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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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롬 7:1-6
제목 :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
요즘 한국교회의 주된 관심은 다음 세대에 있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높은 관심도가 무색하게 교회를 떠나는 다음 세대 영혼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육 부서 출석 인원을 유지하면 다행이라고 할 만큼 교회마다 상황은 심각한데요. 세상과 교회를 섬기는 리서치 연구소에서 조사한 설문 내용에 따르면, (1번) 천 명의 청년들 가운데 약 49%가 본인이 다니는 교회를 계속해서 다니겠다고 응답했습니다. 설문 대상자 절반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죠. 반대로 31%는 교회를 옮길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교회를 떠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12%는 이미 교회를 떠났다고 응답했고요. 마지막 8%는 아예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부모님 등살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신앙생활하는 케이스라고 볼 수 있죠. (out)
이 설문조사가 대략 천 명밖에 되지 않는 인원을 대상으로 조사했다는 점에서 신뢰도가 높지 않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이 설문조사가 한국교회 다음 세대 전체의 현황을 대변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다음 세대 영혼들의 믿음이 건강하다면, 과연 이 정도까지의 비율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10명 중의 5명만 교회 다니겠다고 응답하고, 그중의 3명은 교회 옮길 마음이 있다고 하고, 1명은 교회를 떠났다고 하고, 또 1명은 믿음을 포기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다음 세대의 믿음이 건강하다면 이런 비율이 과연 나올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문제를 직면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숫적인 부흥은 고사하고, 떠나는 영혼들을 붙잡기에 급급한 실정이 된 것이죠. 이렇게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린 지 너무나도 오래되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문제를 다룰 때마다 항상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의 표면적인 문제들만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구성하는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찰해야만 합니다. 이 시간 로마서 7장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깊이 있게 살펴보면서,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이며, 그 믿음이 우리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는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또 그렇게 살아가기로 함께 결단하는 시간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하게 살펴보기 전에, 본문의 신학적인 배경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로마서 7장은 로마서 전체 내용 가운데에서 논란이 되는 구절이 가장 많은 장입니다. 데릭 브라운이라는 학자는 로마서 7장이 성경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난해한 장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본문 말씀을 가볍게 읽어보면 도대체 뭐가 어렵다는 것인지, 그냥 술술 읽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말씀을 깊이 묵상하려고 하면 할수록 묵상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잠시 후에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만,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로마서 7장 1절에서 3절까지 결혼에 대한 비유가 등장하고요. 4절부터 6절까지는 결혼 비유에 대한 적용이 등장합니다. 구조는 굉장히 단순하죠. 하지만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하면, 비유의 내용과 적용에 있어서, 비유가 말하는 바와 적용이 말하는 바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신약신학자들에게는 신학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여겨집니다. 해당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7장 1절 말씀 보세요. (in)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여기서 법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노모스라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만,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또는 일반적인 법을 의미하는데요. 그렇다면 7장 1절에서의 법은 어떤 법을 의미할까요. 여기서부터 문제가 되는데요. 앞서 설명해 드린 대로 이 법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의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모세 율법일 수 있고요. 두 번째는 로마법일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중에 어떤 법을 의미하는지는 2절 말씀을 살펴봐야 합니다. 2절 말씀 보세요. (in)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out)
오늘날 이런 말씀은 전혀 통용되지 않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OECD 국가 중에 이혼율이 9위나 되기 때문에, 결혼하면 매인다? 이런 개념은 오늘날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은 대한민국 사회가 핵가족화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과거에 볼 수 없던 결혼이나 이혼 개념이 새롭게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 시대, 주후 1세기 로마법에 따르면 남편과 아내 모두 이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내가 남편에게 강제적으로 매여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이죠. 하지만 유대교의 배경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에서의 아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과 이혼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신명기 24장 1절과 2절 말씀 보세요. (in) “1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out)
구약성경의 근거와 유대교의 문화적 배경에서 아내가 이혼할 수 있는 경우는 남편에게 이혼증서를 받아서 버림받거나, 남편이 사망할 경우에만 이혼이 성립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로마서 7장 1절의 법은 로마법이라고 볼 수는 없겠죠. 로마법에 따르면 남편이든 아내든 누구나 이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권리가 주어져 있는데, 로마서 7장 2절 말씀대로, 남편이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매인 바 된다. 이렇게 비유를 들 수 없겠죠.
따라서 우리는 로마서 7장 1절의 법을 모세 율법으로 보고,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자 하는 결혼 비유의 내용을 이해할 때, 구약성경의 배경 또는 유대인들의 풍습을 유념하면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자, 그렇다면 본문 말씀에서 결혼 비유의 내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로마서 7장 2절과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이 내용을 간단한 표로 보여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두 가지의 상황이 있는데요. (2번) 첫 번째 상황, 남편이 생존한 상황에서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경우입니다. 부부간의 성격 차이가 되었든, 남편의 경제적인 능력이 너무나 부실해서 가정을 제대로 부양하지 않는 상황이든, 또 남편이 바람을 피웠든, 어떤 경우가 되었든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남편이 생존한 상황에서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간다면,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아내는 음녀라는 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판결은 단순하게 음녀의 의미, 음란한 부인이라는 의미에서의 음녀 꼬리표를 붙이는 것으로 그치는 판결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음녀를 돌로 쳐서 죽이라는 명령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이유를 불문하고 남편이 아내를 버리지 않는 이상, 아내는 남편에게 죽을 때까지 매여 살아야만 했습니다. 집사님 권사님들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이곳은 이스라엘이 아니니까 표정 푸시고요.
이어서 두 번째 상황을 보시면, 만약 남편이 사망한 뒤에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가면, 그 아내는 음녀라는 판결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사망했으므로 아내는 자유의 몸이 되었기 때문이죠. (out) 자,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이 로마서 7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하나도 어렵지 않은 내용이었죠.
그런데 문제는 4절부터 시작됩니다. 4절 상반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개역개정 성경으로 이 말씀을 읽을 때, 뭔가 이상한게 느껴지시지 않습니까? 말이 뭔가 이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말에는 수동태가 없는데, 이 구절에는 수동태가 등장하기 때문이에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로마서 7장 4절의 문장 구조를 분석한 다이어그램을 준비해 보았는데요. (3번) 제가 직접 그린 것은 아니니까 놀라지 마시고요. 원어로 성경을 읽을 때, 어순이나 수식 관계가 복잡할 때, 학자들이 다이어그램을 통해서 문장의 구조를 분석합니다. 화면에 보이시는 로마서 7장 4절, 원문 구절이 굉장히 길지 않습니까? 이렇게 긴 문장을 다이어그램으로 분석한 것인데요. 중요한 내용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4번)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아, 너희들 또한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해서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읽을 수 있는데요. 여기서 문제는 무엇입니까? 너희가 죽임을 당했는데, 누구에게 죽임 당했는지가 밝혀지지 않습니다. 문장이 길긴 하지만, 문장 안에서 너희가 누구에게 죽임 당했는지, 다시 말해 누가 너희를 죽였는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신자가 율법에 대해서 죽임 당했다면, 누가 신자를 죽였을까요? 답은 하나님입니다.
(5번) 우리말로는 다소 어색한 문장일 수 있지만, 헬라어 문법에서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문장입니다. 이를 조금 유식한 말로 표현하자면, 신적 수동태라고 부르는데요. 신적 수동태는 하나님께서 행동하셨으나, 행위의 주체인 하나님을 생략하는 것을 허용합니다. 다시 말해 신적 수동태의 쓰임새를 아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을 때, 도대체 누가 죽였다는 거야. 누구한테 죽임당했다는거야. 이런 궁금증이 애초에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out) 그냥 이 구절을 읽을 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구나. 이렇게 이해하고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 상반절 말씀의 포인트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죽이셨다 또는 너희가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 부분인데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 받는 것, 아무런 대가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믿음 하나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는 것, 사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이런 구원역사와 관련된 표현들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받기만 하는 존재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이기에, 하나님께 받기만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죠.
그러나 로마서 7장은 이러한 이기적인 달콤한 상상을 송두리째 뽑아버립니다. 로마서 7장 4절에서의 하나님은, 죽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를 죽이십니까? 율법과 혼인 관계에 있던 우리를 죽이십니다. 죽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율법에 매여있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살고, 율법을 어기면 죽는. 너무나도 엄격하고 무거운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에 대해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길 수 있습니다. 율법과 성도가 혼인 관계에 있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둘 중에 누굴 죽이든 한쪽만 죽이면 다른 한쪽이 자유로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어느 쪽을 죽이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율법을 죽이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입장에서 생각할 때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면, 율법은 죽임당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이란 무엇인지, 그 거룩함을 따라 살아가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이러한 내용을 담은 것이 율법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성도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잘못한 것이 전혀 없겠죠. 마태복음 5장 17절과 1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out)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어떤 일이 있어도 없어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율법은 주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한 가이드 라인인데 누가 율법을 없애려 할 수 있겠습니까?
자,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들 수 있습니다. 율법이 그렇게 완전하게 주어졌다면, 율법 그 자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으로 완전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율법을 수여 받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율법을 받았음에도, 거룩한 백성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멸망 당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여기에 바로 율법의 한계가 나타납니다. 율법의 한계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in) 첫째로, 율법은 죄가 죄인 줄 알려주는 역할만을 감당합니다. 율법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방식을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이 지시하는 삶에서 벗어나면, 죄악된 삶이 되는 것이죠. 이어서 (in) 둘째로, 율법은 구원에 있어서 그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의 내용을 안다고 해서, 율법의 내용을 믿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율법을 단기간에 지킨다고 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율법은 그 자체만으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갈망함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심령을 움직이는 것은 율법이 아닌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점에서 율법은 그 자체만으로는 한계점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율법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야만 완전해질 수 있으며,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구원을 완성 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out)
이제 중간 정리를 하고 넘어가 보겠습니다. 로마서 7장 4절에서 우리는 신적 수동태를 통해 성도가 하나님께 죽임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율법이 아닌 우리를 죽이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율법의 존재 의의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목적, 그리고 율법의 한계까지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로마서 7장 4절로 돌아와서요. 율법과 혼인 관계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죽이시는데, 율법이 아닌 우리를 죽이신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입장에서 이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7장 4절 상반절 말씀 다시 보세요. (in)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우리의 몸이 죽임을 당하는데, 어떻게 죽임당했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죽임당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유사한 말씀이 베드로전서 2장 24절 말씀인데요. 베드로전서 2장 24절 말씀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in)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out)
로마서 7장 4절과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신자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연합이라는 개념을 통해 율법에 대해서 죽는 것과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음이나 거듭남에 대해서는 굉장히 친숙한데 비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측면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개념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과 동일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칼빈 선생님께서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실 때,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혜택들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인데요. 그만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구원의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7장 4절에서 신자가 예수님과 어떻게 연합합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으로 연합합니다. 죽는 것으로 어떻게 연합하느냐. 죽으면 끝인데 이게 어떻게 연합으로 연결되느냐.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겠습니다만, 이 내용은 로마서 7장 1절에서 3절, 결혼 비유가 적용으로 발전하는 내용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표를 보시면 (6번) 사도 바울이 결혼 비유를 적용할 때, 이렇게 적용합니다. 첫 번째 상황입니다. 남편이 생존한 상황에서 아내가 사망합니다. 여기서 남편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과 성도, 둘 중에 성도가 죽임당한다는 사실을 앞서 살펴보았죠? 자, 그래서 율법과 성도, 남편과 아내 관계가 있는데, 아내가 사망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편인 율법은 죽은 아내인 성도에 대해서 율법을 행사할 권리를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죽어버린 아내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새로운 결혼 관계를 시작합니다. 이어서 두번째 상황 보세요. 새로운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아내인 성도가 거듭나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상황은 굉장히 영적이면서도 기적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믿음으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다음 두 가지의 내용을 지적합니다. (7번) 결혼 비유 또는 결혼 예시에서 죽은 사람은 남편인데 적용에서 죽은 사람은 아내이다. 일관성이 없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문제, 남편과 아내의 혼인 관게의 문제에서 타인의 죽음,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죽음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인해서 죽임당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실제로 목숨이 끊어진 것이 아닌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이런 식의 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영역을 완전히 제외하고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면 이런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서두에 설명해 드렸듯이 로마서 7장은 신학적 논쟁의 장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할 때 두 가지의 자세를 갖춰야합니다.
첫째로, 로마서 7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비유를 언급했으므로, 우리는 모르더라도, 저자인 바울은 모순 없이 비유와 적용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1절 말씀 보세요. (in)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한다는 표현과 알지 못하느냐라는 반문을 통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의 수신자인 로마교회 성도들도 충분히 알만한 내용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out) 물론 오늘날까지 로마서 7장의 결혼 비유와 적용의 불일치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설명하는 학자는 없습니다만, 로마서를 기록한 당사자인 사도 바울과 그 수신자들은 서로 척하면 척하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는 점에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두 번째 해결 방안은 영적인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신비한 연합의 측면에서 본문에 나타나는 이해되지 않는 점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실천해야 하는 부분에 더욱 집중하는 것입니다. 적용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를 들었는데, 비유가 이해되지 않으면, 적용점에 집중하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 됩니다.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파악하고 그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죠.
이 내용이 오늘 제가 전하고자 하는 로마서 7장 1절에서 6절 말씀의 마지막 내용이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인데요. 로마서 7장 4절 하반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8번) 시작.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말 성경은 이 구절을 다소 의역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다이어그램을 통해서 살펴보면 명확해지는데요. (9번) 7장 4절 하반절을 쉽게 표현하자면, 목적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상은 동격으로 두 대상이 등장하는데요. 한 대상은 다른 분이고요. 또 한 대상은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신 분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이시겠죠. 그렇다면 예수님께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동격으로 표현된 부분을 간단하게 예수님으로 생각하시고요. 나머지 두 부분만 살펴보면 확실하게 그려집니다. 다이어그램 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 맺기 위하여라는 목적이 소속하기 위한 목적에 포함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소속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7장 4절 상반절 (10번) 하나님께서 너희들 또한 죽이시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7장 4절 말씀을 정리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에 대해 너희들 또한 죽이셨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7장 4절 하반절,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기 위해서 다른 분께 소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율법에 대해 죽이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로마서 7장 4절 말씀을 적용하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기대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립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이러한 자세는 때에 따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은 바로 구원에 있어서, 그리고 구원받고 난 그 이후의 삶에 있어서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을 멋대로 규정짓는 것이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가장 큰 원인은 말씀을 편식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로마서 7장 4절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마음대로 경계선을 그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최근에 “안녕히 계세요 하나님”이라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인데요. 교회를 떠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마음에 안 들어서, 공동체 문제 때문에, 삶의 문제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그중에 제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교회에서 무리하게 요구하는 헌신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는 사연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로마서 7장 4절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죽이시는데, 신자들이 하나님께 죽임당하는데, 죽임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속하기 위함인데, 무엇을 위해 속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열매 맺기 위해서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로마서 7장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 자신을 위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구원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열매 맺기 위해서 율법에 대해 죽임당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열매 맺기 위해서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성도님들은 과연 하나님께 열매 맺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기로 다시금 결단하신다면, 두 가지의 내용을 반드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교회에서의 헌신, 특별히 물질적인 헌신과 시간을 들여야만 하는 규칙적인 헌신에 대한 인색함을 버리십시오. 헌신하는 모든 행위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계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교회 바깥에서의 생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에서, 지체 의식을 가지고, 하나됨을 바라보며,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에 있어서 인색함이 존재해서야 되겠습니까? 안녕히 계세요 하나님이라는 영상에서, 하나님이 미워질까봐 교회를 떠났다. 헌신을 무리하게 강요해서 하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어서 떠났다. 이런 청년들의 발언을 보면서 저는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 걸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 맺는 삶을 요구받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이것이 바로 구원이며, 하나님의 뜻인데, 어찌하여 받기만을 원하는 것인가. 이런 애통하고 참담한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 화평교회를 떠올렸습니다. 하나님께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매순간 매순간 최선을 다하며 헌신하고 수고하는 영혼들, 마음으로 죄짓지 않고 순결한 마음과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부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는 삶을, 교회에서도 살아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결단해야 하는 것은, 교회 바깥에서의 생활에서도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힘 주시고 능력 주시기를 간구하는 분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죠. 이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는 삶과 똑같은 표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는 삶이라는 표현이 조금 더 부담스러우시죠. 열매라고 하면, 뭔가 가시적인 열매가 보여야만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은 다소 부담스럽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에 대해 우리를 죽이셨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부디 로마서 7장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전적인 은혜를 오해하는 일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낌없는 나무처럼 주시기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사명과 증인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따라 선하신 뜻과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진심 어린 감사와 찬송을 올려 드림과 동시에, 교회와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우리 하나님께 열매 맺는 삶을 살아내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받기만을 원하던 우리가,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기로 결단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 그런 주님과 신비로운 연합을 통해 내주하시는 은혜를 체험케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한없는 은혜를 기억하면서, 매일 매일 지치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하늘 본향을 기억하며 소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을 온전히 살아내도록 주여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는 삶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찬송가 368장 함께 찬송하시겠습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맺기로 결단하며 나아가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설교 개요
1. 서론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 “안녕히 계세요 하나님”
2. 본론
7:1-3 비유
7:4-6 비유에 대한 적용
3. 적용
1) 형제들아
누구든지 내 뜻대로 하는 자가 형제 자매.
2)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음.
율법주의에 대한 우리의 자세
3)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인생관
(1)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
(2)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
4. 결론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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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verse by verse – 그랜트 오즈번
◎ 불신자와 율법
7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죄가 타락한 인간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특별히 다스리고 있다는 것. 롬 7장에서는 은혜 아래에 있는 자들이 율법의 굴레에서 자유하게 되었음을 보게 됨. 아무도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자가 없고(롬 3:21, 27-28),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만 의를 얻게 됨(롬 4:13-16). 율법의 목적은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닌 죄를 깨닫게 하는 것. 율법 아래 죄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증가했고(롬 5:20), 사망이 죄와 율법을 통해 군림하게 되었음(롬 5:14, 21). 7장에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온 자들이 율법의 정죄 아래에 있지 않고 율법과 죄에서 자유한 삶을 살게 됨.
롬 6:15-23에서 7:1-6로 전환될 때의 초점은 하나님의 백성이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 이 본문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속박을 깨뜨리시는 것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음. 죽음은 사실 율법의 사슬로 매는 것을 더 강하게 함( 이 개념을 더 살피려면 갈 3:23; 4:2, 7을 참조). 바울은 죽음으로 결혼 관계가 끝이 나는 것을 예로 들면서, 성도들이 율법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가질 때 자유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들로서 율법이 요구하는 법적 속박에 묶이기 보다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됨.
이 장의 초점은 7:7-25로서 6절에서 소개되는 율법의 옛 방식(7-12절)과 성령의 새로운 방식(13-25절) 간의 대립 구조임. 7절에서 바울은 일인칭을 사용하기 시작함. 여기서 가장 논쟁이 되는 것이 로마서가 바울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율법 아래에 있는 불신자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죄의 권세와 유혹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가 있음.
1) 신자는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해 율법에서 자유해짐(7:1-6)
이 땅의 삶에 관하여만 있는 율법의 권위(7:1)
두 가지 연관된 개념이 구절을 채움. 율법에 평생 종속되어 있는 것과 오직 죽음을 통해 율법에서 해방되는 것. 이 문제에 관해 바울이 염두에 둔 대상은 그가 형제자매(4절)로 부를 만큼 사랑하고 영적으로 돌보고자 노력했던 로마 교인들. 그는 하나님에게서 의롭다 칭함을 받고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로마 교인들에게 강조하기 위해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음.
바울은 “법 아는 자” 곧 율법의 복잡함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알고 있는 그들에게 이 구절을 쓰고 있음을 확실히 함. 롬 6:3, 6, 9. 고전 6:2, 9, 16, 19에서처럼 바울은 이전에 그들이 알고 있던 율법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율법이 하는 역할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으려 함. 율법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6:14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함”을 깨달아야 함. 당시 교회에 있는 많은 이들이 이방인 출신이었는데, 이들은 유대 율법에 관한 지식이 있었고, 다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방인들로서 회당에서 예배 드리고 유대 전통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음(행 10:2; 13:16, 26).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법은 모세의 율법. ‘주관하다’(κυριεύω)는 6:9, 14에서 죄와 사망이 사람들을 ‘주장한다’라고 할 때의 단어와 동일함. 죄와 사망의 법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데,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는 것이 5:12-7:25의 주된 가르침임.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어둠의 영역에서 빛의 영역으로 옮겨졌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 대해서 죽은 것.
◎ 결혼 비유: 남편이 죽음으로 자유해짐(7:2-3)
바울은 결혼 비유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율법의 평생 서약 관계를 설명함. 유대법은 남편만이 결혼을 파기할 수 있다고 하지만(신 24:1), 로마법은 남편과 아내 모두 결혼을 파기할 수 있었음. 여기서 쓰인 “결혼”이라는 단어(ὕπανδρος)는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님. 이 단어는 “남자의 권세 밑에”라는 뜻임. 같은 개념이 ‘법에서 자유하다’는 문구에서 나타남. 곧 남편의 법에서 자유하다는 뜻. 예수님께서는 유대법을 남편뿐 아니라 아내에게까지도 확장시키시지만(막 10:11-12),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 율법을 통해 남편의 죽음을 기준으로 허락하신 자유임.
바울은 3절에서 신명기에 나오는 결혼법을 되풀이하면서 남편이 살아있는 한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간음으로 치부된다고 설명함. 남편 죽음 이후에는 그렇지 않음. 주시할 것은, 이 구절이 남편에게서가 아니라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라고 말한 것. 즉 결혼 자체보다 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 중요한 것은 결혼이 아니라 율법에서의 자유임.
주의할 것은 결혼이 예시로 쓰인 것이지, 우화로 쓰인 것이 아니라는 점. 아내를 성도로 남편을 율법으로 보면, 율법이 죽을 때 우리는 자유롭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초대교부 오리겐, 아우구스티누스, 크리소스톰의 해석).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4절과 충돌을 일으킴. 4절은 “율법에 대해 죽음”으로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하게 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함. 어떤 이들은 남편을 옛 자아로, 아내를 새로운 자아로 해석함. 이것 역시 문맥에 어울리지 않음. 여기서는 남편과 아내 자체에 영적인 의미가 없음을 인지할 때, 결혼 예시가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음. 즉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율법에 대해 죽고 그분을 믿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
◎ 그리스도인: 율법에서 해방되고 그리스도께 속함(7:4)
바울은 이제 로마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라고 강조함. 이 구절은 2-3절의 비유적인 설명보다 1절의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했다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음.
사망에 부쳐진 것은 율법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대해 죽은 것. 전통적으로 신자들은 율법의 정죄에 대해 죽은 것으로 이해되어 왔음. 이는 맞는 말이지만 충분한 해석은 아님. 5:12-6:23(특히 5:13, 20; 6:14)에서처럼 율법의 군림이 파기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기셨음. 우리는 율법에 대해 총체적으로 죽은 것.
개혁신학은 우리가 율법의 법적인 측면에서 자유하지만, 도덕적 측면(삶의 규칙)에서는 자유하지 않다고 봄. 그러나 오스번은 이에 반대함.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대하시는 방식과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줌. 모세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완성되었음(마 5:17-20; 롬 10:4). 또한 죄를 알려주는 것(롬 3:20) 외에 구원의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함. 하나님은 율법과 다른 자신의 의를 보이시고(3:21),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심.
신자들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벧전 2:24)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율법에 대해 죽었음. 그 결과 우리는 다른 이에게 속하게 된 것. 이 개념은 결혼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 우리가 하나가 된 분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분으로서 첫 열매(고전 15:20, 23)로 부활하셔서 우리의 이 새 연합이 영원하게 하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 어떤 이들은 열매 맺는 것을 또 다른 은유적인 표현으로 생각해서 열매 맺는 것이 그리스도와 결혼함으로 새롭게 아이를 낳는 것, 곧 전도라고 해석하기도 함.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다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함. 합당한 열매는 성화가 일어나는 삶, 갈라디아서 5:22-23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임.
◎ 육신과 영의 새로운 삶의 차이(7:5-6)
육은 죄를 지으려는 경향, 유혹이 올 때 자기 자신과 사탄에게 자신을 주려는 성향을 뜻함. 옛 자아는 없어지고 힘을 잃게 되었음. 그것은 더이상 우리 안에서 육체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권세가 아님. 이제는 육체를 통해 우리를 대항하고 통제하려는 외부의 힘이 있을 뿐. 바울은 이를 영적 전투라고 표현함.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율법은 죄가 하나님의 법적 요구를 범하는 것임을 밝힘으로써 사람들이 죄를 인식하게 하고, 죄가 더 증가하게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죄를 짓게 만듦(3:15, 20-21; 4:15; 5:20). 이런 죄의 열의는 믿지 않는 이들의 삶을 완전히 통제하지만 믿는 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침.
이 구절은 율법과 죄의 관계에 있어서 바울의 가르침을 종합하는 부분인데 긍정적이지 않음. 율법이 죄를 규정하고 사람들로 죄를 의식하게 하고,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가져오고,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을 가져옴. 율법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고, 7:12에서 보듯이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함. 하지만 죄가 율법을 통해 그 악한 목적을 이루려 하기에, 율법은 불길한 모습도 갖추고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죄와 율법으로 말미암는 정욕이라는 단어에 다 포함되어있음. 정욕은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 이 정욕은 우리가 불신자일 때,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던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욕구들로써, 유혹을 통해 우리를 죄로 이끌었음. 마지막 결과는 4절에 나오는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것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는 것. 문제는 정욕이 일으키는 엄청난 힘과 두려운 결과를 알면서도 왜 멀쩡한 사람들이 다시 그 죄악된 행위로 돌아가려 하는가임.
바울은 6절에서 “이제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현재로 화두를 돌림. 여기서 우리는 삶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는데, “육신에 있을 때”(5절)와 반대로 영의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됨.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해 죽었음. 이는 6:2에 나왔듯이 죄에 대해 죽은 사실을 포함함. 죄가 군림하는 힘은 십자가에서 힘을 잃었음. 이는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6:4-5)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6:6) 거듭나면서 일어나는 일임. 바울은 그들이 율법에서 벗어난 것을 특정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는 7:2의 결혼 예시에서 사용했던 언어를 사용하면서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었음을 강조하는 것.
율법 행위를 강조하던 옛 시대는 지나가고 영의 새로운 것이 왔음. 율법 조문의 묵은 것과 영의 새로운 것의 차이점을 두고 여러가지 다른 해석들이 있음.
1) 유대인들이 율법과 영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을 잘못 이해하고 사용함.
2) 거듭나기 전의 삶과 거듭난 후의 삶.
3) 율법 대 성령
4) 율법의 옛 언약 대 성령의 새 언약
위 네 가지 중 1,3,4로 선택지가 줄어듦. 4)가 구원 역사적인 맥락에 비추어볼 때 가장 적합함. 바울은 모세 율법에 중점을 두었던 옛 언약에서 성령에 의해 제시된 새로운 언약의 시대로 옮겨간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바울은 율법이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 바울은 율법에도 영적인 가치가 있음을 밝힘. 율법은 죄를 깨닫는 역할(3:20)을 감당함. 율법은 죄를 부각시키고 범법 행위를 드러내지만, 사람을 구원하지 못함. 율법은 스스로 반대하는 일을 하는 중개인이 되어서 죄가 더욱 증가하게 했음(6:19). 그리스도만이 죄를 해결하고 파괴하실 수 있고, 그렇게 하심으로 율법을 완성 혹은 완수하심(마 5:17-20; 롬 10:4). 모든 율법이 그분 안에서 요약이 되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대체됨.
바울은 2:27-29에서 처음으로 성령과 기록된 조문을 대조하면서 ‘성령에 의해’ 일어난 ‘마음의 할례’로 구분된 참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이들을 비교했음. 율법에 의한 옛 언약은 성령과 마음에 새겨진 새로운 언약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새 언약의 현실과 거기에 속한 사람들의 삶으로 특정지어지는 새로움이 생겨남. 여기서 다시 한 번 구원의 역설을 보게 됨(6:16-18). 즉 우리는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으로 자원하여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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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트마이어
비밀 정보원 제임스 본드는 자기의 신분을 가리키는 번호 앞에 영이 두 개가 있는데, 그것은 그가 사람을 죽여도 좋다는 면허증을 받은 것이라고 함. 그리스도인들이 그것과 비슷한 두 개의 영을 가지고 죄를 지어도 좋다는 면허증을 받은 것일까? 물론 아님. 은혜 아래에 있고 율법 아래에 있지 않은 것은 죄를 지어도 좋다는 면허증이 아님. 이는 바울이 이미 분명하게 밝혔음(6:15-23). 바울은 또한 그의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밝힘.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6:1-14).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율법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세례에 참여한 사람들을 죄에서 풀어주었다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을 율법에서도 구해주었다는 말인가? 바울의 은유된 답은 ‘그렇다’였음. 그러나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리스도인을 율법에서 풀어주었다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바울이 7:1-6에서 답하기 원하는 것.
우리는 이 순간 조심스럽게 주목해야 함. 바울의 질문은 “나의 죽음이 율법의 능력의 범위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가 아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게 “물론 그렇다”임. 바울의 질문은 오히려 “다른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나의 율법에 대한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임. 그것이 율법에서 끌어낸 예(2-4절)가 답하기 의도하는 질문임. 바울이 명쾌하게 말하고 있듯이(1절), 그것은 율법에 대한 무엇인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시된 예임.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은 이 율법에 대한 질문에 대해 율법 자체로 답할 것.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예(2-4절)는 복잡하고 뒤죽박죽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당히 바른 것. 남편과 아내를 묶는 결혼의 관계는 두 사람 중 하나가 죽음으로써 해서되며, 두 사람이 다 살아있을 땐 금지되었던 행동(3a절)들이 한 사람이 죽으면 살아 있는 파트너에게 허용되는 것(3b절). 살아있는 파트너에게 허용된 새로운 관계의 유추를 통해 바울은 우리가 마치 그 살아있는 파트너처럼 이제 새로운 파트너, 즉 그리스도를 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이전 주인인 율법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죽음이 나의 율법에 대한 관계가 영향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본보기라는 것.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부활이 우리로 하여금 그를 새로운 주인으로 모실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 이 점은 바울이 4:25에서 지적했던 것과 동일한 것. 즉, 그리스도가 우리의 범죄함(율법)을 위해 죽었고, 우리의 의(그와의 새로운 관계)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것.
** 육과 영
1) 육(싸륵스)의 의미.
5절 “육 가운데” 사는 것은 해로운 죄의 영향 아래에 산다는 것. 죄는 율법을 사용해서 자기의 악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잘 써먹고 있음. 그러므로 육 또는 육 가운데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사는 방법을 묘사한 것. 바울은 육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우리의 육체적인 존재를 묘사할 때 쓰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중립적인 의미에서도 사용됨. 1:3; 4:1; 9:5. 그러나 중립적인 사용은 부정적인 사용보다 평범한 것이 아님. 7:18, 25; 8:3-4에서는 부정적으로 사용됨. 육은 바울에게 부정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며, 우상숭배를 좋아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에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에 팔려 있는 상태임. 육 가운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신이 되려는 시도 때문에 생긴 결과로 처한 상황을 묘사하는데, 이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분을 하나님 되게 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행동의 방향과 가치를 정하는 것.
육은 우리의 본질 전체를 묘사함. 그것은 죄의 지배 아래 살고 있는 것. 우리의 본질 안에 높거나 낮거나 우리가 죄의 지배 아래 처해 있는 곤경에서 구출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에 세례를 통하여 참여하는 것이 육 가운데의 삶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열 수 있는 유일한 길.
그러므로 육은 인간 존재를 통틀어 묘사하는 것이며, 죄에 의해 지배당할 때, 하나님과 멀어졌을 때를 묘사하는 것.
육 안에 사는 삶의 반대되는 개념이 영 안에 사는 삶임. 이 대조에는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또다른 차원이 있음. 우리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느냐에 따른 방법이 문자와 영이라는 개념을 통해 묘사되고 있는 것. 새 언약은 성령에 의해 권능을 받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지만, 옛 언약은 문자에 근거해서(죄에 눌려 있는 율법) 오직 죽음으로 이끌 뿐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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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오르는 로마서 – 김진욱
롬 7:1-4의 비유, 아내의 죽음은 옛 남편으로부터의 자유만을 의미하지 않음. 아내의 죽음은 ‘다른 이와 함께 하려는 죽음’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들은 이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새로운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 된 것.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비유는 이전에 얽매였던 율법에 대비해서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율법의 강제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서 율법이 아닌 새로운 법 안으로 들어갔음을 말함. 새 술은 새 부대에 부어야 하듯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이들에게는 새로운 법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 거듭난 이들은 새로운 법의 지배 아래에 있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다시 태어난 우리가 얻은 것은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임. 이전의 삶이 율법에 매여서 율법의 요구를 들어야만 했던 삶이었다면, 이제는 성령 안에서 성령의 요구를 따라 사는 삶. 과거에는 율법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성령의 종이 된 것.
그런데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율법과 성령은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율법과 성령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는가? 이들이 요구하는 행위의 요구는 사실 그 핵심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음. 율법도 거룩하며 성령은 더욱 그러함. 그렇다면 율법에서 성령으로 옮겨진 우리의 삶은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 롬 7:7 이하에서 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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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NT
롬 7장은 5:20에서 시작하여 6:14-15에서 계속되는 율법에 대한 논의를 확대시키지만, ‘아델포이’는 새 단락이 시작되는 것을 암시함. 6:1-14에서 바울은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이 율법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서 끌어내는 잘못된 결론을 거부했음. 죄 에 대해 은혜가 승리함으로써
죄를 계속 짓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은혜를 더하게 하는데, 이는 죄의 능력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에 대해 결정적으로 무너졌기 때문임. 그리스도의 은혜가 죄의 지배를 끝내고 신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었음. 구약의 약속들은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음. 율법이 아닌 은혜 아래에 사는 것은 계속 죄를 짓지 않도록 함(6:15∼23). 신자들은 주권의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전되어, 신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새 주인에게 마음으로 순종함. 자신을 죄에게 내주는 자는 결국 죄를 그들의 주인으로 맞이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들은 우선적으로 결코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줌. 로마서 7장은 5장 20절을 상기 시키면서 왜 모세 율법의 존재가 죄를 조장하는지를 보다 자세히 설명함. 여기서 비울은 로마의 신자들에게 왜 자신을 반대하는 유대 그리스도인의 비판이 잘못되었는지를 설명함. 만일 율법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정통적이라는 것을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로마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복음을 거부할 것이며 아울러 바울의 스페인 선교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논증은 바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함(Stuhlmacher 1994: 101 ). 비록 로마서 7장이 이 서신 전체에서 가장 논란이 있고 복잡한 장들 중의 하나라 해도, 이 장이 말히는 주요 쟁점이 율법과 죄의 관계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동의함. 이제 바울은 율법과 죄의 관계를 보다 자세히 그리고 역사적 관점에서 설명함. 로마서 7장에서 율법에 대한 논의 와 2:1∼3:20에서의 논의에 있는 차이점은 무엇인가? 후자 본문 에서 바울은 율법을 가진 자들이 죄인이라는 논지를 변호했음.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율법 이 들어온 것이 어떻게 죄를 조장하는지를 설명함. 바울은 율법의 통치와 죄의 통치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논증을 시작한다(롬 7:1-6). 이러한 관찰은 이스라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자들에게는 분명했을 것. 율법 아래서 이스라엘의 삶은 의를 이루지 못했음.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극적으로 죄를 지었으며 결국 그들은 유배를 당했음.
율볍 아래서의 삶은 이스라엘에게 생명이 아닌 죽음을 가져왔음.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율법의 지배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이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일을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음.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성령의 약속이 그들에게 실현됨으로써 이스라엘이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음.
율법의 압제로부터의 자유 7:1-6
로마서 7장 1∼6절은 6장 15-23절과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하며 또한 이곳에서 시작된 논증을 계속하는 기능을 함. 후자 단락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된다는 생각을 거부함. 7장 1-6절에서 바울은 논증을 한 단계 더 진행시키는데, 바울은 죄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다스린다고 주장함. 바울의 복음에 대해 유대교 대적자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이 죄를 짓는 기회를 준다고 주장했음. 바울은 죄에 속박되어있는 자들이 율볍 아래에 있는 자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상황을 역전시킴. 유대인은 율법 아래서 결코 자유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구원의 약속들이 성취되지 않았음. 율법에 대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성령을 소유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을 수 있음. 율 법 아래에 있는 자들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또한 그들에게 사형 선고가 선언될 것임
7:1-6의 구조는 어렵지 않음. 1절은 사람이 살 동안만 율법이 그 사람을 주관한다는 원리를 말함. 2-3절은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아내가 남편과 결혼 상태에 있다는 점에서 율법에 대한 아내의 책임을 호소하여 그 원리를 예증함. 남면이 죽을 경우에만 아내는 결혼의 속박이라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됨.
4∼6절은 1∼3절에서 하나의 결론을 끌어낸다(접속사 호스테, 그러므로]를 통해 나타남).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율법에 대해 죽었음. 신자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했음. 신자들올 그리스도와 결혼시키는 하나님의 목적은 신자들의 삶 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 5∼6절은 ‘가르’로 시작하는데, 그 기능은 4절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는 것. 왜 신자들이 율법에 대해 죽을 필요가 있는가? 5절에 따르면 갱생의 의지가 없는 율법은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제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역사하여, 그 결과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사망이 선언되었음. 6절은 5절의 대조로서 기능하며 (‘뉘니 데 ’, 그러나 이제는), ‘뉘니 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새로운 종말론적 실재를 소개함. 신자들은 더 이상 육체에 있지 않으며, 율법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신자들의 삶을 지배하던 것에 대해 죽었다. 그 결과 신자들은 더 이상 불순종만올 초래했던 율법 조문 아래에 있지 않음. 이제 신자들은 성령의 내주하심 때문에 거룩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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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GTC
바울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을 부정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 율법은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 자신의 길을 가며 자기 방식대로 삶을 살기 위해 벗어나야만 하는 어떤 지배적인 요인이 아님. 오히려 예수님의 육체의 죽음과 육체 부활에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긍정적인 목적이 있으며, 현재 예수를 믿는 신자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결과가 있음.
1)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것.
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는다는 것.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정수를 정확히 포착했음.
1)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다는 사실
2)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을 위해 실질적으로 거룩함과 영생을 가져오신 하나님께 열매를 맺는다는 것.
바울은 7:6에서 7:4-6의 여담을 1)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 현재 하나님의 구원 역사 과정에서 상황의 변화로 말미암아 그들과 하나님 간의 관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종말론적인 “이제”의 시대에 있다는 선언으로, 2) 이 변화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얽매이게 했던 것에 대하여 죽었다”는 선포로, 3) 구속함을 받은 이 새로운 상황에서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는 권고로 마무리함.
바울은 성령의 새로운 방식으로 라는 표현으로 다음 사실을 강조함
1) 종말론적인 “이제”라는 시간은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와 사역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
2)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사의 이 새 시대에 그와 동일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들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성령으로 행하자!)
인정하건대 로마서 7:1-6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 본문의 구조를 어떻게 이해하든지 간에 메시지는 매우 분명함.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하나님과의 결정적인 새로운 관계와, 하나님 앞과 사회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와 공의의 삶을 살아가는 결정적으로 새로운 방식이 임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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