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속의 제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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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views지진과 풍랑의 의미 예수의 잠의 의미 제자들의 믿음이 적다는 것의 의미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제자도)의 의미 이 모든 것들이 일어나는 장소, 공동체
Notes
Transcript
<들어가기>
여러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성경 말씀을 나누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설교 부탁을 받고 우리 청년들과 어떤 말씀을 나누면 좋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청년’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푸를 청, 해 년. 푸르른 날들을 살아가는 사람, 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럼 저도 청년의 한 사람으로서 함께 말씀을 나눠 보겠습니다.
청년의 때에 중요한 키워드가 무엇이 있을까요? 친구, 학업, 진로, 이성교제와 결혼, 신앙, 공동체, 이런 것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젊은 청년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은 어떠신가요?
청년의 때에는 인생에서 처음 마주하고 경험하는 일들이 많고, 또 여러가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합니다. 인생의 방향과 가치관을 설정해야 하고, 이성교제와 결혼 문제도 중요하고, 무슨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살아갈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청년의 때에 맞닥뜨리게 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젊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이있기도 하지만 그만큼 안정되지 않고 불안한 시기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특히 여러분과 같은 기독교인 청년들은 나의 신앙, 그리고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가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깊이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 삶의 무대가 되는 이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란 무엇일까,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문제들을 잘 해결하고 옳은 선택만을 하면서 살아가기엔 우리는 너무나 연약해 보이고, 우리가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주변 상황은 많은 경우 내 힘으로 쉽게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마치 시시각각 변화하는 날씨와도 같아서, 따뜻한 봄날 같다가도 금세 비바람이 부는 날로 변하기도합니다.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날씨 변화가 당혹스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날씨 속을 걷고 계신가요?
오늘 저는 예수님을 따라 배를 타고 길을 가던 사람들이 맞닥뜨렸던 폭풍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제자’라고 불린 한 무리의 사람들과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지나다가 커다란 풍랑을 만났고, 그 풍랑이 어찌나 거셌던지 배가 파도에 뒤덮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가 흔들리고 물이 들이치는 상황에서도 주무시고 계셨고,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워서 도와달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그제서야 잠에서 깬 예수님은 “왜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라고 말씀하시더니, 바람과 바다를 꾸짖습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이 그치고, 파도는 잠잠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 분은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하고 예수님의 정체를 궁금해합니다.
다섯 절로 이루어진 이 짧은 에피소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 복음서는 비슷한 관점을 공유한다고 해서 공관복음이라고도 불립니다. 사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을 기초로 하여 쓰여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기자는 마가복음에 나온 예수님의 이야기들, 그리고 또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여 자신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마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도 기본적인 이야기의 내용과 구조는 마가복음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목적과 의도에 따라서 세부 내용들과 그 에피소드가 쓰인 맥락과 배경들이 조금씩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맥락과 구조: 전후 문맥과 23절을 중심으로>
그렇다면 이러한 저자의 관심과 목적, 의도가 오늘 본문에 어떻게 드러나 있을까요? 먼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맥락을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단락에는 예수를 따라가고자 했던 두 명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이 있으시면 함께 보시면 좋겠습니다.
19절을 보면 첫 번째로 한 서기관, 즉 율법학자가 예수께 와서 예수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또 한 사람이 먼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에 예수를 따르겠다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자들이 치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는 명확한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 이 본문은 사실 이 본문을 둘러싼 전체 맥락과는 잘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8:1부터 9:34까지는 계속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8:18, 즉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단락의 도입부 바로 다음에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본문의 첫 절인 23절을 놓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19절부터 22절을 빼고 23절을 읽으면 훨씬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거죠.
(같이 읽기,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웨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예수의 기적들을 쭉 이야기하는 전체 맥락 속에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를 따르는 삶’, 즉 직접적으로 제자도를 다루는 19-22절을 추가하여 넣음으로써,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는 관점으로 읽도록 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19절에서 서기관, 이 율법학자는 내가 선생님을 ‘따라가겠다’ 라고 말하고 있고, 또 22절에서 예수님은 너는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두 번이나 사용된 ‘따라가다’라는 동사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첫절, 23절에도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그를 ‘따라갔다’”.
이렇게 마태복음에는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간”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마태복음의 자료인 마가복음에는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갔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간 것과 제자들이 예수를 모시고 간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게 합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는 관점에서 읽을 수 있도록 배경을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오늘 본문은 “예수를 따르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맥락과 연결되어 있고, 특히 “따라가다”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 “따라가다”라는 헬라어 단어의 뜻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여행길을 따라가다’이고, 하나는 ‘행동을 따라하다’입니다. 단지 길을 따라가는 행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의 행동을 따라하는 행위를 포함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라는 것이죠. 여기에서도 ‘제자로서의 삶’을 염두에 둔 마태복음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삶, 예수님을 따르는 삶. 그리스도인 청년으로서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은 본문에서 ‘제자들’이라고 칭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라는 것입니다. 아까 말했던 공관복음에 속하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오늘 이 사건, 즉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기 전에 예수께서 12 제자들을 모두 부르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따라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풍랑 이야기에서 ‘제자들’이라고 했을 때에는 12 제자들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읽은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예수님은 단지 4명의 제자들, 즉 베드로, 베드로의형제 안드레,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 야고보의 형제 요한을 부르셨을 뿐이었고, 예수님이 12제자 모두를 불러 제자로 삼으신 것은 이 사건이 있은 다음에 10장에서 12 제자를 세상 속으로 파송하시기 직전에야 나옵니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의 저자는 마치 예수님을 따라 배에 탄 사람들이 12제자가 아닌 듯한 설정을 하고 있습니다. 따로 부름 받은 12명, 나중에 사도라고 인정받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보다 더 포괄적으로 제자의 범위를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가다”라는 동사가 “길을 따라나서다”와 누군가의 “행동을 따라하다” 라는 두 가지 뜻 모두를 포함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따라 배에 탄 사람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따라 살려는 구체적인 헌신 없이 그저 기적을 일으키는 그분이 신기해서 막연히 길을 따라나선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행동까지 따라하려는 헌신된 자세를 가진 사람들, 곧 먼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4명의 제자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언급이 없지만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탄 배를 여러 배들이 따라왔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속으로: 절별 주해 & 키워드>
그럼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24절은 본격적으로 이 날 벌어진 일을 설명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독자들의 관심과 집중을 불러 일으키는 감탄사 (이두!), 우리말로 하면 ‘자, 보라, 이것좀 보세요!’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감탄사를 24절 맨 처음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뭔가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죠.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물로 뒤덮일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 말로 번역된 큰 ‘풍랑’ (개역개정은 ‘놀’이라고 번역)이라는 단어(세이모스)가 헬라어 원문으로는 큰 ‘지진’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그냥 ‘거센 바람’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24절 첫 문장을 직역하면 “바다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진’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 안에서 4번 사용되고, 다른 공관복음, 즉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통틀어 1번 밖에 사용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지진’은 대부분 종말론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킵니다. 무언가의 끝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지진이 일어나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고, 3일 간의 예수의 죽음의 기간이 끝나고 무덤 문이 열린 것도 지진이 일어난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끝에 일어날 징조 중의 하나로도 ‘지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기자가 사용한 이 ‘지진’이라는 표현은 단지 바닷물을 일렁이게 한 원인을 언급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이 그 순간이 자기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급박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는 것을 묘사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24절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 배에 올랐던 사람들이 세상이 끝날 것처럼 느껴지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음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파도가 들이치고 배가 물에 “뒤덮이는” 숨막히는 상황, 목숨을 위협하는 폭풍 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쓰인 ‘뒤덮이다 (칼립토)’ 라는 단어는 ‘덮다’를 뜻하는 ‘칼립토’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덮다’라는 뜻 이외에, 이와 비슷한 뜻인 ‘감추다, 숨기다’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이들이 탄 배는 파도와 들이치는 물에 의해 덮이고, 감추어지고, 숨겨지기 일보직전입니다. 이처럼 갑자기 들이닥친 폭풍 같은 시련은 우리를 이 세상 속에서 감춰버리고, 숨겨버립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인생의 여정 속에서 지진과 풍랑을 만나고, 우리가 탄 배가 뒤집혀 내 존재가 감추어지고, 숨겨진 것 같은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시련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찾아오기도 하고, 또 때로는 오늘 본문 속 제자들처럼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여정 속에서 찾아 오기도 합니다.
혹시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폭풍 속을 걷고 있는 지체들이 있으신가요? 예기치 못한 삶의 풍파로 인해 내 존재가 작아지고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 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는 지체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의 뒤를 따라가고자 길을 나섰는데, 왜 지진과 풍랑이 일어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이러한 풍랑을 지나온 경험이 있거나, 서서히 일렁이며 다가오는 파도를 목격하고 있는 지체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반면에 평온한 바다 위에서 순항하고 있는 지체들도 있겠죠. 인생의 여러 날씨 속에서 여러분은 어느 날씨를 경험하고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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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거센 풍랑이 일고 있는데 예수님은 평온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같은 장면을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배의 뒷부분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고 묘사합니다.
(앞선 단락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곧바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시네요. 사실은 어디서나 잘 주무시는 편이셨던 것 같습니다.)
지진과 풍랑 속에 잠을 자고 계신 예수님. 잠을 자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가 한 장면에 펼쳐지고 있는, 매우 극명한 대조적 이미지를 드러냅니다.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때때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무시고 계시는 것 같이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지만 내 어려움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장면은 격한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는 자가 누리는 평안함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구약에서 이러한 잠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신뢰의 증거로 종종 등장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 4:8)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 3:5-6)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
너는 갑작스러운 두려움도 악인에게 닥치는 멸망도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잠 3:24-26)
따라서 평안히 잠을 자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제자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26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왜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러한 대조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적용 1: 기도>
이렇게 지진과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께 부르짖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새번역은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주님을 부르는 제자들은 모습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생각됩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에, 배가 뒤집힐 위험에 처했는데도 주님을 부르지 않고 배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잠을 자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일까요?
네 바로 요나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배에서 가장 깊은곳으로 내려가 잠을 자고 있었고, 폭풍이 휘몰아치는 상황에 다른 이방인 선원들이 각자 자기 신에게 기도하는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요나와 함께 배를 탄 이방인 선원들이 요나에게 “당신이 믿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시오!” 라고 말하며 요나에게 기도를 재촉합니다.
배를 타고 가던 중에 폭풍을 만났던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어 배를 타고 가던 중에 거대한 폭풍을 만납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거센 바람만 심하게 불었고, 사람들은 희망을 잃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바울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그도 하나님을 찾고 기도했습니다. 여러 날 바람도 그치지 않고 먹지도 못해서 희망이 사라진 그 때 바울은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구체적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바울이 기도하던 날 밤에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반드시 황제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타고 가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너에게 맡겨 주셨다 (행 27:24)”. 그리고 바울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폭풍이 일고, 배가 뒤집히고, 우리의 존재가 감추어지고 숨겨지는 그 때에 우리는 나의 존재를 겹겹이 덮고 있던 허울들이 벗겨지는 것을 경험하고, 내 존재의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실재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은 요나의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바울의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이 풍랑 속에서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당장 필요하지 않은 짐들을 배 밖으로 던져버리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생존에 대한 절박함은 우리를 기도로 이끕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그랬고, 바울이 그러했고, 또 요나와 함께 배를 탔던 선원들이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의 내용을 미루어 볼 때 바울도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나와 배를 탄 선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의 생존이 위협 받는 폭풍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바로 기도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라고 했습니다. 나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통제를 배우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경험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고, 철저히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합니다.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음을 인정하고, 바다와 바람을 잠잠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내 삶과 내가 처한 상황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관계를 맺어야 하는 인격적인 실재라면,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라는 행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의 참 주인이시며,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응답이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
<적용 2: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폭풍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소명과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렇지만 동시에 폭풍은 우리의 소명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보시고,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그랬더니 바다가 아주 잔잔해 졌습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폭풍을 만났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것을 경험하고는, 그 폭풍을 통제할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따르는 제자가 ‘되어갑니다’. 여기에서 제가 ‘되어간다’고 표현한 것은 이미 제자라고 칭함 받고 있던 사람들이 사실은 그다지 제자답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초반에 살펴본 것처럼, 이 제자 무리에는 아마도 예수께서 처음 부르신 4명의 제자들, 즉 나중에 12제자에속했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그 외에도 호기심에 예수를 따라나섰던 다수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탄 배 말고도, 다른 배들도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6절 본문은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아직 제자들의 믿음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마태복음의 저자는 마가복음과는 달리 곳곳에서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유대인 중심의 공동체였던 마태복음의 청중들이 예수의 제자였던 이 사람들을 권위있는 사도로 인식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대체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방금 살펴본 부분도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라고 적은 마태복음과 온도 차이가 느껴지죠.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두 저자는 하나의 이야기를 다른 맥락에서 자신만의 강조점을 가지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믿음이 적고, 아직 확신이 없는 제자들을 그다지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제자들을 꾸짖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위험에 빠뜨린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십니다.
여기에서 쓰인 “꾸짖다”라는 단어는, 17:18에서 한 아이에게 들어간 귀신을 내쫓기 위해 귀신을 꾸짖으셨을 때 사용된 단어과 같은 단어입니다.
폭풍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고, 확신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 예수님은 “왜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제자들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대신 믿음이 적은 사람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폭풍을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보여 주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휘몰아치는 상황 속에 내가 작게 보이고, 숨겨진 것 같고, 감추어진 것 같이 보일 때, 그리고 믿음마저 크지 않아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질 때, 예수님은 우리를 탓하시기 보다는 몸소 그 폭풍 속에서 머리를 대고 주무시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본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적은 믿음을 꾸짖기 보다는 그 폭풍 같은 상황을 꾸짖고, 거세게 휘몰아치는 그 바다와 바람을 잠잠하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주님께 담대히 기도로 나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적용 3: 예수가 누구인지 질문하며 살아가는 것이 제자도>
이렇게 바람과 바다마저 복종하게 하신 예수님을 눈 앞에서 본 제자들은 놀라서 서로에게 묻습니다.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다른 복음서들에는 “이 분이 ‘누구’이길래” 바다와 바람이 순종하는가?” 라고 질문합니다. ‘누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 사용된 단어는 ‘어떤 종류(what kind)의 존재(사람이라는 단어는 원문에 없음)이냐’ 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질문입니다. ‘어떤 종류’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포타포스)는 더 정확하게 따져 보면 “어디에서부터”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분은 어디에서 오신 분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아직 온전한 믿음과 확신이 없던 제자들은 예수가 누구이신지, 어디에서 오신 존재인지를 질문하고 있고, 또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여정 속에, 아직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지 않아도 우리는 예수가 누구이신지 계속 질문하면서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물으며 가다 보면 그가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도, 제자로서 사는 삶의 여정입니다.
오늘 본문인 8장에서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을 경험했던 제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베드로는 14장에서 비슷한 경험을 또 한 번 하게 됩니다. 14:22에서 예수님은 따로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서 먼저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 배가 또 풍랑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번에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기 시작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움에 빠져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나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흥분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런 부탁을 합니다. “주님, 주님이시면 저도 물위를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은 그러라고 하셨고,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서 진짜 물 위를 걷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또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지게 됩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 저를 살려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이 외쳤던 말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대답도 오늘 우리가 본 본문 속 예수님의 말씀과 똑같습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시간이 지나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음에도 제자들은 똑같이 두려워하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여전히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믿음이 적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 사건을 목격한 제자들의 반응이 달라졌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이 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어디에서 오신 분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만, 14:33에서는 베드로를 건지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그들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들 스스로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은 것입니다. 제자리인 것 같고, 아직도 거센 바람이 주는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을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폭풍을 겪으면서, 실수를 반복하면서, 그리고 기도하면서,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대답을 찾아갑니다. 그 여정 속에서 우리는 폭풍 같은 상황을 통제하는 능력을 갖게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을 꾸짖고 잠잠하게 하실 능력이 있는 우리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제자로 사는 삶을 위해 필요한 믿음이란 단지 어떤 훌륭한 명제에 대해 추상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계속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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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 4: 한 배를 탄 교회 공동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기원후 2세기에 활동했던 터툴리안이라는 신학자를 비롯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배를 ‘교회’로 이해하고 이 본문을 해석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함께 탄 이 배는 오늘날 우리가 이루고 있는 교회 공동체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배를 탄 제자들은 함께 예수를 따랐고, 함께 풍랑을 겪었고, 함께 예수님의 기적을 목도했고, 함께 예수가 누구인지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그저 호기심에 따라나선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행동까지 따라하는 제자가 되려고 그를 따라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이미 잘 알고 그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아직은 예수님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그를 한 번 따라가 보려고 하는 사람이든 그들은 한 배를 타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고, 마태복음 저자는 그들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이 함께 모여 앉아 있는 것처럼,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곳에 모여 함께 예수가 누구인지 질문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 함께 말씀을 듣고 삶을 나눕니다. 그리고 함께 그 말씀을 해석하며,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함께 걸어갑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이유입니다.
<맺음말>
푸르른 젊음의 때를 살고 있는 우리는 때때로 예기치 않은 지진과 풍랑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상황을 전복시키고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실 수 있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내 존재의 모습을 들여다 보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제자입니다. 우리 주님은 “너는 왜 믿음이 하나도 없니?” 라고 우리를 책망하시기 보다는, 손수 우리에게 참된 제자의 본을 보여 주시고, 친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그 상황을 꾸짖어 주십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질문이 생깁니다. “나는 정말 제자가 맞을까?”,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이신가?”. 제자로 사는 삶은 모든 질문에 답을 가지고 사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은 때때로 생기는 질문들을 품고 계속 꿋꿋하게 그 길을 걸으며 그 답을 찾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혼자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옆에 같은 배를 탄 공동체 지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우리 일산은혜교회 청년부 공동체가 그러한 건강한 ‘해석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89:8-9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8 주 만군의 하나님, 누가 주님 같은 용사이겠습니까? 오, 주님! 주님의 신실하심이 주님을 둘
러싸고 있습니다.
9 주님은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다스리시며, 뛰노는 파도도 진정시키십니다.
<결단 기도>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불러 주시고, 예수님을 머리로 한 공동체로 모이게 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때때로 우리를 두렵게 하는 지진과 풍랑 같은 상황을 맞이할 때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기억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 옆에 있는 지체들과 함께 예수가 누구이신지 함께 물으며, 그 답을 찾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은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다스리시고, 뛰노는 파도도 진정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 그렇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