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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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43
한국교회는 혹독한 시련을 두 차례 겪었다. 하나는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로 인한 박해와 6.25 사변 시 공산 치하에서 받은 박해이다. 이러한 박해와 끔찍한 시련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두 가지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십자가 신앙과 내세 신앙이다. 십자가 신앙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으니 우리도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고백을 낳았고, 내세 신앙은 “주님을 위해 죽으면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리라”는 삶으로 이어졌다. 주를 위해 죽고 주를 위해 살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간직했던 소중한 신앙의 유산들을 간직하고 살고 있는가?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라는 것은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함께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옥이라는 열차를 기다리고 어떤 사람들은 천국이라는 열차를 기다린다.” 여러분은 어떤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가? 십자가 신앙과 내세 신앙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의 중심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러한 믿음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지나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이다. 잠시 이 땅에 머물 뿐인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선조들은 내세 신앙을 통해서 세상에 살아도 과도히 사랑하지 않고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굳건히 지키며 살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복음 신앙, 즉 십자가와 내세 신앙에 대해서 다시 알려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첫 유언을 남기신 후 두 번째 말씀을 하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 시간 동안 주님과 함께 못 박힌 두 강도 중 한 사람이 심경에 변화를 경험하고 신앙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는 예수님의 십자가 말고 또 다른 두 개의 십자가를 말한다. 강도들이 매달린 두 개의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모양이 동일하였지만, 그 의미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이에 성경은 말한다.
“ 마 27:35-38” 우리 주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는 죄 없으신 분이 지신 십자가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같이 하나님을 떠나 죄의 형벌 아래 죽을 인생을 구속하시기 위한 십자가였다. 하지만, 옆에 서 있던 두 십자가는 일평생 강도질만을 일삼아 온 죄악 된 삶에 대한 형벌로 주어진 십자가였다. 성경은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후, 처음에는 둘이 함께 주님을 모욕하는 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편에 있던 강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둘 중 한 강도의 마음이 변했다. 평생 강도질을 일삼았던 그들은 십자가의 못 박혀 형벌을 받고 있는 순간까지 그들은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희롱의 말을 퍼부었을 때도, 두 강도는 하나였다. “그와 같이...” 마27:41-44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자, 한 강도에게 회심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 강도는 주님을 만나고 삶과 죽음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 죄에 대한 견해가 완전히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예수님을 향해 악한 말을 퍼붓는 자기의 동료와 하나가 되었던 그가 이제는 예수님을 향한 동료의 비난에 마음 아파하게 되었다. 자기의 동료를 꾸짓게 되었고 자신들의 죄를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죄를.... ” 눅 23:40-42
이에 대하여 주님은 십자가에서 두 번째 말씀을 하셨다. “네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강도가 깨달았던 것은 무엇인가? 첫째는 죄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법대로 세상의 자원을 빼앗으며 살아갔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깨닫고 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죽어가는 강도의 가슴에 파고 들었다. 두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의 변화이다. 그는 이제껏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며 궁극적인 가치가 자신이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셋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생각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심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자, 하나님으로부터 정죄 받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넷째는 낙원에 관한 생각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가지고 십자가에 못받는 자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그는 예수님이 자신이 생각하는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낙원이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자, “예수님이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애원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말문을 여셨다. 강도의 절박하고 애절한 신앙 고백을 받고,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 이후 장차 이르게 될 낙원과 구원에 대해 이야기로 응답하셨다. 그런데 이 응답의 시작은 “내가”이다. 지금 죽음 저편에 있는 낙원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잇따라 올 내세에 관해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내가” 그분은 온 세상을 지으셨다. 성경은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 1:1-3
세상의 모든 만물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돌아 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십자가 상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행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들어가는 나라라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허무감 속에 쾌락에 자신을 던짐으로 쾌락을 진통제 삼아 살아간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허무를 깨달을수록 이 세상의 낙을 좇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다. 인생의 허무는 믿음의 사람들을 낙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더욱 분투하며 주님을 위해 살고자하는 마음에 기름을 끼얹었고, 쇠하지 않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그분은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우리는 나의 나된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우리의 일생이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할 인생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기를 소원한다. 때로는 믿음으로 애쓰며 살 때 우리에게 시련과 고난이 가득하지만, 그 때마다 우리는 나타날 내세의 영광이 이 고난과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하던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세상은 다만 나그네 길이고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세상의 즐거움 때문에 하늘나라의 소망을 잃게 되거나 이 세상의 시련과 고난 때문에 넘어지지 않기를 소원한다.
많은 사람들은 죽기 직전에 구원받은 강도를 행운아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이 세상에서 시간이 조금만 더 주어기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이 강도의 구원이 아무리 극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분명히 땅에 남아 있는 우리를 부러워 했을 것이다. 그가 살아온 죄악 된 삶에 어울리지 않는 말할 수 없이 큰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처럼 자기를 구원해 주신 좋으신 주님을 위해 살아드린 시간이 없었다. 주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셨고 구원하셨으나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단 한 시간이라도 살아드릴 기회가 없었던 강도는 주님의 손이 이끌리어 낙원에 들어가면서도 여전히 이 땅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우리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주님은 그 강도를 구원하셨던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 십자가로 우리를 살리셨다. 살리셨을 뿐 아니라, 이 땅에 살아 숨 쉬도록 허락해 주셨다. 여러분의 인생의 시간들을 무엇을 위해 쓰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남은 인생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마음껏 높이고 그토록 말할 수 없는 좋은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강도는 허락받지 못했지만, 우리에게는 허락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오직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삶이 되도록 힘쓰며 살기를 소원한다. 이 놀라운 십자가의 복음을 알리는 데 사용하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