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Notes
Transcript
본문: 마 9:9-13
제목: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역삼동에 있는 화평교회를 섬기고 있는 장태호 목사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처음으로 뵙자마자 어색한 분위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만, 말씀을 전하는 저도, 또 처음 본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여러분도 쉽지 않으시겠습니다만, 부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유익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시간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내용은 어디 무슨 소설책에 나오는 이야기나 유튜브와 같은 곳에서 출처 없이 나오는 이야기들을 보고 온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에는 그 종교가 믿는 바를 명시해 놓은 경전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경우에는 66권의 책을 한 권으로 모아놓은 성경책을 변하지 않는 말씀이자 오류가 단 하나도 없는 진리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40여명이나 되는 각각의 저자들을 통해서 각각 다른 시대에 성경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는데요. 구약성경은 히브리어,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경책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래서 교회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믿습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믿습니다.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죠. 교회가 이러한 내용을 굳건하게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말씀만을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에 있는 말씀만 믿는 것이죠.
자, 그렇다면 66권이나 되는 성경 말씀 중에,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성령님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접해야 하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그 말씀 중의 하나가 바로 마태복음 9장 9절에서 13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마태라는 사람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이 특별한가 라고 생각하실텐데요. 이 당시 세리들은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했습니다. 세금을 거둬서 로마 제국에 바치는 일을 했던 것이죠.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종합소득세를 걷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15퍼센트정도 내는 분들이 많은데요. 예를 들자면, 예수님 시대에는 원래 내야 하는 세율 15%에 추가로 세리들이 마음대로 세금을 더 거뒀습니다. 안 그래도 세금 내기 싫어 죽겠는데, 세금을 더 내라면 누가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거둔 세금으로 떵떵거리면서 살면 그런 사람을 누가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겠습니까. 예수님 시대에 세리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돈은 많지만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돈은 많지만 사회적인 명예나 지위는 얻을 수 없는 불청객과도 같은 존재가 세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는 굉장히 충격적인 행위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존재를 어떻게 제자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속된 말로 재수가 없어서라도 받으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그런 부정적인 시선과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마태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이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세리 마태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는 자리까지 갖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밥한끼 같이 먹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성인 남성의 경우에 빨리 먹으면 5분 10분이면 밥 한 공기 순식간에 먹지 않습니까? 이런 배경에서 생각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의 식사 문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식사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떠나서, 식탁 교제를 갖는 것 자체가 종교적 문화적 신분적 구별의 표시였기 때문에, 급이 맞는 사람끼리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나 사회에서 인정 받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겸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하신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당시 예수님은 살이 썩어들어가는 질병을 말 한마디로 깨끗하게 고쳐주시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말 한마디로 죽을 병을 고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이 사회에서 질타받는 세리 같은 사람과 겸상한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겠습니까?
마태복음 9장 11절 말씀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세기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하셨는데, 이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어찌하여, 도대체 무슨 이유로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느냐. 예수라는 사람이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유유상종이라고 했는데, 예수라는 사람도 똑같이 죄인이구나. 그도 똑같이 더러운 사람이구나. 이런 식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12절 말씀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예수님과 함께 식사한 마태와 마태의 손님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의 말에 따르면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세리와 죄인들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병든 자라고 말씀합니다. 병들었기 때문에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의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고치시는 의사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또한 13절 말씀 중간부분부터 보시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길을 걷다가 마태라는 친구가 겉으로 보기에 똘똘해보이고 써먹기 좋아보여서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죽어가는 모든 영혼들, 모든 죄인들을 부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서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인 관계 없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자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죄인이라는 것은 범법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인의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죠. 최초로 창조된 남자인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결과, 이 세상에 죄악이 들어오게 되고, 사람의 존재는 유한한 존재, 다시 말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인간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죄를 지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위법행위로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삶의 지침인 말씀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로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판별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치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이 바다에 빠진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수영할 줄 모르는데, 바다에 빠지면 어떻게 헤엄쳐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 기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죠. 따라서 물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구해줄 사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구해주지 않는 이상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바로 우리가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덧없고 허무합니까. 사람의 인생은 너무나 짧고 빠르게 지나갑니다. 지나간 세월을 돌이킬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보상받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건강도 마찬가지죠. 교통사고가 나거나 병에 걸리면,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또한 시대를 거듭할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이에 따라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은 행복하기가 너무나도 어렵고 출발선도 다르고 불합리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죄인들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성경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쓸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고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겠습니까. 사람의 재롱잔치를 보기 위해서? 사람이 복종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아뇨. 그런 것은 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너무나도 변덕스럽고 충성스럽지 못하며, 열길 물속보다 더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사람에게 얻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전능자가 보기에 한없이 더럽고 하찮은 죄인의 소유를 탐낼 이유가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 사랑을 받으려면, 부르심에 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셨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러자 마태는 세관에 앉아있다가 즉시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식사하는 자리를 갖기 위해 예수님을 초대하죠. 이런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인생을 돌이켜볼 때,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이 있다면 나를 이렇게 내버려둘 리가 없어. 왜 나만 불행해야 하지?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불완전한 죄인이기에,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과 감정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사고해야만 합니다. 내 인생에서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든지 관계없이,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부르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부르시고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그 손길을 거부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응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체험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아멘.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우리의 죗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치러주셨음을 믿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전적인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시간 함께 예배드린 분들의 상황과 처지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여 주시고,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어, 주님을 만나는 복된 계기로 삼아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