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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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로교회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이번에 백양로교회에 부임하게 된 이성재목사라고합니다. 늘 그렇지만 부임설교는 떨리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많은 은혜 받으시길 바랍니다.
보시기에도 그렇겠지만 저는 상당히 젊은 목사인 편입니다. 하지만 상당히 어렸을때부터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에 목회경력은 올해로 15년차이고 거쳐온 교회도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부임 설교와 고별 설교도 많이 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부임 설교는 늘 떨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임설교를 보통 여호수아 1장 8절을 본문으로 하는 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창세기 12장 1-3절을 본문으로 부임 설교를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부임을 준비하면서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붙잡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너무나 유명한 부분이라 다들 잘 아시는 본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을 듣고 약속을 받게 되는 부분입니다. 다들 아시다피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인류 문명의 최초 발상지로 손꼽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매우 발전된 첨단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뜬금없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먼 길을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부임을 준비하면서 이 이야기가 번뜩 떠올랐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온 목사입니다. 태어나기를 인천에서 태어났고, 학교 생활은 서울에서 했습니다. 목회의 대부분도 서울에서 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뜬금없이 부산으로 갈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인가,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왠지 모르게 아브라함과의 연관성을 찾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브라함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첨단의 도시에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머나먼 곳, 그리고 문명적으로 조금 뒤떨어진 곳으로 떠난 아브라함과는 다르게, 저는 한국의 제 2의 도시라 불리는 부산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첨단의 도시에서 첨단의 도시로 이사왔으니 아브라함과는 분명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어야만 했습니다만, 저는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고향만 떠났을 뿐 처갓집이 있는 지역으로 왔으니 친척과 아버지의 집도 떠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 아내는 부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꿔말하면, 본가에 계시던 어머니의 집을 떠나서 처가의 아버지의 집으로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브라함과는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저는 결국 아브라함과 전혀 닮은 점이 없는데 오늘 왜 아브라함의 이야기속에서 연관성을 찾고,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가, 그건 바로 그 다음 구절들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브라함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 중에서 고향만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아버지 데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지도 않았고, 친척과도 동행한 것입니다. 완전한 순종이라고 보기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렇게 떠났지만, 데라는 하란에 머무르게 되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에 정착하게 되면서 결국 아브라함만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하나님이 뜻하시는대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잠언 16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맞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계획과 생각으로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면서 아버지와 조카를 데리고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그의 걸음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하여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인도하실 땅으로 이끄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또한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서 어떤 깊은 끌림을 느낀 부분이고 그 이야기를 통해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가 아브라함처럼 머나먼 타국의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의 땅으로 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낯설기도 하고 아는 것도 많이 없는 이 부산의 백양로교회에 오게 된 것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아브라함에게 더 연관성이 느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비슷한 구석은 사실 별로 없지만, 아브라함이 먼 길을 떠나면서 느꼈을 불안과 막막함, 두려움과 혹은 설레임 같은 것들이 어쩌면 제가 느낀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입니다. 물론 거듭 말씀드렸다시피 아브라함과 제 상황은 아예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후에야 가나안 땅으로 향했지만, 저는 제가 먼저 백양로교회에 지원을 하였습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가나안이라는 곳 자체를 하나님의 지시를 듣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이미 부산 지역을 마음에 두고 있기도 했었고, 언젠가 오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으니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되었던 환경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향한다는 것에서 오는 불안함과 잘 모르는 지역으로 향하게 되는 것에서 오는 막연함, 또 새로운 적응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같은 인간적인 연약함들이 아브라함에게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당연히 저보다도 더 큰 불안과 두려움, 막막함, 부담감 같은 것들을 겪었을 아브라함은 도대체 어떻게 그 믿음의 발걸음을 용기있게 옮기게 되었는가. 그것이 오늘 이야기의 첫 번째 핵심입니다.
첫 번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12장 1절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고 말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에 발걸음을 옮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에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과 개인적인 생각과 계획으로 지역을 옮긴 다른 사람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상인들처럼 가나안 땅을 거쳐 이집트 땅에 어떤 큰 거래나 중개무역을 위해 떠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가나안 땅으로 떠난 아브라함의 상황과는 전혀 다릅니다. 두려움과 불안함, 막막함보다는 오히려 부푼 기대감과 기대, 희망이 가득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상인도 아니었고, 가나안 땅 이주에 어떤 대단한 비전을 갖고 있던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야 시작된 이주 계획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에 그 발걸음이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었다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안함과 두려움, 막막함 속에서 도저히 갈 길을 찾지 못할 것 같을 때에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시며 한 걸음 내딛을 용기를 주시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일 때가 있습니다.
판타지라는 장르에 거장이자 거의 시초가 되었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J.R.R 톨킨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쓴 ‘반지의 제왕’이라는 소설은 소설을 넘어서서 각종 게임과 드라마, 영화 등으로 제작이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톨킨의 이야기도 어쩌면 오늘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떠올리게끔 합니다.
톨킨은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언어에 대한 깊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함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톨킨은 그의 신앙과 비전을 통해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바탕으로 '반지의 제왕'과 같은 위대한 작품을 창작했습니다. 톨킨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희망과 용기를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판타지 소설이 아닌, 깊은 신앙과 철학을 담고 있는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톨킨도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막막함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그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의 두려움에 굴복하여 문학과 언어에 대한 열정을 포기했다면, 우리는 오늘날 '반지의 제왕'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신앙과 용기의 힘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톨킨의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두려움과 막막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를 때, 우리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통해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참된 용기와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그 한 걸음의 발걸음이 두렵고 떨릴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내딛는 한 걸음이라면 세상 무엇보다 위대한 한걸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보여줄 땅으로 갔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성경 뒷 부분을 읽었기에 여기서 말하는 보여줄 땅이 가나안 땅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그 때에는 보여줄 땅이 어딘지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 경우를 생각해보면, 저는 제가 지원을 하고, 청빙이 결정되고, 이사를 할 곳이 부산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걱정도, 불안도, 떨림도 있었습니다만 어디로 가야하는지조차 모르고 떠나야 했던 아브라함은 얼마나 그 걱정과 불안들이 컸을지 감히 상상도 안갑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큰 용기를 내어 간신히 한 발자국 내딛었는데, 목적지가 여전히 보여줄 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이라든지, 애굽 방향이라든지 뭔가 명확한 목적지를 제시해주셨으면 아브라함이 마음의 준비라도 더 했을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보여줄 땅이라는 단어가 재미있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다, 나타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는 성경 여러곳에서 사용되는데, 흥미롭게도 창세기 22장 8절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러 갔을 때에 이삭이 번제할 어린양이 어딨냐고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사용된 단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여기서 사용된 ‘준비하시리라’라는 단어가 바로 보여줄 땅에서 사용된 보여줄이라는 단어와 같은 원어입니다. 그러니까 바꿔말하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한 말은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신 어린 양을 보여주시리라. 라는 문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또 오늘 본문인 창세기의 이야기는 내가 너를 위하여 준비한 땅으로 가라 라는 문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군생활을 할 때 참 걷고 뛰는 일이 많았는데, 저는 지금 보셔서 아시겠지만 원래 덩치가 좀 있고 운동을 잘 못하는 체질이었습니다. 그래서 특별나게 운동을 많이 하는 부대로 가게 되어 참 고생이 많았는데, 그 때 제가 오래 달리기를 하면서 익힌 노하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눈 앞에 한 사람만 보고 달리자는 것입니다. 매번 달렸던 길을 달리는 것은 조금 나았습니다. 어딜 지나면 뭐가 나오고, 얼마나 더 가면 목적지에 다다른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악랄한 우리 부대원들은 매번 다른 코스로 사람들을 뛰게 하였고, 저처럼 운동 능력이 뛰어나지 못한 친구들은 그 때마다 참 고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앞사람만 잡는다는 생각으로 뛰었습니다. 저 사람만 따라잡아야지, 저 앞에 사람만 따라잡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계속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끝이 어딘지도 모를 코스를 뛸 때마다 그렇게 했더니, 항상 맨 꼴찌에서 달리던 제가 어느 순간에는 가장 먼저 앞서 달리게 되는 경우도 생기곤 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보는 것에 민감한 존재들입니다. 앞에 아무것도 없다면, 보이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 막막함 때문에 사실은 별로 어렵지 않은 길일지라도 더 두렵게 느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보여줄 땅으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몰라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땅을 보며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눈으로 보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비전을 마음에 품고 나아갈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주신 비전과 소망이라면 어쩌면 눈으로 보는 것보다도 더 강력한 우리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여정은 믿음과 순종의 여정이었습니다. 명확한 목적지와 목표를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소명과 비전을 마음에 품은 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인간이기에 순간순간 두려움에 휩싸이고 절망감에 무너질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아브라함 역시 인간적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과 소망을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는가, 그 비전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가 하는 믿음과 순종의 질문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결국 가나안 땅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약속과 믿음의 증거인 이삭을 아들로 얻습니다. 이삭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과 비전, 소망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저 역시도 그러합니다. 부산으로 향하면서 제가 뭔가를 보고 온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떤 명확한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계획에 없던 일이기도 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면서 선택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막상 떠나기로 하여 청빙이 결정된 날부터는 상당한 막막함과 불안감,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전혀 모르는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것들에 적응해야 하는 과정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한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시는 비전과 소망이기를, 그리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한 걸음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도 이런 모험과 도전의 한복판에 놓인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하루하루는 항상 이런 모험과 도전의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때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보여주실 땅을 마음에 품고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어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나 혹은 우리를 해하려는 음모나 계략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절망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마음에 품고 나아가는 아브라함의 이 모습이 우리에게 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아브라함처럼 용기 있는 한발짝을 내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들의 응답이자, 결말은 아브라함이 복이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으로는 복이 될지라였는데, 이전 번역으로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였습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번역이 조금 바뀌었습니다만, 아브라함이 복이 된다는 의미는 아브라함 본인도 복을 받지만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이 복을 받으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아브라함이 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복이 내린다는 것처럼,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부산에, 그리고 이 백양로 교회에 온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고 하나님이 보여줄 땅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제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한 결과가 바로 이 곳에서 복의 통로가 되어 저와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복을 받는 그런 강력한 축복의 은혜가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그런 마음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제가 가는 곳에서 제가 복의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또한 여러분도 그렇게 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삶의 자리 어디에서도 여러분이 복의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세밀하게 듣고 분별하여 어디로 향할 것인지, 떠날 것인지, 머무를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이제 하나님이 보여주실 땅을 마음에 품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본래 눈으로 보아야 안심할 정도로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보여주실 땅을 마음에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주시는 마음을 품고 나아갈수만 있다면, 그 어느 곳을 가더라도 두렵지 않고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아간 곳에서 저와 여러분 모두, 우리 백양로의 모든 성도들이 복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주변의 모든 이들이 복을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주변의 이들만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또한 복을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 복이 어떤 복이든지, 물질의 복이든지 건강의 복이든지, 그 어떤 복이든지 우리도 모두 충만하게 받고, 우리 주변의 이들도 우리를 통하여 복을 누리는 은혜가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갔습니다. 그 믿음의 여정에서 그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저도 여러분과 함께 이 부산에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따라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보여주실 땅을 마음에 품고 나아갈 때, 우리는 복의 통로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함께 하나님 주시는 복 안에서, 하나님의 비전과 소명을 품고 하나님의 음성대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