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청년부예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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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부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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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번에 부임한 이성재 목사입니다.
처음으로 청년부에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되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는 인천 태생입니다.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목회 사역도 대부분 서울에서 했습니다. 잠깐 울산에서 사역을 1년 반 정도 하기는 했지만, 그 때도 교구 사역을 했었고 청년들의 상황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부산에 내려오기로 하고 내려와보니 주변에서 부산의 가장 심각한 사회 현상 중 하나로 청년들의 탈부산 현상을 꼽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 주변에 부산 출신 청년이라고는 제 아내와 아내의 친구들, 처남이나 처갓집 교회 청년들 정도가 전부인데 그들은 탈부산에 대한 문제를 별로 이야기하지 않아서 사실 부산에 내려오고서야 처음으로 그런 문제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청년부 설교를 하게 된 김에, 왜 그런 일이 있는지 나름 열심히 검색을 해봤고 이제야 조금 청년들의 탈부산 현상에 대해서 알게된 감이 있습니다.
검색해보니 청년들이 탈 부산을 하는 이유는 상당히 복잡한 요인들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문화적 다양성이 부족하고 서비스업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게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부산은 관광도시이고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외국인들도 오는 곳인데 문화적 다양성이 부족하고 서비스업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해가 안갔습니다. 그런데 물론 관광산업으로 서비스업도 있고 관광객의 유입으로 다양성도 어느정도 충족되고는 있지만, 장기적인 성장의 관점과 삶을 꾸리는 문화적 기반의 관점에서 부족하다고 청년들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국제적인 교류나 창작 활동을 위한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것과 공연과 전시회, 카페가 충분히 많기는 하지만 차별화된 문화 경험이 필요하고 지역 청년들에 대한 역할 부여가 필요하다는 기사였습니다. 지금처럼 지역 청년들이 배제되어 가는 문화는 청년들에게 큰 실감을 주지 못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다른 문제로는 낮은 임금이 문제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이해가 안갔던 것은 제가 이사올 때 사람들이 부산은 물가가 낮아서 서울보단 살기 괜찮을거에요 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기에, 청년들의 상황이 이해가 안갔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임금이 낮은 만큼 물가도 낮은 것이 맞지만, 직업적 안정성이 불안정하고 성장 가능성이 낮아 고부가 가치 직종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낮은 임금은 잉여자금의 부족을 불러오고 결국 미래를 위한 저축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고민을 해봅니다. 과연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 탈부산인가 하는 것입니다. 탈부산하면 뭔가 해결이 되겠습니까? 서울이면 이런 문제가 없겠습니까? 일산이면? 분당이면? 이런 문제들이 없겠습니까? 또 다른 기사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서울은 경쟁이 더 치열하고, 기회는 얻을 수 있어도 결과까지 얻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과연 물리적인 이동인가를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물론 저는 여러분이 부산에 남기를 바라는 입장도 아니고,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부산이 좋으니 꼭 여기에 남아서 우리 교회 출석을 지켜주셔야 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과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래서 롯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롯에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순간에 있었던 사람? 두 딸과 부적절한 관계로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된 사람? 아브라함의 조카? 다 맞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로 갈대아 우르로부터 함께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은 곧, 아브라함의 모든 여정을 함께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롯이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과 드디어 갈라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상당히 재밌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땅을 고르라고 선택권을 건네줍니다. 그리고 롯은 그 자신이 보기에 좋을만한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곳으로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이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땅이었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롯은 이후에 그 멸망의 시기를 직접 겪기까지 합니다. 딸을 통해 자손을 보게 되는 최악의 일까지 겪게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롯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정말 롯이 뭔가를 잘못한 것일까요? 애초에 아브라함을 떠나면 안되었던 것일까요? 하나님은 왜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가는 것을 막지 않으셨을까? 그곳에 심판을 내리기 전에 왜 롯이 그곳을 떠나 아브라함에게 돌아오게 하지 않으셨을까?
모르고 읽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상당히 의문이 많이 드는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오늘 눈여겨 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12절입니다.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하는 구절입니다. 누군가가 롯의 등을 떠민 것도 아니고, 롯이 어쩔 수 없이 소돔까지 간 것도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목을 하던 롯이 굳이 도시들에 머물렀고, 그렇게 옮겨서 도시들만 찾아다니다가 결국 소돔까지 갔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부산을 떠나려는 친구들에게 그러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롯이 도시들을 좋아해서 문제가 생겼다가 아닙니다. 롯이 어떤 기준과 선택으로 도시들에 갔을까, 롯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기대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롯은 중간에 한번 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끌려갔을 때 아브라함에게 구출을 당하는 일을 겪기도 합니다. 그 때 모른척 아브라함의 곁으로 돌아갔을수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롯이 돌아간 곳은 결국 소돔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롯은 왜 소돔을 좋게 본 것일까요?
먼저 우리는 롯이 소돔을 향해 갔다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롯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롯이 소돔을 골랐고, 소돔으로 떠났다에만 집중하면 마치 우리는 오늘 어디든 떠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아브라함도 살던 도시를 떠나 먼 곳으로 이주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주했고, 롯도 이주했는데 도대체 롯은 왜 실패했을까?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는 무엇일까? 떠남이 문제일까? 우리는 그런 질문에 다다라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향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걸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으로만 봐서는 곤란합니다. 당시에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상인들이 있었다면 그들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중개무역을 위해 가나안 땅 쪽으로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의 여정을 아브라함의 그것과 같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이 여정을 떠난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도 안되는 여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지 않으셨더라면 아브라함은 굳이 자기가 살던 도시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이건 이민과 이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는 믿음의 여정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도 먼 곳을 떠났고 롯도 그 여정을 따라갔으나 그 마지막이 달라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여정을 떠난 것이지만 롯은 그저 삼촌 따라 거리만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길을 나선 아브라함의 여정, 별다른 생각없이 그저 삼촌을 따라 나선 롯의 여정. 결정적인 차이가 벌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탈부산이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산을 떠나면 성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니, 애초에 무엇을 위한 성공입니까? 무엇을 위해 부산을 떠나야 한단 말입니까? 머무르려면 또 왜 머물러야 하는 건가요? 부산에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그런 고민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저 어딘가를 떠나고 머물러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에 내려올 때 무수히 많은 고민을 하면서 내려왔습니다. 단순히 생각한다면 어쩌면 서울에 남는 것이 좋은 선택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미래가, 내 종착지가, 내 삶의 여정이 꼭 서울에만 있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지역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 향한 계획을 어떻게 세우고 계시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탈부산을 꿈꾸고 있다면, 그것이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생각인지 무엇을 위함인지 스스로를 잘 생각해보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부산을 벗어나면 뭐든지 잘 해결될 것 같습니까? 기회가 산처럼 쏟아지고,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습니까? 우리의 앞길이 평탄대로가 되어서 모든 일이 잘 풀리겠습니까?
출애굽기를 기억하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노예에서 풀려남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구원이었고, 해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 길이 평탄대로였던가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동했던 길들도 나름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키고 보호하고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고난과 역경이 없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없었더라면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정말 구원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 어떻게 운이 좋아 이집트를 나왔다고 하더라도 한순간에 군대에 따라잡혀서 멸망하게 되는 시나리오가 아니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벗어남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작정 떠난다고 해방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입니다. 그 길이 전혀 평탄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의 구원이었던 이유는 이집트의 군대를 막아주신 하나님이, 사막에서 물을 솟게 하시는 하나님이, 광야에 양식을 비같이 내리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은 하나님을 빼놓고는 결코 구원과 해방의 여정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멸망과 구원의 길의 차이는 물리적인 길과 여정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룻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모압지방으로 떠나갔다가 남편과 아들들이 죽어 고향 땅으로 돌아온 기구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나오미는 왜 모압지방으로 떠났을까요? 땅에 흉년이 들어서 떠난 것입니다. 범죄를 해서 떠난 것도 아니고, 더 큰 성공을 위해서 떠난 것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흉년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에 구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남편도 죽고 아들들도 죽는 더 큰 고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온 고향 땅에서는 며느리 룻을 통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오히려 그 가문의 기업이 전부 회복된 것입니다. 모압 땅에 가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갔는데 그 곳엔 구원이 없었고, 구원이 없었던줄로만 알았던 고향 땅에는 오히려 회복의 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의 차이입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고향 땅에 돌아온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기를 어머니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했던 것을 보면 나오미의 신앙과 믿음이 없어지고 메마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향 땅에 돌아왔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오미에게 룻을 통해 구원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장소의 문제입니까? 모압과 가나안 지방의 차이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 나는 그것을 어떻게 신뢰하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순종하고 있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룻기를 통해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이 있다면 충분히 회복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까지만 봐도 성경은 일관되게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환경과 조건에 따라 편하고 불편하고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흉년이 든 가나안 땅보다 모압 땅이 더 좋아보이는 것, 가나안 땅보다 소돔과 고모라가 더 풍족해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면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아닌가의 차이가 우리의 주된 관점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의 이야기를 기억해보기 바랍니다. 다니엘은 바벨론과 메대 바사, 바사 제국에 이르기까지 3개의 제국에서 재상의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그곳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고 가나안 땅에서 일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방제국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며 수많은 믿음의 역사들을 이뤄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길이, 여러분의 비전이, 여러분의 소망이, 여러분과 함께 하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를 먼저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게 서울일지, 부산일지, 뉴욕일지, 샌프란시스코일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지금 당장 부산을 떠나고 말고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나라가 멸망했다가 그 땅으로 돌아온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성벽을 세우고 나서 무엇부터 했는지 말입니다. 만약 그들의 관심이 땅에 있었다면 축제를 벌였을 것입니다. 땅을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고향 땅에 돌아와 성벽을 세우고 가장 먼저 말씀 성회를 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강론을 들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래야 합니다. 중요한건 어느 땅이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제가 잠깐 조사한 것이 부산의 모든 실정을 조사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모르는 많은 문제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청년들이 떠나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떠나지 않고 머무른다 할지라도 큰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서울이라고 그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산을 떠난다고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고 잘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부산에 남는다고 하여서 항상 절망적인 것도 아닙니다. 어느 땅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롯이 가나안 땅을 고르고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골랐다면 반대로 롯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아브라함이 롯이 당한 일을 겪었겠습니까? 선택권은 분명 롯에게 먼저 있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어느 땅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롯과 아브라함의 차이를 주목하여 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누가 하나님과 함께하느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함께 하였고, 롯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차이입니다. 땅의 차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상황도 절망스러운 상황이라고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어떤 땅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설령 절망과 좌절의 대지라고 할지라도 구원의 싹이 돋는 희망과 회복의 대지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니 무작정 새로운 기회를 찾기보다 믿음의 눈으로 보기 바랍니다. 삶의 여정을 신앙을 별개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부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서울이나 다른 도시가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어디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특별한 계획과 목적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삶은 그 어떤 장소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가는 여정임을 기억하십시오.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성경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낯선 땅 바벨론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며, 그 안에서 빛을 발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지금 이곳에서도 충분히 여러분의 믿음과 가치를 지키며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며, 그분의 계획 안에서 여러분을 사용하실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스가랴 4장 10절에는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쩌면 부산에서라고 할지라도 작은 시작이 앞으로 큰 변화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곳에서 하는 일,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중요한 과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십시오. 예레미야 29장 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향한 나의 계획을 내가 안다, 그것은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곳이 어디든,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놀랍습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고 나아가십시오.
어쩌면 삶은 결코 쉬운 여정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곳에서 여러분의 꿈을 펼치고,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어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일으키실 변화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이 여러분의 모든 걸음에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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