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제대로 살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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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viewsSubject: 하나님을 본받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Complement: (1) 서로 용서하는 사람이다. (엡 4:32) (2)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엡 5:2) Big Idea: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서,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설교의 목적: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기 설교의 적용: 용서하고,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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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오늘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주어의 위치에 두고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기를 원하신다.”가 되겠네요.
오늘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주어의 위치에 두고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기를 원하신다.”가 되겠네요.
[인트로]
에베소서 5:1(“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에서 바울은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좀 더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것이죠. 순서를 한번 체크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하나님께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하나님을 본받을 수 있죠. 다시 말해,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말한 후에, 그 사랑을 받는 자에 걸맞게 하나님을 본받는 생활을 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라는 문장은 제안이나 추천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설교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우리 늘사랑 고등부가 [먼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전환문구: 정리하자면, 오늘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이고,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겠죠. 우리 같이 한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하나님을 본받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본론]
1.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서,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야 합니다.)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사랑하는 고등부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서로를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그가 용서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이겠죠. 그니까, 용서는 용서받아 본 사람만 할 수 있다는 고유한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아 본 경험이 없다면 용서를 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왜죠? 용서가 무엇인지 모르니까. 자기 딴에는 용서했다고 생각해도, 실상은 용서가 아니라 생색이거나 자기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위선에 가까울 수 있죠. 다시 말해, 용서는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행위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용서에 담겨 있는 첫 번째 의미는 겸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분노하는 것이 타당해 보이는 나의 뜻보다, 기꺼이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더 합당하다는 겸손이 있어야만, 인간은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다른 말로,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행동이 화날 만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판단이,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합리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겸손한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분노가 아무리 타당해 보여도, 그런 상황에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더 합리적이라고 믿고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진짜 용서할 수 있는 거죠. 용서했음에도 여전히 우리 내면엔 분노가 잔존할 수 있죠. 그런데 그래도 용서하는 겁니다. 왜? 상대방이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반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분노하겠다는 나의 뜻보다 훨씬 타당하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믿기 때문에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용서하는 근거는 오늘 이 말씀 때문입니다. 말씀이 용서하라니까 용서하는 거예요. 그게 가장 고상한 이유이자 가장 위대한 근거입니다.
그니까 여러분, 혹시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떠오르신다면, 꼭 용서해 주세요. 이제 여러분의 마음에서 미운 사람들을 놓아 주세요. ~
용서에 담겨 있는 두 번째 의미는 증거입니다.
어떤 증거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먼저 용서해 주셨다는 증거죠. 그니까, 우리가 서로를 용서함은, 우리도 매 순간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기 위함이죠. 우리가 서로의 죄를 용서했기에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로서 서로를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함으로써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증거를 매번 확인할 수 있는 거죠.
*예화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물어봅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줘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되나요?” 예수님이 대답하시죠.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해야 한다”라고…
예수님은 연이어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이라는 비유를 말씀해 주세요. 짧게 요약하면, 한 주인이 이제 결산을 해요. 그래서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리고 오는데, 사정을 들어 보니까 도저히 갚을 수 있는 여력이 안 되는 거예요. 너무 불쌍해서 임금이 그냥 그 빚을 다 탕감해 주는 거예요. 여기서 “탕감하다”라는 동사가 사실 원어로 “용서하다”라는 뜻인데, 아무튼, 그렇게 만 달란트 빚졌던 자가 자유하게 된 거죠. 근데 이 사람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멱살을 잡으면서 빚을 갚으라고 하는 거예요.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갚을 돈이 없다고 하니까, 그냥 감옥에 가둬버려요. 주인이 이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고등부 여러분,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치 품삯이에요. 백 데나리온을 빚졌다고 하는 것은 백일 분의 임금을 빚진 거죠. 그런데 한 달란트는 1 데나리온의 6천 배 정도 돼요. 1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면 1 달란트는 육천 일을 꼬박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이죠. 여기에 만 달란트를 곱하면, 일수로 따지면 6천만 일인데, 6천만 일은 년수로 164,384년치의 품삯으로 계산됩니다.
정리하자면 어렵게 곱하고 더할 필요 없이,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을 탕감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갚을 수 없는 빚을 용서받았다는 거죠. 그럼 엄청나게 큰 용서를 받은 사람답게 자기도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데, 자기에게 고작 100일치의 품삯을 갚지 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감옥에 가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네가 이웃에게 행한 대로, 나도 너에게 행하리라.”
사랑하는 고등부 여러분, 우리는 용서받은 자답게 서로를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겸손한 사람만 할 수 있고, 먼저 용서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거예요.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용서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 주세요.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 깨달을 때라야만, 우리도 비로소 우리 이웃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요약! 하나님을 본받는 자는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2.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여러분, 사랑은 용서와 마찬가지로 사랑받아 본 자들만 할 수 있는 고유한 행위이죠. 부모님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이 부모가 되었을 때 자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려움을 겪곤 하잖아요. 우리도 똑같죠.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데 문제를 겪습니다.
진짜 사랑은 생각의 범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지는 실천이 필요하죠. 거룩한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 경건한 생각은 그리 유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요일 4:8), 하나님의 자녀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잖아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 방식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만드는 것이었죠. 이와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표현 방식은 그저 주여, 주여,를 외치며 사랑한다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우리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처럼 버린 사랑이었죠.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제도는 고대생활의 일상적인 특징이었습니다. 당대 최대 규모의 성전과 제단 단지를 소유했던 1세기 에베소인들은 그리스도가 희생제물처럼 자신을 버려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이 무엇인지 곧바로 이해했을 거예요.
구약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선 그들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제도를 통해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을 허락해 주셨는데, 이는, 죄를 지은 사람이 깨끗한 동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침으로써 죄를 용서받는 방식이었어요. 동물이 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져 피를 흘림으로, 일시적으로 죄인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죠.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표현하잖아요. 구약에서 바쳐진 희생제물은 다 일시적으로만 인간의 죄를 속해 주지만, 예수님은 희생제물처럼 자신을 버려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심으로써 영원히 인간의 죄를 속하여 주셨죠. 정리하자면,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선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 구약의 사람들은 동물을 희생제물로 삼아 제사드림으로 일시적으로나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와 동일하게, 예수님은 자신을 마치 구약의 희생제물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그의 피로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여러분께 전달하고자 하는 건, 예수님께서 희생제물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희생제물로 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랑을 행하긴 위해선 ‘내’가 죽어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어감이 너무 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부분이야말로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기독교가 실천하는 사랑의 유별난 차이점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서로 잘 되기 위해 사랑하지만, 교회가 실천하는 사랑은 내가 죽고 네가 잘되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헌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기준이죠. 저는 우리 고등부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사랑이 우리의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결론]
오늘 설교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서,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이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