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7:11-26 빌라도 재판 (고난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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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장 11-26절
찬송가 144장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성경의 수많은 인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 생각된다. 그의 이름이 ‘본디오 빌라도’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 잠시 등장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 때 사용하는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인물이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락 내린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책임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무엇을 그토록 잘못했단 말인가? 성경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본디오 빌라도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고했고, 몇 번이나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노력하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어느 정도 동정심도 가지고 있었고, 호의를 베풀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비쳐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본디오 빌라도’만 사도신경에 선명히 남아있는지 궁금해 진다. 왜?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도들에 의해 저주스러운 이름이 끊임없이 불려지고 있는 것인가? 이 시간 우리는 이같은 의문을 풀기 위해 총독 빌라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헤롯 대왕이 죽은 후, 유대 땅은 그의 유언대로 세 명의 아들들에게 분할 통치되었는데, 로마는 이들에게 일부지역을 관할하는 분봉왕의 지위를 주었다. 그 가운데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통치하게 된 분봉왕은 아켈라오이다. 그는 부친 헤롯대왕의 성품을 쏙 빼닮아 잔인했는데, 자신의 왕권 계승을 반대하는 3천명을 학살하는 등 무자비한 통치를 하기 시작한다. 결국 아구스도 황제의 재판을 받아 추방되었고, 따라서,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은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기 시작했다. 로마는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이 때 파견된 총독이 5대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이다. 본래 로마의 ‘본디오 가문’ 지방의 호족이었고, 대대로 군인 집안이었다. 특별히 그의 이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빌라도’ 는 ‘창으로 무장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군인집안의 출신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A.D. 26년부터 36년까지 10년간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다스렸으며, 로마 총독으로서는 유일하게 예수를 직접 대면한 인물이기도 하다.
총독들은 평상시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를 통치하기 위해 로마의 직영 도시인 가이사랴에 머물러 있다가, 유월절과 같은 명절이나 폭력 사태가 발생될 것이라 우려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결하는 예루살렘에 임시 총독 관저를 정하고 일정 기간 동안 머물곤 했다. 로마 총독은 대개 법률과 치안, 그리고 세금 징수 문제만 관장했으며 나머지는 대개 산헤드린 공의회를 통한 유대인의 자치에 맡겼다.
또한 총독들은 유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유대 사회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 임명권을 갖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도 갖고 있었다. 예수님 당시 심문했던 대제사장 가야바도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되어 약 18년 동안 대제사장으로 재직하다 AD36년 공직에서 물러났던 인물이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빌라도’는 유대인들로부터 극심한 미움을 받은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철저히 무시하고 짓밟았던, 무단통치를 일삼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사 가문 출신답게 무력을 앞세워 횡포를 일삼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상수도 건설을 위하여 성전의 금고로부터 돈을 빼앗았다. 이것은 또 한 차례의 폭동을 낳았고, 이 폭동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3장 1절에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빌라도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던 갈릴리 사람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왜냐하면 갈릴리 지방의 사람들은 성품이 강렬하다는 이유로 로마를 가장 저항할 사람들이었다는 이유로 무참히 죽였다.
따라서 빌라도는 ‘고지식하고 무자비하고 완고한 자’ 이고 또한 ‘부패, 폭력, 강도, 학대, 억압, 불법적인 처형, 그리고 끊임없는 가장 가혹한 잔인성’을 가진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평소 빌라도의 이같은 무자비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거부한 일, 자칭 왕이라 하고,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한다는 죄목으로 고발하면, 쉽게 사형언도를 내릴 것으로 판단하고 빌라도에게로 몰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분명히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당시에 빌라도의 입지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민란이 일어나려는 조짐이 보이자,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무죄한 사람을 유죄 판결하는 정치적 판결을 내리고 만 것이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기간이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 기간이었다. 따라서 빌라도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예루살렘의 치안 때문에 예루살렘에 와 있다가, 유대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 뒤 그에게 끌려오게 된 예수님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이 발라도에게 예수님을 고소한 죄목은 모두 세 가지였다. 1) 예수는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2)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 3) 자칭 왕이라고 했다.
사실 빌라도는 처음부터 예수의 사건을 다룰 마음이 없없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와있던 갈릴리 지방의 영주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를 보내 그에게 이 일을 떠맡기려 했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처형을 요구하자, “때려서 놓아주자, 유월절 특사로 풀어주자”시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와 있듯이, 그 아내의 말대로 예수의 판결에 대해 상관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군중들의 압력에 무기력하게 무릎 꿇었다. 빌라도는 양심과 정의의 순종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인 유익을 위하여 편의 위주로 처리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순간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국 마지막 순간 치명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빌라도는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포기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혜가 있으면 무엇하는가? 현명하면 무엇한가? 로마의 최고학문을 배우면 무엇한가? 권력과 재물과 기술이 있으면 무엇한가? 진실되게, 바르게, 공명정대하게 사용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무용지물이다. 바르게 쓰여지지 않는 권력은 자신을 패가망신케 하고,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주게 된다. 우리는 빌라도를 통해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전가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빌라도는 무리 앞에서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 어떤 물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준 죄의 책임성을 씻어 낼 수는 없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여 본다면, 우리는 처한 여러 어려운 현실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혹시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선택을 스스로 한 후,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찾지는 않았는가?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이렇게 핑계하였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후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어떤 핑계도 댈 수 없음을 기억하라.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었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백성의 고함 소리에 지고 만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빌라도에게 고난 당하셨다. 그러나 그 고통은 3일 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빌라도는 영원한 죄인이 되어 역사에서 물러갔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온 세상을 지배하고 계신다. 우리에게도 이런 고난이 올 때가 있다. 때론 어둠의 세력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니다. 우리는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그 믿음을 가졌기에 당하는 작은 고난을 참아야 한다. 인내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의 고난은 짧은 고난이다. 롬8:18은 이렇게 말한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오늘 이 아침에 예수님이 심판받으시는 현장을 상상해 보았으면 한다. 예수님을 심판하는 빌라도와 고함지르는 군중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멀찌감치 서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떠 올렸으면 한다. 어쩌면 예수님을 심판하는 그 순간, 진정으로 심문받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빌라도였다. 양심의 소리 앞에서 재판받고 있는 것은 고함지르던 유대인들이었다. 빌라도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빌라도는 자신이 어떤 소리를 따라 가는 사람인지 결정해야 했다. 빌라도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다. 마태복음이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는가?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디오 빌라도 역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은 죽이는데 힘을 모았던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이시야 말로 진정한 심판자이시며, 재판관이심을 기억하라.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만, 어느 순간에는 모른다고 말할 때가 있다.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어쩌면, 우리가 빌라도나 고함지르는 유대인들이나, 멀찍이 주님을 바라봤던 제자들이 아닌가? 우리 역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잊고 지낼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왕이시고, 진정한 재판관이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시고, 최후 심판자이시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억울함, 고달픔, 배신감, 수고로움을 누구에게 호소하고 있는가? 누가 심판해 주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가? 진정한 재판관, 최후의 심판자는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고, 주님 앞에 여러분의 문제를 호소하시기를 소원한다. 주님의 공의로우심과 자비로우심 앞에 모든 것을 맡길 때, 주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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