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박해 선교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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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행 7:54-8:8
제목: 교회의 박해 선교의 확장
사도행전 7장 54절에서 60절까지의 말씀은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으며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복음을 훼손시키려 하는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죠. 그 결과 스데반은 권모술수에 의해 공회에 소환됩니다. 이때에도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도 같았으며, 무려 53절에 달하는 굉장히 긴 내용을 공회에서 증언합니다. 만약 스데반이 이때 복음을 증언하지 않았다면, 순교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타협하지 않고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합니다. 그 결과 스데반은 순교하고 맙니다. 사실 드라마나 소설을 써도 이렇게 쓰진 않을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6장 8절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7장 60절에서 퇴장한다는 것이 너무나 짧고 아쉽지 않습니까? 그런데 스데반 집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때에 순교라는 부르심을 받고 맙니다. 이러한 스데반 집사의 순교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첫 번째 순교이며, 그의 순교에는 적지 않은 충격이 뒤따르는데요. 스데반의 순교 그 이후에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상황은 경건한 사람들이 애곡하는 상황입니다. 사도행전 8장 2절 말씀 보세요.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스데반 집사의 죽음, 그의 순교에 대해 경건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를 장사하고 그를 위해 크게 웁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지도자격인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했으니 당연히 슬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구전된 율법을 문서화한 미쉬나라는 책에 따르면, 처형당한 사람의 애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오늘날 우리가 토라, 율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세오경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받아들인 율법은 모세오경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랍비들이 율법의 내용을 해석하고 좀더 디테일한 카테고리로 분류해 놓은 것을 진짜 율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는 책을 미쉬나라고 부르는데요. 이 책 내용에, 율법이라고 생각되는 내용에, 처형 당한 사람의 애도는 금지한다. 라는 조항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8장 2절 말씀에,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위해 애곡하는 행위는 율법을 어기는 행위로 여겨지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든 관계없이,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이 무엇이라 하든 상관없이,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슬퍼하고 크게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한 자들의 용기있는 행동은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스데반이 공회에서 담대하게 증언하는 모습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우리도 저렇게 순교 당하면 어쩌나 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스데반이 당한 박해가 정당한 것이 아니었음을 애곡함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이어서 스데반의 순교 이후의 상황 두번째는, 사울의 박해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있을 때, 사울은 즉각적으로 움직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리새인인 사울의 입장에서 스데반이 전하는 복음은 거짓된 것이었으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1장 22절과 23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22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말씀에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까?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율법에 능통한 사울의 입장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라는 사람을 미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의 세치 혓바닥으로 인위적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죠.
따라서 사울은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스데반의 죽음으로 만족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다음 단계에 착수합니다. 사도행전 8장 1절 하반절 말씀 보세요.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이어서 3절 말씀 보세요.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이 두 구절은 예루살렘 교회에 발생한 엄청난 변화를 보여줍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도행전 8장 1절과 3절은, 스데반의 죽음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구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절 하반절 말씀 다시 보세요.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울이 실행한 박해는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얻은 공권력으로 실행한 박해였습니다. 공식적인 박해였던 것이죠. 이 박해는 사도행전 4장과 5장에 기록되어있는 사도들이 당한 박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면서도 잔혹한 박해였습니다. 이 박해는 스데반이 순교한 날부터 즉각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일정 기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끔찍한 박해였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박해는 예루살렘 교회를 철저하게 와해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하면, 사울의 박해는 보여주기 식으로 겁주는 박해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된 박해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 3절 말씀 보세요.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여기서 “잔멸하다”라는 표현은 야생 짐승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완전히 철저하게 파괴하는 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어떻게 잔멸했다고 합니까? 각각의 집에 들어가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잡아가서 감옥에 가둡니다. 이때 사울이 사용한 방식, 각각의 집에 쳐들어가는 방식은 굉장히 효과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1세기 예루살렘 교회들은 오늘날 우리나라에 세워져 있는 수많은 교회들과 같이 단독 건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가정집을 교회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정집은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회심자와 안전하게 만날 수 있는 은신처로 사용되었으며, 전도의 중심지로 여겨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서 압수수색영장을 가지고 각각의 집에 쳐들어가서 체포한 것은 예루살렘 교회에 치명타를 날리는 행위와도 같았습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는 강제로 흩어짐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스데반 집사의 첫번째 순교 이후의 두 가지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경건한 자들이 애곡하는 상황과 예루살렘 교회 전체에 이루어진 광범위하고도 철저한 박해로 인해 흩어지게 된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사건의 흐름은 복음의 능력이 퇴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고, 방관하고 계신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와 예루살렘 교회 전역에 이루어진 치명적인 박해는 열방을 향한 복음 전파의 시발점으로 사용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러한 흐름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원어의 뉘앙스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단순하게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만, 원어로 3절과 4절 직역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완전하게 파괴하고 있었다. 각각의 집에 들어가서 남자들과 여자들을 끌어내서 감옥에 넘겨주고 있었다.” 원어성경에서는 사울의 행위를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중단되거나 종결된 것으로 표현하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는 동작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때 사도행전 8장 4절에서 갑자기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등장합니다. 사울이 산헤드린 공회를 등에 업은 채로, 예루살렘의 모든 교회를 잔혹하게 파괴하는 모습 가운데 그 어떠한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저자인 누가는 “그러므로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잔혹한 박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박해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이 끊임없이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박해라는 것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 좀 그만 전파하라고 괴롭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박해의 강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무엇을 기대하게 됩니까? 아, 이정도면 더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겠지.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아, 예루살렘 교회? 가정집 교회? 그딴거 싹다 박살내버렸으니까. 이제 더이상 집에서 모이는 사람 없겠지. 이제는 예수쟁이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예루살렘 교회에 시행된 대박해 때문에 흩어진 자들로 인해 더욱 힘있게 전파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역설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는데, 스데반이 순교하기 전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대박해가 일어나자, 계획에도 없던 대이동이 일어납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됩니다. 사울이라는 악독한 바리새인 녀석 때문에 더이상 예루살렘에 거주할 수 없으니, 어디든 가서 살아야 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단순하게 주소지만 변경된 것이 아니라, 흩어진 곳, 바로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사도행전 8장 5절 이하의 말씀에서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땅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내용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이 진리의 말씀은 참으로 신통하면서도 오묘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에는 이 세상의 이치와 계산이 들어맞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곱 집사를 세웠는데, 세운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사망합니다. 그리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예루살렘 전역에 광범위한 박해가 시작됩니다. 대충 그냥 믿는다고 하는 사람 몇 사람 데려다가 보여주기 식으로 고문하고 끝내는 정도가 아니라 뿌리채 뽑아버리는 엄청난 박해가 일어난 것이죠. 그러니 이러한 상황만 놓고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존재처럼 보입니까? 예루살렘 사회가 원하지 않는 어떤 사회악이자 패잔병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존재들이 어떤 역할을 감당합니까?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삶으로 증명하는 복음 전파자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역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우리는 넉넉하고 평안한 삶에 안주하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사명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복음 전파자로서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시고,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각박한 현실과 어려움에 부딪쳐 낙심하지 않고, 영적인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1세기 예루살렘 교회에 들이닥친 대박해와 흩어짐의 결과를 묵상하며, 오늘날 우리가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물질과 환경이 전적인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청지기의 삶을 감당함과 동시에 복음 전파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담대함을 부어주시고,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가슴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하심으로 새벽기도회를 마친 뒤에 교회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개인의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시다가 귀가하시면 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서론 – 스데반의 죽음, 첫 순교, 그의 죽음의 가치와 결과
본론 – 스데반의 죽음 이후
1. 경건한 자들의 애곡 – 순교에 대한 반응
2. 사울의 박해 –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대박해
3, 흩어짐과 복음 전파
1) 흩어진 사람들
2) 빌립
(1) 빌립의 사역 –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
(2)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응
-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빌립이 하는 말을 따름.
(3) 결과 –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음
결론
마치 패배자처럼, 패잔병처럼 흩어진 그리스도인들, 흩어진 예루살렘의 교회들.
기반이 없는 곳, 적대감이 스며든 곳, 피하고 싶은 곳,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은 곳, 그런 곳에 복음이 전파되고, 기쁨이 넘치게 됨. 하나님의 섭리와 복음의 능력. 이를 온전히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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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NT
8:1-2
율법은 처형된 죄수의 시체를 매장하는 의무를 규정했지만, 그 죽은 자들에 대한 공적인 애도는 권장하지 않았음. 그러나 스데반은 그의 정죄와 처형을 분명히 반대했던 경건한 사람들로부터 최후의 찬사를 받았음.
스데반의 죽음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즉각적인 탄압의 신호탄이었음. 공격의 주요 목표가 된 사람들은 교회 내의 헬라파 유대인들(스데반이 이 무리의 지도자였음)이었으며, 강제로 예루살렘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 역시 그들이었음. (참 11:19-20) 사실상 그들 중 일부는 스데반의 증언을 예루살렘이 거부함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 그러므로 그 도시를 버리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었을 것. 예루살렘 교회는 이때부터 AD 135년까지 대부분이 히브리파 유대인들로 구성되었을 것. AD 135년 이후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완전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공동체가 되었음.
열두 사도는 예루살렘에 남았음. 그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
8:3
교회 탄압을 앞장서서 주도한 인물은 사울(바울)이었음. 그는 이제 더욱 주도적으로 활동함. 산헤드린 주요 제사장 지도자들로부터 필요한 권세를 부여받아 교회 성도들을 집에서 체포해서 감옥에 보냄으로 교회를 잔멸했음. “잔멸하다”라는 단어는 특별히 야생 짐승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는 행위를 지칭함.
사울은 자기 민족의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전통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그 새로운 신앙, 그리스도 신앙이 전통을 위협한다고 보았음. 과감한 조치가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했음.
8:4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은 흩어지게 되었음. 약 1:1 흩어져있는 열두 지파에게. 벧전 1:1 흩어진 나그네.
8:5 내러티브의 관심은 스데반과 같은 헬라파 유대인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빌립에게 집중되어 있음. 빌립은 공동 기금에서 매일 시행하는 구제 사역을 담당하도록 지명된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음. 빌립은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자 북쪽에 있는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음.
유대와 사마리아 주민들 사이에는 정착의 기간에 유대가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로부터 분리되어 나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분열의 역사가 존재했음. 이 분열은 솔로몬의 죽음(BC 930년) 이후 히브리 군주국이 분열하면서 명확하게 드러났음. 포로기 이후 두 지역 사이를 화해시키려고 시도한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분열은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사업에 참여를 거부당하고 그들의 거룩한 산 그리심 산에 경쟁적인 성전을 세움으로써 더욱 커졌음. 그리심 산의 성전은 하스모니아 통치자인 요한 히르카누스 1세(BC 134~ 104년)가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그곳을 자신의 왕국의 일부로 추가하면서 파괴시켰음. 로마인들이 BC 63년에 팔레스타인을 정복했을 때,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의 지배에서 해방되었지만, 적대적인 관계는 지속되었음.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빌립으로서는 상당히 중대한 결정을 내린 것이었음.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신 18:15-19 모세와 같은 선지자와 관련해서 그들이 예상했던 장차 오실 구원자에 대한 소망을 유대인들과 공유했음.
빌립이 복음을 전한 곳이 사마리아 성 안이었는지는 불확실함. 사마리아라고 불린 고대 성읍은 헤롯 대왕에 의해 재건되었고, 로마 황제를 기념하여 세바스테라고 다시 이름이 지어졌지만, 그 도시는 헬라화 된 도시였음.
요한복음에 기록되어있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사마리아 사역은 빌립의 사역을 위한 토대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음.
8:6-8 빌립의 사역은 축귀-치유 사역이었음.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빌립의 메시지를 믿었으며, 그 결과 사마리아 성읍에는 기쁨이 충만했음.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빌립의 사역에서도 긍휼과 권능의 사역이 이루어졌으며, 빌립이 선포한 메시지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가시적인 표적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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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NT
빌립의 사역은 예루살렘의 헬라 계열 유대인의 교회에 가해진 박해의 결과로 시작됨. 박해는 흩어짐으로, 흩어짐은 복음 전파로 이어짐. 박해에 신실하게 대응한 스데반의 죽음은 교회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음.
8:1b 대박해가 교회를 향해 일어남. 박해(디오그모스)는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사용됨. 교회는 유대로, 사마리아로, 또 그 너머로 흩어지며, 다시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으로 흩어짐., 교회가 다 흩어진다는 언급(모든 것들이 흩어졌다)은 과장법이겠지만, 이런 표현은 교회의 상당 부분이 박해받을 때 전체가 공격 받고 영향 받았음을 보여줌. 굉장히 큰 박해였음을 나타내는 것.
8:2
명시되지 않은 수의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의 장사를 지내고 그의 죽음에 크게 애통해함. 대개 이런 비탄은 자기 가슴을 치고 눈물 흘리는 것을 수반했음. 미쉬나는 처형 당한 사람의 애도를 금지함. 그러나 경건한 자들은 애통해 하였음. 이들의 행동은 대담했으며, 스데반의 행위가 옳았다고 인식했음을 보여줌. 이런 애도는 보통 30일에서 70일 정도 계속되었음.
8:3
이 사이에 사울은 계속해서 교회를 심각하게 박해하기 시작함. 사울은 스데반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이 죽음에 동의하였고, 이제는 교회를 향해 행동을 취함. 사울은 교회를 말살하려고 노력했으며, 교회에 피해입히는 행동을 8:3에서 개시하고 있음. 사울의 색출이 집집마다 이루어졌다는 것은 사울의 색출 활동이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보여줌.
8:4 흩어진 사람들은 교회임. 흩어짐의 결과가 절망적이지 않은 것은 흩어진 것으로 인해 말씀이 더욱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이며, 이는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로 자세히 기술됨. 역설적으로 교회가 예수님에게 받은 사명을 수행하도록 도운 것은 박해임. 박해는 그 의도와는 정 반대의 효과를 내었음. 복음의 확산을 막기 위해 시작된 박해였지만, 오히려 박해는 복음 전파에 기여하였음. 박해받은 교회는 흩어져서 복음의 말씀을 전함.
8:5-40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음. 사마리아 사람들은 신실하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당했으며 여러 혈통이 섞였다는 이유로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흠이 있는 잡종 취급을 받았음.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 먹는 것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었으며, 사마리아 사람의 딸들은 부정한 여성으로 여겨졌음.
8:6-8
무리가 빌립에게 주의를 기울였음(프로세코는 이 구절에 두번 더 나옴).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 6회 나오는데 절반이 이 단락에서 사용됨. 이 단어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 무리가 관심을 기울이는데 그 이유는 빌립이 전하는 말씀과 그가 행한 표적 때문이었음. 해설 내용은 표적과 치유가 이들을 메시지로 이끌었다는 것. 누가에게 기적은 사람들에게 메시
지를 고려하는 계기를 만들어 줌. 기적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님. 기적은 도구일 뿐.
하나님께서 빌립을 통해 역사하게 하셔서 사마리아 성읍에 기쁨이 가득하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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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더반
8:1 핍박
1. 박해라는 표현은 누군가를 괴롭히고 압박하기 위한 계획이나 과정을 의미함.
2. 이 박해는 예루살렘 교회 전체에 미치는 심한 혹은 큰 박해였음. 행 4-5장의 문맥에 따르면 이는 사도들을 그 대상으로 했던 체포와 심문을 넘어서는 더 심한 박해임.
3. 이 박해는 스데반이 처형당하는 날부터 시작되었으며 일정 기간 동안 지속되었음.
4.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행동을 억압하는 계획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신자의 회중에까지 미쳤음. 누가는 모든 신자가 다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설명함.
5. 결국 예루살렘의 신자들은 흩어지게 되었음. 회중 각 사람이 예루살렘 바깥 지역 이곳 저곳으로 흩어진 것.
6. 예루살렘을 빠져나온 신자들은 유대와 사마리아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피난처를 찾음. 누가는 예루살렘 회중 가운데 가난한 신자, 특별히 디아스포라 배경의 과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언급하지 않음.
8:3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회중을 계속해서 잔멸해 나아갔음. 그의 행동의 지속적 성격을 강조하는 두 개의 현재형 분사는 사울이 어떻게 신자들을 잔멸했는지 설명함. 그는 신자들이 모임을 하던 신자 개인 집을 찾아가 거기에 모여있는 신자들을 찾아냈음. 그리고 그는 남녀를 불문하고 강제로 끌어갔음. “옥에 넘기니라”라고 결론 내리는 구절은 이 일이 지속해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미완료 과거형이며 심문과 평결을 준비하는 과정을 의미하기도 함.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으로서의 사울의 행동은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함.
첫째, 예루살렘의 집에 모이던 교회들은 자기들만 모여서 예배하던 모임 장소일 뿐 아니라 신자들이 복음을 적극적으로 선포하며 새로운 회심자를 끌어들이는 가르침과 전도의 중심지이기도 했음.
둘째, 스데반 처형 이후 생긴 핍박은 조직적이었음. 산헤드린과 연관이 있는 유대인들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서 신자들을 핍박했음. 종교적 신념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거나 감옥에 넣거나 처형하거나 도시를 강제로 떠나게 함으로써, 그들을 완전히 제거할 목적으로 신자들이 모이는 곳을 찾아가 집에 있는 신자들을 체포한 것.
사울은 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했는가? 사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 선포가 끔찍한 일이며 신성모독적인 것으로 여겼을 것. 사울은 신 21:22-23에 따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인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음.
스데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영광받으신 주님이요 구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죽임당한 교회의 첫번째 증인임. 예수님의 참된 증인은 성령 충만한 가운데 기꺼이 접대하고(6:1-6)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에 적극적이며(6:8-10), 반대에 위축당하지 않고(6:11-14), 복음의 중요성과 의미를 잘 설명할 수 있으며(7:2-56), 확신을 타협하지 않고(7:51-53), 믿음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으며, 원수를 포함해서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사랑하는(7:60) 사람임.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스데반의 용기가 아닌 그의 삶 가운데 함께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임(6:10; 7: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