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해결책이 낳은 문제

오경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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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6장 1-6절 잘못된 해결책이 낳은 문제
찬송 516 515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사람은 그것을 때로는 참고 기다리지 못한다.
어제 말씀을 통해 믿음이 미래 지향적이라고 한다면 믿음은 또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믿음은 곧 기다림이다.
여기서는 처음으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무대 전면에 나타난다.
그런데 아쉽게도 좋은 모습보다는 기다리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마 하나님의 직접적인 약속을 받지 못해서 그녀가 가지는 초조함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사래의 태를 닫으셨으므로 자녀가 없었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아브라함의 이름과 사라의 이름이 각각 아브람, 사래로 나온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바뀌는 것은 17장에 나온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도 자손에 대한 욕심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여종을 통해 대리로 자식을 얻는 것이었다.
아마 이러한 문화는 당시에는 일반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배경과 문화를 알 수 있는 문헌이 함무라비 법전이나 누지문서가 있다 여기에도 이런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는 관습이었다.
오히려 당시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더 큰 수치로 여겼다.
그러니까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애굽 사람인 여종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것은 그녀의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물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은 아니었다.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올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가는데 있어서 항상 위기가 있다. 어려움이 있다.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도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어 주셨는데, 바로 이어 이렇게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전에
다른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
3절에 보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으로 온지 10년이 지났다.
그때 아브라함은 85세였고, 사래의 나이는 75세였다.
한해 한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래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자손을 낳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브람에게 말한 것이다.
사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사래의 제안을 거절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해서라도 자손의 대를 잇는 것이 혹시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하는 조급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듯이 인간적인 방법은 반드시 인간적인 갈등을 만들어낸다.
사래도, 아브람도 목적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자식이 없는 상황에서 자손의 대를 잇는 의도였다 할지라도
목적이 옳다도 방법이 옳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깨닫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방법까지도 선하게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물어야 함을 배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강제적으로 이끌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셨다.
결국 아브람은 사래의 제안데로 하갈과 동침하였고, 하갈은 임신하게 되었다.
그러자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었다.
자식을 가진 하갈이 사래를 무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주도권이 바뀌었다.
하갈의 눈에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힘잃은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주인의 씨를 잉태한 하갈은 더욱 거만해졌다.
이미 예상한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수모를 당한 사래는 이제 아브라함을 다시 원망했다.
5절에서 사래는 이렇게 말했다.
<창 16:5>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겪는 수모를 사실은 당신이 겪어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 왜 이렇게 말했을까?
처음엔 사래의 여종이었지만 아들을 얻기 위해 당신의 첩이 되었으니 당신이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과 나 사이에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사래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억울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정작 문제의 시작은 자기가 만들었지만 그로 인해 당하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아브라함에게로 문제의 책임을 넘기고 있다.
성경을 보면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위해서 그 목적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출애굽기에 보면 사래의 표현과 동일한 표현이 또 나타난다.
<출 5:20-21절>
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모세가 아론과 함께 바로에게 찾아가 내 백성을 떠나게 하라고 하자
바로는 백성들이 게을러서 그렇다고 하면서 이전보다 더 벽돌 만드는 일을 어렵게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의 기록원들이 모세와 아론을 보자 자기들에게 더 어려움이 생긴것을 알고
억울하다며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이다.
모세는 그들을 위해 용기를 내었는데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에게 닥친 어려움만 하나님앞에
옳다고 말하는 것이다.
선지자도 그러했다.
<요나 4:9절>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이 요나가 초막을 만든 박넝쿨을 벌레를 통해 갉아먹게하고 뜨거운 동풍을 보내시니
그는 더위속에서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달라고 간청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람은 정작 자신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기회를 주시고 은헤를 주셨는데
자기가 그런 은혜를 받았으면서 멸망당할 니느웨를 용서하신것은 용납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사래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일때가 많다.
나의 목적이 옳기에 내가 당하는 어려움은 합당하지 않다는 논리.
그래서 사래는 아브라함에게 책임을 넘기며, 하나님앞에서도 선악간에 판단하셔도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사래는 아이를 낳기 위해 하갈을 아브람에게 줄 생각만 했지 그 결과는 예상하지 못했다.
생각지 못한 어려움으로 사래는 사래대로 맘이 상하고 아브람에게 그 원망을 쏟아내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내용을 또 한가지 깨닫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할 때, 비록 당장 눈앞에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할지라도
생각지 못한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한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문제에 맞부딪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이다.
즉,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라 임기응변식으로 그 문제만 해결하고 생각지 않은 또다른 문제를 만나는 것이다.
결국 문제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이 답을 주시면 그것으로 끝이 나지만 내가 답을 찾으려 하면 그 답 너머에 또 다른 문제를 풀어야하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문제는 그렇게 생겨나는 또 다른 문제앞에서 아브람조차도 제대로 된 답을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이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의 손안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보기 좋은대로 하라
여기서 출애굽기의 복선과 같은 미묘함을 보게 된다.
아브람의 경솔한 답은 사래로 하여금 애굽 여종을 학대(아나)하게 만들었다. -> 훗날 출애굽기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을 학대(아나)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학대하다는 동사는 누르다, 괴롭히다, 대답하다 등의 여러 의미가 있다.
사래가 애굽 여종을 학대한 결과 여종은 견디다 못해 도망했다.(바라흐) - 이 단어는 서두르다, 달아나다, 가버리다는 뜻도 있다.
<츌 14:5>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나중에 출애굽기에서는 애굽왕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게 허락한 이후에, 그들이 도망한 것으로 이해하고 후회하는 모습이 나온다. 여기에 도망이라는 동사가 하갈이 사래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도망한 단어와 같다.
성경은 이처럼 대단히 치밀하다.
사래의 그릇된 판단과 아브라함의 소극적인 대응은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잘못 이해하여 인간적인 방법으로 답을 찾으려한 모습과 또한 생각지 못한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여종을 학대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 애굽 여종은 이를 견디다 못하여 도망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할 바른 행동이 아닌 것이다.
조급함, 약속을 신뢰하고 기다리지 못함, 인간적인 답을 찾으려는 것들이 결국 의도하지 않은 나쁜 결과로 나타남을 본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시며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셨는데, 사람은 아직 그 은혜에 온전히 이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본다.
기도
주님의 때를 믿고 기다리게 하소서
인간적인 해결이 결코 바른 답이 아님을 깨닫고 성령께서 바른 답을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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