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현실 직시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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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롬 7:21-25
제목 : 영적인 현실 직시와 감사
1987년 박윤선 목사님께서 성역 50주년 기념 논총을 증정 받으실 때, 한 가지 고백을 남기셨습니다. 그 고백은 바로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신구약 성경 66권 전체를 주석하시고, 평생을 주경 신학자의 삶을 살아내신 박윤선 목사님께서 본인을 가리켜 83년 묵은 죄인이라고 고백하신 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혹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은밀한 죄를 지으셨고, 그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박윤선 목사님께 어떤 영적인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셔야만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박윤선 목사님의 삶에 대해서 함부로 왈가왈부할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박윤선 목사님께서 누구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사랑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박윤선 목사님의 고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또한 박윤선 목사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고백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러한 고백을 진심으로 올려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 위해 우리는 사도 바울의 탄식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 말씀을 토대로 우리의 신앙생활과 우리 자신의 내면을 깊이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탄식의 말씀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해하려면, 로마서 7장의 결론부라고 불리는 21절에서 25절 말씀 전체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한 절씩 살펴보고 말씀을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1절 말씀 보세요. (in)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로마서 7장에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는 “법”이라는 단어가 수차례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out) 우리가 로마서 7장 말씀을 읽을 때 굉장히 거부감 들게 만드는 그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가 하면, 로마서 7장 1절에서 두 번, 2절에서 한 번, 3절에서 한 번, 4절에서 한 번, 5절에서 한 번, 6절에서 한 번, 7절에서 세 번, 8절에서 한 번, 9절에서 한 번, 12절에서 한 번, 14절에서 한 번, 16절에서 한 번. 언제 이거 다 듣고 넘어가나 싶으셨죠? 그런데 심지어 더 골치 아픈 문제는 제가 방금 간략하게 소개해 드린 이 법이라는 단어, 열 다섯 차례나 등장한 노모스라는 단어가 항상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11절과 12절에서는 노모스와 똑같은 단어인 엔톨레라는 단어까지 등장합니다. 법이라고 했다가 율법이라고 했다가 계명이라고 했다가. 아주 그냥 눈으로만 읽어도 벌써 피곤해집니다. 그래서 이런 피로감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자연스럽게 스윽 넘어가면 됩니다. 7장 1절에서 23절까지 눈으로 읽고 이해가 잘 안되도 그냥 넘어가서 바로 24절 말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말씀 읽고 8장으로 넘어가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식으로 편리성만을 추구한다면, 사도 바울의 탄식의 의미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쉽게 넘어갈 생각하지 마시고, 다시 21절 말씀, 법법법하는 말씀으로 우리 성도님들을 모시고 가보겠습니다. 흥미로우시죠? 네. 21절 말씀 다시 보세요. (in)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out)
21절에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로마서 7장 1절에서 20절 말씀에 대한 결론을 내리겠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율법과 불신자의 관계, 율법과 신자와의 관계. 이 관계들을 통해 깨닫게 되는 사도 바울 개인의 경험에 대한 결론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려주는 접속사인데요. 결과적으로 사도 바울은 하나의 법칙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21절에 나오는 “법”이라는 단어는 앞서 열 다섯 번씩이나 등장한 노모스라는 단어입니다. 7장 12절에서는 율법이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만, 21절에서는 법이라고 번역되었죠. 이러한 번역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깨달은 것은 어떤 것입니까? 율법입니까? 아니면 어떤 일반적인 법칙을 깨달았다는 것입니까? 당연히 일반적인 법칙을 깨달았음을 암시하는 번역이겠죠. 사실 로마서 7장 전체 맥락에서의 노모스라는 단어는 대부분 모세 율법을 가리키기 때문에, 21절에서 갑자기 다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문맥상 21절의 노모스는 어떻게 봐도 모세 율법이라고 해석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21절에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다.”라는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내용이 모세 율법에 나옵니까? 그렇지 않죠. 우리가 아는 한 율법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혼동을 줄 만한 명령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무엇 해라. 혹은 무엇무엇 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명령들이 율법의 말씀인데, 이러한 명령들은 누가 봐도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삶에서 온전히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를 떠나서, 율법의 내용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자, 그래서 21절 말씀에서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내용은 율법이 아니기 때문에, 21절에서 사도 바울이 깨달았다는
법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원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깨달은 한 가지 일반적인 원칙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선한 것을 행하기를 원하는 사도 바울에게 악한 것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함께 있다”라는 말은 “어떤 목적이나 행동을 위해서 준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미를 적용해서 생각해 보면, 그냥 악한 어떤 것이 사도 바울 주위에 있다. 주위에 맴돈다. 이 정도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 무언가를 할 때마다, 말을 하든 행동을 하든 생각을 하든, 악한 것들이 항상 자기 자신 안에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한 것을 행하기를 소망하며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악한 것이 사도 바울 어딘가에 내재되어 있고, 그로 인해 영향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악”이라는 것은 아담이 타락할 때 세상에 들어온 죄를 의미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멘. 이어서 로마서 8장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아멘.
방금 읽은 두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존재가 전적으로 타락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각과 말과 행실에 있어서 선한 것을 행할 능력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구원에 있어서도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떨까요? 신자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 역시 죄의 부패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일에 있어서도 우리가 그 어떠한 공헌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조직신학적인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전적인 타락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21절 말씀을 이해할 때 전적인 타락에 관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도가 없이 21절 말씀을 읽으면 뭔가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21절 하반절 말씀을 보세요, (in)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데 어떻게 악이 함께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말이 안 되죠. 향기로운 냄새와 악취가 공존한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적 타락의 관점에서 이 말씀을 묵상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허물과 죄로 죽어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상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우리 몸처럼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동기는 언제나 순수하지 않으며,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칼빈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 죄의 1%도 알지 못합니다. 또한 루터에 따르면, 원죄는 우리 안에 있는 턱수염과도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면도를 해서 깨끗해 보이지만 내일이면 턱수염은 또다시 자라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상에서 살아가는 이상 우리의 턱수염은 계속해서 자라나기 때문에, 우리의 원죄 역시 근절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능력한 우리의 상태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21절 말씀은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와 도전이 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대한민국 에서 사법 처리만 되지 않으면 괜찮은 줄로 압니다. 본인이 범죄자들에 비해 훨씬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인 줄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죠. 이러한 영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in) 첫째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이제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죄인에게 의식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out) 이는 단순한 의식적인 변화가 아닌, 이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가를 규정하는 세계관과 가치관의 변화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완벽한 선을 행할 수 있고, 우리의 행위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고, 우리의 행위에 죄악이 담겨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엇을 행함이 마땅한지를 알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겠노라 결단하는 것부터가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또한 은혜로 여겨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선한 행위를 완벽하게 이행하고 있느냐로 그렇지 않느냐로 평가하는 것이 아닌, 우리 삶의 방향성에 대격변이 일어났다는 것부터가 죄인에게 있어서 크나큰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in) 둘째로,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죄악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한다는 점을 인지한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죄악을 완벽하게 통제한다거나, 죄의 존재를 우리 삶에서 완전히 근절시킬 수 없습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out) 어떻게 보면, 참으로 지독한 역설처럼 보이는 우리의 영적인 현실을 깨달아야 하는데요. 이 내용을 좀 더 살펴보기 위해서 22절과 23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in)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out)
이 두 구절은 우리 내면에서 발생하는 선과 악의 전쟁, 참된 법과 거짓된 법의 전쟁을 묘사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속사람이라는 말은 마음과 정신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인의 자아 인식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 말씀 보세요. (in)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이어서 에베소서 3장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out)
이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속사람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 날로 새로워지며 강건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와 동시에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영적인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7장 23절 말씀 다시 보세요. (in)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운다고 하는데, 여기서 “싸우다”라고 번역된 표현은 원어로 “전쟁하다 또는 교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친구끼리 말다툼하거나, 학창 시절에 주먹다짐하는 정도가 아닌, 수많은 인명피해를 발생시키는 끔찍한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죠. 또한 사로잡는다는 표현은 전쟁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종의 전리품처럼 잡혀가는 것이죠. 포로로 잡혀가서 어떤 치욕스러운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우리는 이 두 가지 표현을 통해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대단히 끔찍하고 잔인한 영적인 전쟁의 실존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전쟁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확인해야 하는 것은 전쟁의 당사자들인데요. 누가 승리했고 누가 패배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23절 말씀 다시 보세요. (in)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우리 내면에서 누가 전쟁하고 있습니까? 죄의 법이 마음의 법과 전쟁하고 있는 것이죠. (out) 그리고 그 전쟁에서 죄의 법이 승리하는데, 그 결과 우리를 죄의 법의 포로로 사로잡아 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악이 통치하는 포로 수용소에서 전쟁 포로로 잡혀있는 신세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우리의 심령이 죄악과 전투할 때, 우리의 힘으로 전투하면 항상 패배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의 지배 아래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6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아멘. (out) 이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노예였던 때를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은혜 아래에 있는 거룩한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랜트 오즈번이라는 신약학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모두는 죄의 교활하고도 거짓된 힘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강단에서, 성경공부 시간마다, 소그룹 모임에서 지속적으로 이런 것들을 배워야 한다. 성도는 목사와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문제들을 내어놓고 도움을 받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통해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죠. 이와 같이 고결한 정체성을 부여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되,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영적인 전쟁과 전쟁의 패배로 인해 죄의 포로로 사로잡혀가는 듯한 그 비극적인 참상을 스스로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로마서 7장 결론부에 해당하는 21절에서 25절 말씀에 “나”라는 존재는 사도 바울을 가리킴과 동시에 우리 자신의 경험이 되어야만 합니다. 부패하고 더러운 죄악에 패배하고, 심지어 포로로 끌려가는 수치를 당할 때, 우리는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겠습니까.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은 죄악의 포로로 끌려가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며, 절망스러운 탄식을 내뱉습니다. 24절의 “곤고한”이라는 표현은 비참하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가 볼품없이 나약하며 더할 수 없이 끔찍하다는 것이죠. 이러한 탄식은 자신의 전적인 무능력함을 목도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절망감을 나타내며,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매일 매일 느껴야만 하는 불편한 자의식의 일부가 되어야만 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매일 패배감에 젖어 영적인 우울증에 빠져 살아가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패배에서 비롯되는 비참함과 절망의 탄식은 모든 성도가 처한 영적인 현실을 대변하며, 각자의 삶의 자리가 어떠하든 관계없이 본인의 영적인 현실이 어떠한가를 똑바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영적인 현실 직시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를 전적인 은혜로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감사함을 느끼게 됩니다. 2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아멘.
사도 바울은 자신이 비참한 사람이라고 탄식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고백합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이제 두 가지의 적용점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익숙함과 성숙함의 차이를 구분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가야 겠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신앙생활하다 보면, 성도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 상태 중에 한 가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는 익숙함이요 또 다른 하나는 성숙함입니다. 교회에서 보내는 물리적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신앙생활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익숙해집니다. 이러한 익숙함을 영적인 성숙함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익숙함과 성숙함의 차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영적인 현실 직시와 감사함을 통해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존경하는 박윤선 목사님은 자신을 가리켜 83년 묵은 죄인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자신이 영적으로 너무나도 비참한 상태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럼에도 매일 매일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때, 아 하나님, 저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저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저는 죄악이 통치하는 포로 수용소에 갇혀있는 듯한 패배감을 날마다 느낍니다. 이런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러한 영적인 진단과 탄식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죄인이라는 고백을 드릴 수 없습니다. 말로만 죄인이라고 수천번 수만번 입버릇처럼 되뇌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신앙생활이 익숙하십니까? 익숙한 느낌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익숙함이 영적인 나태함과 안일함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주의하고, 영적으로 성숙해지기 위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기 위해, 내 안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영적인 전쟁들을 외면하지 말고, 우리의 영적인 현실을 직시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둘째로, 영적인 조울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 아무런 근거 없이 행복하고 감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건강하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더더군다나 무슨 일이 잘 풀려서, 자녀가 잘 돼서, 세상적인 일들로 인해 기뻐하기만 하는 것 역시 건강하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이와 반대로 우울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역시 건강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비참한 사람, 불쌍한 사람, 더럽고 형편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면서도 감사하다는 결론을 맺었습니다. 여기에서 우울감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상황은 너무나도 암울해 보이지만, 그 가운데 우울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결과는 감사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고찰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합신 교단과 화평교회가 지향하는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사상은 하나님 중심주의입니다. 청교도 신학자인 조엘 비키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개혁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만물을 향하여,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하여, 그리고 신자의 삶의 모든 국면에 대하여 포괄적이고도 주권적이며 부성적인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가장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의 주인 되심 하나만으로 진심으로 기뻐하며 감격스러운 매일 매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현실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날마다 패배감에 젖어서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전전긍긍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주인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바로 서 있다면, 감사한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없이 그저 행복하고 감사해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감정임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지금까지 영적인 조증을 앓고 계셨다면, 담대하게 말씀으로 극복해 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로마서 7장 21절에서 25절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경험은 개인의 경험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입니다. 사도 바울의 탄식은 우리의 탄식이 되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이 느낀 비참함과 패배감은 어제도 느꼈고 오늘도 생생하게 경험했으며 내일도 반복해서 체험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영적인 현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러한 영적인 현실 직시는 반드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두 가지의 측면을 기억하시면서 건강하고도 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하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매일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만, 어느새 우리는 죄악의 노예가 되어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고개를 들 수도 없는 비참하고도 비참한 상태임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비참함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바라보게 하시며,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성화가 완전해지는 그날까지, 우리의 탄식이 그치게 되는 그날까지, 죄악된 말과 생각과 행실로부터 단호히 돌아서도록 고군분투하며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익숙함에 젖어 성숙함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주님의 자녀들 있습니까. 영적인 비참함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거룩한 탄식과 감사함을 통해 성숙한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찬송가 263장 함께 찬송하시겠습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날마다 죄악에 패배하며 사로잡히는 비참한 영적인 현실을 직시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며 살아가는 모든 화평의 지체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