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7:1-2 빌라도 (고난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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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양심상 ‘모든 재판은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판이 공정하지 않으면 분노하게 되고 재심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재판이 열렸는데, 불공정하기 짝이 없는 재판이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정당한 절차를 무시하고 기습적으로 열렸습니다. 마27:1-2절,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유대교 지도자들이 새벽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자체 결정하고 자신들은 십자가 처형할 권한이 없으니 빌라도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재판이 열린 것입니다. 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달렸으니 얼마나 일찍 재판이 이뤄졌겠습니까?
재판 과정도 정당하지 않았습니다. 기소자들은 있었지만 확실한 증인도 없이, 변호자는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재판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는 자들은 겹겹이 있었습니다. 제일 위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거짓 증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주를 받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편에서 변호를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변호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사형 언도를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불의한 재판이 이뤄졌는데도,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예수님의 재판의 부당성에 대해 항의하거나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칠곡 계모에 대한 재판보다 훨씬 더 잘못된 재판인데도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빌라도의 예수님 재판은 ‘중요한 하나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질문은 예수님에 대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고발 내용과 관련된 질문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여러분들 대부분이 이미 많이 읽으셨고, 특별히 오늘 큐티 본문과 동일합니다.
1.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빌라도의 법정이 배경입니다. 법정은 실제적으로는 법을 어긴 죄인에게 그 죄의 경중을 따져 형을 구형하는 장소 입니다. 바로 죄인들이 서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그 법정의 자리에, 죄인이 서야할 그 자리에 누가 서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십니다. 내가 서야할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대신 서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판관은 누구였습니까? 본디오 빌라도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판관으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닌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판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빌라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로마로부터 유대땅에 5번째로 보내진 총독입니다. 역사를 보면 그는 어느 총독보다도 잔인했다고 합니다. 그의 삶은 의로운재판관으로서의 모습이나 대쪽 같은 공명정대한 치리자의 모습은 아니었다고 역사는 말합니다.
빌라도의 삶은 무고한 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의 삶은 출세지향적인 목표에 눈이 멀었습니다.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의해 일을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앞가림을 위해서라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라도는 후에 사마리아인들을 무참히 학살합니다. 그래서 결국 로마 정부는 그를 로마로 송환합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이로 인해 그의 인생의 출세는 이제 끝이라하여 결국 자결하고 맙니다.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오늘의 재판에는 유대민족의 지도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직접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주고 그 결과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빌라도 자신의 판결에 의해 이들이 더욱동요하느냐 아니냐가 달린 중대한 재판입니다.
이 재판은 특별합니다. 그동안 수많은 재판의 경험이 있었던 빌라도도 이런 경우는 처음 맞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인의 자리에 선 이 분은 극악무도한 정말 끔찍한 죄를 저질러 온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님을 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그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경위를 금방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다함께 1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시기와 모함으로 그곳에 서 계십니다. 그들이 여러가지로 예수님을 고소하는 그 모든 것에는 합당한 타당성과 이유가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왜 특별한 재판입니까? 일반적인 법정에서는 죄인은 자기 변호하기 바쁘고, 어떻게 해서든 형을 줄이기 위해서 항변합니다. 만약, 자신의 주장에 힘이 약하면 비싼 돈을 주어서라도 유명한 변호사를 고용하기도 합니다. 1차에서 안되면 2차, 3차까지 어떻게 해서든 벌을 면하려 갖은 애를 다 씁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4절 말씀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로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5절 시작!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세상에 이런 경우가 다 있담? 자신에게 온갖 누명과 모욕을 뒤집어 씌우는 것을 보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예수님을 보면서 빌라도는 깜짝 놀라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심정을 느끼실 수 있기 바랍니다.
항변하지 않는 예수님… 모든 고난과 치욕과 억울함에 대해… 이 모든 것들을 다 당할 각오를 하신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된다. 여기서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여기서 예수님의 목숨을 내건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침묵하셨습니다.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듯 합니다. 평소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대제사장들이 걸핏하면 꼬투리를 잡기위해 답이 없는 넌센스 문제를 예수님께 가져올때마다 지혜의 말씀으로 그들의 논리와 이성을 무너뜨리셨는데, 이까짓 말도 안되는 그들의 주장에 항변하실 수 없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왜요? 무엇 때문에요? 누구때문에요? 바로 나 때문입니다. 저를 사랑하셨거든요… 그분이 죽어야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속으로 수십번 수백번 외치셨을꺼예요. “내가 죽어야 라전도사 살릴 수 있어.. 내가 죽어야 김집사 살릴 수 있어…”
저는 예수님께서 법정에서의 모든 치욕과 정말 억울한 판결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순순히 받으시는 그 모습을 볼 때, 눈물을 참을 수 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만이 보여주신 위대한 사랑이다! 온세상에서 내놓으라는 가장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가 있을지언정, 이 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 말도 안되는 재판을 묵묵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 치욕과 모멸을 다 당하셨습니다.
예수님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 상상조차 하기 끔찍한 고난을 피하지 않고 다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2. 오늘 빌라도 앞에 누가 서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어떠한 분이십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마다 우리에게 그분의 존재를 우리가 나아가야할 올바른 길을, 우리가 추구해야할 진정한 목표를 제시해주고 있지만 우리는 눈워두워 보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우리 눈을 뜹시다! 우리는 그 빌라도 앞에 서 있었던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도 서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7, 38절을 읽겠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자신이 누구이신지, 무엇을 위해 왔고, 무엇을 증거하였는지 분명히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어떠했습니까? 오히려 “진리가 무엇이냐”하며 그분의 진정한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어느 공부 잘하는 똑똑한 사람은 '진리란 참된 도리요 바른 이치다'라고 말합니다.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은 이처럼 말할 것입니다. '명제의 값, 참과 거짓중에서 논리법칙에 맞는 참이 진리이다' 보석가게 주인은 '변하지 않는 금이 진리이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빌라도 총독은 예수를 심판하는 과정에서 죽일만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인 클라우디아는 예수님을 심판하고 있는 자기의 남편 빌라도에게, '이 의인에 대하여 아무 상관하지 마세요, 지난밤 꿈 속에서 이 일 때문에 아주 애먹었어요'라는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합니다. 그 때문에 빌라도는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에 자기의 책임을 면하려고 상관치 않으려 하자 대제사장은 우리의 왕은 예수가 아니라 로마의 가이사 뿐이니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협박합니다. 만일 처형치 않으면 고발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습니다. 만일 폭동이라도 난다면 어쩌나… 빌라도는 그로 인해 가이사의 책망이 두려웠습니다.
지금 선택의 기로에 빌라도는 서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은 무엇입니까? 진로의 문제? 직장의 문제? 배우자의 선택? 정말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 가운데 서보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신중을 가하고 신중을 가해야 할 중요한 선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바꿀만한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영원을 좌우할만한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가운데 빌라도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야 맙니다.
요한복음 19장 12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절이요,”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예수를 놓아주면 너는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라는 말에 그는 결국진리를 내려놓고야 말았습니다.
또한 빌라도는 바라바와 예수님을 흥정합니다. 정치범이자 흉악범인 바라바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흥정의 대상으로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12절에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라고 재판관으로서 무책임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는 흥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는 처음부터 진리이고 마지막 또한 진리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바라바 중에서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십니다.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말합니다. 마태복음 27장 24절 함께 읽겠습니다.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빌라도는 예수님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결코 무죄하지 않습니다. 그의 잘못된 선택이, 그의 무책임한 선택이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수많은 크리스챤은 그들의 신앙고백속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이름은 그 선택으로 인해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저주의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라도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며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생사를 내걸고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기억합시다. 우리도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힘을 다해,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의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새기고 다닙시다. 또한 진리를 저버리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고발 이유) 예수님이 자신을 그리스도라 하고 하나님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신성모독한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에 대한 반역을 한 것으로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요?”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아니라는 답을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네 말이 옳다” 자신이 왕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말한 왕의 의미는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의 개념과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지, 세상 나라의 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이 주제를 가지고 빌라도가 예수님과 더 자세한 대화를 나눈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18:36-37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여러분, 예수님은 분명히 왕이신데, 이 세상 나라의 왕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증언하시고, 이 나라를 사람들에게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그 나라의 백성으로 초청하고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재판에서 예수님의 대답은 “네 말이 옳도다”라는 ‘그 한마디’로 끝이 났습니다. 더 이상 말이 없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고발당하되 ‘아무 대답이 없었고’, 답답해진 빌라도까지 나서서 ‘왜 사람들이 너를 쳐서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데,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느냐’하며 거들었지만, 예수님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침묵은 빌라도를 놀라게 할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은 그 중요한 시점에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을까요? 침묵으로 일관하셨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재판을 받을 때, 억울한 고발을 당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세상에 억울하게 재판 받을 때, 특히 생사가 달린 재판에서 침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꼭 침묵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도 복음전하다 고발당하고 재판에 회부될 때도 있었는데, 침묵하지는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할 기회로 삼았고,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강요 받았을 때에, 담대히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도전하기까지 했습니다.(행4장)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억울하게 갇혔다가 풀려날 때에, 오히려 큰소리 치기도 했습니다.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행16:37)
그러므로 재판에서 예수님이 침묵한 것은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무조건 침묵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백성들의 터무니없는 고발을 당하면서도 침묵하셨을까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임 당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에서 이미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마시기로 결단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는 것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도 그렇고,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오히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밝히려고 힘썼고,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라도 풀어 주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의 노력 중에 하나가 명절의 관습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한 것입니다. 명절에 죄수 하나씩 사면해 주는 관습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명절에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죄수들이 풀려나는 하는 관례가 있지 않습니까? 유월절 명절이기 때문에 한 사람을 풀어줄 수 있었는데,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 그 당시 가장 악명 높은 살인강도 한 사람을 제시하면서 둘 중에 누구를 풀어주기를 원하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그 강도가 바로 바라바였습니다. 바라바가 어떤 강도였는지 알 수 없지만, 유명한 죄수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한동안 사람들로부터 흉악범으로 정죄 받는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민란을 일으킨 주동자요 살인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칠곡 계모와 같이 악명 높은 죄수였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오랜 정치 경험으로 볼 때, 아무리 사람들이 예수를 시기하고 미워한다고 해도, 그 흉악범을 내세우면 그래도 예수를 풀어줄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어떤 번역에 보면, 바라바의 이름도 예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됩니다. “바라바라 하는 예수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그런데 그 사이에 빌라도를 당혹스럽게 하는 소식이 하나 전달되었습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왔는데, 지난 밤의 꿈 이야기를 전해준 것입니다. “당신은 그 옳은 사람에게 아무 관여도 하지 마세요. 지난 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몹시 괴로웠어요.” 빌라도가 로마 총독이었지만, 평소에 그의 아내의 말은 잘 듣던 남편이었던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밖에서는 엄한데, 안에서 부인 말도 잘 듣는 자상한 사람, 바로 빌라도가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아내가 꿈을 꾸고 사람을 보내서 그런 충고를 하였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아내의 꿈 이야기를 듣고 더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풀어주어야겠다!” 그래서 빌라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그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이 둘은 비교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온갖 선한 일들을 많이 행하신 분입니다. 자비로 병든 자들을 고치셨고, 죽은 자도 살리신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은 흉악범이요, 살인자였습니다.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둘 중에 누구를 놓아달라고 요구했겠습니까?
무리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기는 했지만, 의외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기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당사자인 예수님보다 빌라도가 더 놀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신경질을 내면서 묻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대답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는 맨붕 상태가 되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묻습니다. “도대체 왜?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단 말이오?” 이제 사람들은 빌라도의 질문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고만 외칠 뿐이었습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어야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인데 무슨 죄를 대겠습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성경은 담담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아무 성과도 없고, 오히려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사형 언도를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물을 떠다가 손을 씻는 행위를 통해 자기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을 뿐, 예수님의 처형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 총독이요 재판장으로서, 재판을 시작할 때만해도 뭐든 맘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로마에서 들어본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이상한 재판이 이뤄졌던 것입니다. 죄 없는 사람을 십자가형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빌라도의 재판을 증거하면서 무엇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을까요? 마태는 무슨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었을까요?
첫째로, 이 재판은 ‘예수님이 분명히 다윗의 왕위에 앉은 왕이심’을 다시 한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동방박사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은 왕으로 나셨음이 증거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경배하러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빌라도의 입을 통해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요?”라는 질문이 나오고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그렇다”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영원한 나라의 왕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재판을 받으시고,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재판 과정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빌라도가 총독이지만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아내의 충고를 받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재판을 이끌고 가시는 분은 말 없이 서 계신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주님이 인류를 위해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으실 것을 작정하시고 불의한 재판이 이뤄지도록 침묵하며 보고만 계셨던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예수님은 만 왕의 왕이십니다.
둘째로, 이 빌라도의 재판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은 비록 사형언도를 받으셨지만 아무 죄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무죄에 대해 성경은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데, 가룟 유다의 양심 선언을 통해서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27: 3-4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여기서 가룟 유다의 입을 통해서도 성경은 예수님의 무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아내의 꿈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의 무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사람을 보내서 “그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는 행위를 통해서도 “예수님의 무죄”를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재판장으로서, 무죄한 사람에게 사형을 내리는 악을 저지르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 없음에 대한 고백은 서신서에도 계속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셋째로, 빌라도의 예수 재판은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을 재판한 사건이라는 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스스로 죄를 뒤집어 씌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변호하실 수 있었는데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을까요? 사랑 때문입니다.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구원하기 위해 대신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롬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해서 인간과 하나님의 깨어졌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인간 대신 죄인의 모습으로 정죄를 받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판이 불의한 재판으로 끝난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유대교 지도자들의 책임일까요? 그들의 사주를 받은 백성들의 책임일까요? 아니면 실제적으로 사형언도를 내린 빌라도일까요? 모두의 책임입니다. 우리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빌라도의 재판에서 한 사람도 예수님을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조차도 그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앞에서 던진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 불의한 재판을 보면서도 침묵하였을까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라도의 재판의 불공정성에 대해 집중 보도하는 기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왜요? 다 공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는 무리 속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는데 죄인 중에는 네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바라바와 같은 죄인들이 있습니다. 명백한 죄인입니다. 세상에 이런 죄인들은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감옥에 갇혀서 살아갑니다.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고, 사회에 나와도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제사장이나 백성의 장로들과 같은 죄인들이 있습니다. 교묘하게 죄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거짓과 불의, 시기와 미움, 위선 등의 죄가 많지만 감옥에는 가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훌륭해 보여 사람들의 존경도 받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아닙니다. 속은 썩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은 “회 칠한 무덤과 같다” 책망하셨습니다. 겉은 희고 깨끗하지만 속은 썩어 있는 것이죠.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들은 바라바 못지 않은 중죄인들입니다.
셋째, 빌라도와 같은 죄인들이 있습니다. 그는 불의를 묵인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분명히 재판장으로서 예수님은 죽일만한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옳은 것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눈을 감았습니다. 세상에는 빌라도와 같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항상 자신의 유익을 위해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넷째, 본문의 군중, 또는 무리와 같은 죄인들이 있습니다. 무리들은 이유도 잘 모르면서, 대제사장들이 시키는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외쳐댔습니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죄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을 모르면서 죄를 짓고 살아가는 평범한 대중들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나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르고 했다’고 말합니다. 이 정도면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묻고 싶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고, 사형당하게 하였습니까?” 대제사장들입니까? 소리친 무리들입니까? 예수님 대신 풀려난 바라바입니까? 아니면 사형 언도를 내린 빌라도입니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판 가룟 유다입니까?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든 사람은 이 모든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포함된 모든 인류가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고, 우리는 바라바처럼 예수로 인해 풀려나고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53: 4-6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유대인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본문 마27:26절에도 “예수님이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 시대의 채찍질은 보통의 매가 아닙니다. 노끈 끝에 쇠꼬챙이가 달려 있었습니다. 굉장히 잔인하여 어떤 죄수는 채찍에 맞다가 죽기도 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이 죄인으로 판결을 받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게 달려 죽어야 했나요? 우리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후5:2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5:1)
홀어머니와 사는 어떤 불효자가 있었습니다. 공부는 하지 않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사람을 때려서 다치게 하여 청소년 감옥에 갔습니다. 1년을 감옥에서 살던지 아니면 벌금을 천 만원(만달러)을 내야 했습니다. 가난한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돈을 구했지만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에서 식모로 1년간 일하기로 약속하고 천 만원을 가불해다가 벌금으로 내고 아들을 감옥에서 빼내왔습니다. 이런 사실은 안 아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전과 같이 살아도 될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식모산정도가 아닙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으로 취급을 받으셨고, 온갖 모욕과 조롱을 받으시고, 비참한 십자가 처형을 받으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대제사장이나 장로와 같이 겉은 멀쩡한데 속은 썩어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시기와 미움, 위선의 죄 안에 갇혀 사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제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회개하여 새롭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 빌라도같이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항상 옳은 것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택해온 사람은 없습니까? 진리보다는 항상 현실과 타협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해야 하며, 자신의 권력과 영광을 위해 살기 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본문의 군중처럼 줏대 없이 되는대로 말하고 되는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이 정도면 깨끗하다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각자 주님과 관계를 새롭게 하고, 각자에게 주신 비전과 사명을 붙잡고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리 속에 하나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군중 속의 하나로 보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실 때, 이름을 부르십니다.
한번은 런던 타임즈가 저명한 작가들에게 “이 세상에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동일한 주제로 에세이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체스터톤(G.K. Chesterton)인데, 그의 대답은 역사상 가장 짧고도 강력했습니다. “나입니다.” (I am)
여러분, 문제는 ‘나’이고,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 때문에 ‘새로운 나’가 된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롭게 사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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