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후스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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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여러분. 지난번에 이어 오늘은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고민하다가보니, 마침 딱 지금의 여러분에게만 전할 수 있는 말씀이 있어서 전하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청년부 담당 교역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편한 것도 많고 힘이 떨어지고 지치는 일들도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제가 교역자 입장이고, 청년 생활을 얼마 안해보고 바로 목회를 시작해서 담당 교역자가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교역자의 빈 자리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성도님들의 반응을 통해서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담당 교역자가 없을때에만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 담당 교역자를 지목하는 이야기가 아닌데 마치 그 사람을 정죄하거나 지적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소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때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서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런 질문을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잘 믿고 있습니까? 이런 뜬금없는 질문을 하면 상당히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 믿으니까 교회도 오고 예배도 드리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깊이 생각해보면 상당히 날카롭고 의미가 있는 질문입니다.
예전에 영락교회의 한경직목사님이 돌아가실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 때 한경직 목사님이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서 이제 마지막이다 싶어서 수많은 목사님들이 인사를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경직 목사님을 알고, 친분이 있고, 집에까지 방문할 관계의 목사님들이었으니 어떤 목사님들이었겠습니까? 한국의 기라성 같은 목사님들이 잔뜩 오셔서 앉아계셨다고 합니다. 그 때 어떤 목사님이 한경직 목사님께 다른 목사님들께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 없느냐고 여쭤봤더니 한경직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말씀 드렸듯이 거기 모인 목사님들은 전부 기라성 같은 목사님들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들이었고, 아주 대단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에게 예수 잘 믿으라고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마치 제가 여러분에게 하나님 잘 믿느냐고 물어본 것처럼 말입니다. 아마 처음에는 다들 너무 생뚱맞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불쾌한 사람들도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시다가 한없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목사라고 할지라도 예수님 잘 믿는게 가장 어렵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면서 말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 잘 믿고 하나님 잘 믿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조건도 없고 어떤 면에서는 쉬워보이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한없이 어려운 법이니까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상당히 여러 가지로부터 위협받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들로 우리의 믿음이 위협 받습니까?
때때로 믿음은 너무 강력해져서 흔들리기도 합니다. 이 말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상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히스기야가 모세가 세운 놋뱀을 깨뜨렸다. 그것을 느후스단이라고 부른다 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느후스단, 청동으로 만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세운 놋 뱀을 말합니다.
그럼 이게 무엇이길래 히스기야 시대까지 애지중지 내려왔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 반복적으로 불평하자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뱀에 물린 백성들은 죽어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들을 위해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구리로 뱀 모양의 장대를 만들어 세운 후 그것을 보는 사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때 세워진 놋뱀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살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모형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믿음의 모형 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단순한 믿음의 모형으로 두지 않았습니다. 놋뱀을 마치 영험한 물건으로 여겨서 애지중지하며 보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증표로 놋뱀을 바라봐야 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마치 놋뱀이 이스라엘 백성을 고쳐준 것인마냥 놋뱀 자체를 숭배하게 된 것입니다. 너무 강력한 믿음이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흔들리게 한 것입니다. 너무 강력한 믿음이 오히려 우상을 만들어내고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놋뱀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 내용입니다. 히스기야가 그래서 놋뱀을 깨뜨리는 종교개혁을 시행했다는 것 말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잘 믿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는 느후스단이 없습니까?
무엇이 우리 삶에 느후스단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흔히 돈이나 물질, 명예, 권력, 쾌락 같은 것들이 우상이 되어서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깨뜨린다고만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힘들게 하는 우상이 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 말고도 느후스단은 더 은밀하게, 더 자연스럽게 우리의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느후스단, 놋뱀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놋뱀을 애지중지 관리하며 보관하는 것을 어쩌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예배하는 것이라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어느덧 마음 속에서 하나님보다 느후스단을 향한 마음이 더 커져가는 것을 모른채 말입니다.
비슷한 일이 우리 가운데 어떤 일이 있겠습니까?
제가 대학생 때, 깜짝 놀랄만한 일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서울의 모 대형교회에 목회자 사모 양성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뭐하는 곳이냐고 물어봤더니 목회자 사모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서 성경공부도 하고 신부수업을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왜 사모가 되고 싶을까? 나도 목사지만, 사모 되면 고생만 진탕할텐데 왜 사모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목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면 모를까, 왜 사모가 되고 싶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들에게 열광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아, 저렇게 목사를 대단하게 생각하니까 사모가 되고 싶을수도 있겠다. 저 교회는 목사를 마치 스타처럼 생각하는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기 스타의 아내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나보구나 라고 말입니다. 요즘 같이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욕먹고 목사가 먹사라고 욕먹는 시대에 사모 되고 싶냐고 물어보면 과연 얼마나 사모가 되고 싶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참고로 저희 아내도 사모 싫다고 노래를 불렀던 사람입니다. 죽기살기로 꼬셔서 결혼했습니다만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목사들이 대단해 보이나? 왜 대단해 보이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심지어 제가 신학생이고, 제가 목회자니까 목회자들의 면면을 보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면서 더 생각했습니다. 왜 저런 사람에게 열광하지? 왜 저런 사람을 대단하다 말하지? 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의문까지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목회자를 믿는 것인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놋뱀을 믿는 것인가? 하는 오늘 본문의 사건처럼 말입니다. 놋뱀을 향한 애정과 열정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제쳐버린 상황처럼 말입니다.
이상하다고 생각되지요? 그런데도 나랑은 상관 없다고 생각될수도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어리석게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높이려고 하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런 일들이 생각보다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기에 바울이 세운 교회 중 고린도교회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 고린도전후서의 배경이 되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참 많은 문제가 있던 곳입니다. 바울이 굉장히 오랜 시간 사역을 하면서 세운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떠나자 다양한 문제들이 터진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편지를 보내면서 이 문제들을 바로잡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고린도전서에서 다루는 첫번째 내용이 바로 분파싸움, 분쟁, 갈등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도들이 무리를 나눠서 분파 싸움, 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를 나눈 기준이 독특합니다. 잘 읽어보면 아마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를 기준으로 다투지 않았는가 추측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까? 당연히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는 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누구를 통해 세례를 받았는지를 가지고 파를 나누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바울에게, 누군가는 아볼로에게, 누군가는 게바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누군가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바울은 격분합니다. 어째서 그리스도께서 나뉘였냐고 말입니다. 바울, 그러니까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고,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냐고 물으면서 말입니다. 이 말은 대표적으로 바울을 언급했을 뿐 결국 누구의 이름을 가져다 대어도 같은 말입니다. 아볼로가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세례를 기준으로 봤을 때 그리스도께 직접 세례를 받았다라고 자신을 말하는 사람들도 이상하긴 매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구름 타고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는데 뜬금없이 그리스도께 세례를 받았다는 사람이 어떻게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냥 분파싸움, 분쟁에 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오히려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스데바나의 집 사람들 외에는 세례를 준 일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거짓말쟁이들도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왜 생겼습니까? 유명한 사람, 유명한 인사, 대단한 사람에게 세례를 받았다라고 자기를 치장하고 싶고 거짓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나쁜 의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능하면 존경하는 사람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역자의 편에 서고 싶어서 생긴 일이 아니겠습니까?
스타 목사, 스타 부흥사, 유명한 목회자, 인기 목사처럼 대단한 설교가, 예언자,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이 그 시절에도 있었고 그런 사람들에게 대중들이 관계를 맺고자, 친분을 쌓고자, 마치 관련인물인 것처럼 여겨지고자 다가가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놋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놋뱀을 우상숭배했듯이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라는 사람 자체를 마치 우상처럼 섬기는 모습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모습은 굉장히 흔하게 나타납니다. 사람은 생각보다 사람에게 쉽게 매혹됩니다. 여러분은 사이비 이단 종교로부터 자유로울 것 같습니까? 절대로 속지 않을 것 같습니까? 사이비 이단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생각보다 지식인들이 많고,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든지 매혹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라리 그렇게 아예 이단이나 사이비면 다행입니다. 적어도 뭔가 잘못되었다면, 바로잡을 기회라도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사이비 이단 교주만 사람들을 매혹할 것 같습니까? 그런 재능을 가진 목회자는 없을 것 같습니까?
제가 예전 사역할 때 어떤 목회자를 만난적이 있습니다. 저도 전도사였을 때고, 그 사람도 전도사였을 때입니다. 그 사람이 제 직속 상관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에게 업무 지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묘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잘 다루는 독특한 재능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사이비 교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였습니다. 청년부 목회자였는데, 청년들이 마치 이 목회자에게 잘해야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믿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목회자를 잘 섬기는 청년들이구나. 대단하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생각된 것은 부서에 있는 청년 교사들을 겪으면서였습니다. 말했다시피 그 목회자는 제 직속 상관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목회 지침이라던가 부서 계획 등을 지시를 받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제가 그때 중고등부를 맡고 있었는데, 이번 달에 중고등부 야외예배를 기획해 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열심히 계획을 했습니다. 교사 회의에서도 선생님들에게 열심히 협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뭐가 불만인지 청년교사들이 단체로 보이콧을 하는 것입니다. 못하겠다는 겁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딱히 틀린 말들이 아니었습니다. 충분히 합리적인 이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의 의견을 취합해서 다시 보고를 했습니다. 다음다음과 같은 이유로 야외예배를 조금 연기하고자 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청년부 목회자가 뭐라뭐라 속닥속닥 하고 문자 몇 통 하면, 청년들이 앞장 서서 다시 그 행사를 하겠다고 기획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입장에선 이런 겁니다. 어떤 행사를 하라고 지시하는 것이 청년부 목회자인데, 거부하고 보이콧 하는 것이 항상 청년부 교사들이고, 그래서 행사를 수정하려고 기획하면 청년부 목회자가 나서서 결국 자기가 하고싶었던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처음엔 신기했습니다. 크게 나쁘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청년들과 담당 목회자 간에 강력한 라포가 형성되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청년부 목회자가 사이비 교주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향력을 시험해보려고 나를 통해서 자꾸만 청년들을 자극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한 형제의 싸움이었습니다. 부서 안에 형제 교사가 있었는데, 그 형은 청년부 회장이었고 청년부 목회자의 열렬한 신봉자인 반면에 동생은 말 그대로 중고등부 친구들이 좋아서 교사를 하는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제 설교를 듣고 형제가 대판 싸웠다는 것입니다. 니네 전도사님, 우리 전도사님 하면서 말입니다.
전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둘 다 중고등부 교사이면서 청년이었고 심지어 친형제였는데, 니네 전도사님은 누구고 우리 전도사님은 누구며, 교회 일 하면서 싸울 이유는 뭔가 싶어서 말입니다.
제가 아주 독특한 일을 겪은 것 같습니까? 그런 일은 아주 드물게 일어날 것 같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을 것 같고, 사람을 그렇게 따르는 것도 불가능해 보입니까?
저는 불과 며칠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목회자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그 분이 예수님이고 하나님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분을 말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궁금했습니다. 저 분은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목사님을 믿는 것인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인가, 목사님을 믿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들 말입니다.
사랑하는 청년부 여러분,
이 이야기는 담당 목회자가 없을 때만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담당 목회자가 있을 때는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가 없으니, 강력하게 선포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람 말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힘든 때 도와준 사람을 잊기 쉽지 않습니다. 내가 연약할 때에 은혜 베풀어준 사람을 쉽게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생 중에서 가장 힘들고 절망할 때가 바로 청년의 때입니다. 가장 많이 부딪치고, 무너지고, 절망하고, 일어서고 다시 부딪치는 것이 바로 청년의 때입니다.
쉽게 말해서, 여러분이 지금 사람들의 유혹에 넘어가기 가장 쉬울 때란 이야기입니다. 멘토라는 이름하에, 은인이라는 이름하에 여러분은 사람에게 지나치게 몰입할 수 있을 때입니다.
물론 장년들도 그런 일이 종종 생깁니다. 하지만 청년 여러분이 그런 일을 겪을 가능성이 더 많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하셔야 합니다. 목회자를 싫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목회자를 통해 하나님을 믿어야 함을 기억하시라는 이야기입니다.
놋뱀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놋뱀을 보면서 얻을 교훈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을 믿어야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산다 였습니다. 놋뱀 자체가 사람들을 구원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놋뱀을 애지중지 했습니다. 놋뱀을 보관했습니다.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잃어버렸으면서도 그까짓 놋뱀은 철저하게 보관해왔습니다. 모세의 시대 때부터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도 똑같았습니다.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준 세례, 바울에게 속했다는 소속감 같은 것들에 집착했습니다. 바울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 속하길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재밌는 것은 바울이 하는 말은 지지리도 안들었습니다. 고린도전서가 왜 후서까지 기록되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말을 잘 들었다면 고린도후서가 필요했겠습니까?
여러분도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가 대단하다더라, 좋더라 하는 것은 어떤 유명한 점집이 점괘가 잘 맞는다더라 하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목사는 그저 다 목사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목회자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목회자든 다 사용하십니다. 물론 실력차이도 있을 수 있고, 능력 차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재능의 차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사이비 교주 같이 사람을 홀리는 재능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휘둘려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설교를 잘하는 목회자를 보았습니까?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 됩니다. 병을 고치는 목회자를 만났습니까?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언을 하는 목회자가 있습니까? 미래의 모든 것 까지도 하나님께 속해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은사나 달란트, 개인의 카리스마 등 현상에 집중하게 되면 그건 놋뱀을 애지중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여러분 놋뱀을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사람을 우상으로 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어떤 목회자가 오더라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좋은 목회자가 오시길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매달리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장 집중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다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당사자들은 조금도 원하지 않았을 분파들일 것입니다. 사람에게 속하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이 시간을 보내고 기도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좋은 목회자가 되었을 때, 훌륭한 시너지를 발휘하는 청년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