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9:27 여자여 아들이니이다 (고난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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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요 19:27
두 번째 말씀을 하신 후에 얼마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주님께서는 몸서리쳐지는 고난을 견디시면서 세 번째 말씀을 주시려고 다시 입술을 떼셨다. 처음 두 마디의 유언이 우리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세 번째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주신 말씀이다. 마리아에게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셨고, 요한이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다. 언뜻 보면, 이 세 번째 말씀은 극히 개인적인 말씀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결코 사적인 담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 세 번째 유언 안에는 십자가 아래 서 있던 두 사람만이 아니라 십자가 그늘 아래서 살아갈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시대의 교회들을 향해 말씀이다. 세 번째 유언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는 광경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건을 목격한 증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하고 권위 있는 필치로 이 세 번째 말씀을 포함하여 십자가에서 마지막 운명하시고, 또한 그 직후에 일어난 일들을 생생하게 기록하였고, 함축적이고 압축적으로 보도하였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요 19:33-35
성경은 먼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유언으로 남기기 전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요 19:25
이들이 십자가 곁에 있게 된 경위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눅 23:26-27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두 무리들이 따라오고 있었다고 상세히 전해 준다. 하나는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었고, 또 하나는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였다. 성경은 “백성”이라고 지칭된 사람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눅 23:35 백성들은 십자가의 사건을 구경하기 위해 따라오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벳새다 광야에서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시던 떡과 물고기를 먹은 자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예루살렘 성에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외쳤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고난의 현장에서는 모두 구경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메시야가 아니었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 우리가 걸었던 기대를 그는 저버렸어”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고 축복을 받기를 소원하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교회를 다니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군지 알고 진정으로 깨뜨려본 적이 없는 이들이다. 많은 기적과 은사를 경험했다 할지라도 예수님께 사로잡히지 않고는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나 이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여인들의 무리가 있었다. 성경은 말한다.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눅 23:37
백성들이 주님의 고난을 구경하며 다가가고 있을 때, 이 여인들은 주님의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계속 따라가고 있었다. 이 여인들은 구경하며 따라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여인들은 모두가 돌아간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을 바라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이 고난 받는 현장에서 그분과 함께 서 있는 것이고, 그분이 아파하시는 곳에서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며 사랑이다. 이 여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보라 예수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셨으며, 어떠한 은혜로 우리 같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사 새로운 인생을 주셨던가! 그분이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나쁜 일을 하셨단 말인가!” 고난당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그 여인들에게는 고통이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주님께서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는 결정적인 고난에 동참할 수 있었다. 주님을 믿되 진실로 그분을 향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고난의 현장에서 아픔을 같이 할 수 없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을 보라. 자기가 필요 할 때 주님께로 달려갈 수 있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실 때 그분 곁에 있어 드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실 때, 주님과 함께 죽으러가는 길에 함께 선 자들은 언제나 소수였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노래부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의 경건도, 열심도, 지식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님을 기억하라.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사랑이 식어져가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우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2-3
그리스도의 사랑의 감격에 주체할 수 없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여 기도하던 자리가 눈물로 젖어 본 때가 언제인가? 십자가에서 뚜렷하게 새겨 놓으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기쁨의 눈물도 없고 슬픔의 흐느낌도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닌가? 우리는 정말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이 메마르고 눈물이 없는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이 온몸과 영혼에 넘치도록 가득 차서 우리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며 때론 외로울지라도 고난의 길 한 복판에 설 수 있는 자녀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십자가에서 들려주신 세 번째 유언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십자가 아래에까지 따라온 이들에게 주신 것이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는 일을 마치자 백성들은 제각기 돌아갔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이후에도 남아 있던 여인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요 19:25-26)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여인은 “이모”라고 되어 있는데, 이 여인은 살로메로서 세베대의 아내이다.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 요한의 어머니이다. 또 한 여인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였다. 이 사람은 아마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마 27:56) 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름이 올라 있는 막달라 마리아는 우리가 아는 대로 누가복음 8장에서 일곱 귀신 들렸다가 주님의 은혜로 고침 받은 여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여자여”라는 말은 우리의 이해와 달리 희랍어에는 하대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 말은 마리아에 대한 인간적인 깊은 배려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브라람을 기억하게 된다. 이삭을 바치려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던 아브라함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아식과의 대화였다. 이삭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사랑하는 아들이 아버지라고 묻는다. 이 때 아브라함이 느꼈을 그 고통을 생각해보라. 아마도 아브라함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을 것이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소중한 아이들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지금 십자가에서 흉악한 강도들과 같은 부류로 낙인 찍힌 채,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다. 그 현장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슬픔을 억누르며 조용히 흐느끼며 서 있는 마리아에게 “어머니”라고 부름으로, 그 가득 찬 아픔을 터뜨릴 생각이 없으셨다.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 “여자여”라고 부르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면서도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걱정하던 예수님의 자애로움을 보게 된다. 우리는 상한 심령을 돌보시는 예수님의 자애로운 배려를 느낄 수 있다. 그분은 강하신 분이었으나, 인생의 약하고 여린 부분을 깊이 이해하시는 분이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성품 안에 깃든 사랑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사랑은 마리아에만 그치지 않고 우리와 같은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까지도 계속됨을 믿으시기를 바란다. 여기서 “여자여”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인식을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마리아를 “여자여” 부른 것은 당신이 비록 이 여인의 몸을 빌려 이 땅에 태어났지만 지금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은 그녀의 아들로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0여 년의 세월 동안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며 살았지만,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혈육에 매여 있을 없는 만왕의 왕이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속주가 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육신의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부르시고 계신 것이다.
십자가를 묵상해 보라. 우리 주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주님의 생애는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고난을 아랑곳하지 않고 인생들의 연약함과 아픔을 돌아보시던 생애였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사랑을 아는가? 우리가 정말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부요함을 깨달으며 살고 있는가? 피 떨어지는 십자가 앞에 서기까지 누구도 그 사랑을 알 수 없다. 아무리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자라도 주님의 음성 앞에서 녹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기를 소원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이 말씀은 의심할 여지없이 요한에게 하신 말씀이다. 많은 이들은 이것을 마리아의 노후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 두려움과 자기 목숨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을 배반하고 잠시 먼 길로 떠났다가 회개하고 십자가 앞에 섰으나 잠시나마 주님을 버렸던 죄책감 때문에 얼굴을 들 수 없었던 요한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한 목양적 배려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다. 베드로도, 가롯유다도 그리고 사랑받던 요한까지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이것을 마가복음 14장 2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라...” 자기들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생애를 사시고 이제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마지막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려 그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기도로 준비하실 때 제자들은 모두 졸았다. 그리고 주님께서 끌려가실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그랬던 요한이 지금 어떻게 십자가 아래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것인가? 그가 돌아온 것이다. 요한은 다른 제자들 보다 먼저 회개한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십자가 앞까지 왔으나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떨구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라도 주님을 버렸다는 뼈저린 후회와 고난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대하는 아픔 속에서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 아래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동안, 주님의 침묵은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보라 네 어머니다” 아무런 호칭 없이 요한을 부르셨다. 주님은 이런 분이시다. 우리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주님은 실패가 없으시는 분이시다.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사랑하는 제자는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일에 좌절하였지만, 택한 자를 부르시는 십자가의 은혜는 좌절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한가? 침체 가운데 있는가? 한때 십자가로 뜨겁던 마음이 냉담한가? 오늘 골고다 언덕에서 보혈에 젖은 음성으로 실패한 요한을 불러 주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를 소원한다. 어쩌면 우리는 갈릴리로부터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따라온 슬피오는 여인처럼 주님만을 사랑하며 사는 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못한 자들을 부르고 있다. 실패한 요한과 같은 사람을 찾고 있다. 주님은 채찍과 매질로 고난당하실 때 그 곁에 있어 드리지 못했지만, 사형의 언도를 받으시고 병정들에게 조롱을 당하실 때 비록 그 분을 변호해 드리지 못했지만, 요한의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갔을 때 주님은 요한의 과거를 묻지 않으셨다. 그리고 용서하셨다. 요한은 실패했지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실패하지 않으셨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주님과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셨다. 회개한 베드로에 “내 양을 치라”고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 사랑을 노래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