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8: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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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 때!
이제는 그 때!
2장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준비해야 할 신랑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예 없던 포도주가 아니라 잔치에 쓰기에 부족한 상태라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 삶도 그러함을 보여 줍니다.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부족함이 발생하는 것이 인생이 처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어머니는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라고 아들의 능력을 기대하며 말합니다. 그때에 예수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합니다.
16장에서 제자들에게 ‘그 때를 당하면’ 말씀하신 것은 정말로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장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예수의 능력이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능력 가까이 있던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사건부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말 그대로 믿기 어려운 기적이지만 저자 요한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기적이 보여주는 본질인 ‘예수가 누구이신가? 입니다. 그래서 기적이라는 말 대신 ‘표적’, ‘표징’ 이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18장 19장 두 장에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 때’가 어떻게 역사의 현장에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서 오랜 시간 살핀 내용들이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과 연결되어 각자의 속에서 ‘아 그래서 그랬구나’하는 놀라운 경험을 기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 역시 예수의 죽으심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과 승천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하심을 통해서 분명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는 예수를 눈으로 본 것도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기록된 글을 통해 읽고 듣는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믿어지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믿기 때문에 유아 세례를 베풀고 성장함에 따라 세례 문답 교육을 하고 입교인으로 세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믿음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합니다. 어떤 때는 성경의 말씀을 읽어도 들어도 마음 깊이까지 도달하지 못하거나 예배의 감사도 시들할 때가 있다는 거죠. 그중 십자가의 죽으신 사건에 대한 피상적인 감정에 호소한다든지 널 위해 죽었다고 주입하듯 말하는 신앙교육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읽고 생각하는 작용을 통해 받아 들이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7:11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라는 말씀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18장을 시작하면서 예수는 ‘나가시니’, ‘함께 들어가셨다’ 행동을 합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행동은 결코 쉽지 않고 또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경우는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과 같은 말이 나온 것이겠죠. 예수께서는 3년동안 ‘때’를 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로 마치시고 ‘나가시니’, ‘들어가셨다’라고 행동하십니다. 그리고 가신 곳은 가끔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가룟 유다’도 아는 곳이었습니다. 즉 역사가 시작되는 지점은 우리가 다 아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학생은 공부하는 곳에서, 운동 선수는 운동장에서, 직장인은 회사에서, 신앙은 삶에서 일어납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떠난 가룟 유다의 시간입니다. 자리를 떠난 유다의 행동은 대제사장에게 찾아가 예수를 팔았습니다. 팔기만 했을까요? 3절에 보니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라고 말합니다. 여기 군대라는 용어는 로마의 군대를 의미하는데 당시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의 공간은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언제든 민란과 같은 소동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를 성전 바로 옆 더 높이 세운 안토니오 요새에서 늘 감시했습니다. 거기에 가이샤랴 빌립보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안 안토니오 요새를 중심으로 주둔 합니다. 군대라는 용어는 군단의 10/1 수준으로 대략 600여명으로 구성이 됩니다. 그리고 ‘아랫 사람’이라 일컫는 이들은 성전 자체적으로 조직하여 운영되는 예루살렘 성전의 경비 병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략 200-400여명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출동했다는 것을 여러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파는’ 자 입니다. 이마 앞서 6장에서 요한은 ‘유다’를 예수를 파는 자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를 팔고 있고, 유대인들은 앞서에서도 죽이려 결의했고 여러번 시도하려 했어도 유월절에는 민란 걱정으로 피하자고 했지만 유다의 배신은 이런 분위기를 뒤엎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군대까지 동원하는 것입니다. 이제 각 그룹의 모든 때가 ‘한 점’으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역사가 ‘가룟 유다’ 때문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제 시작’이라는 사인을 보내지 않으면 군대라 할 지라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세상은 만물의 질서를 부여 받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자연은 법칙에 의해 하나의 변화도 없이 움직입니다. 자연이 그렇다면 사람은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역사’라는 시간을 부여하셨습니다. 사람은 그래서 자연의 법칙을 순응하며 즉 다스리며 역사를 써 내려 가야하지만 오히려 자연을 훼손하는등 창조 질서의 파괴적 주범이 되어 있고 창조의 질서 조차를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대적자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시간도 창조주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아는 것은 예수를 팔고 그를 잡기 위해 제자들과 모이는 곳을 알았지만 예수는 이 모든 것을 ‘아시는’분이시고 ‘그 때’를 결정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0:28–29 “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 흔한 참새가 시장에서 덤으로 팔리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간섭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살펴 보십시오 그들은 ‘그 때’를 알고 싶어서 영적인 대화를 찾아다고, 영적인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를 보려는 마음은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마치 ‘신의 행세’를 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지 않으면 마치 잔치에 부족한 포도주처럼 그것만 있으면 해결될 것 같은 ‘자신이 아는 장소’로 각자는 발걸음을 옮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인 곳이지만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4절에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다’입니다. 모든 것을 의미하는 ‘다’는 유다처럼, 대제사장이나 천부장과 같이 자신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착각하는 이들과 명령이니 나는 시키는대로 했다고 하는 군대에 속한 군사나 아랫사람들 모두를 아는 것입니다. 마치 돋보기의 초점에 빛이 모이고 드디어 연기가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은 ‘발화점’입니다. 우리는 목적없이 살지 않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 정점에 ‘돈’이라는 것을 놓고 돈을 찾기 위해/ 벌기 위해 동분서주 합니다. 어떤 주식을 사야 가치가 올라 갈까? 어디에 투자를 해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어떤 집을 사야 우리 가족이 행복감을 누릴까가 아니라 더 비싸게 팔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대놓고 주가를 조작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자들이 매일같이 언론을 뒤덮고 있습니다. 더한 것은 법을 집행해야 할 이들이 오히려 더 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는 것이죠.
그들이 예수를 붙잡았지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 앞에서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할 때 ‘내가 그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앞서 예수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표현하면 ‘나는…이다’라는 표현이 여기에도 등장합니다. 그들의 반응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라고 요한은 상황을 표현합니다. 왜 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게 했을까요? 동일한 질문과 답변 그리고 예수께서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허락하는 듯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찾던 예수는 유대인 입장에서 하나님을 모독한 범죄자였고 로마의 입장에서는 유월절에 모인 많은 사람을 선동할 위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맞닥뜨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질’ 수밖에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요한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막.누가는 현실적으로 가룟 유다가 입맞춤을 했을 때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예수를 손으로 덮쳐서 붙잡았다’ 라고 기록한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살인을 불사하는 종교지도자들은 로마의 손을 빌려 예수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법적인 정당성을 찾은 것이죠. 그들은 ‘백성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대제사장 가야바는 말했습니다.(14절) 그러나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은 ‘예수의 실체’였습니다. 영적으로 산다고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우리가 교회의 언어를 쓰고 우리 삶의 대부분을 교회와 연결된 삶이라 할지라도 예수께서 누구이신가를 분명하게 깨닫지 못한다면 이런 종교 지도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시간에 광화문에 모여서 마치 대제사장처럼 ‘백성을 위해서’ 우리가 모였다라고 말하며 종교적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칼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라 이름하는 자의 오른쪽 귀를 잘랐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말씀하시면서 베드로의 칼을 쓰는 행동을 꼬집습니다. 마태는 ‘내가 내 아버지께 부탁하여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부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그렇게 한다면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되묻습니다. 누가는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며 ‘고난’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앞서 9장의 태어나며 눈 멀었던 자를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눈을 뜬다. 얼마나 멋진 일이자 놀라운 기적이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 고통 중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그가 눈을 뜨자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좇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함으로 기적이라는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걷는 자가 되었고, 나사로 역시 다시 살아 났지만 기쁨도 잠시 유대인들은 나사로까지 죽이기로 했다고 기록합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그립니다. ‘다 잘될거야’ 그러나 기독인들에게 주어진 ‘잔’이 황금색 잔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의미하는 잔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진리를 알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 크게 요동칠 것입니다. 앞서 돈의 가치를 최고로 놓고 가는 길과는 전혀 다르다는 길이라고 알게 될 때 혼돈 속에 빠집니다. 세상 모두가 그렇게 사는 삶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삶이자 방식인데 그런 방식이 아닌 ‘고난의 잔’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그분’즉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가 겪는 것은 주님과 함께 마셔야 하는 ‘고난의 잔’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8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앞서 두 제자들이 예수를 향한 사람들의 찬양을 보고 권력의 정점에 오르면 양쪽에 앉기를 바라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늘의 진리를 알고자 하지만 막상 알게 되려는 시점에 회피하고 떠나거나 예수를 배반해서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는 앞잡이가 되거나 아니면 제자들처럼 옆에 있으면서도 귀를 닫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시인해야 합니다. 그나마도 우리에게 주일의 예배 조차도 힘겨워 하는 데 예수 이름을 위하여 산다고 말할 정도까지의 고난 받음은 아니지 않습니까? 말씀을 들으면 마음의 힐링을 원하고 불편한 내 마음의 평안을 원하는 교회를 찾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베드로처럼 자신의 힘을 의지해서 칼을 휘둘러 잠시라도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열정으로 보이고 예수를 위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의 눈에는 예수께서 마시는 고난의 잔을 볼 진정한 시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을 더 기뻐하셨고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셨다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루신 성취가 여전히 우리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어쩌다 힘들거나 심한 고통이나 병약할 때 우리의 믿음은 한없이 약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 믿음의 강력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는 12절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즉 체포 당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먼저’ 안나스에게 데려 갑니다. 이어서 나오는 가야바가 그해 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왜 장인인 안나스에게 데리고 갈까요? 대제사장 가야바가 주제하는 회의는 공식적으로 ‘산헤드린 공회의 최고 법정’인데 그에 앞서 안나스에게 데려간 것입니다. 안나스의 사위가 가야바가 대제사장이고, 아들 5명이 모두 대제사장을 잇는 말그대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의 수장에게 먼저 가는 것은 외형적으로 예수의 죽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이어질 ‘산헤드린 공회의 최고 법정’ 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그들 모두 동참하는 하나의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어질 빌라도 총독까지 하나의 세력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와 세상의 대표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철저한 외면과 미움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죠.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의 죽음을 ‘백성을 위해서 죽는 한 사람의 목숨’을 14절에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백성을 위해서’는 ‘우리 죄를 위해서’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백성들의 동요는 최고위층인 저들에게는 위협이 되었고 잘못하면 로마에 대항하는 것으로 비춰진다면 그나마도 자치권을 인정받아서 예루살렘과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잠시의 평화마저 깨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몇년 전에도 폭력으로 로마에 대항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비록 3년 짧은 독립을 맛보았지만 결국 전멸했던 일을 알기 때문이죠. 마치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그나마도 살아가는 데 독립을 하겠다며 위험한 행동을 하는 이들을 고발할 때 했던 말이 바로 ‘백성을 위해서’입니다.
붙잡히신 예수는 그렇게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이어 빌라도의 재판까지 매우 빠르게 진행됩니다. 그가운데 저자 요한은 베드로의 배반 사건을 비춥니다. 예수께서 붙잡히셨을 때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한명이 예수를 따랐고 다른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어서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문 밖에 있는 베드로를 들여 보내려고 하자 문을 지키는 여종은 베드로를 알아 보고 ‘이 사람이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고 하니 베드로는 ‘나는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뜻 예수께서 닭이 울기전 세 번 나를 부인한다는 예수의 말씀이 떠 오를 것입니다. 맞습니다. 또 하나는 앞서 붙잡히시던 장소에서 예수는 ‘그가 나다’라고 말함으로 피하지 않는 모습과 베드로의 ‘나는 아니다’는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땠을까요? 불과 몇 시간 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까요?
다시 장면은 바꾸며 예수께서 심문 받는 장면으로 넘어 갑니다. 마치 카메라의 앵글이 예수께서 잡히시던 때부터 따라 오다가 이제 예수께서 심문을 받는 장면과 부인하는 베드로를 서로 비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다’라고 말하시면서 피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과 반면 칼을 꺼내 휘두르며 열정을 보이며 분연히 일어선 것처럼 보였던 베드로는 ‘내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베드로의 때는 이 때가 아니었을까요? 이 때 ‘내가 그다’라고 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연히 맞닥트린 어쩔 수 없는 사건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예수를 제외한 모든 세력의 규합이 맞서는 한 지점에서 발화가 시작되어 강력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죽으심도 맞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모든 일이 ‘예수의 허락’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시간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은 마땅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논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의 배신은 부족함 속에서 내가 추구하는 바를 열정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아도 ‘온전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때’를 알려 줍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때를 찾다가 멸망에 이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고 기쁨으로 채워가시기를 축복합니다.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