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건 예배하는것

요한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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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도입]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는 시37:4의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는 하나님의 명령을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우리 이렇게 한번 서로 인사해볼까요? 하나님을 기뻐하세요!
오늘 같이 하나님 말씀을 읽겠습니다.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요9:13-25]
13.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7.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18.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20.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24.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서론]
지난 시간에 날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한 일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일이고 그 하나님의 일이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은혜와 믿음에 대한 관계와 더불어 행위와 믿음에 대한 교리적인 부분도 다루었고 칭의란? 즉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아는 것이라고 간략하게 설명 드렸습니다. 그리고 죄라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사랑이라는 아우구스투스의 놀라운 선언도 우리가 살펴보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지 않으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처절한 실패와 절망을 안겨주지만 하나님을 제일 앞 순서에 놓게 되면 그 모든 것들을 향유하는 삶을 살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도 말씀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9장의 내용은 8장의 실전편으로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 선포에도 빛 자체를 꺼버리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속에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잘 드러내고 있음을 알아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자기 구원의 종교이지만 유일하게 기독교만이 신이 인간이 되어 이 땅으로 내려온 종교임을 우리가 같이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유대인들의 지독한 고정관념과 확증편향적 태도로 맹인이었다가 빛으로 나아온 사람을 어떻게 심문하고 그 과정에 그들이 그토록 정죄의 근거로 사용하는 안식일에 대한 율법에 대하여 말씀을 통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왜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그토록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했는지? 제 4계명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데 그토록 집요하게 사람을 죽이는 명분으로 삼으려고 했는지를 통해 오늘날도 여전히 교회안에 남아있는 율법적 정죄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안식일은 바로 오늘날 주일 성수로 이해하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본문의 시작은 13.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그들은 누구입니까? 앞의 문맥을 보면 유대인들입니다. 어떤 유대인들이죠? 8절 말씀을 살펴보면 이웃사람들과 그가 전에 걸인인 것 을 보았던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이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을 보고 의견들이 갈려서 바리새인, 즉 이러한 종교적인 현상을 설명하고 판단을 내려줄 사람들에게 데려갑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진리와 도덕적인 잣대였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믿을 수 없는 일을 경험하게 되면 누구에게 가시나요? 제게는 이런 일이 생길 리가 없어요? 목사님에게 찾아 가시나요? 확실한 것은 저에게는 안 오시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럼 여기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평가하는 말씀을 한번 보세요! 마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저는 하나님에게 묻습니다. 제가 목도하는 기적은 여러분들의 믿음입니다. 3%의 청년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경건과 윤리의 기준을 제시할 자격과 자질을 갖춘 자들이 주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서의 저자인 요한은 이어서 14절에 14.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는 문장을 씁니다. 우리가 앞에서부터 계속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의 충돌을 다루었고 그 중심에 안식일 논쟁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사실 저는 이 당시 안식일 논쟁의 성경적 해석과 오늘날 주일성수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이 오늘 설교의 중심 모티브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예배에 대한 기준이 되고 신학적 배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일 성수를 한번도 어기지 않고 지켜본 사람 손 한번 들어봐 주시겠어요? 그렇다면 나는 한번이라도 주일 성수를 가족여행, 시험, 친구들과 약속, 사소한 이유이든 공적인 행사이든 그 원인으로 주일성수를 못한 사람 있다? 손 한번 들어 볼까요? 넵!~ 이제 손 내려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종교개혁이후 기독교는 이원론을 배격했습니다.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분한 것을 이원론입니다.그리고 성속이원론은 성직과 세속직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직을 수행하는 것은 거룩한 일이고 세상적인 일들은 세속적인 일로 구분 짓는 세계관을 배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일성수가 오히려 종교개혁으로 배격한 성속이원론을 부추기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주일에 한번 예배 드리러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나머지 6일의 삶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원래 안식일은 애굽의 종이었던 이스라엘이 자신을 구원해 주셔서 자유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즐거워 하는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여기서 기억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신5:15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는 날이 되어 주일입니다.따라서 우리는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무엇을 하던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분을 즐거워 한다면 그 장소와 시간은 예배의 처소가 됩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성과속을 그럼 어떻게 구분할까요? 그것은 방향입니다. 세상에 있어도 나의 시선과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으면 그것은 바로 거룩한 땅이 되는 것이고, 교회 안에 있어도 나의 생각의 방향이 하나님을 기대하고 기뻐하지는 않고 오늘 끝나고 뭐 먹으러 갈까? 이런 생각으로 예배 드리고 있으면 그것은 세상 가운데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죠! 여러분 동의가 되십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말씀에 누가 더 충실 합니까? 그래서 우리의 전 삶의 영역이 하나님 주권, 나라가 이루어 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오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예수님이 38년 병자를 안식일에 치료할 한 사건을 우리가 이미 살펴 보았습니다. 38년 동안 병에 붙잡혀 노예 되어 자유가 없는 인생에게 참된 안식인 자유를 허락하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안식을 어겼다고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15절을 보면 그들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습니다. 15.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라세인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과정속에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을 직감했습니다. “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는 물음을 통해 진흙을 만들어서, 바르셨다는 것을 꼬투리 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16절을 보면 이들의 의견이 갈라서게 됩니다. 첫째 부류는 예수님께서 안식을 지키지 않으셨기에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고 죄인으로 정죄하고 다른 부류는 예수님이 표적을 행했기에 죄인일 수 없다고 합니다. 이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분열은 폐쇄적인 집단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사회의 특징입니다. 참 한국의 기독교 집단이 너무도 그렇습니다. 지금 이 시간 광화문에 모여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의 연합예배를 드린다고 광장에 합니다. 그 자체가 정치 집회일 수밖에 없는데 순진한 것인지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인지 예배라고 이름하면 예배가 된다고 생각하는지 참 답답한 일입니다.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큰 것이 보이는데도 듣지를 않을 뿐 아니라 동참하지 않은 사람을 정죄하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들을 생각이 없고 자신들의 생각을 확증하는데 모든 사람들을 도구화 합니다. 17절을 보면 눈이 밝아진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누구라 하느냐? 참으로 고약한 질문입니다. 그 사람이 긍정적 평가의 대답을 하면 그가 네게 도움을 주었으니 네 판단은 휘어진 것이라 폄하할 것이고 부정적인 대답을 하면 기적의 당사자조차 그런 증언을 한다고 예수님을 책잡을 의도가 보여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펴본 4복음서 3장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에 찾아 온 이유가 이 때 부터 벌써 예수님과 교류하는 자들을 출교 조치를 했기에 사람들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러 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맹인은 사실을 말할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는 못했지만 선지자라는 대답은 아쉽지만 나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명백한 사실임에도 믿지 못하고 이제 그의 부모를 데리고 옵니다. 롬1:28 “말씀이 이 상황에 들어 맞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19-21절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는오늘날의 여론 재판과 같이 답을 정해놓고 밀어 붙이는 인간의 악한 모습입니다. 사실은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범인을 정해놓고 증언과 증거를 조작하여 맞춰 갑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불의한 어떤 집단과 너무도 닮지 않았습니까? 두번째는 부모의 비겁한 태도입니다. 날때부터 맹인이여서 빛을 한번도 보지 못하고 성인이 되어 버린 자식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빛을 보게 되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 일보다 기쁘고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이 있을까요? 그런데 22절을 보면 출교를 두려워 한 나머지 그 책임을 이제 막 빛을 보게 된 아들에게 돌려 버리는 잔인하고 비겁한 부모의 모습속에 인간의 악한 모습은 그 끝이 어디일까? 생각해 봅니다. 자신이 살려고 아들을 출교의 벼랑으로 내몰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교훈이 이것입니다. 현실의 자잘한 불이익을 피하기에 몰두하다 보면 보다 거시적인 세계, 보다 의로운 사회에 대한 감지력과 분별력은 마비됩니다. 가끔 청년들을 보면 소탐대실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너무도 저의 청년의 시기와 닮은 모습이기에 더욱 잘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크게 생각하고 크게 보고 손실을 두려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속적인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으로 미래를 팔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24.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유대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번째 소환하여 타협을 시도합니다. 입을 단도리 합니다. 예수님이 치유해 주신 기적을 다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만나는 사람마다 떠들고 다니지 말라는 것이지요! 혹 그럴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참 달콤한 유혹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확정된 죄인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면 좋아합니다. 쉽게 동의하겠죠! 현재에도 그렇습니다. 현대의 기독교는 자유주의 신학에 잠식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인간 예수로 존경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만을 높이고 예배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종교적 기만주의에 넘어가서는 안되겠습니다. 맹인은 25절에서 지혜롭게 답합니다. 25절 같이 읽어 볼까요? 25.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지금 본다는 사실보다 더 강력한 입증이 있을까요?맹인 자신이 기적의 증인입니다. 날때부터 맹인이었던 자가 눈을 뜬 기적의 출처는 무엇인가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기적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일어납니다. 시66:18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은 죄악을 품은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오히려 잠 13:21 말씀에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하시죠! 기적이 그에게 임했다면 예수님은 결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일 것입니다. 맹인은 이러한 사실을 유대 사람들에게 알리고 변증합니다.
[결론]
세상은 두가지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믿음과 하나님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죠!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성경이라는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기원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과학도 자연도 답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과학은 기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화론은 과학이론과 가설적 방법을 갖춘 종교적 믿음입니다. 믿음을 우리는 과학이라고 하지 않죠!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적으로 변질되는 것을 늘 주의해야 합니다. 종교에는 자기의가 있을 뿐 은혜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본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훌륭한 종교인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그리스도를 기다렸지만,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했지만 정작 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눈 앞에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고 잡아 죽이고자 했습니다.이것이 종교인입니다.종교는 반드시 타락합니다.그것은 자기의를 따라서 자기구원의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살리는 영이 없고 죽이는 의문만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확증편향의 오류에 반드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종교에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까? 우리의 노력에 기반합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 있습니까?
태어날 때 부터 맹인이었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날마다 그 은혜를 힘입어 살아갈 때 우리는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1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와서 잠시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시간을 드리고 6일의 삶은 자신이 주인 되어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경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신앙인의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두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언제나 우리의 방향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기뻐한다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해 바르게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이 어디서 예배하는 것이냐고 장소를 물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누구에게 예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4장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명심할 것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을 해야만 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종이 되어 사망 권세에 붙잡혔던 우리를 생명으로 옮겨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성도의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모든 신령한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화평의 모습으로 회복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사이를 막았던 죄를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피로 속량하셔서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은 언제나 그 관계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아버지의 것을 모두 누리는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 관계가 무엇인지 묵상해야 합니다. 흔히들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 한다고 합니다. 관계에는 이 대화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을이라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봄에도,가볍게 빰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에도, 우리가 소소하게 만나고 미소 짓는 이웃과의 만남속에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다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시작부터 성령님이 우리 안에 함께 하십니다.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합니다. 매일의 일상 가운데 그분을 갈망하고 기뻐하고 즐거워 하십시오! 그분을 근심케 하지 마시고 범사에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뻐하라!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하나님 뜻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도둑질 당하지 않도록 깨어 있습시다. 은혜를 기억하는 건 예배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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