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1:4-8 교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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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론
골로새서 1장 4-8절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사랑의 묘사 장인 고전13:13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라고 기록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을 가르쳐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삼원소라고 부릅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의 세가지 필수 덕목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카톨릭에서는 ‘향주 삼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주를 향해 가지고 살아야 할 세가지 덕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냥 세가지 성덕이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교회사에 보면 2세기 그러니까 주후 120년경 8월 1일 로마에 하드리안 황제가 통치하던 시절 당시 로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큰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때 로마에 살던 세 자매가 나란히 순교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본래 이 세 자매는 과부가 된 신심높은 어머니에 의해서 양육되었는데 큰 딸의 이름은 피데스(믿음), 둘째 딸은 스페스(소망), 셋째 딸의 이름은 까리따스(사랑)이었다고 합니다. 이 세 자매가 붙들려 와서 신앙을 버릴 것을 종용받았으나 큰 딸 믿음(12살)은 “나는 주님을 믿을뿐입니다”했고 둘째 딸 소망(10세)은 “나는 천국을 바라볼 뿐입니다.”했고, 셋째 딸 사랑(9세)은 “나는 예수님을 사랑해요”고 대답한후 나란히 참수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이후 기독교 교회내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를 그리스도들인이 붙잡아야 할 가장 큰 신앙의 덕들로 가르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세가지 덕은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붙잡고 살아야 할 덕일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교회의 교회다움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실현해야 할 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1세기 자신의 제자인 에바브라라는 사람에 의해 설립되고 양육되어온 소아시아의 작은 공동체인 골로새 교회안에 이 세 가지가 있는 것을 보고 감격해 하며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골로새서입니다. 이 편지의 서두인 3절에서 바울은 그가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이 세 가지가 교회안에 자라나고 있음을 인하여 감사한다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여기 감사의 세가지 덕목을 통하여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본질적인 특성들을 다시 배울수 있어야 합니다. 도대체 교회란 어떤 곳이어야 합니까?
1.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먼저“--그리스도 예수안에 그들의(너희의) 믿음---”을 인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오늘날은 믿음이라는 단어가 믿음의 대상에 대한 강조없이 맹목적으로 사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 전도자가 어떤 청년에게 전도했더니 “나도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했더니 “나는 우리 교회가 믿는 것을 믿습니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당신의 교회는 무엇을 믿습니까?”했더니 “우리 교회는 내가 믿는 것을 믿습니다”하더랍니다. 그래서 또 한번 “당신과 당신의 교회는 무엇을 믿습니까?”했더니 “저와 저의 교회는 똑 같은 것을 믿습니다”했답니다. 믿는다는 것이 중요하지만 무엇을 누구를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신앙의 대상이 신앙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을 믿는 사람은 자기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본주의(휴매니즘)의 한계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기전에도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잘 믿어 하나님외에 다른 누구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 다메섹 길을 가다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바울이 무지했던 것은 자기가 믿고 있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질머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이 예수를 구주로 곧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도 이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예수를 믿지 못한다면 유형교회의 교인일수는 있어도 무형의 교회 곧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는 아직도 아닌 것입니다. 바울이 감사했던 것은 골로새 교인들이 오직 이 예수안에 믿음의 근거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이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구원의 공동체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2.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라고 할 때 여기서 사랑의 대상이 성도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물론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분명하게 성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절에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 사랑 예수님 사랑이 중요하지 않아서 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 사랑과 예수님 사랑은 성도들에 대한 사랑으로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애정을 가시적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로만 사랑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 대한 사랑은 가시적으로 보여져야 하기에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시작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을 인용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고린도 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엄격한 성경학자들은 고린도 전서 13장은 은사장이라고 해야지 사랑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2-14장까지가 한 묶음으로 성령의 다양한 은사문제를 다루면서 13장은 이 은사들을 사랑으로 사용할 것과 이 모든 은사들보다 사랑은 더 고귀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가장 본격적인 사랑장은 요한 일서 4장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4장은 다음과 같은 네가지의 강조점으로 요약될수 있습니다. 첫째는 4:8에 “하나님(성부)은 사랑이심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4:9에 이 사랑이 독생자(성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4:13에 성령님을 통해 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의 교훈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장의 결론이 마지막에 기록됩니다. 4:20-21에 이 우리안에 거하는 사랑이 형제들에게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형제를 미워한다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사랑이 제일 먼저 표현되어야 하는 곳이 교회이고, 그 대상이 성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교회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선포할수 있는 것입니다.
3. 교회는 소망의 공동체입니다.
바울사도가 골로새 교인들에 대하여 세 번째로 감사한 것은 그들이 가진 소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5절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은 복음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온 것이라고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어서 6절에는 이 복음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우치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소망의 사람이 되어 온 천하에 소망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모든 소망은 일시적이고 무너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해준 이 소망은 5절의 증언처럼 “하늘에 쌓아둔 것”입니다. 무너지거나 변질될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습니다.“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태6:20)고 하셨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소망은 세상살이 끝나는 날 끝날 수 밖에 없는 소망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복음의 소망은 이 세상의 경계선을 넘어서서 저 영원까지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지난 세기 영국의 한 영적 지도자가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다가 심한 폭풍을 만나 배가 몹시도 흔들리게 되자 사람들은 배의 갑판에 누워 신음하고 토하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하는 것을 볼수 있었습니다. 모든 승객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노신사가 평온한 모습으로 찬송을 조용히 부르는 모습을 포착했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이 노인에게 접근하여 물었습니다. “노인은 두렵지 않으신가요?”그랬더니 “아닙니다. 왜 알고 싶으십니까?”하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해 주시지요”했더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자기는 딸만 둘인데 큰 딸은 어렸을 적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갔고 둘째는 지금 뉴욕에 살고 있다고 하면서 지금 그 둘째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이 배가 무사히 도착하면 미국에 있는 둘째를 만날 것이고 무슨 일이 생기면 그렇게 보고 싶은 천국에 있는 큰 딸을 만날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없다고 하더랍니다. 이것이 복음의 소망을 가진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2001년 소위 9.11테러 사건이 났을 때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고 감동을 끼친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테러 당일 유나이티드 93편 비행기를 탑승했던 승객중에 타드 비머라는 휘튼 대학 출신의 신실한 그리스도인 회사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행기가 테러범들에게 납치된 것을 깨닫는 순간 비행기내에서 주변 몇 사람과 함께 테러범들과 싸울 것을 의논하고 마지막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시편 23편을 암송한 다음 “자 나가자”(Let's Roll)고 외치며 조종실로 뛰어 들어 비행기를 추격시킴으로 와싱턴 국회의사당으로의 진격을 막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진정한 영웅은 이 사건을 믿음으로 수용할줄 알았던 그의 가족들이었습니다. 얼마후 그가 출석했던 뉴저지 프린스톤 연합교회에서 미 전역에 방영되는 추모예배가 열렸을 때 그의 누이동생 미셀 비머가 추모 찬송을 연주한후 강단에 오른 타드 비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장례식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타드 비머를 저희의 아들로 저희 가정에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고귀하신 선물,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주심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지금까지는 머리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 아들을 보내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아들 타드가 주 예수님의 선물인 영생의 약속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옵나니--제 아들 타드의 죽음의 스토리와 이웃과 이 땅을 구하기 위한 그의 행동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되게 도와 주시옵소서.--한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주신것과 함께 좋은 아들을 선물로 주셨던 것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내 아들과 천국에서의 만남의 소망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며칠 후 여기 전국에 방영된 래리 킹 프로그램에 출연한 타드 비머의 아내 리사 비머는 래리 킹에게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의 남편이 마지막에 기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리사는 이런 대답을 합니다. “조금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의 삶은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한 준비의 인생인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타드와 저는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최선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타드는 최후까지 그렇게 산 것입니다.” 그리고 두달후 11월초 리사 비머는 뉴저지에 약 2만 5천명이 모인 크리스챤 여성들의 세미나에 참여하게 됩니다. 본래 9.11테러 전에 리사비머는 이 모임에 참석하기로 신청을 해두었다고 합니다. 리사는 이 모임에 계획한대로 참석하는데 그냥 회원이 아닌 강사로 참여할 것을 요청 받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9.11전만해도 9.11은 저에게 평범한 달력에 나온 하루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9.11날짜를 들을 때마다 공포와 분노, 그리고 개인적인 상처와 손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감정들을 우리가 어떻게 할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의 몫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만을 생각할 것이지 아니면 아직도 남겨진 것들을 생각하며 살것인지. 계속적인 공포속에 살 것인지 아니면 소망속에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소망안에 살기를 선택하였습니다.--제가 이렇게 할수 있는 것은 제가 강한 여성이어서가 아닙니다. 제가 소망안에 살기로 선택한 이유는 하나님이 제게 주신 영원한 소망 때문입니다. 저와 제 남편은 계획성이 철저한 사람들이었지만 우리는 9.11을 대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집회가 오래전에 계획된 것 처럼 9.11도 제 남편의 죽음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주관아래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와 제 아이들의 미래도 그분의 신실하신 계획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앞날에 다하여도 소망이신 그분을 의지하며 살 것입니다.”
(그녀가 쓴 “자, 나가자"은 우리말로는--”나는 소망을 믿는다“로 번역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