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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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한 걸음만 더 걷자
우리가 몸담고 사는 현실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어려움을 가지고 계십니까?
관계의 문제가 있어 고통받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때로는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탄식하며 신음하십니까?
우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방황하며 갈등하지 않습니까?
이런 많은 어려움 가운데 참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고 넘어지고 포기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와 똑같은 동일한 질문으로 살아갔던 신앙의
한 가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가정의 나사로의 가정입니다.
첫 번째 인생의 시간표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예수님이 이 3남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3남매 역시 예수님을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모셨는지 모릅니다.
3남매와 예수님이 얼마나 친밀한 사이였는지 말씀을 깊이 살펴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그만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어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번에는 나사로 가정이 그랬던 것입니다. 어쨌든 성경에는 그 이유가 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나사로는 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었고 예수님은 곁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이들이 급히 예수님이 오시면 나사로를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오빠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급하게 사람들을 통해 알렸습니다.
3절 말씀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 내 오빠 나사로가 병들었나이다하니
누이들이 자기 오빠 나사로를 예수님에게 소개할 때 사랑하시는 자라고 말할 정도로 이 나사로는 예수님과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사역을 하고 지치시게 되면 예루살렘 성읍을 빠져나가서 베다니라고 하는 작은 마을로 가곤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랑하는 나사로가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이 지치실때면 나사로와 그의 가정을 통해서 충전의 시간을 가지셨고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아시겠지요. 예수님과 나사로가 얼마나 특별한 사이였으며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소리를 들었다면 열일을 제쳐두고 빨리 오셔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다른 사람은 주님이 급한 일이 있으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나사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사로 죽어간다는 말을 듣고서 보이시는 예수님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5절 6절 말씀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사랑하시면 빨리 가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의 타이밍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시간표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내가 원하는 인생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가 맞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표와/ 우리의 시간표가 맞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풍랑이 있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위기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6장 48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나타난 시각을 성경은 밤 사경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밤을 가늠하는 시간표를 4경으로 나누었습니다.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12시간을 1경 2경 3경 4경으로 나누어 3시간씩 네 번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로 오시는데 밤 1경도 아니고 2경도 아니고 3경도 아니고 4경에 오셨습니다. 4경이라면 새벽 3시부터 6시에 해당하는데/ 사랑하는 제자들을 구해야 하는데 그 전날 이른 저녁에 오시면 좋을텐데/ 왜 꼬박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새벽에 찾아오셨을까요?
이 말씀 가운데 우리들의 실질적인 고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마르다 마리아가 했던 고민/ 풍랑이 일어나고 있는 바다 한 가운데 제자들이 했던 고민을 우리도 똑같이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래도
예수를 나름 잘 믿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 게 아닙니다.
맞지요?
신앙생활 나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인생의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찾아오는 어려움이 또 빨리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럴 때 성도들 안에는 오늘 마르다와 마리아와 제자들이 했던 질문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어려움 그 자체도 문제지만 그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자꾸만 마음이 작아지는 것입니다. 자꾸만 마음이 위축되는 거예요.
자꾸만 마음이 초라해지는 거에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이 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고. 그런 하나님과 나와의 사랑에 밀도가 자꾸 약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이 예수 믿으면 잘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 맞습니다. 예수 믿으면 잘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1단계 믿음입니다.
1단계 믿음에만 머물러 있으면 인생을 살면서 풀 수 없는 문제 앞에 여러분 우리가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어려움이 찾아오면 이해 할 수가 없고/ 예수 믿으면 잘 된다고 했는데 왜 내 인생의 어려움이었는지 해석이 되지 않고/ 용납이 되지 않는/ 신앙의 내적 갈등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일차 방정식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인생살이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75세에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한번도 가본 적이 없고/ 그리고 그 땅이 어딘지도 알지 못하는/ 그저 하나님이 지시할 땅 곳으로 가라는 /명령 앞에..
우리 같으면 설명서도 없고/ 계획서도 없고/ 그러니 하나님 나 못 가겠어요. 아니 좀 지도라도 좀 줘 봐요./ 뭐 이러면서 좀 우리는 거부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말씀 하나 믿고 일어나서 갑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은 2가지 첫번째는 땅의 약속 두번째는 후손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아들이 바로 생겨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 정도의 믿음에 반응하고 순종을 한 아브라함이라면 아들이 바로 생겨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25년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25년이 지나서야 이삭을 그 가정에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들의 인생이 이렇게 참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나게 미묘하고 복잡한 그런 시간표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25년을 기다려야 했던 아브라함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우리는 남의 이야기니까 숫자 25를 쉽게 받아들이지만 아브라함의 입장이라면 25년에 그 하루하루의 시간들이 얼마나 참 어렵고 힘든 시간들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또 어땠을까요? 사랑하는 오빠 나사로를 떠나보내었던 이 두 누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렇게 예수님을 잘 섬겼는데/ 정말 잘섬겼는데 그런데 사랑하는 오빠를 떠나보내고 주님을 불렀지만 주님이 지체하여 오지 않는 동안에 오빠가 죽었습니다. 이 아픔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합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시간표가 흘러가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래도 우리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는 다르지만/ 그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 수 있겠느냐! 성경이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믿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 입술의 고백이 삶이 되게 하라
오늘 본문을 보면은 예수님의 특이한 행동 3가지가 나오는데
첫 번째는 주님이 늦게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 또 예수님의 특이한 행동을 보게 됩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나죠. 쉽게 말해서 장례가 끝난 장례식장에 주님이 늦게 오셨습니다.
여러분 그런 자리에서 주고받을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겠습니까?
마르다가 먼저 말하겠지요. 예수님 왜 이제서야 오셨습니까? 늦었습니다. 우리 오빠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겠죠. 미안하다 내가 할 말이 없다. 내가 마음은 있었는데, 일이 너무 바쁘다 보니까 이렇게 늦을 수밖에 없었다 마리야. 마르다야 정말 미안하다/ 아마 주님은 마르다의 눈도 보지 못하며 너무 미안해 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이것이 당시의 상황을 놓고 보면 오고 갔어야 할 대화의 내용인데
예수님은 민망해하고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마르다를 만난 순간 대뜸 예수님이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23절 예수께서 이러시되 너희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예상 외에 이해할 수 없는 일반적인 사람과의 관계 가운데서 올 수 없는 주님이 미안해하고 좀 송구스러워 해야 될 상황에서 갑자기 느닷없이 너희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이런 말씀을 주님이 두 번째로, 하신 거죠. 그러니까 이런 말씀 앞에서 /여러분/ 우리가 마르다라면 예수님 다시 살아난다는 그런 이야기는 좀 그만하고/ 그런 이야기 하실 시간이 있으면/ 빨리 오시면 되지/ 빨리 오셨으면 내 오빠 안 죽었을 텐데/ 왜 이제 와서/ 그런 어려운 이야기를 하시냐/ 이렇게 반응했을 겁니다.
그런데
24절에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보통이 아닙니다. 보통의 신앙이 아닌 걸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이 타들어가고 있는데,
오빠의 죽음 앞에서 이 슬픔이 한가득인데 그런데 마르다가 주님 앞에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의 입은 꼭 닫고 부활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하고 있죠.
그래서 이 마르다의 신앙이 보통이 아닌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저는 주님이 이 여인의 태도 앞에 주님도 참 감격스러우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유명한 말씀
25절 26절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오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니 이것을 니가 믿느냐
오늘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의 시금석이 되는 부활의 중요한 메세지를 이 여인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해서 오늘 본문이 끝이 나도 이상은 없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의 고백을 높이 세워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망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을 하는 마르다를 보면서 주님이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믿음으로 끌어 올려야 겠다고 생각을 하신 것같습니다. 세 번째로 이상한 행동 한가지를 하시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무덤가로 가십니다. 그리고 무덤에 막아 두었던 돌을 치우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39절 상반절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여러분 너무 이상한 말씀을 주님이 하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셨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들의 믿음이 한단계 더 전진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마르다가 했던 그 입술의 아주 귀한 신앙의 고백이/그들의 삶에/ 그 순간에/ 실제에/ 현실까지/ 나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고백했습니다. 먼 미래에는 내 오빠가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이 고백도 이 상황 가운데는 대단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신앙 고백이 그냥 관념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 순간에 이 여인의 삶의 실체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덤가로 가서 돌을 치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니가 했던 입술의 고백을 실제로 증명해 보라는 것이지요.
이때 마르다가
39절에서 이렇게 대답을 해요. 예수께서 이러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러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음에 벌써 죽음의 냄새가 나나이다.
여러분 마르다가 조금 전에 입술로 부활신앙을 고백을 했습니다.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고백의 메아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 여인이 주님의 말씀에 의심을 표현합니다. 죽었는데요. 죽었는데요. 그래서 시체 냄새가 나고 있는데요.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 성도만큼 신앙 고백을 많이 하는 민족이 또 있나 싶습니다.
우린 예배 때마다 고백을 하고/ 또 많은 삶의 현장 가운데서도 우리가 입술로는 신앙의 고백들을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아니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이 신앙 고백이 우리의 삶에 현실의 자리에서는 작동하지 않을 때가 너무 많은거 같습니다. 신앙의 이중성입니다.
근데 이게 너무 오래돼서 이제는 이상하게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알지를 못합니다.
신앙의 이중성이 우리 몸에 자연스럽게 베여 있는것이지요.
교회 안에 들어오면 할렐루야가 나오지만 교회 밖에 나가면 놀렐루야야가 나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 때마다 은혜를 받으십니까?
축복합니다.
은혜받으신 대로 /삶가운데 살아 내실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 가정/ 학교/ 직장 /그리고 세상 한가운데서/ 예배 가운데 받은 은혜의 신앙 고백 /그대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이 오늘 이 마르다에게 원하셨던 것 바로 이것입니다. 사실 마르다가 죽은 오라버니를 두고 예수님이 늦게 왔는데 그 앞에서 부활 신앙을 고백한 그것만 해도 우리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수준의 신앙입니다.
근데 하나님은 마르다가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입술의 신앙의 고백이 그녀의 삶에 실제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빠가 죽어있는 무덤 앞에서 그 믿음이 살아서 작동하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여기까지/ 바로 여기까지/ 바로 여기까지 /여인과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기를 우리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먼저는 원망이 아니라 귀한 믿음의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입술이 될 수 있기를
그다음은 그 입술의 고백이 우리들의 삶에 눈물 나는 현장에서도 실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은 바라고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여기까지 자라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 단지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나사로 오늘 본문에서 다시 살아났지만 나사로는 또다시 죽었습니다. 지금은 천국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다 죽었고 또 죽고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나사로의 기적의 포인트가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믿음으로 붙잡고 살기를 원하는 우릴 향한 주님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인생 최대의 저주와 절망인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능력이 우리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 주님을 믿고/ 우리 삶에 실제 자리에서 그렇게 살아내어 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멘이십니까? 아멘 정말 이걸 믿는다면/ 인생 최고의 두려움인 죽음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을 믿는다면 /그 예수님이 내 삶의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을 믿고/ 실제의 삶에서도/ 믿음과 신앙으로 걸어가라는 주님의 말씀인것입니다.
이것이 여인을 향한 주님의 기대이자 이 자리에 있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대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여기까지 자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돌을 옮겨 놓으라 이건 같이 한번 외쳐볼까요?
여러분 그러면 입술에 고백이 삶이 되게 하는 건 뭘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물론 이미 입술의 /삶이 되게 하라는 말씀을/ 각자 자기에게 적용할 줄 아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냥 그것 또한 명제로만 받아들이고 /실질적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분들이 더 많기 때문에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본문을 찬찬히 읽어보니까 예수님이
39절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 말씀하세요.
이거 이상합니다. 왜 이상합니까?
여러분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신 예수님이 돌 옮길 능력이 없겠습니까?
눈만 한번 찡긋 하시면 돌을 공중 분해가 돼 가지고 산산조각낼 수 있을텐데 말이죠!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작은 일이지만 아주 작은 일이지만 돌을 옮겨 놓은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의 실천을 하라고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머리와 관념이 아니라/내 몸으로/ 내 육신으로/ 내 인생으로/ 주의 능력을 경험하는 인생이 되라고 이 일을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목사입니다. 근데 주님께서 안목사 너 가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거라 말씀하시면 저는 못살립니다. 죽은 사람은커녕 감기도 저는 치료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는 없지만, 무덤에 돌은 옮길 수 있습니다. 그것도 주님이 나에게 부탁한 일이기에 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돌을 옮기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이 땅에 오셔서 행하셨던 놀라운 이적들 저는 하나도 못합니다. 눈 먼자 눈 뜨게 하는 일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는 일 못합니다.
그러나 돌을 옮기는 일은 뜻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순종할 수 있습니다. 질병과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아파하는 지체들을 심방하고 사랑하는 지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도하는 그런 저에게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런 능력이 없는 제가 치유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그 일을 주님이 저에게 부탁하셨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 마음으로 기도할 수 밖에 없지만 예수님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치유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의 능력을 믿고 저는 순종하여 돌을 옮기는 마음으로 심방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 살리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돌을 옮기는 일은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옮겨야 될 돌은 무엇입니까?
남편의 문제입니까? 아내의 문제입니까? 자녀의 문제입니까?
진로의 문제입니까? 직장의 문제입니까? 성령께서 주신 성령의
감동을 따라 /각자각자에게 주신 성령의 감동을 따라/ 또한 우리들이 서 있는 삶의 환경/ 지금 이 자리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이기에 /이 자리에서 지금 우리가 /옮겨야 될 돌들을 /찾아서 순종하는 겁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하면 한 번더 사랑하고/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인내하라고 하면 한던버 인내하고/ 힘들고 그만두고 싶어도 좀 살아달라고 부탁하시면 또 한번 살고/ 지키라고 하면 한번 더 그 삶의 자리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한다고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런 의심이 내게 밀려올 때에도 그 큰일은 주님이 하실 테니 나는 주님을 믿고 나의 삶에서 돌을 옮기겠습니다.
그리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계획들을 다 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성령께서 내게 주신 감동/ 지금 내 앞에 있는/ 내가 평상시 했던 일 /돌을 옮기는 작은 일처럼 보이는 이 일이지만/ 이 일만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일이고 /이 일만은 주님이 내게 부탁하신 것이라는/ 선명하고 명확한 그 일을 순종하여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걸음 또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의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한 분을 소개할까 합니다.
1982년도에 미국 뉴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라톤 대회에 한 젊은 여인이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뉴욕 주립대학의 대학원생이었던 린다 다운스입니다. 이 여인은 당시에 뇌성마비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녀가 마라톤을 참여한다고 하니 주변의 사람들이 말류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말리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마라톤대회를 참여하기로 마음을 먹고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마라톤 대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엘리트 선수들은 2시간이 조금 지나자 모두 들어왔습니다. 일반 마라토너들은 5~6시간 사이에 모두 들어왔습니다. 6시간이 조금 넘자 방송국 카메라도 모두 철수했습니다.
한 참을 지나서 방송국에 누군가가 전화를 했습니다. 마라톤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마지막 골인 지점을 향해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습니다. 방송국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카메라와 기자가 현장으로 도착을 했습니다.
마지막 골인 주자는 바로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린다 다운스였습니다. 그녀는 무려 11시간 57초만에 골인 지점을 통과 할 수 있었습니다.
기자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무모한 도전을 했습니까? 린다 다운스는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겁니다. 나의 목표는 처음부터 완주였습니다. 1등은 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완주가 나의 관심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으로 산다는게 참 힘들고 어렵죠. 그런데 우리는 그 믿음의 걸음을 걸어가야 합니다. 왜요.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천국에 입성할 때까지 완주해야 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크고 거창한 일에 마음을 뺏기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 거창한 일을 하기에 지금 내가 너무나 안 된다고 생각해서 지레 짐작 포기하고 주저앉지 마십시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한걸음 또 한걸음 걸어가는 겁니다.
길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새로운 길을 만드는 건가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 붙잡고 실험하다 보면 새로운 길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돌을 옮기는 것처럼 작은 일일지라도 그 일을 하다 보면 우리도 주님이 내 삶에 역사하는 것을 후에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언론은 어려운 날들이라고 앞다투어 걱정합니다.
물가가 꺾일 줄 모르고 물가와 더불어서 여러 가지의 경기에 지표들도 안 좋은 지표들이 너무 많이 보입니다.
그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세상 한가운데 우리도 우리 몸을 두고 살아가는 중입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려분/ 여러분 곁에 주님이 계십니다. 죽음을 부활로 바꾸는 생명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믿고 /믿음에 한걸음 한걸음을 함께 걸어가십시다
돌을 옮기는 것처럼 작은 일일지라도 이 일에 순종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실 것을 믿고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해운대 신일교회 성도님들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일어서십시다. 그리고 믿음에 한걸음 /한걸을을 내 딛으시길 바랍니다.
걸어가보십시다.
두걸음 뒤 머가 있는지 조금도 내다 볼 수 없는 우리의 인생가운데
믿음의 한걸음을 내 딛을 때
오늘 본문 속 나사로의 주님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도 일하심을 목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나사로의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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