과 허영심에 의해 일방적으로 상처받아 신음하는 일들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때로는 불의한 사건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신체적인 어려움을 얻게 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젠가 주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수많은 불 말과 불 병거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네 번째 부류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의 차별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앞서 설명드리지 못한 내용 중 하나인데요. 엘리사는 사환에게 하나님의 군대의 병력이 아람 군대의 병력보다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지만, 아람 군대의 목숨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상식을 아득히 상회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람 군대가 시력을 잃었을 때,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없앨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람이 언젠가 또 다시 기회를 틈타서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 올 수 있기 때문이죠. 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네 번째 부류,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는 사람은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취하는 영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아람 군대를 죽이기는커녕 그들에게 떡과 물을 제공한 뒤에 아람 땅으로 돌려 보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23절 말씀 보십시오.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병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침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병력이 있어도 자발적으로 침략하지 않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와 같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줄 아는 믿음과 결단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입으로만 믿는다 믿는다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동행하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백성을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굳게 신뢰하며,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구원 받을 자격 없는 비천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죄악 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비성경적인 사고방식에 동조하며 살아가지 않도록 우리의 심령을 주장하여 주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깨달음을 간직하며, 삶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하루 하루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하심으로 새벽기도회를 마친 뒤에 교회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개인의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시다가 귀가하시면 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네 부류의 사람이 등장
1.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물리적인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2. 초월적인 존재와 신비함을 알지만 물리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1번 부류와 다를 바가 없음. 알기만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
3. 하나님의 사람을 수종들며,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했던 사람.
4. 하나님의 사람
불병거와 불말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깨달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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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C pp.287
6:8-14
아람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왕하 5:1 이후에 악화되었고, 왕들은 다시 싸움.
언뜻 보기에 왕하 3장 이후에 이스라엘 왕과 선지자 사이의 관계가 개선된 것으로 보임. 엘리사는 여호람에게 자발적으로 예언의 은사의 유익을 제공함. 그는 아람 왕의 침실에 잠입하여 가장 내밀한 말까지 들을 수 있음. 마음이 불안한 아람왕은 엘리사를 잡기 위해 그가 어디에 있나 보라고 명령함. 엘리사는 왕이 있는 곳을 언제나 알고 있지만, 왕은 엘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함. 이는 또한 군대의 움직임이 노출되는 문제를 군대의 움직임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아람 왕의 정신나간 생각을 보여줌. 그는 정말 엘리사가 이러한 움직임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진실로 자신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무력으로 강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6:15-23
아람 왕은 엘리사가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없음. 그럼에도 아침이 밝았을 때 아람 군대가 둘러싼 성읍(사마리아에서 약 18km 북쪽에 있는 도단)에서 엘리사가 발견됨. 엘리사의 예언적 은사가 실패한 것인가? 그런데 엘리사는 침착해 보임. 이유는 금새 드러남. 염려하는 엘리사의 사환이 너무나 잘 본 대로 아람 사람들이 성읍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사실임. 그러나 엘리사 자신은 여호와의 군대에 둘러싸여 있었음. 아람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그들의 숫자가 훨씬 더 적음. 그들은 승리의 가능성에 대해 어두운 눈이 되고 자신들의 주변에 대해 어두운 눈(산베이림)이 되어, 자신들이 잡으러 온 선지자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음. 엘리사의 인도에 의지한 채 그들은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도되어 그곳에서 어두웠던 눈이 열려서 보고 자신들이 사로잡혔음을 깨닫게 됨. 여호람은 그들을 치려고 했음. 그러나 엘리사는 음식을 많이 베풀고 난 후에 그들을 돌려보내라고 함. 그 결과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5:1 이하에서 묘사된 불안한 평화를 초월한 평화가 찾아옴. 아람 사람들은 더이상 이스라엘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음. 그들은 자신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안전하다고 판단할 때 다시 올 것(6:24 이하).
** 여호람은 뭔가 상황이 좋게 돌아갈 때에는 선지자를 예의 바르게 대하려고 함. 그러나 상황이 나쁘게 돌아갈 때에는 그렇게 대하지 않음(왕하 6:24-33). 여호람은 우상숭배자로서 왕하 9:1 이하에서 엘리사가 주도할 최종 심판을 당할 운명임. 만일 엘리사가 개입해서 그를 돕는다면, 그것은 여호람에게 어떤 극적인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님. -- 상황이 좋게 돌아간다고 해서,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본인의 영적인 상태가 건강하다거나 바르다고 판단해서는 안 됨. //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지금은 아직 끝이 아니라고 정하셨기 때문”
** 6:17 “산”이라는 단어는 맥락으로 볼 때 성읍이 건설된 구릉을 의미함. 성읍 바깥에 있는 언덕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 그러나 NIV에서는 hills라는 복수 명사가 사용되었음. 아람 사람들은 성읍을 에워싸고 있음(15절, 사바브). 그러나 하늘의 군대는 엘리사를 에워싸고 있음(17절, 스비보트)
** 6:18 “눈을 어둡게”라는 의미는 실명된 것이 아니라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태, 눈이 부셔서 멍해진 상태를 의미할 것. 아람 사람들은 선지자의 제안과 조종을 따르지만, 그를 따라 사마리아로 갈 수 있을만큼 볼 정도는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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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C pp.399
6:11-14 아람 왕은 자신의 궁정에 반역자가 있다는 논리적인 결론올 도출함. 그의 군대의 누군가가 그의 동태를 누설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함.
그러나 그의 신하들이 엘리사가 범인이라고 설명하자 그는 선지자가 살고 있는 도단으로 군사를 파견함. 이 원정은 군주가 예언을 침묵시키려는 또 하나의 헛된 시도를 나타냄. 엘리야는 그러한 위협을 견뎌 냈으며 (왕상 17:1-24; 18:1-15; 19:1-18;, 왕하 1:1-15) 이제 엘리사도 그렇게 해야 함. 하나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사자를 보호해 주실 것 인가?
6:15-23 옐리사와 그의 종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은 성읍이 아람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알게 됨. 여느 “정상적인” 사람처럼 종도 두려워 하지만 선지자는 그에게 침착하라고 명령함. 왜일까? 그는 아람 군대보다 그들의 군대가 더 많고 강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함. 엘리사는 자신의 종이 이 “군인들”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 후 이 종은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을 정말로 보게 됨. 이때 주님은 엘리야가 죽음에서 보호받고 하늘로 끌려 올라갈 때와 동일한 도구로 엘리사를 죽음에서 보호하심.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나서 쪼그라들었던 종의 마음이 진정되었음이 분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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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 주해 pp.314
이 단락에 소개된 기적은 군사적인 영역과 관계됨. 하나님은 자신의 선지자를 통해 자기 백성에게 놀라운 승리를 주심.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강한 용사이신 것이 확인되며 선지자가 왜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으로 불렸는지가 새롭게 밝혀짐.
본문에 따르면 여호람 왕 당시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자주 국지적인 분쟁이 있었음. 아람 왕은 여러 차례 이스라엘 지역에 진을 치고자 하였음(8-10절).
하지만 그 일은 번번히 실패로 끝났음. 왜냐하면 언제나 엘리사가 아람 왕의 의도를 먼저 알고 여호람에게 해당 지역을 방비하도록 하였기 때문. 엘리사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하나님 때문이었음. 하나님께서 매번 엘리사에게 아람왕의 계획을 알려주신 것. 아람 왕은 이 사실을 몰랐음. 그는 자신의 부하들 가운데 이스라엘과 내통하는 사람이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곧 엘리사가 가진 신비한 능력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
그런데 아람 왕의 무지는 다음 순간 더 크게 드러남. 엘리사의 능력을 알고서 도 그를 잡으려는 계획이 무모하다는 사실은 왜 알지 못하였을까? 어리석게도 그는 엘리사를 사로잡기 위해 그가 있는 곳(도단)으로 군대를 보냈음. 그는 선 지자 엘리사가 이상한 방법으로 군사정보를 알아내는 신통한 스파이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 같음.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음. 엘리사는 그 이상의 사람이었음. 필요한 경우 그는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여 적군틀을 물리칠 수도 있었음. 엘리사와 함께 하는 분이 하늘의 만군을 지휘하는 여호와 하나님이셨기 때문임. 아람 왕은 이런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이었음.
그런데 영적인 일에 무지하기는 엘리사의 사환도 마찬가지였음. 그는 도단을 에 워싼 아람 군대를 보고 질겁하며 말하였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15절하). 엘리사의 대답은 그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이었음; “두려워하지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16절). “우리와 함께 한 자” 라니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가? 엘리사가 사환의 눈이 열리기를 기도하자 그제서야 사환은 엘리사가 보는 것 을 볼 수 있었음. 그것은 불 말과 불 병거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르고 있는 광경이었음. 131) 이 환상은 보이는 세상 이면에 있는 영적 실재에 대한 것임.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사로잡으려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군대가 그를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음. 어디 엘리사뿐이겠는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동일한 보호를 받고 있음(신 20:1-4; 사 43:1-3; 마 28:20).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믿음의 눈임(엡 1:18-19). 엘리사를 둘러싼 불말과 불병거는 그저 장식품이 아니었음. 카일의 설명과 같이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상징들임. 엘리사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하고 기도하자 하나님은 그들의 눈이 어두워지게 하셨음(18절). 그렇다고 그들이 맹인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그들의 인지력에 큰 장애가 생겨났다고 보아야 함. 그들은 엘리사를 알아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엘리사의 인도를 따라 사마리아까지 갔음. 결국 엘리사를 사로잡으려던 그들의 계획은 좌절되 었고, 오히려 그들 자신들이 포로로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음. 이 일은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려는 모든 악의 세력이 당할 운명을 보여준다고 해도 틀리지 않음(삼하 3:29; 에 7:9-10).
한편, 엘리사를 따라 사마리아로 온 아람 군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엘리사의 기도로 다시 인지력에 정상을 되찾았음. 본문에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놀라고 당황하였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음. 이스라엘 왕(여호람)은 엘리사에게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21절하) 하고 물었다. “내 아버지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여호람은 엘리사의 권위에 압도되어 있었음. 그가 정말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게 되었던 것일까? 두고 보아야 할 일. 두 차례 반복되는 말 “내가 치리이까”에서 포로들을 죽이고자 안달하는 여호람의 무자비한 마음을 읽을 수 있음. 엘리사는 그를 만류하고 오히려 포로들을 잘 대접하여 돌려보내도록 하였음. 그 결과 아람 군대는 이전과 같이 이스라엘 지역 내에 진을 치려는 시도(국지적인 습격)를 하지 않게 되었음.
그렇다면 엘리사가 아람 군사들을 잘 대접하여 돌려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다음은 카일의 설명임 “시리아인들을 죽이면 기적의 목적이 수포가 되고 맘. 왜냐하면 기적은 시리아인들에게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참 하나님의 선지자와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 하도록 가르치도록 의도된 것이기 때문”. 브루거 만의 설명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감. 그에 따르면 이 에피소드는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이 취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함. 이 설명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라고 말한 바울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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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C pp.179
이 사건은 여호와가 자신의 백성의 보호자라는 것을 보여줌.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임. 이스라엘의 승리가 병사들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지자에 의한 것이었던 것은 의심할 나위없이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아람으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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