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9:1-12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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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요한복음 9장 1-12절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사는 동안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사람이 무엇을 질문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수준과 그 사람의 가치관을 알 수 가 있습니다. 지혜롭다고 하는 헬라인들은 만물의 근원, 곧 ‘아르케’ 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말했고, 또 어떤 철학자는 ‘불’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철학자는 ‘원자’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맞는 말이든, 틀린 말이든 그 질문의 수준만은 대단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으로 인해 서양철학이 나왔고, 자연과학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미련한 사람은 항상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이런 어리석은 사람의 인생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 평생 화장실만을 꿈꾸며 살았던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30년만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 수세식 화장실보다 재래식 화장실이 많았습니다. 이 사람의 소원은 하루 빨리 돈을 벌어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자기 소원대로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척집에 갔더니 아파트라서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부러웠습니다. ‘겨울에 추울 때 화장실이 집 안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또 열심히 돈을 벌어서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한동안 만족스럽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이 자라자 아침에 화장실 쓰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순서를 기다리느라 줄을 서야 하고, 머리 감을 때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집에 갔더니 그 집에는 화장실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더 열심히 돈 벌어서 화장실이 두 개 있는 집에서 살아봐야지’ 그래서 수년 동안 열심히 돈을 벌어서 화장실이 두 개 있는 집으로 드디어 이사를 갔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 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해에 죽었습니다. 이 사람은 평생 무슨 일을 하다가 죽은 것입니까? 평생 화장실 바꾸는 일을 하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이러한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참 미련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불쌍한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은 질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 때문입니까? 부모 때문입니까?”(요 9:2) 보통 질문 속에는 묻는 사람의 수준과 그 사람의 가치관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 속에는 어떤 전제가 깔려 있습니까? 그것은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은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은 ‘죄’ 때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욥기를 보면,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가졌던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이렇게 된 것은 너의 죄 때문이야!” 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은 유대사회에 깔려있는 보편적인 생각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둥병 환자를 볼 때, 불쌍히 여기지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죄했습니다.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문둥병이 걸리느냐?” 하며 오히려 핍박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고 부자를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의 모든 모습들은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현재의 모습들을 과거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원인을 찾다가 ‘지금 고난당하는 것은, 현재의 모습은 나의 과거의 악업 때문이야, 지금 잘 되는 것은 과거의 공덕 때문이야!’ 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원인을 찾다가찾다가 못 찾으면, “내가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래” 라고 생각을 회피해 버립니다. 이것을 성경은 “율법주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모든 원인을 과거에서 찾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갈 수 없게 만듭니다. 결국 모든 과거 지향적인 사고는 무엇이든지 간에 내용에 있어서는 반드시 결정론으로 흐르고, 숙명론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조금 이루고 나면 교만해지고, 이루지 못하면 환난 가운데 빠지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당시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좋은 집안에 태어났고 학식이 있었습니다. 부자였습니다. 모든 면에서 평탄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했다는 의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신앙입니다.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당돌하게 이렇게 소리칩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마 19:20)” 얼마나 겁 없는 주장입니까? 그런데 이 청년이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청년이 가난했다고 하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한번 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미 부자인 것을 보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켰던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축복만 강조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를 대상으로 교회 구성원을 분석한 논문이 있습니다. 이 교회에 가난한 사람이 많겠습니까? 부자가 많겠습니까?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와서 복 받고 부자 되기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논문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교회는 압도적으로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고 복 받는다”는 말을 듣고 제일 기뻐하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부자일까요? 가난한 사람일까요? 부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돈을 벌기위해서는 때로는 깨끗한 방법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는 부정한 방법을 썼을 것이고, 어느 때는 사기도 쳤을 것이고, 때로는 폭리를 취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마음의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어느 날 교회에 가서 부자 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들은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평안해지고 평화가 찾아 왔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재수도 안 하고 대학에 단번에 붙고 가정도 평안하고, 건강하고, 나에게 멋있는 외모까지 주셨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인류대학에 들어간 사람은 의인이고, 재수하는 사람은 죄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형통한 악인이 있을 수 있고, 고난받는 의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시각을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3절)
고난이 목적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왜 소경이 되었다고 하십니까? 현재의 모습이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낸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의 고난이 과거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고통의 원인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의 삶은 과업의 업보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소망의 씨앗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예를 들어 한 고등학생이 밤을 새워가며 일하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죄의 결과입니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고자 주경야독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현재의 고난은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시각입니다. 여자가 해산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과거의 죄가 많아서 입니까? 미래의 생명을 위한 진통입니다. 고통이 있고 그 다음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소경이 왜 소경이 되었습니까? “과거 때문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다”라는 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을 일을 나타내고자 소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소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시각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게 되면, 사람들의 사고의 틀이 바뀌게 됩니다. 과거 지향적인 믿음에서 미래지향적인 믿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수세기 동안 죄인을 가두는 곳을 형무소라고 불렀습니다. 이 형무소의 말뜻이 무엇입니까? “죄의 대가를 치르는 곳” 입니다. ‘죄인은 고통을 당해야한다’는 것이 형무소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19세기 영국의 부흥이 일어나고 사람들의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때 “엘리자베스 프라이” 라는 여자가 형무소를 교도소로 바꾸는 운동을 벌렸습니다. 교도소는 무슨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교도소는 사람을 교도해서 새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완전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시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에게 말씀이 들어가면 시각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당해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고, 태도가 다르고, 미래를 대하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오늘보다 내일이 낫다고 믿는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내일보다 모레가 훨씬 낫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엄청난 일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새해에는 더 많은 것을 준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해주는 믿음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와 같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미래 지향적인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첫째는 아무리 큰 고난이 온다고 할지라도 낙심치 않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을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하였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끝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디딤돌이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망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삶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시각입니다. 그리하여 현재의 고난 중에도 낙심치 않고 소망 가운데서 미래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토스카니니를 알고 계십니까? 토스카니니가 유명한 이유는 그가 악보를 보지 않고 모두 외워서 지휘하기 때문입니다. 토스카니니는 선천적으로 눈이 나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 토스카니니는 제1바이올린 주자였는데, 눈이 나빠 악보를 제대로 볼 수 없어서 다 외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연주 시점을 알아야하기 때문에 자기 악보만 외운 것이 아니라, 남의 악보까지 다 외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공연을 하는데 폭우 때문에 지휘자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악보를 다 알고 있는 토스카니니가 대신 지휘를 하게 되었습니다. 악보도 안 쳐다보고 자신의 해석으로 완벽하게 지휘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 날로 상임지휘자 대신 토스카니니가 상임지휘자가 되었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미래를 위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둘째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항상 과거를 생각합니다. “어제는 이렇게 했는데, 작년에는 이렇게 했는데...”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에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할 수 있습니다. 전에는 모르던 일들을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이 전혀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크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을 정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성장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비교하는 것도 다릅니다. “과거에는 우리교회가 100명 모이는 교회였는데, 이제는 300명 모이는 교회로 부흥했다” 가 아니라 “지금 우리는 이 정도의 모습이지만, 연말엔 500명 모이고, 내년엔 1000명 모이고, 그 다음에는 평택을 변화시키고, 나라를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과거를 바라보는 자들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나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교회가 이런 성도들로 가득차고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셋째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적 중에서 가장 이상한 이적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맹인을 어떻게 고치셨습니까? 진흙에 침을 뱉어 이겨 눈에 붙였다고 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진흙을 이기려면 침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것을 눈에 발랐습니다. 그리고는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비위 상해서 순종하기 힘든 명령입니다. 그러나 그는 순종했습니다. 손을 그 눈에 대고 안수기도해 주시거나, 말씀으로 명령하시면 될 것을 예수님은 이상하게 진흙에 침을 바르고 씻으라 하셨습니다. 본문은 순종하기 힘든 좀 거북한 방법으로 병자를 고치쳤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어떻게 했습니까?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원리입니다. 왜? 오늘 우리 가운데 이러한 기적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것저것 따지고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교인의 숫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 앞에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입니다.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나오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순종하지 않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은“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하든지, 아무도 자신의 사사로운 견해를 말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고 한다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아멘” 하고 나가십시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엄청난 일을 하실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시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엘리사에게 가서 고쳐달라고 하니깐 만나기를 거절하고 낫고 싶으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이 언제 고침을 받았습니까? 그대로 순종했을 때입니다. 의심을 버리고 순종하니깐 문둥병이 나아서 어린아이의 살결같이 되었다라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듣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듣고 난 다음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남을 믿으시기 소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2016년 미래의 땅 앞에 서 있습니다. 누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까? 지금 바로 순종하는 자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이런 자가 되기를 소원한다.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 되기를 소원합니다.
<헌금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주님께 귀한 정성을 드리는 손길마다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정성을 각종 물질에 담아 믿음의 씨앗으로 드리오니 우리의 정성을 기쁘게 받아주시며 복을 내리사 더욱 더 많은 것으로 주님께 드릴 수 있도록 복을 더하여 주옵소서. 우리들의 삶이, 우리들의 손길이 언제나 주님께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더욱더 풍성히 드릴 수 있도록 재정의 기름부음을 흘러넘치도록 부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축복기도>
지금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하심이 우리의 소망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하는 백성들 머리위에, 가정위에, 직장과 삶 가운데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