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77 views
Notes
Transcript
(153) 예레미야서와 새하늘과 새땅 김창대교수 01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Ss4yf0rUydU
전공이 이제 예레미야를 가지고 논문 예레미아에 새 언약을 가지고 /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주는 이제 어떤 가교 역할/ 예언서 읽는데 / 상당히 많이 도움/ 예레미아 의 새 언약의 도움이 되었고 발전 이사야도
(02:12) 예레미야의 새 언약을 알아야 소예언서 알게 된다.
소예언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가 결국은 새 언약이 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 에 오심이다. 대부분 ‘돌아오라’ 오랫동안 돌아오라고
📷
(05:25) 이 분량은 이사야의 그 두루마리 분량이 똑같아요 왜 이렇게 순서대로 이렇게 하나의 책으로 읽어라 이제 이렇게 힌트를 주고 있죠 예 작은데 이렇게 배열을 한 그 이유는 뭘까? 호세아는 시기가 좀 애매하지만 호세아 아모스 주전 750-740 아모스 그렇고 그러다가 쪽 가다가 이제 하박국은 이제 예루살렘 멸망 직전에 바벨론에 의해서 하박국의 학개는 예루살렘이 이제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되기 직전의 상황을 기술.
(06:31) 학개 스가랴는 바벨론에서 멸망하고 나서 포로에서 돌아온 거죠 돌아와서 학개 스가랴 선지자가 성전 재건을 얘기한 것/ 말라기는 그야말로 구약의 맨 마지막이니까 대체로 보면 어떤 뉘앙스나며 순서대로 배열된 것 같다. 시대 순서대로 대충 그런데 자세히 읽어 보면은 시대 순서대로 배열된 게 아니에요 미가서 같은 경우는 주전 750년 얘기하는 그러니까 동떨어져 있는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가 히브리어를 주전2-3 세기에 주전에 헬라어로 번역한 그리스 이게 70역이라고 하는 건데 그 70인역 에는 소예언서의 순서가 호세아 아모스 미가 그러니까 이 완전히 수대 순서대로 배울 수 있어요
(07:36) 미가가 맨 앞에 있고 뭐가 원본인가? 70인역의 원본 있어요 그거를 번역한 거니까 70인역을 대분 이라고 하는데 70인역이 번역했던 그 원본 히브리어 우리는 이제 우리가 갖고 있는 개혁 성경은 맛소라 사본을 맛소라 사본보다 더 유대인들은 그 히브리어 사본을 권위 있게 본다.
(08:43) 사본학에서 보면은 오히려 이해 안가는게 원본이 가능성이 높아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후대로 가면서 점점 자기가 이제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정리를 한다 그러다 보니까 오히려 원본이 가능성이 봐요 그래서 이제 지금 우리가 맛소라 사본이 오려 원본의 가능성이 많은 보는 가능성이 많은데 문제는 왜 미가가 가운데 있느냐? 미가를 중심으로 앞뒤에 다 짝이 있다 요나 니느웨, 나홈은 니늬웨 심판, 오바댜는 에돔의 방관, 공의와 의를 행하지 않음이 하박국과 비슷, 너 높은산에 에돔아, 이걸 바벨론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이 억지스럽지만 / 아못. 스바냐, 공의/ 요엘, 스가랴도 공의가 물처럼 / 호세아 고멜의 관계를 통해 말라기 역시 에서를 싫어하고 야곱을 사랑했다. 젊은 시절의 아내와 같은 이야기 즉 사랑 이야기, 치료의 광선이 호세야에도 치료라는 말이 나온다.
호세아 부자들에 대해 하나님이 책망할 때 청중이 하나님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9장8절 ‘에브라임은 내 파수꾼이요 ~~’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인데 거짓 원한을 품었다. 책망하니까 신정론에 의심을 품는다. 말라기 2:17절 후반에도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말3:14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 무엇이 유익하리요. / 호세아 – 부자들을 책망하니 하나님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고 말라기는 하나님이 약속을 안지키시고 포로 후기에 왜 약속을 맺지 않는가 해서 하나님을 원망한다. 원망의 구조가 되어 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이를 동심원 구조라하고 매우 중요하다. A b c d e f e’ d’ c’ b’ a’ 구조이다. 성경을 기록한 서기관들이 오늘날처럼 다 쓰는 게 아니라 특정 계급들이 썼을 것이다. 전문 교육을 서기관들이 쓰는데 쓰는 패턴으로 쓰고 그전에는 구전이었다. 그러려면 패턴을 가져야 외우기 쉽다. 브루스 월키의 창세기, 노아 이야기가 패턴 즉 동심원 구조로 되어 있고 시편 1편에서 의인과 악인 대조인데 의인은 율법을 즐거워 한다. 다시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 하면서 대조를 한다.
📷
18:57 시를 외울 때 패턴이 있으면 외우기 쉽다. 다양한 패턴이 있다. 패널 구조도 있다. 동심원 구조의 핵심은 가운데 있다. 시편의 경우. 나무 같음과 겨 같음의 결과가 중요하다.
미6:6-8 이게 중요하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인애)와 겸손이 동행하는 것이다. 인애, 공의, 의 이다. 공의를 정의, 의를 공의로 번역했다.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신약의 개념이 없어져 개역개정 아쉽다.
선지서의 핵심이다. 이사야, 렘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개념이다. 인해 헤세드. 공의 미슈파트, 정의 쩨데카, 쩨텍 / 헤세드는 사랑이다. ‘나를 사랑하라’ 부모와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격이 있다. 부모가 먼저 사랑한다. 자녀는 따르고 순종하는 모습, 신뢰이라면 충성, 감사, 신뢰로 나타나지만 헤세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끈이다. 그것을 내용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자기의 방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사람 사이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인애 없는 공의 있을 수 없고 인애는 있는데 공의 없는 건 없다. 사랑한다면 행동하지 않는가? ‘의’는 무엇인가? 오늘은 아는 체하더라도 내일은 모른 체한다면 ‘의’가 없는 한결이 없다. ‘의’는 인애와 공의보다 한 차원 높은 의미를 갖는다.
호세아 – 인애를 원한다. 당연히 공의가 나타나고 ‘의’ 즉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모스는 ‘공의’를 강조한다. / 렘 9:24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의와 의를 원한다고 했고. 미가는 인애. 공의, 겸손히(의) 동행한다고 표현한다.
소예언서는 ‘인애, 공의, 의’를 행하라는 것이다. 왜 중요한가? 살펴보자. 주전 750 – 740년 활동 선지자 – 호세아, 아모스, 미가. 이사야. 이 시대에 기라성 같은 선지자가 나타났을까? 글을 쓰는 선지자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엘리야, 엘리사 글 안썻다.
제명에 산 사람이 없다. 고난을 엄청 받은 특징도 있다. 주전 800-750년에 일어난 일을 알아야 한다. ‘태평성대’였던 시기였다.
북. 남유다 시기에 북-여러보암 2세, 남유다 – 웃시야 / 둘 다 50년을 통치한다. 요충지였는데 오랜 시간 전쟁이 없었던 시기였다. 20년 주기로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런 태평성대의 시기였는데 그러니 1. 상업이 발달 2. 상인이 등장하니 상업도로 생기고 통행세 받고 부가 일어난다. 부자 엘리트가 나타나고 돈을 가지고 부동산 투자 (밭을 산다) 그런데 자작농을 소작농으로 만드는 현상이 일어난다. 미가 – 너 밭을 탐하는 자 2:1 / 사5:8 밭에 밭을, 가옥에 가옥을/ 자연스럽게 부익부 빈익빈이 일어난다. 미가서 2장에 너 밭을 탐하는 자여 3:12 그러면 시온을 갈아 엎어 밭으로 만들어 줄게, 이렇게 미가는 언어유희를 잘한다. 2:1을 예를 들면 – 미쉬케퍼트(침상) 라(악) 하사브(꽤하여) 사데(밭) / 미쉬파(지파) 라(악) 하사브 사다드(망하게) 이런 워드 플레이를 한다.
부자의 탐욕을 드러낸다. 호12장 부자가 있다. 상업자본으로 땅을 사는 자들 8절. 실로 부자라. 불의를 발견할 자 없다‘ 부자들은 죄가 없다고 말한다. 부자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야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6절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해라. 부자들은 무슨 말이냐. 축복받는데 라고 말한다. 12:4절에 보면 부자들을 3절에 야곱은, 12절에 옛절에 야곱이 이렇게 2번 했다. 씨름했다. 재산 지키려고, 밧단아람에서 사람을 20년동안 섬겼다. - 즉 야곱 꼴 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신앙을 저버렸냐 아니다 재사를 잘 드린다. 미가 – 만만의 재물, 맏아들을 바칠까 ? 사1:11 너희의 무수한 재물이...호6:6 번재 원하지 않는다. 암 – 난 제사 이야기 한 적없다. 공의를 하수와 같이 흘려라.
헛된 제사 – 왜 제사를 드렸을까? 제사를 드려야 복을 주신다. 주고 받는 대가이다. 기계적 관계이다. 말씀을 따라 어디든 순종하는 것이 / 그런데 바알 신앙에 물든 것이다. 제사 종교로 전락을 한 것이다. 시50편에 나온다.
제사를 드리는 목적은 무엇인가? 레위기를 보자. 46분
속죄이다. 용서를 체험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복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복의 상태(효 – 요17) 예수의 십자가를 보고 돌아서 사진을 찍을 수는 없는 것이다. 제사의 목적이다. / 51편 – 상한 심령이다. (다윗 밧세바 범죄)
헛된 제사에 대한 하나님께서는 멸망 시키시기 전에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기라성 같은, 끌려 갈 때(성전 없는) 글을 읽으라고 기회를 주신 것이다. 722년에 북이스라엘 살만에셀 5세에 의해 열왕기하 15장에 (744년에 나타난) 멸망했다. 이때 701 산헤립 침공 때 미가가 멸망을 예고했다. 이미 작정된 상태였다. 미3:12절 예언 - / 렘 바벨론 멸망 직전 렘26장 18절 미가가 ... / 히스기야가 회개했다. 유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 당시 산헤립은 강력한 무기를 가진 왕이다. - 다른 왕들을 죽였다고 실린더(원통형 기록) 기록했는데 히스기야만 죽이지 못했다. 상대가 되지 못하는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려 준 것이다.
결국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다. 렘이 이때 렘 7장에 4절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3번 – 믿지 말라. 여기서 예배만 드리면 안전 축복 신앙을 말한다. 헛된 제사를 드린 것이다. ’ 길을 바르게 공의 행하면...‘ 이라고 기회를 주셨다. 그러니까. 586 시기에는 이런 소선지자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당시 ’하나냐‘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다. 예배 드리면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렘이 강조한 것이 ’새 언약‘이다. 물론 호세아도 2장에서 이야기. 이사야도 새 언약을 예언했다.
남. 북 멸망 예언 – 포로 – 새 언약 – 왜 새 언약인가? 예수님 믿기 위해서인가? 목적은 기계적 신앙을 타파하고 ’인애. 공의. 의‘를 새롭게 새우시는 것이다. 렘도 그런 기조에서 예언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시대 스가랴도 새 언약 / 말라기 – 새 언약의 사자를 이야기 한다. 이런 상황(기계적 신앙)을 타파하고 ==== 여기까지.
2번
예수님 당시 특징, 율법주의다. 왜 좋아하지 않았을까?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20 포도원 비유, 율법사, 바리새인 – 처음 온 사람 – 지켰으니까 받는 게 당연하다는 비유이다. 처음이 나중되고 나중이 처음 되는 것, 불러 주는 곳이 없다. 빈 손으로 가야할 상황이었다. 1시간 – 하루 싹 – 돈 보고 일했겠는가 주인의 은혜를 보고 일했겠는가? 마 23:23절 율법의 더 중한 바 – 인애. 공의, 의 = 구약과 눅 11`:42 =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것이다. ’화있을진저 십일조 드리면서‘
무익한 종, 할바를 했을 뿐이라고 하는 마음의 상태를 가져야 한다. 한국 교회가 모르거나 적용을 못하거나 그렇다. 새 언약의 목적이 이것이다.
시편 33편에도 인애, 공의. 의로 창조하셨다. /구약의 왕의 의무 사무엘하 8:`15-18 다윗이 왕 올라서 공의와 의를 행했다. / 소돔, 고모라 사건 – 아브라함을 부를 때 공의. 의를 위해 불렀다고 기록한다.
미가가 바로 그 이야기를 한 것이다.
새언약은 인애, 공의, 의다. 그렇다면 기존의 언약은 무엇이었나?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둘을 복음과 율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대표적으로 모세 언약을 생각해본다면 기존 언약은 없나? 그렇지 않다. 당연히 율법에도 인.공.의가 있다. 그렇다면 차이가 뭘까. 새언약이 너무 좋기 때문에 ’복음‘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다. 이것이 복된 소식인가? 틀린 것은 아니다. / 레위기 피 흘려 구원 받았다. 그렇다면 차이가 뭘까? 피의 질이 틀린가? 이것이 아니다. 새언약 인애.공이. 의를 확실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이 할 수 없었다고 하면 세대주의가 되는 것. 기준언약과 같다하면 유대주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연속성, 불연속성이 있는 것이며 비슷한 요소가. 인애. 공의. 의가 중심에 있다면 신약은 확실함이라고 하고 구약은 그럴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면으로 생각해보자.
율법의 지향점은 인,공.의이다. 신명기 10장 율법의 최고 ’하나님 사랑‘이다. 인애에 있다. 롬9장을 보자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가지 못하고 자기 의지를 좇아 갔다.
율법의 기능 –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알려주고, 죄를 깨닫게 하고, 은혜의 통로이다. 율법을 지킴으로 복을 준다. 그래서 사랑을 느끼는 통로이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제사법‘ - 율법으로 완벽하지 못할 것을 아신다. 그래서 죄의 용서를 통해 은혜를 체험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의, 의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율법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유월절 허리에 띠를 두르고 서서 먹다가 예수님 시절에는 누워서 먹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사랑하심을 느껴야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느낀다. 부모의 사랑을 느껴야 부모를 자녀가 사랑한다.
롬9:31-32 그런데 지키니까 복이 오네 그러면서 행동으로 복을 받는 공로로 보게 된 상태이다. 부모가 돈, 땅을 주는 이유가 사랑하라는 것이지만 자기가 잘해서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하지 않고 대가만을 바라는 기계적인 모습이 되엇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언약은 어떻게 인.공.의를 행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는데 요1:16-17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4)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 은혜 위에 은혜 – 1 은혜 율법, 2 은혜 – 예수께서 가져온 은혜와 진리이다. / 구약적 은혜는 헤세드, 헬- 카리스/ 진리 – 알렉세이아 / 시편에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편 40: 11) 그래도 옮긴 것이다. - 헬라어로 바꾸면 은혜와 진리로 이것이다. //
새언약은 진정한 인.공.의를 주어 행하게 하시는 것이다.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이다.(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확실히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고 사랑하셨구나 아는 것, 요한복음 마지막에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 15 포도나무 ’사랑안에 거하라‘ 13장1절 끝까지 사랑하신다. /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는 분이신데 제자들이 자신을 팔 것인ㄷ 그럼에도 사랑하는 것을 보여 주신다.
롬 4장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의로다 함‘을 얻었다. 의는 ’인.공.의‘를 함의하는 용어이다. 인.공.의를 행한 것으로 인쳐주신다는 것이다. 죽으시고 돌아가심, 부활하심을 믿는 순간 –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정하시지만 나는 실제적으로 어떤가? 2천년전 예수의 죽음이 믿겨지는가? 롬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새언약의 놀라움은 ’성령‘이다. 성령의 작용이다. 요한복음은 그래서 성령을 주신다(효) 새 언약이 갖는 놀라운 점이다.(축복이다) 회개, 갑작스러운 눈물 등 그렇게 급작할 때,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
롬1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ㄱ)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가 나타나서‘ = 의 = 인. 공. 의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할 수 없는 하나님을 아무런 댓가 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그렇게 믿음이 자라나는 과정을 갖는다.
한편 강도, 사랑이 있다. 열매 맺는 순간이 없는 것은 맞다. 그럼에도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데 결정적 역할이 성령이시다. 롬5장
믿음의 정의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다. 신앙의 참을 ’열매‘로 안다고 할 때 절반만 맞는다. 가짜일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기도하겠다‘는 말로 끝날 때. /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그만큼 느끼는가? 롬8장은 로마서의 핵심인데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35절부터 –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믿음의 핵심은 사랑이다. 효) 믿음, 소망, 사랑 – 마지막까지 가는 것은 사랑이다.
성령의 부어짐
이사야가 새언약을 이야기하면 말했다. ==(여기까지)
3편
예레미야는 성령이야기 안했고 사59장에서 이야기했다. 21절에 ‘새 언약은 이러하니...’
구약의 성령론 – 새 언약에서 성령은 ‘내주하심’이다. 요한복음,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구약은 왕, 선지자들에게 임했다. 내주하는 경우보다 외주하는 개념, 머무르는 개념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웃니엘이 임했다.(하야동사), 기드온 ‘감싼다’, 삼손(짤르흐 – 성령이 급격하게, 눈을 감고 안는 것 같다), 다윗도 그렇다. 사무엘서 착한 다윗에서 – 밧세바 일탈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회개를 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외주와 주로 직분자에게 임하는 형태인데 개혁주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중생은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작용으로 되는데 그렇다면 구약은 어떻게 그런가? 그들의 힘으로 받았나? 이러다 보니 극단적 개혁주의 – 내주했다‘ 라고 해석한다. 구,신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논리다. 구약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신약에서 예수께서 보혜사 보내심, 들어감을 이야기 했다는 것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 했다고 봐야하는 논리이다. 물론 구원의 방식은 성령이시다. 구약의 구원에 대한 신약적 관점보다 약한건 사실이다. 이사야 40장에서 포로로 끌려간 백성에게 전하는 메시지 인데 1장1절에 ’공의와 ...충만했던...창기가 되엇느냐‘고 시작한다.
1-39 심판 메시지 / 인,공.의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한다. 극상품 포도나무 – 열매가 인.공.의인데 미스파, 쩨아카 (언어 유희)로 그래서 심판 – 포로가 된다.
40-66 회복 메시지 / 포로에서 백성으로 돌아와 새 언약 맺겠다는 메시지, 53장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 54장 10절 – 나의 인자는 떠나지 않는다. 언약은 옮기지 않는다.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이 와서 54장 약속을 맺는다 (신약, 예수, - 오심 – 그리고 언약) / 포도주(기쁨), 젖(평화) <- 주신 것이다. 53-54-55장을 차례로 읽으면 이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이 주지 않는 기쁨을 갖게 된다.
40장 포로기 사람들에게 예언한다. 계획은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기 때문이다. 40장 중요는 – 포로 그래서 고난 가운데 있어, 힘들어 한다. 너무한다. 40:7절에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내 사정은(길) 송사는‘ 포로기에 너무 고난을 받으니까 너무 힘들다. 좀 적당하게, 미슈파트를 행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중이다.
41:10절 ’두려워 하지 말라‘ 이렇게 3번이나 말씀하신다. (40-45장 3번) 도와 줄게, 힘 줄게, 너 힘이 없어 두려워하지 그래서 힘 줄게, 14절 너 버러지(구더기) 같은 야곱아 – 힘없는 상태를 버러지, 구더기,이다. 42장은 그래서 고난 받는 이유가 너가 죄를 지어서야, 포로기 고난 사람들 생각에 죄라면 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닌데 – 거기서 오는 두려움이 있다. 자격 없는 상태에 대한 것이다. 다시 버리는 것 아닌가? 그럴 때 43장 다시 두려워 할 때 ’지명하여 불렀다‘고 위로 하신다. 43:4 너는 보배롭고 존귀,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까지 하신다.
그럼에도 또 다른 두려움 ’돌아 갔다 쳐도‘ ’인.공.의‘를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또 다시 포로로 끌려갈 운명 아닌가? 다시 죄를 짓고 벌을 내릴 것에 대한 두려움 44:2절에 ’너를 지으며 ... 두려워 하지 말라(3)‘ 3절 ’나의 영을 주신다‘ --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성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45장에 또 다른 불만 – 성령을 주신다면, 처음부터 주시지 왜 고생 후에 이제와서 주시는 건가 45장의 메시지다. ’토기장이, 진흙‘ 비유이다. (자기를 지은 자와 다툰다) 논쟁이 나오는 이유는 ’왜 고생시켜 놓고 왜 이제 성령 주시냐‘ 토기장이로 잘 못 만드신거 아니냐고 – 여기서는 하나님이 답 안주시고.
그렇게 할 수 있는데 – 이걸 누구거라 생각하겠는가? 자기가 한 것이라고 할 것, - 능력 없음을 철저하게 느끼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행한다면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할 것이다.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이다. 61장 나 여호와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57:13-15)
성령의 역할은 ’인.공.의‘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새언약의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창조 질서를 세우는 의미‘가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왜 시작인가? 새언약을 통해 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었는가? 새 언약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100% 알고 인.공.의를 행하게 하는 것이자, 새 하늘, 새 땅을 함께 동반한다.
우리는 새언약의 수혜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아는가? 시금석은 ’사랑‘이다. 뭘 주기 때문이 아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의 상태가 새언약의 상태이다. 하나님이 주신 ’그것‘을 바라 봤다면 이제는 ’사랑‘ 안에 있는 것이다. 모든 선지자들이 ’고난을 통과해서‘이다. 절대로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핵심이다. 렘, 미가 특히 그렇다.
렘 31: (새언약의 문맥에서 말한다) 8절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고난을 통과하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나에게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미가 5장 (새언약 남은 백성을 이야기한다. 4:6 그날에 저는 자를 모은다. 7절에 야곱의 남은 자는 여러 나라 가운데와 많은 백성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들 중의 사자 같고 양 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그가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 어떤 사람인가, 이슬과 같은 존재, 그래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새언약의 수혜자가 될 것이다.
질문? 고난을 정말 통과해야 하는가? - 그렇지 않으면 뭘 했으니까? 라고 생각한다. / 진정한 고난은 정말 뼈도 못추린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받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감해 주신 것이다.
그렇다고 ’고난‘을 통과했다고 다 수혜자가 되는가? 그럼에도 그런 마음을 갖게 해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대표적으로 요나이다. / 소선지서 앞에가 요나이다. 참 희안한 인물이다. 물고기 뱃속은 일종의 고난이다. 그럼에도 나와서 화 내고 성 내고 했던 인물이다.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했는가?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다. 회개를 했다면 은혜 체험을 했다면 니느웨 백성의 회개를 보고 반응 했을 것이기 때문 2장에 보면 난 성전 보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랑‘한 것이다. 매스꺼워 토해 버린 것은 아닐까? 니느웨는 성전을 보고 기도하지 않아도 살려줬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열매로 알 수 있다고 하지만 ’열매‘가 가짜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절반만 맞는 말이다.
시금석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
포도주와 젖 (평화와 기쁨)이 내 속에 임했는가? 53장 고난 54 새언약 55 새언약의 축복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다. 삿5장 우유 시스라 우유 먹으니 잤던 사건을 기억하라. 젖은 우유이다. 평안의 상태
사55장 12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으로....1절의 포도주와 젖을 대비한다. 새언약의 증거이다.
예화 ) 칠레 광산이 무너진 사건 – 어떻게 견뎠는가? 60일간(확인) 생명의 리더가 있었고(규율), 건강을 책임지는 리더(전직 간호), 영적 리더(결정적인) 위로를 주고,
새언약의 수혜자는 기쁨과 평강이 있는가? 이것이 축복이다. 신앙생활 하는 목적이 하나님 사랑, 기쁨,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 하는 것인가? 위해서가 아니다. 기계적으로 갈 요소가 된다. 예레미야가 오직 사랑, 기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보고 어떨 때는 사랑, 기쁨만을 주시지 않는 분이다. 예레미아가 어릴 때 부름 받았다. ’어린 아이라 말을 못한다‘ 성전 무너진다고 예언하는 선지자다.
15:16절에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 기쁨과 즐거움이다‘ 누렸다고 했다. 점점 – 분노로 채우셨다. 핍박하니까, 18절 고통 심하여 낫지 않는다. 원망한다. 사역하는데 고통을 주는 자를 손대지 않으니 원망하는 내용이다. 19절 – 하나님의 말씀은 – 돌아오면 회개하면 이끌어 이렇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 렘 10:19 슬프다 내가 증상을 당했다. 사역을 하면서 고난받았다. 23저레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 24 징계하시되 너그럽게 해달라.
그럼에도 주님께서 주신 새언약은 즐거움과 기쁨을 주시고 거둬가지 않으신다. -3 끝 -
4부 //
복습> 새 언약 맺는 이유는 당연히 믿고 천국이지만 / 인애, 공의와 의를 행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축복은 기쁨과 평안이 있다.
이사야 58:8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새 언약을 ‘치료’로 말하고 있다. 이사야 58:11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물 댄 동산”
기쁨 >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서 오는 기쁨이다. 뼈를 건고하게 - 물론 육체적 건강을 포함한다.
새언약을 누리기 위해 ‘고난’을 통과하며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경험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간다.
기존언약과 새언약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논문> 창조하셨다 - 하나님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 예수님 천국이 가까웠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 없다고 아니다. ‘창조’는 하나님 나라의 다른 표현이다.
주권, 백성,영토 > 다스리게 한다는 주권 하에 말씀이다. 백성-아담. 하와, 영토-우주이고, 에덴은 우주의 중심이다. 성전의 개념이 있다. 물이 나온다. 겔에서 물이 흘러 나온다. 질문> 에덴이 순종했다면 - 확장된다고 봐야 한다. / 새예루살렘 밖에서 이를 간다(계) 창2장에서 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안식의 개념은 휴식의 패턴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사 사십장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쉰다’는 이사야 66:1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안식 = 거하시는 의미이다.
만물을 만들고 ‘안식’ 하나님 나라에 등극하신다. 히브리서 천국 - 우리가 들어갈 안식 - 즉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다. 임재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 ‘안식일’이다.
그렇게 ‘창조세계’ 그리고 ‘역사’가 있다. 창조 안에는 시간도 창조하셨다. 시간 창조의 예> 조지 뮬러의 기도를 어떻게 아실까? 사실 답이 없다. 시간 밖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아티클) / 상담 - 상처의 치유는 과거의 우리를 치료하신다.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다. 그래서 망친다. 잘 할 수 있다. 반면 자연은 하나님께 순종한다. 인간은 역사 안에서 죄를 짓는다. 그래서 창조 세계도 하나님께서 휩쓸었다.
노아언약 - 물로 심판 하지 않겠다. 물이 내려 오며 다시 생육 번성 명령, 다시 창조세계를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 이러한 ‘창조질서’는 다시 죄로 말미암아 무너질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을 맺는다’ 모세언약 - 조건, 아브라함언약 -무조건 이렇게 나누는 것은 좋지 않다. 다 유기적으로 연결, 아브라함 언약 역시 창조 언약에 연결 - 복의 연결 - 복을 받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됨 - 창조 질서가 곤고해지는 결과, 즉 세우는 것이다.
창 십이장에 바벨탑 사건은 심판인가? 언어혼잡이 심판으로 볼 수 있나? ‘유보’이다. 심판하셨다면 ‘불’로 심판했을 것이다. 시날 땅에 느므릇이 주체해서 바벨탑을 쌓았다. 온 민족이 대항해서 노아 이전보다 심각한 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로 심판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창대케 하리라’ 언약을 세우신다.
유다가 끌려가 모세 언약이 끝난다. 그래서 불로 심판 받아야 한다. 모형으로 보여준 것이 소돔, 고모라이다. 신 이십팔장 - 모세 언약이 더 확대 시킨 언약이다. 모세 언약의 특징 - 출 십구장에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 열국과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공의와 의를 행함으로) / 시온이 공의와 의로 충만해서 열국에 빛나서 - 그랬는데 사 이장에 새 언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공의와 의로 빛나서’ 이사야 26:18 “18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시온의 백성이 공의와 의로, 와서 하나님 백성이 되지 못하는 형태(출산 못함)이다.
이사야 6:1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 59:9 “9 그러므로 정의(미슈파트)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쩨테카)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일어나 빛을 발하라 - 그래야 열국이 보고 찾아온다. 백성 된다. 어둠 속에 사는 사람 - 맹인 - 봐도 들어도, 맹인 모티브를 만드는 것이다. 이사야의 사명이다.
이사야 5:30 “30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 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려서 어두우리라”
모세언약 - 공의.의로 빛나게 해서 사람들이 온다. -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보다 더 크다. 그 사이 다윗 언약 (왕으로 공의/의를 행하는 것을 보여줘서) 모세언약이 파기되면 쫓겨나게 된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없어지면 다윗언약 없어지고 아브라함 씨가 없으니 아브라함 언약 없어지고 역사 안에 언약이 무너지면 노아의 창조 언약까지 무너지는 것이다.
예레미야 4:1–2 “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2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열국이 복을 받았을 텐데 ‘아브라함 언약’ 까지 무너지고 있다는 예레미야 4:23 “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창조 전 상태인 창조 질서까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노아 언약’까지 무너지는 결과이다.
이사야 24:5–6 “5 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6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 중에 사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 // 불타서 - 불로 멸망한다.
다시 바벨탑 사건으로 유보된 불 심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미 유다는 불심판 받았고, 열국도 심판 받고, 다니엘 1:2 “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 시날 땅 - 바벨탑 사건의 장소였다. 2장 신상에 절하는 것 - 바벨탑 사건이었다. / 역전 ‘모든 민족 - 음악, 악기를 통해 통합시켜’ 신상을 만들어 절하게 한다. 이런 면에서 역사는 동일하다.
예레미야 51:53 “53 가령 바벨론이 하늘까지 솟아오른다 하자 높은 곳에 있는 피난처를 요새로 삼더라도 멸망시킬 자가 내게로부터 그들에게 임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이 하늘 같이 높인다. 즉 바벨탑 사건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 51:58 “58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의 성벽은 훼파되겠고 그 높은 문들은 불에 탈 것이며 백성들의 수고는 헛될 것이요 민족들의 수고는 불탈 것인즉 그들이 쇠잔하리라” // 불에 탈 것이며 >> 불 모티프를 기억하라. 예루살렘이 불탔다. 심판이다.
이럴 때 나오는 ‘새언약’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동반되는 것이다. 새언약의 유기적 통일성을 기억하라
베드로후서 3:12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베드로후서 3:13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새언약 - 이미 왔다. 역전시킨다. 어떤 의미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다. 역전, 더 좋은 것/ 다윗의 자손 - 온전히 공의.의를 보여주심 / 모세 언약 - 인.공.의 행하는 것 - 성령을 통해 확실히 성취 / 아브라함 - 열방이 복을 받게 됨 / 노아 언약 - 창조 질서보다 더 좋은 새 하늘, 새 땅을 동반하고 나왔다. == 모든 성취를 이룬다. 더 좋은 것으로 완성시킨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연속속과 불연속성 : 이전 언약의 조건/무조건 - 파괴되었는데 - 다시 성취 - 언약이 연결되는 의미도 있다. //
우리는 새언약의 수혜자로 새 하늘, 새 땅인가? 그건 아니다. 이미 임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아니다. 노아 언약으로 유지되는 창조의 질서 아래 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불타고' 있다. 하늘에서는 이루어짐, 재림으로 완성됨.
수혜자 - 어디에서 살고 있어야 하는가? 새로운 창조질서에서 살고 있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문, 올드 크리에이션이 지나가고 뉴 크리에이션이다, 이리 새 하늘 새 땅을 성취하며 사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3:6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 새언약의 일꾼//
고전에서는 서로 싸워서 글을 썼다. 고린도 항구도시 거칠다. 싸움 잘한다. 뱃사람들이 있다. - 싸우지 말라 13장 사랑이 제일이라//라고 한 것이다.
고후는 문제가 다르다 - 사도바울의 사도권에 위풍당당 아니고 매 맡고, 고난 받고 그래서 - // 원래 고난이 많다. 육체 고난 - 기도 했다. - 감당해라 -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 이야기한다. 고린도후서 4:16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린도후서 4:8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연연하지 않아…
이사야 65:17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 계시록도 마찬가지 - 새 하늘, 새 땅의 중심도 새 예루살렘이 더 중심이자 우리가 사는 곳, 아직 완성은 안되었다. 그럼에도 미리 히브리서 12:24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브리서 12:21–22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 너희는 이미 이른 곳이다. 기존 질서가 아닌 창조의 질서에 산다.
새 예루살렘의 성취는 (새 언약의 축복, 치우, 기쁨, 평안 등) 미리 선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취하는 곳은 ‘교회’이다. 이상적인 대답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교회’ 크리스토포 라이트는 ‘주 안에 있는 교회’라고 표현했다.
바울에게 ‘주 안에’ 매우 중요하다. 빌립보서 4:1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립보서 4:4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9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 4장은 새 언약의 축복이다.
빌립보서 4:13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새 언약의 또 다른 축복이 ‘능력’이다.
결국 - 주 안에 있어야 한다. // 4:1 주 안에 서라 - 이미 선 상태에서 축복을 이야기 하고 있다. 빌3장에서 이미 말했다. 빌립보서 3:8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선행이 무엇인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 사랑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3:10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새 언약의 축복을 받는 사람의 특징이다.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하다. // 죽으심을 본받아. (바울이 한 번 사용한 단어) - 본 받아 - 싱크로 - 나도 죽어서 형상으로 같이 간다. // 주 안에 들어가려면 주의 형상이 되어야 한다. 1. 사랑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가야 한다.(자기를 죽이는 - 순모르피조마이 현재분사 - 끈임없이 죽는다 //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바울의 의미)
빌립보서 3:13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자꾸 잊어버려야 한다. 이것이 죽이는 것이다. // 잊어 버린 사람은 반응을 하지 않는다.
디모데후서 2:11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 주와 함께 죽는다. 우리 삶의 자세를 말한다. /디모데후서 2:12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 참으면 왕노릇 한다 . 그래서 바울이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소예언서 - 사랑하는 사람, 인.공.의를 행하는 사람이다. 새 언약 목적 -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
언약의 유기적 통일성 - 팔머로빈슨 -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책)
노 <아<모<다윗<새언약 = 이전 언약들의 점진적 확대를 말한다. 창조도 언약으로 끌어 들인다.
벤게메른(김창대 지도교수) - 그렇지 않다. //노아언약 스케일 크다. 심화가 아브라함 더 심화 모, 다, 새언약 - 모델은 정반대인데 더 심화의 의미로 본다.
둘은 같이 공부. 사이 안좋아// 둘다 웨민, / - 김창대 교수는 - 이렇게 보지 말고, 스케일 면에서는 노아 언약이 크다. 창조 질서를 곤고하게 아브라함 언약이다. 아브라함 언약을 민족적 단위로 성취 모세 언약. 이를 보여준것이 다윗언약 // 무너졌을 때 // 포괄적으로 ‘새 언약’
두 교수 절묘하게 썩었다. 노아> 아브라함<모세>다윗<새언약 / 장구 모양이다.
=== 4강 끝 ==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