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원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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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가 처음으로 금향로 기도회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말씀을 전할까 고민하다가 금향로 기도회이니만큼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는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되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많은 은혜 받으시길 바랍니다.
기도에는 참 다양한 종류의 기도가 있습니다. 이름만 나열해도 통성기도, 방언기도, 묵상기도, 합심기도, 금식기도, 안수기도 등등 상당한 종류의 기도들이 있습니다. 저는 기도들을 약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해보고자 했습니다.
첫 번째는 방법에 따른 분류입니다. 기도에는 다양한 방법과 방식이 있을 수 있는데 그 방법에 따라 명칭을 구분한 것입니다.
먼저 통성기도입니다. 소리내어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이 기도를 가장 기본적인 기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기도라는 것은 다른 의미 때문이 아니라, 이 기도가 용기만 내면 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기도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의아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기도하라고 하면 소리내어 기도하는게 쉽지 않고, 오히려 속으로 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이 많으실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초신자일수록 소리내어 기도하는게 익숙하지 않고 어렵다 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묵상기도를 해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주변의 환경이나 소리 등등에 따라서 생각보다 기도에 집중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통성기도가 묵상기도보다 더 기초적인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내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릴 정도로 기도하면 집중하기가 훨씬 더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통성기도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다보면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바로 방언기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기도는 종류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사도행전 초기에 등장하는 방언기도는 내가 나의 언어로 기도하였더니 주변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언어로 듣게 되는 기적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를 비롯한 서신서의 방언 기도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언어로 기도하여 통언 하시는 분이 없다면 알아들을 수 없는 기도를 말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방언 기도는 성령 충만하여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기도하는 두 번째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함께 기도하는 합심기도가 있습니다. 한 가지 기도제목을 두고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한다고 하여서 합심기도라고 합니다. 중보기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념입니다. 중보기도는 각자의 자리나 혹은 중보기도를 위한 시간을 배정해서 순서대로 기도하기도 합니다만, 합심기도는 보통 한 자리에서 그리고 같은 시간동안 마음을 모아 뜨겁게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식기도는 식사를 금하면서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이것도 방법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 지방에서는 하루 중 특정한 시간만을 금식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하루를 온전히 금식하기도 하고, 특정한 끼니를 금식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식사 대신에 기도를 택함으로써 소원하는 기도 제목을 위해 기도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합니다.
저는 보통 금식기도를 할 때에 물도 마시지 않고 기도하고는 했으나, 그렇게 하면 이제 머리가 아프고 몸이 아파와서 물 정도는 마시면서 하는 방법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금식기도 자체도 다양한 방법과 방식으로 세분화되어 나뉘기도 합니다.
또 그 외에도 안수기도나 관상기도 등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내용에 따른 분류입니다. 저는 기도를 방법에 따라 구분하는 것 다음으로는 이렇게 내용에 따라 구분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먼저 예언기도가 있습니다. 이것도 성경적인 이해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조금 다른데,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 특히 서신서에서 말하고 있는 예언은 오늘날 설교와 유사합니다. 미래 일을 예언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언은 미래 일을 예언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건 이중 삼중으로 확인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각으로 맹신하는 것은 조심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다음으로 회개기도는 말 그대로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회개하는 기도를 말하고, 결단기도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중대한 결정이나 소명, 혹은 각오 등을 결단하며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통성기도로 회개하거나 묵상으로 회개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내용에 따른 기도와 방법에 따른 기도 분류가 혼용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보기도 역시 내용에 따른 구분에 해당하고, 봉헌기도, 축복기도, 작정기도, 서원기도, 대표기도 등도 내용에 따라 구분하는 분류에 속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시간에 따른 기도의 분류입니다.
가장 먼저 어찌보면 삶에서 가장 많이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식사기도가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로 식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는 새벽기도가 있습니다.
특별히 새벽기도는 한국교회에 존재하는 유구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선교사님들이 조선 땅에 왔을 때 철야기도를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 철야가 끝나고 난 후 이어서 기도하다가 다시 농사일을 하기 위해 나가기 전에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면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셨던 일을 모범으로 삼아 새벽기도가 한국 교회의 상징처럼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고 모여서 예배와 기도의 삶을 이어가는 중에 발전한 철야기도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과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수많은 기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기도의 종류 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도의 용사들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모든 기도들을 하나로 묶어서 기도라고 통칭할 수 있는 기도의 기본적인 성질은 무엇입니까? 제가 그걸 정의할 순 없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기도의 정의는 있습니다. 오늘 그것을 나누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도는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들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로 기도는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기본적으로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소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뢰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보통 기도는 해주소서. 하소서 하는 소원의 형태가 가장 많습니다. 목사인 저도 기도 내용을 생각해보면 대부분 해주시옵소서, 하옵소서, 주시옵소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소원을 빌었을 때 우리의 소원이 모두 이루어집니까? 물론 이루어질 때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될 때까지 기도하라거나, 반드시 이루어지니 낙심하지 말라는 이야기들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을 때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실망하고, 좌절하며 심각한 경우 절망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속으로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집니까? 내용에 관계없이 상황에 관계없이 그저 내가 기도만 하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제가 대학교 때 저희 막내이모님이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처음 병문안을 갔을 때, 제가 신학생이 되었다고 다들 기뻐해주셨고 신학생이 되었으니 저도 이모님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병을 고쳤는데, 나도 이모님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모님은 결국 투병 중에 그대로 돌아가셨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기도를 안해서 그런 것입니까? 제 기도가 부족했습니까? 당시 저는 학교에서 틈만 나면 기도탑에 올라가 아까 구분지었던 방법 중 통성기도의 방법으로 시도 때도 없이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다가 목에서 피가 나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제가 그 때 피를 토해봤습니다. 그렇게 피를 토하면서 기도해봤습니다. 하지만 이모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왜 제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까?
그 때 저는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아, 기도는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수많은 경험들로 생각이 더 정리되었지만 그 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기도한다고 모든 것이 내 맘대로 될 수는 없구나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했습니다. 기도가 부족한 것 아니냐고, 기도를 덜한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연세대학교 교목실에서 일했을 때의 일입니다. 목사 안수를 주기로 했던 교회에서 갑작스럽게 안수를 주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연세대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주셔서 감사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연세대학교는 교목실 직원이 계약직 직원 계약이라 평생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약 종료는 다가오는데, 다음 사역지가 도무지 정해지질 않았었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졌습니다만, 그때만 해도 미혼 목사라서 교구 자리를 지원해도 이력서가 서류에서부터 탈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 힘들었습니다. 결혼을 제가 안하고 싶어서 안한게 아닌데, 사역지가 구해지질 않으니 막막했습니다. 집이 있어야 결혼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사역지가 구해지질 않으니 사택이 없어서 집이 없고, 집이 없으니 결혼을 전제로 소개를 받을 수도 없는 이상한 굴레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도 사람들이 기도를 안한다, 안해서 그렇다, 매달리지 않아서 그렇다 하길래 이번에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먼저 구했습니다. 집 없이도 결혼하겠다는 여성분을 만나게 해주세요. 그게 아니라면, 집을 얻을 수 있도록 물질을 주세요. 그것도 안된다면 미혼이어도 뽑아주는 사역지를 주세요. 하는 기도제목이었습니다. 피를 토해본 경험은 있었으니, 이번엔 다른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시간을 정해두고 길게 기도하는 작정기도를 선택했습니다. 하도 다들 기도가 부족하다 하니, 길게 기도해보려고 했습니다. 6개월의 시간을 두고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중 어떤 기도제목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땠을까요? 절망했습니다. 낙심했습니다. 단순히 심적으로만 절망하고 낙심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인생에 큰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계약이 종료되고 사역지를 못 구하게 될 경우 가지고 있는 돈을 생각해봤을 때 3개월 정도밖에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굶어죽을 위기가 눈 앞에 닥쳐왔습니다. 목회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면 먹고 살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응답이라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사역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야할지, 그저 기도하며 기다리기만 해야할지 막막했습니다. 결국 그 화살을 하나님께로 돌리게 되기도 했습니다. 내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더 극단적인 상황으로 저를 몰고 갔습니다. 간절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응답해주지 않으신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역하고 있던 교회에 일부러 사임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보통은 다른 사역지를 구해놓고 말씀을 드리는데, 그 때 저는 정해진 사역지가 없는 상태에서 사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정도 간절해야 하나님이 다음 사역지를 주시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아둔 돈으로는 구약 성지순례 이스라엘행 비행기표 티켓을 끊었습니다. 어차피 굶어죽을지도 모르는거 이스라엘이나 보고 오자라는 생각이었고, 더 간절해야 한다는 강박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결혼을 했을까요? 결혼할 여자분을 만났을까요? 사역지를 구했을까요? 그 모든게 다 이루어졌을까요?
물어보는 이유가 있겠지요. 하나도 안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지금을 기준으로 하면 다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6개월을 이어가던 그 끈질긴 기도는 교목실 계약이 종료되고 사역하던 교회에서 사임하던 그 순간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적적으로 어떤 교회에서 연락이 올지도 몰라라고 붙들고 있던 마음까지 무너지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정말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마지막 사역을 마치고, 사임인사를 하고 집에 가던 도중 교통사고가 난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주행하던 저는 갑자기 날아든 어떤 차량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뭔지 아십니까? 하나도 안다쳤다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연세대 계약 종료로 더 이상 대학교에 주차를 할 수 없어 어머니가 계신 본가에 차를 가져다 두려고 인천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댁 바로 앞에서 교통사고가 난 것입니다. 사고는 꽤 컸습니다. 양쪽 차 모두가 폐차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도 안다쳤습니다. 저도 안다쳤고, 상대도 안다쳤습니다. 심지어 제 과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상대가 신호위반을 한 상태로 달려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회도 사직하고, 바로 다음날 계약도 종료되는 저는 아쉬움 없이 그대로 입원했습니다. 그리고 다친 곳은 없었지만 사고가 너무 컸던 관계로 이런 저런 검사를 하면서 약 한달 정도를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모아둔 돈으로 생활이 어렵다고 계산 했었다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당장 밥 한끼 먹는 것도 빠듯한 시점에 무려 한달을 공짜밥을 먹은 것입니다. 심지어 주차할 곳을 찾아야 하던 차는 그대로 폐차되어 쓸 필요도 없게 되었고, 폐차비도 받았고, 합의금도 받았습니다. 뜬금없이 생활비가 조금 더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제가 사역지를 구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인 6개월이나 지난 뒤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저는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낙심 때문에 더 이상 같은 기도를 이어가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6개월간 그냥 흘러가는대로 지켜만 봤습니다. 원망과 슬픔만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 갑작스럽게 사역지가 결정되던 그 날, 그 때서야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아. 6개월 공백이 지나서 사역지가 결정되려고 그 사고가 났구나. 그 때 이런저런 이유로 생활비가 조금 더 생겼던 이유가 있구나. 내가 기도했던 대로는 하나도 안이루어졌지만, 하나님은 계획하시는 길과 방법이 있었구나. 심지어 내가 생각지도 못한 교통사고라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셨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때 다시금 완전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이루어주셔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정답을 놓고 아무리 기도하였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아,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밖에는 없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기도의 응답을 놓고, 그저 그 대답만을 구하며 기도한다면, 그 기도가 이뤄지기만을 기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소망과 소원의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는 것일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아주 모범적인 사례를 주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셨던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반드시 내 뜻과 일치한다는 보장이 고 때로는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또 생각지도 못한 방법과 방식으로 일이 이루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에게는 깊은 실망과 좌절과 절망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제가 지금 다 지나고 났으니 웃으면서 결국엔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만, 교통 사고가 나고 사역지가 구해지기 그 6개월간 저는 참 힘들었습니다. 마음이 힘들었고 고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안들어주시는 것인지, 그 와중에 왜 교통사고까지 나게 한 것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고 기도만 하면 나오는 것은 원망과 절망과 고통과 탄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버리신 것 같았고, 하나님이 저를 고통 중에 밀어넣으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그렇게 우리의 모든 것이 틀리고, 무너지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만 같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과 방식에 우리의 마음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방식이 최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방법이 나에게 최선일 것이라는 강력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기도에 3가지 원칙을 이야기 합니다.
첫 번째로 기본적으로 기도는 아뢰는 것이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기본적으로 기도는 소원의 도구가 아니라, 소통의 창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사소통 창구가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소원이 이루어지느냐 아니냐의 유무보다 우선 우리의 아룀이 기도의 기본적인 형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아뢸 수 있습니다. 당연히 소원과 소망을 아뢰어도 됩니다. 어쩌면 그게 가장 기본적인 기도의 형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 상태, 심지어 원망과 불평도 아뢸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의 시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존자를 원망하며 불평과 불만 가운데 빠진 기도들이 꽤 많습니다. 이 시편들을 잘못 되었다 말하겠습니까? 무의미한 기록들이라고 기도가 아니라고 말하겠습니까?
시편 10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13편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22편에서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특히 이 고백은 예수님이 사용하신 십자가 상에서의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시편을 가만히 읽어보면 이처럼 원망 같아 보이는 고백도, 지치고 무너진 자의 절규도 들려옵니다. 때로는 원수를 저주하고 하나님의 복수와 심판을 바라는 고백들도 있습니다. 그런 시편들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내용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아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아룀을 듣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실 우리의 이러한 고백이 없더라도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도 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기도의 창구를 열어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솔직하고 진솔한 상태와 현상, 소원과 고백을 직접 듣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기본적으로 아룀의 형태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무엇이든 아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는 어떠해야 한다고 나름대로 정의 내리고, 제한하고, 억제할 때가 있습니다. 아까 다윗의 고백과 같은 고백들을 우리가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기도하는 성도의 고백을 지나가 들었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어느때까지 나를 내버려두십니까? 라는 기도를 듣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십중팔구는 그런 기도는 하면 안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런 원망과 불평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한국 교회의 특징입니다. 물론 불평과 불만이 거기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결국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순종의 자리에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기도의 내용에 제한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아뢸 수 있습니다. 소원과 소망을 구할 수 있듯이, 지금 내 어려움, 고통, 슬픔, 절망, 원망도 아뢸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그런 기도들, 하나님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 누구에게 아뢴단 말입니까. 제가 지도했던 청년 중에 한 명은 기도제목이 한결같이 부자되게 해주세요입니다. 다들 그런 기도 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세속적인 기도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친구의 속마음은 단순히 돈만을 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친구는 교회에서 가난함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는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어서 돈으로 손가락질 받지 않고 돈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기도해줬습니다. 상처받은 영혼의 고백이기에 함께 기도해줬습니다. 지금도 그 친구가 부유해지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 상처가 나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정말로 부자가 된 다음에는 물질 때문에 상처받은 성도들을 치유하는 치유자가 되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이든 아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하지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슬픔도 원망도 하나님이니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원망하고, 사람을 저주하는 것보다 그것이 낫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쏟아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받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본적으로 기도란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만 이야기하고, 나만 떠들기 위한 창구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기도는 동시에 듣기 위한 창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창구이고, 하나님의 뜻을 듣기 위한 소통 창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지 않고, 나의 말만 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기도의 형태이다. 나의 것을 아뢰는 것은 분명히 맞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경청의 자세와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실생활 속에서도 경청의 태도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내 말만 하려고 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대부분은 말하려고 하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더더욱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까 방식과 방법에 따른 기도의 분류를 몇 가지 이야기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전 기도의 다양한 방식 가운데에서는 침묵 훈련이라던가 묵상 훈련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의도적으로 경청의 훈련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청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들으려고 하기보다 자꾸 말하려고만 합니다.
그것도 아까 말한 것처럼 이런 말은 안돼, 저런 말은 안돼 하면서 이리저리 가려가면서 아뢰려고 하는 것입니다.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려고 기다리고 계시는데, 하나님의 위로를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기도는 안돼, 저런 기도는 안돼 하면서 도무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질 않는 것입니다.
질문을 하러 온 사람이 대답을 듣지는 않고 끊임없이 질문만 한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듣는 사람은 얼마나 고역이겠습니까? 대화란 무릇 질문도 하고, 대답도 하고, 주고받는 것이 응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너무 하루종일 우리만 이야기합니다. 우리만 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는 것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나님 생각을 정하고 재단하면서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했던 경험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결혼할 여자를 주시거나, 돈을 주시거나, 집을 주시거나, 사역지를 주세요 라는 하나님 대답을 정해놓고 주구장창 아뢰기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삶을 통해 역사하셨는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절망 중에 신음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안들어주셨지,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지 하면서 말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단지,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장소에서 일하실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듣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지, 하나님은 무엇을 나에게 바라시는지 같은 것들을 듣기 위해서 우리의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결국 순종의 훈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듣고, 계획을 보고, 하나님의 방식을 알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결국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순응하는 훈련인 것입니다.
우리의 지혜가 아무리 높다한들, 우리의 지식이 아무리 바다같다 한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보다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보다 못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식과 우리의 방식은 애초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과 방식에 순종해나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바로 겸손히 무릎 꿇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건 아주 좋은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방식과 방법에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반복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한하고, 하나님을 뜻대로 움직이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보시는 것이 다르고, 하나님이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이삭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방법이 이스마엘이었습니다. 도무지 방법이 없을 것 같은 상황.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던 상황. 나이가 80세가 넘어서 이제 희망이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하갈과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지혜였습니다. 나름대로 현명한 처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를 잘못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잊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닫힌 줄로만 알았던 사라의 태를 열어 이삭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으론 불가능하다 생각하던 일들이 하나님의 방법에선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서 태어난 것은 인간적인 방법이었습니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어째서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방법이기에,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가능합니다.
제 경우를 이야기하자면 저도 그랬습니다. 교통 사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교통 사고를 통해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차가 없어지고, 부족하던 생활비가 채워지고, 고생했던 몸이 정밀한 검사를 받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런 방법은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을 택하셨고,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믿고 순응하고 순종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나의 것이, 내 생각이 최선이 아님을, 내가 무조건 맞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방법은 나와 다를 수 있기에 우리는 기도를 통해 순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이러합니다. 기도는 간절해야 합니다. 기도는 진솔해야 합니다. 기도는 매달리는 것도 맞습니다. 야곱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다윗이 울고 불며 여러 상황에서 아뢰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는 안돼, 저런 기도는 안돼 라는 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기도는 아뢰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아뢸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들으십니다. 내가 누군가를 저주한다고 하나님이 그를 저주하십니까? 저주 안하십니다. 내가 뭐라고 하나님이 내 마음에만 맞게 누구를 저주하고 심판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상처받았음을, 내가 지금 속상함을, 내가 지금 원망으로 가득찼음을, 내가 지금 위로 받기를 원함을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 들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계획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루 종일 우리만 이야기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멈춰서서 기다리며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말만 한다면 그건 넋두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넋두리도 필요하겠지만,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하십시오. 소통은 주고 받는 것입니다. 아뢰었으면, 듣는 시간도 필요한 법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들었다면, 이제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결국 순응해야 하는 것이며, 순종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행함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과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방식에 우리를 맞춰나갈 줄 알아야 합니다. 그 기도의 최종 종착지가 바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그 기도 말입니다. 우리는 결국 그 기도에 다다라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기도 말입니다. 예수님도 하셨는데,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기도가 이뤄지길 바라는 것은 너무 우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또한 그렇게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기도의 3가지 원칙을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무엇이든 아뢸 수 있음을 말씀 드렸고, 그러나 동시에 듣기로 노력해야 함을 말씀 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들었으면 순종해야 함도 말씀 드립니다. 기도의 형태도 다양하고 방식도 다양하고, 내용도 다양하지만 이 세 가지는 가장 기초적인 기도의 기본인입니다. 이 세가지가 무너진 기도는 때로는 내 마음대로 엇나가버릴 수도 있고,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기도를 하시든 이 세가지를 반드시 기억하시고 결국에는 순종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