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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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갈 6:11-18
제목 :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이번 주에 우리 화평교회는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서 가상칠언의 말씀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도상에서 어떤 말씀을 하셨으며, 그 말씀을 토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깊이 묵상하는 귀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저는 가상칠언과 겹치지 않는 범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죽음을 사도 바울의 시각에서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 말씀을 보시면, (in) 갈라디아서라고 부르는 이 편지의 수신자는 갈라디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out)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이후에 기록되었으며, 특정 교회를 대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북부 갈라디아 사람들과 남부 갈라디아 사람들 전체를 대상으로 삼아 기록한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 갈라디아서는 광범위한 지역의 수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편지라고 하기에는, 갈라디아서의 내용이 굉장히 디테일하고, 실제적인 문제를 주로 다룬다는 점에서 참 독특하고도 놀랍습니다. 1세기에 갈라디아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록한 편지이지만, 그럼에도 이 편지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 대한 적용이 차고 넘칩니다.
이러한 점에서 순서상으로는 갈라디아서의 서론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오늘 본문 말씀을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단락으로 선정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한스 디터 베츠라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는 본문 말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in) “갈라디아서 6장 11-18절은 바울 서신의 요약일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의 해석학적 열쇠이다.” (out) 이 설명에 따르면 오늘 본문 말씀은 갈라디아서를 이해하고자 하는 성도에게 반드시 이해되어야만 하는 필수적인 본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본문이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단락인데 문제는, 이 단락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피할 수 없는 해석상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야만 합니다.
큰 카테고리에서 파생되는 몇 가지 문제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문제는 오늘 본문 바로 이전 단락,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10절 말씀의 내용과 연결되지 않는, 새로운 단락이자 마지막 단락에서 정체 모를 사람들이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누구이며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들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그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확인해야만 합니다.
먼저 첫 번째 문제는, (in)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2절 말씀을 보시면,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또 13절 말씀을 보시면, 할례를 받은 그들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참으로 알쏭달쏭한 표현입니다. (out)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사람들의 정체를 가리켜 갈라디아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주의자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거짓 교사나 거짓 선생, 사도 바울의 대적자 정도로만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추정은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과 갈라디아 사람들에게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그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한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런 내용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부차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애써 알아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6장 12절과 13절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사람들과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가 하면 6장 12절 상반절 말씀 보세요. (in)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한다는 표현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고 있는 시점에 발생하고 있는 문제였음을 의미합니다. (out)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갈라디아 지역에 거주하는 이방인 개종자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할례가 무엇입니까? 남성의 성기의 포피를 베는 행위이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살에 새기는 의식이죠. 또한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는 창세기 17장 말씀에 근거하면, 할례라는 의식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할래 말래의 문제가 아닙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남성이라면 당연히 받아야만 하는 거룩한 의식으로 여겨야 하며, 반드시 시행해야만 하는 규례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이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한다는 것이 왜 문제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갈라디아서 6장 12절 하반절 말씀 보세요. (in)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거짓 선생들이 갈라디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이유와 목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박해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out)
잠시 후에 살펴보겠습니다만 할례를 강요하는 동기는 박해를 피하기 위한 것과 할례받은 사람들의 숫자로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는 먼저 할례로 어떻게 박해를 피하기 피할 수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내용을 살펴보려면,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의 상황, 다시 말해 사도 시대의 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해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활동했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비판받고 추방당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물리적인 박해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에게 핍박받은 주된 이유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면 무조건 박해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애매한 믿음 가진 사람이면 그렇게 죽어라 박해할 필요가 없겠죠. 그러니 율법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박해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분명한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분명하다는 것은 단순하게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시다. 이 정도만 믿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는 유일한 근거는 할례나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의해서만 의로워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확신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박해를 당했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거짓 선생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하면서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은 언약의 표징을 살에 새기는 행위가 아닌, 율법에 대한 충성의 증거로 할례를 받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방인 개종자들이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율법의 공로를 칭의의 근거로 믿는다는 징표가 되기 때문에, 그 증거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박해를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한 것이었죠.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갈라디아 지역에서 우상숭배하며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유대교를 맹신하는 자들, 율법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어 박해를 당하게 되는데, 이방인 개종자의 경우에는 유대인 혈통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고, 이러한 점에서 할례를 받지 않은 개종자는 박해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박해당하는 것은 견디기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라 타협하는 마음으로 할례받은 사람도 존재했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 거짓 선생들이 갈라디아 지역의 개종자들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 없이 그저 미신적인 믿음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할례받게 했다.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6장 13절 말씀을 보시면, 이 사람들이 어느정도 율법을 지키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 말씀 보세요. (in)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out)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표현은, 두 가지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가능성은, 거짓 교사들이 율법의 전체 내용을 누구보다 해박하게 알고 있지만, 의도적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할례를 억지로 받게 한다는 것은, 의식적인 충성도와 행위로 증명하는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할례만 억지로 하는 수 없이 받고 다른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생각했을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아닌, 율법의 행함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믿었기 때문에, 더더욱 의도적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을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번째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데요. 두 번째 가능성은, 거짓 교사들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철저하게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율법이 명하는 바를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짓 선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고, 이를 통해 경건한 삶을 살아간다고 굳게 믿었지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사도 바울의 시각에 따르면 이 거짓 선생들은 율법에 대해 객관적으로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원죄로 인해 율법의 요구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므로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근거 외에도 사도 바울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거짓 선생들의 율법주의 행태는 참 우스웠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율법주의를 가장 엄격하게 실천하는 바리새인의 일원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4절과 5절 말씀 보십시오. (in)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out)
사도 바울의 과거는 오늘날 군 복무로 표현하자면, 특수부대에서 굉장히 고된 훈련을 받으면서 군 복무한 사람 앞에서 공익 근무한 사람이 본인 군 생활이 어떻고 저떻고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생활로 표현하자면, 시누이도 없고 시부모님이 이른 때에 별세해서 남편 하나만 챙기면 되는 사람이 시누이만 예닐곱 명 되는 사람 앞에서 결혼생활이 어쩌고 시집살이가 어쩌고 이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갈라디아 지역의 거짓 선생들이 할례를 억지로 받으라고 강요하는 모습이 같잖게 보였을 것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는 녀석들이 오히려 율법주의를 강요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습니까.
자 그런데,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거짓 교사들이 율법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켜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할례를 억지로 받게 만들고자 하는데, 그러한 의도 안에 숨어있는 잘못된 동기를 지적하는 데 집중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거짓 교사들이 할례를 강요하는 동기와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in)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비롯되는 박해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이 내용은 앞서 살펴보았고요. 둘째는, 갈라디아 지역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받은 사실을 가지고 본인들의 자랑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out) 갈라디아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의 동기에 잘못된 생각들을 가득 채워 넣었습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표징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러한 성경적인 의미를 퇴색시키고, 할례를 강요해서 억지로 받게 만든 사람들의 숫자를 가지고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본인이 전도한 것처럼, 마치 자신이 일궈낸 찬란한 업적인 것처럼, 본인의 실적을 공로로 삼아서 자랑하기 위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느정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본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루어 냈다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겠죠. 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얼마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본인 집값이 얼마인지, 차종이 무엇인지, 자녀들의 성적이나 대학이 어떤지. 뭐 세상 사람들이 자랑할 것이야 차고 넘치겠죠.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것들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상반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사도 바울은 본인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유일한 자랑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음을 밝힙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사도 바울에게 자랑할 것이 십자가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사회에서 꽤나 높은 계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5절에서 8절 상반절 말씀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out)
사도 바울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베냐민 지파에 소속된 순수 혈통의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리새인으로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2장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이랬던 사도 바울이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다소 현실감이 없게 느껴집니다.
예컨대, 서울대학교 졸업한 사람이 아... 저는 학창시절에 공부 못했어요. 그냥 열심히만 했어요. 이런 얘기하면 어떻게 느껴집니까? 겸손 떠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아니면 빈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겠죠. 마치 사도 바울이 이런 케이스인 겁니다. 갈라디아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거짓 선생들에 비해서 사도 바울이 자랑할 것이 객관적으로 훨씬 더 많은데, 오히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강하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자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랑할 거리가 그렇게 많은 엘리트 출신의 사도 바울이, 본인의 모든 스펙을 다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만을 자랑하는 근거를 확실하게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자랑거리가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하반절 말씀 보세요. (in)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말이 좀 복잡한데요.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읽으려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해 그렇게 못박혔다.” (out) 죄악 된 세상을 의인화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듯이, 세상이라는 존재를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게 만들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만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든 것이 아니라, 나 역시 죄악 된 세상과의 관계성 안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이라는 존재 안에는 내가 없고, 내 안에는 세상이라는 존재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논리 구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인의 십자가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이러한 오류를 너무나도 쉽게 범합니다. 예를 들어, 고난주간이 다가오면,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참석하고, 예수님의 고난을 잠깐 묵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참석하는 것 그 자체는 본질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을 함께 묵상하되,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대해서 철저하게 죽고, 세상과 완전히 새로운 관계에 들어갔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님 혼자서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 사건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타인의 도움 없이 고난의 길을 순종하며 걸어가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볼 때, 무슨 영화 관람하듯이 방관하며 감정적으로만 공감하고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리스도인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하는 구속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는 어떤 사람도 관여할 수 없지만, 그리고 그 사건은 이미 종결된 사건이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의 인생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리스도인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상반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2천년 전에 세상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의 길을 홀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 하나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고백합니다. 이를 오늘 본문 말씀인 갈라디아서 6장 14절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 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래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과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중요한지, 그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다독하신 우리 성도님들께서는 이 말씀과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이 굉장히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 보세요. (in)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번역된 두 단어는 갈라디아서 6장 15절의 새로 지으심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똑같은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서는 새로 지으심이라고 번역되어 있고,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번역되어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둘 다 가능한 번역이든지, 아니면 둘 중 하나가 잘못 번역되었든지.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out)
자 그래서,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은 일반적으로 성도 개인의 중생과 회심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렇게 쓰여있으니 당연히 새로운 피조물이 무조건 사람이라고만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이 구절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성도의 심령에 내적인 변화가 발생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구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과연 사람만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가리켜 이전 것 또는 새로운 것이라는 중성 복수 명사를 사용해서 표현하는 것이 매우 부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가리킬 때에는 중성 명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표현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마땅합니다.
이에 덧붙여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서는 새로 지으심이라는 번역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의 번역을 재고하게 만듭니다. 새로 지으심이라는 번역을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새로운 창조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을 경우, 박윤선 목사님의 스승이신 게할더스 보스 박사님의 견해대로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을 다른 각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보스 선생님의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in) “완전히 새로운 환경, 더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창조되었으니, 해당되는 사람은 그 세계 안에 거주자이며 참여자이다. 물론 변화된 주체의 내면성이 배제되지는 않았지만, 이 구절의 일차적인 의미는 변화된 주체의 내면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변 세계 전체가 새로운 국면과 특성을 갖게 된 것이다.” (out)
박윤선 목사님의 스승이신 보스 박사님의 설명에 따르면, 카이네 크티시스는 새로운 피조물이 아닌, 새로운 창조 세계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카이네 크티시스는 성도 개인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변화를 가리키며 예수님의 재림 때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새로운 피조물, 아니 새로운 창조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종말론적인 새로운 창조가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한 사람의 죽음, 그것도 십자가 처형 방식을 통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그 사건이, 온 우주만물을 새롭게 창조하는 사건으로 여겨져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갈라디아서 6장 15절 말씀과 연결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6장 15절 말씀 다시 보십시오. (in)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사도 바울에 따르면,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신경 쓸 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새로 지으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새로운 창조의 개념은 할례냐 무할례냐의 이분법적 논쟁을 아득히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out) 새로운 창조와 할례 논쟁은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것이죠.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피부로 체감할 수 없는 새로운 창조라고 할지라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성경적으로 따지고 보면,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일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은 그 순간이 언제인지, 그 순간이 몇 월 며칠 몇시 몇분 몇초인지 알 수 있습니까? 믿었다고 생각했는데 믿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믿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믿음의 기초를 쌓았던 순간이었을 수도 있죠. 또한 우리가 믿은 그 순간에 중생이 일어나는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느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배 시간에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때,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조명하심이 없다면, 말씀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데, 어떤 때에는 말씀이 깊이 깨달아지고, 감동이 되는 그런 순간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순간은 분명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을 체험한 순간이었을텐데, 이런 것은 항상 지나가고 나서야 알게 되죠. 이와 같이 인간의 존재는 감각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우둔한 존재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그 어떤 변화도 체험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이며, 오직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전적인 은혜에만 의존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갈라디아서 6장의 마지막 단락을 통해 크게 두 가지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내용은 거짓 선생들의 행태였습니다. 이들은 갈라디아 지역에 거주하는 이방인 회심자들이 억지로 할례받도록 강요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악독한 꾀에 넘어갈 경우, 회심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억지로 받은 할례는 거짓 선생들의 기념품과 업적으로 남게 됩니다. “내가 저 사람들 할례 받으라고 하니까 전부다 할례 받았어.” 마치 무슨 실적 쌓듯이 자랑하는 자랑거리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과 유사한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컨대, 고난주간 새벽기도회를 6일간 참석한 뒤에, 참석한 것을 가지고 자랑한다면, 거짓 선생들이 할례를 자랑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개교회가 전통으로 지키는 부분들을 진리와 동등한 위치에 두고, 타인을 판단하고, 본인의 믿음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거나, 건강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거짓 선생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 내용을 전 교회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요즘 대형교회들 보면, 무슨 음식점이 컨셉 잡듯이 다들 컨셉이 하나씩 있습니다. 전도로 유명한 교회. 선교로 유명한 교회.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교회. QT로 유명한 교회. 이런 식으로 교회에 대해서 수식어를 붙이고, 교회를 브랜드화 시키는데, 이런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런 대형교회 출석하는 성도들이 교회에 대한 과한 자부심을 가지고 타교회를 폄하하거나, 전략이 없어 보이는 부분을 열정 부족으로 지적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내에서 담임목사님의 마음을 함부로 헤집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교회는 어떻다던데. 어떤 교회는 무슨 프로그램을 써서 부흥했다던데. 이런 식으로 다른 교회를 비교하면서 담임목사님을 흔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부가 대화할 때, 다른 집 배우자와 비교해서 말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식과 대화할 때, 엄친아 얘기하면 어떻게 됩니까. 엄마 친구 아들은 전교 1등했다더라. 이런 얘기하면 무슨 소리 듣습니까? 그 엄마 친구 아들은 오십억짜리 집에서 살더라. 이런 얘기 듣죠.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자랑하도록 그런 분위기를 만들거나 따라가야 한다는 듯이 부추기지 않도록 영적인 분별력을 갖춰야겠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마지막 단락의 두 번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도의 관계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난주간에만 반짝 감상하고 그 고통을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과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를 규정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맺었던 세상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게 종노릇하던 때를 벗어나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관계로 나아가게 된 것이죠. 따라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우리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중생하는 것을 반복해서 알려준 것이 아니라, 모든 종말론이 절정에 달하는 세계 갱신의 시작으로써의 새로운 창조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적극적으로 적용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세계관과 가치관의 변화를 체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새로 지으심을 받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계십니까. 부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의미와 그 유익을 온전히 누리시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과 긍휼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의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고난주간에 새벽기도회로 수요예배로 시간과 마음과 정성을 들여 주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은 이생의 자랑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단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새로 지으심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새로운 창조 세계 안에서,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찬송가 321장 함께 찬송하시겠습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새로 지으심의 중요성을 기억하며 그 심령 가운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나아가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속사역의 유익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며,
(in) (out)
적용
1. 무엇을 자랑하는가?
1) 개인
2) 교회
자랑거리를 만들도록 부추기는가? 00으로 유명한 교회. 부흥하는 교회. 교회에 자꾸 어떤 수식어를 붙이는데 교회가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2. 새로 지으심 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세계관과 가치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인생. 세상과의 구별된 삶을 달게 여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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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 서론
갈라디아서의 배경과 수신자
2. 본론
1) 갈라디아서의 대적자들
(1) 대적자들의 정체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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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창조
갈라디아서의 맺음말에서, 바울은 자신의 중심 논제인 할례의 주제로 되돌아간다(갈 6:12–16). 단순히 율법의 요구로서의 할례를 부정하기보다(예, 갈 5:2–6), 바울은 하나님의 해법, 즉 “새 창조”(카이네 크티시스, kainē ktisis)를 제시함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 여부에 관한 이분법적 논쟁을 초월한다. 비록 바울이 여기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그는 갈라디아서 3:28에서와 유사한 논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할례와 무할례,”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의 구분은 쓸모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던(Dunn 1993, 342)이 언급하듯이, 그러한 것들이 “메시아 예수가 오기 전, 소수 집단의 옛 시대(3:23–4:11)”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례와 무할례에 관한 갈라디아서 5:6과 고린도전서 7:19의 상응 진술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갈라디아서 6:15에서 두드러진 것은 “새 창조”에 대한 강조다.
주석가들에 따라 “새 창조”란 표현의 의미와 배경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베츠(Betz 1979, 319–20)와 롱에네커(Longenecker 1998, 295–6)를 포함한 몇몇 학자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6:15에서 이미 알려진 “잠언적 금언”(Longenecker 1998, 296)을 차용하고 있다고 제기한다. 슈라이너(Schreiner 2010, 379–80)는 “옛 세계의 질서”에서 구별된 “새 창조”를 강조한 반면, 던(Dunn 1993, 343)은 구약 언약 내러티브와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 베츠는 “새 창조” 개념이 다른 종교들의 “제의적 차별점들”을 없애버리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6:15에서 바울은 “새로운 종교의 건립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대범하게 주장한다.
• 던은 바울에게 있어서 “새 창조”는 이전 유대교와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 약속과 (유대인) 상속자들의 ‘오는 시대’”의 성취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 조지는 “새 창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어진 개인의 구원과 성화의 측면에서 해석한다. 그는 이것이 (중생에서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거룩한 성숙까지 이르는) 회심의 전체 과정을 수반한다고 주장한다.
• 저비스는 비록 바울이 ‘카이네 크티시스’(kainē ktisis)란 표현을 자신의 다른 본문에서는 사용하지 않지만, 그 배후의 신학은 바울 서신의 다른 본문들과 일치한다고 제안한다(참고, 갈 2:19–20; 롬 6:4–6, 11; 8:18–25).
• 롱에네커는 해당 구절의 간명함은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이 전에 알고 있는 표현을 사용한 것임을 암시한다는 베츠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는 (아마도 신약 이후에 기록되었을) 모세의 묵시록 및 유대교 문헌에서 발견되는 유사 표현에 이목을 집중시킨다.
• 마틴은 ‘카이네 크티시스’(kainē ktisis)란 표현을 바울의 묵시 신학의 일부로 해석하면서, 갈라디아서 6:15 기저에 있는 신학의 급진적 “새로움”을 강조한다. 마틴의 관점에서, “새 창조”는 옛 우주 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재편성을 의미하며, 그분이 이 질서로 침입하신 이유는 세상이 “하나님에 반하는 권세들의 수중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 맥나이트는 갈라디아서 6:15를 민족주의적 용어들로 이해하여 어떤 사람의 유대인 또는 이방인 신분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읽는다(비교, 갈 3:28).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새 백성, 즉 “새 창조”인 교회만 있을 뿐이다.
• 슈라이너는 갈라디아서 1:6의 “이 악한 세대” 및 갈라디아서 6:15의 “새 창조”가 이 편지 안에서 “봉투”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그는 바울이 할례를 새 창조가 아닌 “옛 세계의 질서”로 지정한 것은 유대 무리들 안에서 할례의 가치를 감안할 때 “놀라운 것”임을 인정한다.
묵시 하나님이 인류 역사에 개입하여 그 백성을 구원하고 그들의 적을 멸망시킬 것을 기대하는 세계관이다. 억압받는 유대인과 기독교 집단에서 생겨났으며, 평화, 정의, 의로움이 지배하는 정의로운 유토피아 사회, 즉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기대와 더불어 일어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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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단어 연구
‘프도라’(Phthora), “썩어질 것.” 갈라디아서 6:7–8에서 바울은 육신 또는 영을 따라 사는 삶의 선택의 결과를 예상한다. 그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육신을 위해 심는 자들은 육신에서 “썩어질 것”(프도라, phthora)을 거둘 것이라 말한다. 바울이 사용한 용어, ‘프도라’(phthora)는 동사 ‘프데이로’(phtheirō)에서 유래하며 “썩어질 것” 또는 “멸망하는 것”으로 번역된다. 바울은 이 단어와 그 동족어를 자신의 편지 다른 본문들에서도 사용한다.
고린도전서 3:17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멸하면”(프데이레이, phtheirei), 하나님이 그를 “멸하실”(프데레이, phtherei) 것이라 경고한다. 고린도전서의 이후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를, 운동 경기의 목표와 반대되는, “썩지 아니할(아프다르톤, aphtharton) 상급”(고전 9:25)으로 묘사한다. 에베소서 4:22에서 바울은 “옛 자아”는 그 유혹의 욕심 때문에 “부패했다”(프데이로메논, phtheiromenon)고 말한다. 이 용어는 로마서 8:21, 골로새서 2:22, 베드로후서 1:4, 2:12, 19를 포함해, 신약의 다른 본문에서도 발견된다. 갈라디아서 6:8에서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후에 제시될 “새 창조”에 대한 언급(갈 6:15)을 예견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육신을 위해 심는 자들은 ‘프도라’(phthora)를 거둘 것이며 이는 그들이 “새 창조” 대신 옛 시대에 따라 심었기 때문이다.
‘스티그마타’(Stigmata), “흔적.” ‘스티그마’(stigma)는 신약의 하팍스 레고메나다(비교, 70인역 아 1:11). 그것은 문자적으로 낙인으로 인한 구멍 또는 흔적을 의미한다. 비록 후대의 기독교 역사에서는 “그리스도의 스티그마타”에 호기심을 가졌지만(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에 수록된 해당 항목을 보라), 바울이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의 배경은 아마도 문신이 새겨지거나 낙인이 찍혔던, 전쟁의 노예 또는 죄수 개념일 것이다.
하팍스 레고메나 “한 번 언급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 헬라어 문구에서 유래한 것으로, 특정 문서나 글 모음에서 한 번만 등장하는 단어들을 가리킨다.
바울의 논리는 아마도 이러할 것이다: 신학적 의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갈 2:19; 6:14),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한 자신의 육신의 고난을(갈 5:11; 6:12), 자신의 몸에(엔 토 소마티, en tō sōmati) 지닌 “예수의 흔적”(타 스티그마타 투 이에수, ta stigmata tou Iēsou)으로 보았다(비교, 고후 4:10).
갈라디아서 6장에서 제시되는 바울의 표현은 정통 신학을 고수하는 것뿐 아니라, 신자들의 공동체 내에서 복음의 기본 원리를 살아내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참고, 갈 5:6).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14에서 율법 전체를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하면서도, 갈라디아인들이 “믿음의 가정” 안에서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식들, 즉 용서, 서로의 짐을 지는 것, 자신의 일을 살피는 것을 열거한다(갈 6:1–5). 바울에게 있어 이러한 윤리적 권면의 기저를 이루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고 성령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따라서 서로를 상호 존중으로 대해야 하는데, 이는 그들이 이제 사람들을 나뉘게 하는 율법에서 자유케 되었기 때문이다(갈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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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 – 박형용 (pp.~83)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구절은 주관적인 구원론을 지지하는 구절로서 개인 성도의 중생과 회심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음. 이런 까닭에 이 구절은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폭풍 같은 인생의 마음속에 생긴 내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음. 그러나 게할더스 보스는 다른 각도로 이해하였음. “완전히 새로운 환경, 더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창조되었으니, 해당되는 사람은 그 세계 안에 거주자이며 참여자이다. 물론 변화된 주체의 내면성이 배제되지는 않았지만, 이 구절의 일차적인 의미는 변화된 주체의 내면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변 세계 전체가 새로운 국면과 특성을 갖게 된 것이다.”
바울의 언어에서 크티시스라는 단어는 전체 창조물(골 1:15)에 관하여 사용되었으나, 크티스마는 개별적인 창조물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우리는 이 구절에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함축적인 의미가 나타나있다는 사실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세계 질서의 대조를 발견한다. 새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질서를 가리키나, 옛것은 구속받지 못한 비참한 세상을 가리킴(갈 6:15).
리델보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속한 자들을 위해 먼저 죽고, 그들은 단지 후일에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서 죽으셨을 때, 성도들도 역시 그분과 함께 죽었으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다.”
바울 사도가 고후 5:17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사용할 때에, 그는 그것을 개인의 주관적인 상태에 관하여 사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이전 것들”과 “새 것들”은 모두 중성 복수로 사용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단어를 중성으로 사용함으로써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구속역사를 가리키는 데 사용했다. 옛 질서는 지나갔고 새로운 질서가 이미 시작된 것.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 안에서 새로운 창조, 즉 새로운 존재질서를 성취하셨다. 리델보스는 말하기를 “이전 것”은 죄와 곤경에 있는 구속되지 않은 세상을 의미하고, 새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동시에 임한 구원의 때와 재창조의 때를 의미한다. 새 시대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옛 시대로 침입하여 들어왔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세대로 옮겨졌다.
보스는 카이네 크티시스를 새로운 피조물(성도 개인을 지칭)보다는 새로운 창조물(전체 세상)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카이네 크티시스는 한 개인의 변화를 가리키지 않고 종말론적인 변화를 가리키며 오는 세상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 사도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새로운 창조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설립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받는다.
바울 사도의 구속사에 대한 사상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새로운 창조라는 말로 요약됨.
보스 “그 새로운 피조물은 모든 종말론이 절정에 달하는 세계 갱신의 시작을 의미한다”라고 말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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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 조병수(pp.232~)
1. 대적자 (6:12-13)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대적자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지 지적함.
바울은 대적자들을 가리켜 “육체로 잘 보이려고 하는 자들”이라고 부름. 이들의 특징은 내용보다 외면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내용을 아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할례라는 외면을 나타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 속보다 겉에 치중하는 자들은 항상 이런 오류를 저지름.
대적자들은 성령을 알지 못하고 믿음도 알지 못함. 그들은 오직 육체에만 관심을 가졌음. 사람과 행위에만 관심을 가졌음. 따라서 대적자들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였음.
이들의 목적은 두 가지.
1)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핍박받지 않게 하기 위함
할례를 받는 것은 유대인과 동일하게 행동하는 것이며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은 유대인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는다면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 그러나 그들이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상하게 여기고 핍박할 것. 대적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할례를 강요했던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핍박 받지 않으려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님. 이것은 매우 값싼 신앙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불신자들에게 걸리는 것과 어리석은 것. 십자가로 인해 핍박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은 좁은 길을 가는 자들임.
2)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기 위함.
대적자들은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성도들에게는 할례를 강요함. 무엇보다 이것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는 생각에서 나오는 시도. 자신의 부족함을 은닉하기 위해 남에게 잘못된 것을 강요하는 것. 이는 성도를 이용해서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에서 나오는 시도. 이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성도를 잡아먹는 것.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행위.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타인에게 잘못된 것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만 함.
2. 사도 바울(6:14, 17)
바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 자랑함.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바울의 자랑임.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기 때문. 그러므로 바울은 세상에 대해 연연할 것이 없음.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면하려 하지 않고, 세상에 대해 자랑하려 하지도 않음. 따라서 바울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지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에 빌붙기 위해서 어떤 아첨도 할 필요가 없음. 바울에게 오직 십자가만이 자랑거리일 뿐. 바울의 자랑거리는 오직 그의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뿐.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다면 세상으로부터 핍박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음. 그런 자에게 있어 세상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함.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입장을 결정하는 표준이 됨.
3. 신자(6:15-16)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구별이 사라짐. 바울은 이미 앞에서 이 사실을 천명하였음(3:27-28).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는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헬라인이라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음. 할례를 받았느냐 할례를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 할례를 받았을지라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은 사람은 무의미하며, 할례를 받지 않았을지라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의미가 있는 것. 새로운 피조물은 “이 규례를 따라 생활하는 자들”임. 그들에게는 새로운 규례가 주어졌음. 그것은 그리스도의 법(6:2)임. 또한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임.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민족이며 복음의 사람임. 사람을 좋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을 구하는 사람임.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언어, 새로운 행동이 나옴.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새 피조물인 신자들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기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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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NT – 모이세스 실바 (PP.597-)
바울은 친필로 편지 쓰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며 결론을 시작함. 바울이 글자 크기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편지 쓸 때 자신의 마음에 일어난 격동을 부각하는 방편일 것. 큰 글자라는 것은 바울이 제기하는 문제와 결과에 대해 바울이 투자한 노력이 시급한 문제라는 사실을 암시함.
바울은 자신이 이미 쓴 것(갈 1:1-6:10)을 되돌아 봄. 친필로 쓴 자기 편지의 성격에 대해 반성하고, 자신의 전도로 회심한 자에게 그들 앞에 있는 편지의 내용과 똑같이 행하도록 촉구함으로써 교인에 대한 마지막 호소를 시작하기 때문.
6:12
바울이 격동한 원인은 13,14절의 주제. 대적자들이 억지로 할례 받게 하는 것은(아낭카주신)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음. 할례를 강요하는 일이 사도 바울이 기록하는 시점에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님을 함축한다. 따라서 번역은 “그들이 너희를 억압하고 있다”가 된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시점에서 대적자들의 행위가 실현되지 않은 목표로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거짓 선생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한 호의적인 동기가 아니라 자기들의 이득을 위한 이기적이고 비겁한 동기에 따라 활동하고 있다고 비난함. 거짓 선생은 복음을 따르는 것을 자기들이 존중하는, 아니 사실은 자기들이 두려워하는 사람들(비기독교 유대인)에게 좋게 보이는 것에 맞추고 있다. 자기들을 더 좋게 보이도록 만들거나 명성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이와 같이 행동하는 것.
거짓 선생은 기독교 운동을 유대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율법에 대한 순종에 있어서 더 자유롭게 만드는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에 맞추어 유지되는 운동으로 보게 만들고 이방인까지 이에 순응하게 만든다면 동료 유대인이 기독교를 더욱 쉽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음.
(거짓 선생은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은 갈라디아 전체에 나타난 육체에 대한 부정적 의미를 그대로 담고 있음. “모양을 내다”라는 표현은 육체를 단순히 외모로 보는 것을 암시함. 거짓 선생의 중심적인 관심사는 바울의 관심사, 즉 성령과 성령이 인도하는 삶보다 부정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제시됨.
결론적으로 거짓 선생은 박해를 피하고자 한 것.
갈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이 동기는 본질적으로 모양을 내려고 하는 자들의 욕망이 가진 이면을 보여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이 보기에 복음의 진리가 더 이상 정결함과 오염에 대한 율법 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혼합 공동체에서 유효하게 일어나는 십자가의 걸림돌을 가리키는 압축된 표현임. 비기독교 유대인은 단순히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 관념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의 특수한 함축적 의미 때문에 이 복음을 전파하는 유대인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하도록 동기를 얻었을 것. 바울은 메시아가 온 이후로 율법의 역할이나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기초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가 지닌 함의가 무엇인지 그들에게 말했기 때문.
거짓 선생은 확실히 자기들은 율법에 대한 충실함을 보존하고 확대함으로써 경건한 삶을 추구했다고 믿었음. 그러나 바울은 자신과 거짓 선생의 활동에 있던 역학 관계에 대해 그림을 더 크게 보는 위치에 있었음. 바울은 유대 기독교 공동체에 가해진 압력을 잘 알고 있었음.
바울은 매질과 돌팔매질을 당하며 그 압력을 몸소 느꼈음. 바울은 이방 그리스도인을 유대 그리스도인처럼 변화시키려고 애쓰고 디아스포라 지역에 퍼져 있는 기독교 집단 속에 율법에 대한 충성으로 최소한 모양을 내려고 했던 유대인 기독교 선생의 동기를 평가할 때 이런 압력도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함.
거짓 선생은 바울이 주장하듯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가?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유대교 생활 방식을 가장 엄격하게 실천하는 당파인 바리새인의 일원으로 자신이 신실하게 지켰던 율법의 정확한 기준에 따라 거짓 선생의 활동을 판단할 수 있었음. (행 26: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행 26: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바울은 대적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함. “그들이 너희의 육체(너희의 할례 받은 생식기)로 (다른 유대인의 눈에) 자랑하려 함이라” 거짓 선생은 회심한 갈라디아 사람들을 통해 자기들의 개인적인 기념물로 만들고 싶어 함. 따라서 거짓 선생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부여할 수 있는 것 속에서 자기들의 자랑할 것, 곧 자기들의 명예에 대한 권리를 찾는 사람들의 본보기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자신을 위한 기념품으로 만들고자, 또는 자신의 목회적인 성공의 통계 속에 집어넣고자 하는 것과 같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함.
바울이 기꺼이 명예를 주장하는, 자랑하는 유일한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 바울은 고후 11:21과 빌 3:4-14에서 자신의 자랑거리에 대해서 말함. 바울은 자신의 이스라엘 혈통과 율법 준수에 대해 언급하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명예와 가치를 찾는 것을 포기함. 그 대신 자기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자기에게 그리고 자기를 위해 이룬 것에서 자랑거리를 찾고, 세상의 가치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며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함.
바울은 “자랑” 개념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희생 심상을 나란히 배치함. 그리스도인은 여러 세기에 걸쳐 십자가를 아름답게 꾸민 무수한 형태를 보았기 때문에, 나무에 나체로 매달려 피흘리며 죽어가는 그 비참함과 죽음에 대한 고통과 통증은 제대로 상상할 수 없음.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 따라서 십자가가 세상의 가치와 지도 원리를 어떻게 완전히 뒤집어 놓는지 완벽하게 보여주는 상징이 됨. 예수님에 대한 심판을 의미했던 십자가가 그 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세상에 대한 심판이 됨.
바울은 세상이라는 말을 세상의 다양한 범주인 민족, 계급, 성별,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초등학문을 통해 이 세상 질서의 부당하고 폭력적이고 속박적인 관습을 영속화하는 인간 사회의 다른 작용 원리를 통해 규제되는 삶의 질서를 가리키는 데 사용함. 세상은 악한 세대이며 뒤틀리고 타락한 옛 피조물이며, 향락과 야망의 영역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는 선언은 이러한 구조와 세상 논리가 바울에 대해 가지고 있던 권세가 끝난 것과 바울이 이 구조와 세상 논리에 복종하는 일이 끝났음을 의미함. 이는 모든 제자가 공유해야만 하는 죽음임. 모든 제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육체와 함께 그 충동과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함. 유대인과 이방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중시하는 악한 세대의 옛 법규를 초월하여 온전한 자유 가운데 살기 때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악한 질서와 구조의 규칙과 규례를 죽이는 도구가 됨. 예수님의 십자가는 새로운 피조물을 낳기 때문. 바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랑하기에 합당한 근거인 이유는 엄밀히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 악한 세대의 권능과 이 권능이 인간 생활 및 공동체를 지배하는 억압에서 해방하는 도구이기 때문.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행위자인 성령이 예수님을 믿는 자 가운데 들어가고 그들 가운데 거함으로써 그들 안에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의로운 이가 살게 함.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은 각 그리스도인 속에,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 속에 내주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이다.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은 새 아담인 그리스도의 형상이 신자 안에 충분히 이루어질 때(2:20; 4:19), 따라서 신자가 옛 아담이 아니라 새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될 때 형성된다. 이 진술은 바울이 앞에서 비슷하게 진술한 선언을 즉각 환기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 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5:6). 이 두 진술 사이의 평행 관계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새로운 피조물의 동장에 필수 요소라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함축적인 의미로 보면 이는 바울이 5장 13절 -6장 10절에서 믿음이 사랑으로써 역사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해설하는 것처럼 바울에게 핵심 관심사인 “성령 가운데 걷는 것” 또는 “성령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바울은 2장 14절의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걷는” 이라는 말을 환기하는 심상인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 평강과 긍휼의 복이 있기를 하나님에게 기원한다. 이 조건적 복은 독자에게 바울의 규례에 맞추도록 권고하는 한편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복의 길 바깥으로(그리고 저주 아래에, 갈 3:10-12) 떨어짐을 의미한다고 그들에게 은연중에 경고한다. 이 두 본문에서 하나님 이 그리스도 안에서 초래한 새로운 현실에 맞게 행하는 것은 옛 피조물의 경계표지, 특별히 유대인 ( ‘할례” ) 과 이방인( ‘무할례” ) 을 구별한 경계표지인 규례와 원리를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따르다”로 번역한 동사( ‘스토이케수신’ )는 비슷하게 명령한 행동인 “성령으로 행하는 것 ( 성렁에 보조를 맞추어 걷는 것 ) ”( 5:25 )을 떠올리게 함.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은 것이 그의 진정성을 증명했다(6:17), 바울의 몸에 난 상흔이 그의 사명과 그에게 사명을 준 분에 대한 그의 신실함을 입증하는 증거였다. 바울의 몸에 난 상흔은 반대와 대적을 피하고자 곳곳에서 복음의 진리를 바꾸는 것이 훨씬 수월하고 편안했을 때 바울이 무엇보다 자기에게 사명을 준 분에게 순종했다는 것과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실천하는 데 신실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십자가 목걸이를 하거 나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것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고 성 령을 열매를 맺는 것에 있다( 5:22-23).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예수가 우리가 되기를 바라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삶 속에 낙인이 찍힌 예수 자신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다른 면에서도 흔적을 남긴다. 곧 우리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흔적을 남긴다.
그리스도인의 신실함은 또 십자가를 통해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6:14) 라는 바울의 관례에 맞추어 사역하거나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목사와 제자는 민족 집단, 특권 계층, 사회 경제적 계층 등과 같은 세상의 구분선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스도인은 그들 자신의 관계와 실천 속에 서 이런 변화를 증언하기 때문에 이런 구분선을 여전히 그들 자신의 정체성과 질서 의식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이웃에게 조롱이나 악의가 가득 찬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신실함의 문제는 자신의 실천을 세속적 사상가의 요구에 맞추어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성령의 요구와 새로운 피조물의 규례에 맞추어
적응하는 것에 있다. 오직 이런 길을 통해서만 기독교 공동체도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증언을 유지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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