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로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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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행 28:21-31 (봉독 )
제목: 마침내 로마에서
사도행전 28장 1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단락을 장식합니다. 사도행전은 책 이름 그대로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세상의 위인전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애초에 사도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보내심 받은 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심 받은 자들이 어떤 행적을 남겼는가를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는지를 집중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1장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의 명령에 따르면 사도들은 어디에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까?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에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out) 이에 따라 사도행전은 1장 8절의 말씀을 따라 크게 세 가지의 구조로 나누어집니다. 1장에서 7장까지는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요. 8장에서는 사마리아, 9장에서 28장까지는 땅끝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말씀인 사도행전 28장 마지막 단락은 로마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 단락에는 세 가지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in) 첫 번째 특징은 사도행전 28장이 열린 결말로 종결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는데, 사도행전 28장은 제자들의 이야기가 아닌 사도 바울의 이야기만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한 뒤에 땅끝 어디로 가서 복음을 전파했는지 기록되지 않습니다. 열린 결말로 끝이 나는 것이죠.
(in) 이어서 두 번째 특징은, 복음을 들은 대상자들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8장 21절에서 28절에 보면, 유대인들의 반응이 나타나지만, 30절과 31절에서는 반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인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인지.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이러한 내용은 모두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것 역시 열린 결말에 어울리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in) 마지막 세 번째 특징, 복음의 정수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out)
이 세 가지의 특징을 염두에 두시고,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로마에 거주하는 높은 사회 계층의 유력한 유대인들과 바울의 대화가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높은 계층의 유대인들에게 본인의 결백함을 호소함과 동시에 유대인들과의 두번째 만남으로 연결해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23절 말씀 보세요. (in)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out)
여기서 강론했다는 표현은, 영어성경에서 “설명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는데요. 원어에서 이 단어는 “설득하려고 애쓰다.”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동사의 시제를 반영해서 읽으면,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해서 유대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은 열정을 가지고 의욕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들을 사람은 들어라. 복음을 받아들여서 살 사람은 살아라. 안 들으면 너만 지옥 가지 내가 지옥 가냐. 이런 식의 거만한 고자세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 다시 말해 히브리어로 기록되어있는 구약 성경을 가지고 메시아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최선을 다해 복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유대인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24절 말씀 보십시오. (in)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out) 믿은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의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복음을 전한 사람이 일반 그리스도인이 아닌 무려 사도 바울이 직접 복음을 전했음에도 믿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복음을 충분히 전할 만큼 전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으며, 상대방이 복음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관계없이 그 결과에 대해 우리가 책임질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을 수 있습니다. 아, 이런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렇게 했으면 조금 더 좋았을텐데. 이런 아쉬움은 얼마든지 남을 수 있겠습니다만,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조금 부족해서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8장 26절과 2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이 말씀에 따르면, 로마에 거주하는 높은 계층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요. 첫째는, 마음이 우둔해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우둔해졌다는 것은 헬라어에서 문자적으로 “살찌다, 무성해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에 빈자리가 없어서, 빈공간이 없어서 복음에 반응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죠. 이어서 이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들의 감각 기관이 말씀에 반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렇게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행전 28장 26절과 27절 말씀은 이사야서 6장 9절에서 10절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고, 하나님께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만드셨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고 싶은데 믿지 못하도록 강제하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불신자의 악함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유기하셨다는 측면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두 가지의 이유를 묵상해야만 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로, 마음이 우둔해져서, 마음이 살쪄서 믿지 못했습니다. 둘째, 마음이 살쪄서 들어야만 하는 것을 듣지 못하고, 봐야만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초대 받았는데, 초대장을 펼쳐보지도 않고 찢어버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세상의 온갖 것들로 마음이 살쪄있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하심과 동행하시는 은혜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음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동행 따위 필요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 인생에 하나님께서 들어가실 자리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를 거부한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로마에 거주하는 높은 계층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자들에 대해 영적으로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한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의 인생을 궁금해 합니다. 그들의 성공 비결을 배우고 싶어하는 것이죠. 물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인생을 분석해 보면, 타인에 비해 훨씬 더 치열하게 노력하고 효율적으로 시간을 안배하며 살아간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마음의 중심에, 삶의 목적에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자리를 없애버리고, 자기 마음을 살찌운 채로 살아가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로마에 거주하는 높은 계층의 유대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외적으로 흠잡을 것 하나 없이 훌륭해 보이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영적으로 자기 마음에 하나님의 자리를 없애버리고, 다른 것으로 살찌운 것을 만족하며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들의 영적인 상태를 파악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진실된 노력입니다. 사도행전은 결과물로 과정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앞서 사도행전의 특징에 대해 말씀드릴 때, 열린 결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사도행전 28장 마지막 단락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두 차례 복음 전한 내용을 기록합니다. 하나는 방금 살펴본 내용, 로마에 거주하는 높은 계층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내용이고요. 다른 하나는 30절과 31절 말씀입니다. 30절과 3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30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out)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8장의 시점에 오기까지, 유대인들, 이방인들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거부와 핍박을 당했습니다. 이 정도의 경험치를 가지고 있다면, 상대방의 눈만 봐도 감이 올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마음이 있다 없다. 이 정도는 충분히 느껴질 것입니다. 마치 강아지들이 개장수를 알아보는 것처럼, 느낌적인 느낌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사도 바울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본인의 감각이 상대방을 어떻게 파악하고 느끼는지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합니다. 상대방이 누구든지 관계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칩니다.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는 차후 문제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 전파에 대한 열매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행전의 열린 결말을 장식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30절과 31절은 열린 결말에서의 사도 바울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사도 바울의 열매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이 과정 가운데 분명히 열매를 맺었을텐데, 그럼에도 열매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적용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파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 과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높은 계층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차별을 두지 않고 동일하게 열정적으로 담대하게, 거침없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딱 봐도 얘는 틀려먹었어. 고생 좀 해야돼. 아직 멀었어. 하나님께 좀 얻어맞고 와야 돼. 이런 생각을 함부로 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이 사람이 복음을 거부하더라도, 지금 내가 이 사람에게 전해야만 하는 내용은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전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복음 증거자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하겠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알아서 역사하시겠지. 이런 안일한 마음으로 우리의 의무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귀중하고 복된 인생을 영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부디 복음 전파자의 아름다운 인생으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시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관계없이 담대하게 거침없이 복음을 전파한 사도 바울의 모습을 바라보며,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증거하는 삶 살아가기로 다시금 결단케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 세상에 범람하는 수많은 세상적인 가치관 가운데에서 믿음을 지켜주시고, 믿음이 흔들릴까 하여 전전긍긍하는 위태로운 그리스도인이 아닌, 어떻게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유익하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할까를 고민하며 삶으로 실천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이어서 유선복 강도사님께서 기도회 인도해 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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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더반 pp.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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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NT pp.945
행 28:17-31 개론
이 마지막 단락은 바울이 두 차례 유대인 방문자들을 맞이하고(17-22, 23-28), 또 다른 사람들을 맞아 이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기록함(30-31). 어느 유대인 무리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24-28절, 단락 끝에서 바울은 모두에게 주 예수를 선포함. 유대인이 나오는 각 장면에서 바울이 말하고(17-20, 23절), 이후 유대인의 반응이 나옴(21-22, 24-25a절).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 분위기는 승리의 분위기로 종결되지만(30-31절), 이사야 6장 9-10절에서 온 마지막 구약 인용처럼 유대인의 호응이 없는 것에 대한 유감의 분위기도 있음.
이 장면은 누가-행전의 많은 요소를 개괄함. 하나님은 로마로 오는 길을 인도하셨음(행 1:8; 19:21; 23:11; 25:10-12; 27:24). 예수 안에서 성경 말씀을 따라 성취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선포의 핵심임.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들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주제를 메아리치게 함. 바울의 마음가짐은 롬 1장 16절과 9-11장에서 그가 더 크게 다루는 것에 부합함.
이 기사는 사도행전을 마무리하는 끝이 됨. 어떤 학자들은 바울의 재판이 60년대 초반에 이르기 전에 누가가 이 책을 기록했다고 주장함. 그러나 복음서의 개연성 있는 기원과 시기를 고려할 때 부정적으로 보임. 간단히 말해 누가의 이야기는 복음이 로마에 도달하며 땅의 끝으로 복음의 여행이 시작되고 계속된다는 것.
28:23-24
바울은 하루 종일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에 대해 말함. 바울의 주제 중 하나는 예수님을 통해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임. 이 주제가 사도행전 다른 곳에서는 드물게 나오지만(1:3; 8:12; 14:22; 19:8) 이 개념은 사도행전을 시작하고 끝냄. 문학적 인클루지오를 이룸. 바울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를 이용함. 이 주제는 눅 16:16을 상기시킴. 하나님 나라 약속의 중심에 예수님과 히브리 성경 전체의 약속이 있음.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 약속이 연관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노력함. (엑세티데토 의욕을 나타내는 미완료. 그는 이들을 설득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바울은 이들에게 증명하고 있다(디아마르튀로메노스). 어떤 사람은 설득되지만, 상당히 많은 이들이 믿기를 거부한 것이 분명하다. 바울의 반응은 거부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는 것이기 때문.
긍정적으로 반응한 소수는 하나님께서 항상 남은 자를 두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킴. 24절에 나오는 “설득되었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사도행전 다른 곳에서 긍정적으로 사용됨(13:43; 17:4; 19:8-9).
28:25-28
유대인들은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가운데 떠남. 바울은 이사야 6:9-10 말씀을 인용하여 한 마디 덧붙임. 성령은 원래 이 말씀을 “너희 조상들”이라 부르는 이전 세대에게 하였음(행 3:25; 7:51-52; 13:32-33; 26:6). 이사야를 통해 경고받은 이들은 “너희” 조상이었음. 그러나 이제 이 세대는 조상들의 과오를 반복할 위험에 처했음.
사도행전은 이 구절을 준엄한 예언이 아닌, 이미 일어난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제시함.
이스라엘의 마음, 정신, 눈은 하나님의 선지자에게서 오는 하나님에 대한 선포에 닫혀있음. 이스라엘의 문제는 무딘 마음. 27절에 나오는 동사 에파퀸데는 문자적으로 “살쪘다” 또는 “무성해졌다”를 뜻하며, 마음에 빈 곳이 없어 반응이 없는 것을 의미함. 아무것도 마음을 뚫고 마음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음. 또한 이들의 귀는 멈칫함. 듣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 바레오스(무거운)는 신약에서 단 두번 사용됨. 귀는 지치고 너무 짓눌려 기능할 수 없는 것으로 그려짐. 바울은 감긴 눈도 언급함. 사람의 어떤 감각 기관도 반응하지 않음. 이 백성의 우둔함으로 이들은 하나님에게 반응하고 치유를 위해 돌아가지 못함.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거부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