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을 통한 은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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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마리아 여인을 통한 은혜의 초대 본문: 요한복음 4:3-15 찬송: 528장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말씀의 문을 열며>

과거 사막을 건너던 사람들오아시스를 찾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났습니다. 그들에게 오아시스는 단순한 물의 공급원이 아닌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우물’은 잃어버린 마음의 평안을 찾는 시간과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각자의 광야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성경에서 우물가는 단순한 물을 긷는 장소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특별한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신부 리브가를 우물가에서 만났고, 도망자 야곱은 그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우물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광야로 도망친 모세도 우물가에서 십보라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만남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의 우물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잇는 중요한 통로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곳은 야곱이 그의 자손들에게 물려준 소중한 유산이었으며, 동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이 교차하는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 우물은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를 통한 생수의 약속이 이루어질 곳이며, 민족과 문화를 초월한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되는 거룩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대해 말씀하셨듯이, 오늘날 우리는 모든 갈증을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적인 ‘우물’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야곱의 우물가에서 일어난 특별한 만남을 통해, 우리 영혼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참된 생수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은혜의 만남 시작>

본문 4절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지역과 갈릴리지역을 다닐 때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지 않고 요단강 동편으로 건너가 남북으로 왕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렇게 강을 건너는 것은 하나의 지형물을 통과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2-3일이 더 소요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지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늘 의도적으로 이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단순히 지리적 이점을 살려서 갈릴리고 가리셔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따라 사마리아를 통과하신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6절에서 예수님께서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라는 구절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피곤함을 경험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신비입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아실까?”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 피곤하심이 바로 우리의 답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직접 경험하시고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때는 “여섯 시쯤”, 즉 한낮이었습니다. 중동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정오, 그 시간은 아무도 물을 길으러 나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보통 여인들은 아침 저녁 서늘할 때 물을 길으러 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가장 뜨거운 시간, 가장 불편한 그 순간을 은혜의 시간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기다려주셨다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큰 은혜로 다가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불편함과 피곤함을 무릅쓰고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한 영혼을 기다리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일상의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들녘에서 일을 할 때, 가게의 카운터를 지키고 있을 때, 혹은 집안 일을 한는 부엌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순간이 은혜의 자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장벽을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민족, 문화, 종교, 심지어 우리가 가진 죄의 장벽까지도 뛰어넘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평범한 일상의 순간들이 거룩한 만남의 자리로 변화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일터에서, 가정에서, 어쩌면 지금 이 예배의 자리에서 말입니다. 피곤함을 무릅쓰고 우물가에 앉아계신 주님처럼, 지금도 주님은 우리와의 만남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시간이 바로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예비된 은혜의 시간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시선 회복>

7절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 짧은 구절에는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 랍비들은 여자와 대화하는 것을 금기시했으며, 특히 사마리아 사람과그릇도 함께 쓰지 않았습니다. 한 역사가의 기록에 따르면, 사마리아인의 그릇을 만지는 것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만큼이나 부정한 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 겹의 편견의 벽을 단숨에 허무셨습니다. 여자라는 벽, 사마리아인이라는 벽, 그리고 그녀의 불순한 과거라는 벽을 말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사회적 편견이나 종교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주님은 한 영혼의 가치,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 자체의 가치를 보셨습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라고 말씀하시며 주님은 놀라운 전환을 이루십니다. 겉으로는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을 구하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녀에게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주시기 위한 대화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한, 우리는 늘 사람을 겉모습과 배경, 조건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때로는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잘못된 시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을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선입니다. 이 시선은 모든 영혼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고,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존귀한 생명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선을 회복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편견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선물”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물이 아닌, 우리의 영원한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구원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이 선물의 가치를 알면, 더 이상 사람을 외모나 조건으로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편견된 시선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만일 알았더라면...” 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 속에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애타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의 가치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면, 우리의 시선도 주님의 시선과 같아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이 회복되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복음의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생수의 은혜 제공>

예수님의 시선은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열었고, 그녀는 주저 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니까?” 이 질문은 영적인 것을 육신적으로만 이해하는 우리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녀는 야곱의 우물물만을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영원한 생명의 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 영혼의 궁극적인 갈증을 해소할 수 없습니다. 성공, 부, 명예, 관계… 이 모든 것들은 잠시 우리의 갈증을 달래줄 수는 있지만, 결코 우리 영혼의 근본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약속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는 선언입니다. 이 생수는 우리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됩니다. 이는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생수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적 갈증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깊은 내면의 갈망, 삶의 의미를 향한 갈증, 참된 평안을 향한 목마름을 완전히 해소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이 세상의 물을 찾아 헤매며 목마름을 겪을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수를 받아들일 것인지를. “내게 그 물을 주사 목마르지도 않게 해달라” 라는 사마리아 여인의 고백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이 생수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 모든 편견의 벽을 허무시고 찾아가셨듯이, 오늘도 우리를 찾아 일상의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의 생수, 곧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이 그분의 시선으로 새롭게 바뀌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은혜를 받아들일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는 이 약속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제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수를 구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갈급할 때마다 예수님을 통해 생수를 공급하시는 하나님, 메마른 우리의 심령에 생명수를 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기다리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시고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편견과 한계를 뛰어넘어 찾아오신 그 크신 은혜,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신 그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에게 부어주신 생수가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게 하옵소서. 매일의 일상이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으로 가득하게 하시고, 우리의 메마른 영혼이 주님의 생수로 날마다 새롭게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다른 이들을 향해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시고,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주님의 생수를 증거하는 살아있는 간증이 되게 하옵소서.
영원한 생수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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