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7:1-10 베드로와 유다 (고난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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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유다
마 27:1-10 / 찬송가 250장
마태복음 26장과 27장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추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붙잡히시고, 말도 안 되는 재판을 받으시고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리스도께 비추어진 조명 때문에, 동시에 펼쳐지는 베드로와 유다의 이야기는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게 되면, 마태는 의도적으로 26장과 27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베드로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새벽에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두 사람 모두는 인간으로서 가장 특별한 기회와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부르심에 따라 주님을 3년 동안 밤낮으로 쫓아다녔습니다. 그들은 반복해서 주변 사람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선포하고, 헌신하며 자신을 바쳤습니다. 이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선교 훈련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의 제자였으며, 온종일 예수님께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해하기 힘든 심오한 가르침도 받았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배웠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의 사역 동안 매일같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과 질병을 치료하시는 능력, 죽음을 이기시는 능력, 자연을 다스리시는 능력, 그리고 모든 궤변에 답하시는 지혜를 보았습니다. 3년간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그들은 놀라운 경험을 했고, 예수님과 교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 다 죄인이었고,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자기 죄에 대해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 죄책감에 압도당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는 사탄에게 사로잡혀 예수님을 대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두 사람은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공식적이고 폭력적이고 강력하고 공개적으로 주님을 배신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그들은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로, 두 사람 다 슬퍼하고 후회하였습니다. 그리고 몹시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명은 너무도 괴로운 나머지 자살하였고, 다른 한 명은 너무도 괴로워서 회개하였습니다.
그 중 한명은 예수님을 배신하는 행위에도 후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고, 어떤 이들은 자녀에게 그의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누구인입니까?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명은 매우 불명예스럽게 여겨지고 있고, 너무도 경멸스럽게 여겨 아무도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욕하고 매도하기도 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가룟유다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유다는 스스로 목매달아 자살하였는데, 바위에 떨어져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베드로는 순교자로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생을 마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삼 년간,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똑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가장 극과 극으로 동떨어져있었습니다. 이 둘은 복음서에 기록된 열 두 제자의 명단에서부터 차이를 보입니다. 베드로가 첫 번째이고 가룟유다는 마지막이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를 만들게 된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태도가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같은 지식, 같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태도는 서로 달랐습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했고, 유다는 주님을 미워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는 베드로나 유다와 같은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모두 같은 설교를 듣고, 같은 진리와 같은 교리와 같은 성경 해석을 들고, 같은 영적 교제를 경험하고, 성도의 삶을 살고,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경배하고, 함께 복음을 듣지만, 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에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이것들을 지적하셨습니다. “너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예수님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16장 21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그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절대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나는 십자가를 향해 가고 있다” 심지어 주님은 자신이 어떤 식으로 죽을 것인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26장 6절에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으로 장소를 옮기셨습니다. 그 때 한 여자가 매우 비싼 향유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그 병에 담긴 내용물은 상당히 비싼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300 데나리온이나 된다고 말합니다. 300 데나리온은 노동자 1년의 연봉과 같은 금액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이 향유를 주어 죽음을 준비하였는데 이때 제자들은 이를 보고 분개하였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를 가지고 허비하느냐?” 이 말을 누가 했습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유다가 이 말을 했습니다. 유다가 불만을 품은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돈 주머니를 가졌기 때문이라”
이 일이 있고나서 유다는 내리막길로 갑니다. 유다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야심을 품은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자기만족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돈을 원했고, 욕심과 탐욕과 세속적인 동기를 가지고 행동했습니다. 유다는 명성과 권력을 얻고 싶어했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얻으려고 그 방편으로 예수님을 이용하였습니다. 유다는 이 무리에서 챙길 수 있는 전부를 챙기려 했습니다. 그는 여자가 부은 향유도 팔아 돈주머니에 넣고 자신이 챙기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에 대한 보상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분노하였고.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팔아 넘기게 된 것입니다.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 (마 26:14) “그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마 26:16)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찬에서도 배신자가 있을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각자 묻기 시작합니다. “저는 정말 아니지요?” 주님은 말씀하시길 “나와 함께 빵을 적시러 그릇에 손을 넣는자가 나를 배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셔고, 그를 향해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을 뻔 했다”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에게서 사탄이 들어갔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유다는 떠났습니다.
그 후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도들에게 파송된 큰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리고 입맞춤의 신호로 예수님을 붙잡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유다가 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27장 3절 이하에 비극적인 삶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유다는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기심에 사로잡힌 죄악된 마음이 너무도 강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영광과 진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을 너무나 사랑했고 구원의 기회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다의 삶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붙잡히던 그날 밤, 멀찍이 예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누가복음 22장 61절에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보셨다” 라고 되어있는데, 눈과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유다와 예수님이 눈이 마주쳤을 때, 유다는 그분께 입맞춤을 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깨어졌고, 산산이 무너져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슬픔에 압도된 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자살하였지만, 슬픔에 압도된 베드로는 회개하고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이 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본 방식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회개했습니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자살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 “내 어린양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 양을 치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저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근심했고, “주님이 제 마음을 아십니다.”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을 베푸셨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께서 전해 주시는 진리를 사모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회복되었고 1세기 초대 교회에서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서신서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8-9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유다에게 있어 예수님은 실망스럽고 화가 나게 한 분이었고,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구원자시며 사랑했던 분이셨습니다. 결국 유다는 사탄에 속하였고, 베드로는 예수님께 속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이 아침에 고백하길 소원합니다.
<보혈을 지나>
<거룩하신 하나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