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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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문열 씨가 쓴 추락하는 날개가 있다. 라는 책은 사실 소설의 내용보다는 책 제목자체가 좋아서 많이 회자된 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용은 사실 그닥 그렇게 감동적이거나 교훈이 있거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개가 없으면 추락도 없습니다. 날개가 있기에 날수 있고 날수 있기에 추락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추락은 우리에게 많은 아픔과 고통을 안겨줍니다.
저도 목회자로서 나름 추락의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노회가입한 후 아직까지 노회를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첫번째는 영주권이 완전히 해결된 뒤게 가고 싶어서이고, 두번째는 사실 이것이 진짜 이유인데, 제가 있었을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을 평안한 마음으로 볼 자신이 아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름 진심으로 평안하게 마주 대하고 볼수 있는 날이 올때까지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만큼 추락의 아픔이 제게는 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저의 못난 감정과 마음은 사실은 아직도 제 안에서 다 해결되지 못한채 진행중에 있습니다.
한주간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의 눈에는 유독 한 사람이 띄었습니다. 유독 그 사람에게 알수 없는 동질감과 공감을 갖게 되고 또 그 사람의 삶의 태도와 처신이 저로 하여금 존경과 애정의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 사람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이름없는 종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창세기 24:2 NKRV
2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이 사람에 대해서 성경이 두가지를 소개하는데, 하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믿고 맡긴 종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소유를 맡긴 종이라는 믿을만한 , 신실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늙은 종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늙은 이라는 말은 단순히 나이가 연장자라는 뜻이 아니라 권위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자켄이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되는 용도가 주로 장로를 가리킬때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이보다 더 좋게 소개할수 있을까요? 그는 권위있는 자였고 그가 모시는 사람에게 가장 큰 신뢰를 신실한 자였습니다. 이 늙은 종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성경학자들은 이 늙은 종을 창 15 장의 엘리에셀과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습니다.
창 24: 2. 그는 50년전 아브라함에 의해 상속자로 생각되기도 했던 다메섹 엘리에셀이다
(Keil, Lange, Whitelaw)- 옥스포드 주석
본문의 종은 한때 아브라함의 양자였고 상속자였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생각했고 주변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창세기 15:2 NKRV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날 아브라함에게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삭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차지할 모든 것을 다 차지해버렸습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말처럼, 그가 받은 충격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원망스럽고 세상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께도 , 주인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신 하나님도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가 무슨 특별한 잘못을 한것도 아닙니다. 그가 애초에 그 상속자리를 요구한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는 아브라함의 종에서 상속자로, 또 다시 종으로 그 신분이 롤러코스트처럼 격변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한때 상속자의 자리에서 다시 종의 자리로 자리매김한 엘리에셀이 놀라운것은 그 뒤로 50년간 그 이전과 변함없이 자신의 종된 자리를 충성스럽게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자신의 자리를 그대로 빼앗아간 이삭을 위해 그의 신부감을 찾는 일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등장인물의 인품보다 이보다 더 훌륭한 인품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와 같은 삶의 추락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고귀하고 높은 인품을 가진 삶을 살수 있었을까? 오늘 본문을 통해 두가지 교훈을 찾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삶의 뿌리를 철저히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창세기 24:2–3 (NKRV)
2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3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아브라함이 늙은 종 엘리에셀에게 손을 자신의 허벅지에 넣으라 말합니다. 허벅지에 손을 넣는다는 것은 목숨을 건 맹세를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합니다. 이 것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했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엘리에셀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케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우리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크게 성공한 토크쇼 진행자이자 사업가입니다.
그녀가 쓴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자신이 수많은 실패속에서도 일어설수 있었던 삶의 기준들을 말하는데 그 첫번째의 비결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든, 언덕위에 있든 시궁창 속이든 교차로든 혹은 어떤 틀에 박힌 일을 하든, 지금 이 순간 스스로에게 줄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구냐에 대한 대답에서 내가 무엇을원하는지가 결정된다.
who am I 와 What do I want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오프라의 대답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오프라는 한 프랑스 신학자 피에드 드 샤르당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인간의 경험을 하는 영적인 존재다. 나는 만물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고 모든 가능한 것은 나도 가능하게 된다.
소설 개미로 유명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심판을 읽어보면, 평생 판사로서 명예와 부를 누리며 살다가 죽은 주인공을 영혼세계에서 재판을 하는데, 그때 검사 역활을 하는 영혼이 이 주인공에게 큰 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기를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평안히 살기 위해 판사직을 선택하여 적당히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참 인상적인 말이었습니다. 베르나르 는 도덕과 윤리적 잣대로의 인생의 기준이 아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성공임을 그 소설을 통해 말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프라도 같은 맥락으로 말을 한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도 정확히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단순히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유명해지고 돈이 많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것과 자녀로서 하나님의 모든 자원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며 살아왔다 말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엘리에셀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도 그와 같았음을 봅니다.
엘리에셀이라는 이름의 뜻은(Eliezer) אֱלִיעֶזֶר(엘리에제르)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입니다.
만약에 그가 자신의 삶을 명예나 부에 근거를 두었다면 그는 결코 그 인생의 추락을 감당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 두었고 자녀로서 자신의 모든 일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데 집중시키며 살았습니다.
누가복음 15 . 장은 소위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간 둘째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이야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주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면 어떻게 저렇게 죄인들과 어울릴수 있느냐며 비판하는 그들을 위해 예수님이 하신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1–3 NKRV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탕자의 이야기의 핵심은 사실 둘째가 아니라 첫째입니다. 집 나갔다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가락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주는 아버지를 보면서 첫째가 마음이 섭섭하고 불편하여 말하기를 ,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저 탕자에게는 이렇게 큰 대접을 해주시는데, 왜 저에게는 염소새끼 한마리 잡아주지 않으셨습니까? 라고 항의 할때 그때 아버지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애야 내 것이 다 네것인데 무슨 말이냐.
누가복음 15:31 NKRV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무슨 말입니까? 왜 나를 누리지 못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몸만 아버지와 같이 있지 아들로서 아버지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첫째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니가 만약에 나에게 아버지 친구들과 오랜만에 파티를 하려고 하는데 염소 한마리 내주세요 하면 어찌 내가 주지 않았겠느냐 하신겁니다. 집나갔다 재산다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도 누리는 아버지를 한번도 집나가본적이 없는 첫째 아들은 평생 한번도 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비유에서 첫째는 그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아버지 집 문밖에 서 있는 것으로 끝나버린 다는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도 용서하시고 복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는 데 평생 율법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그 하나님의 용서와 복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아이러니를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누구입니까 ? 당신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의 가장 큰 정체성으로 고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은 사실 굉장한 일입니다.
이렇게 상상해 보세요.
성경에 보면 우리를 가지라고 하고 주님은 나무라고 하십니다. 이 비유를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나무가 단순히 나무가 아닙니다. 나무는 어디와 연결되어 있습니까 지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무는 지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지가 나무와 연결되는 것은 단순히 나무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무는 땅과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해, 구름 , 비, 바람 모든 자연현상과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햇빛을 통해 광합성을 할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의 뜻입니다. 사도바울도 이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빌립보서 4:13 NKRV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NIV
13 I can do all this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원을 우리의 삶가운데 계속해서 부어주시고 맛보게 하실줄 믿습니다.
두번째로,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창세기 24:32–33 NKRV
32 그 사람이 그 집으로 들어가매 라반이 낙타의 짐을 부리고 짚과 사료를 낙타에게 주고 그 사람의 발과 그의 동행자들의 발 씻을 물을 주고 33 그 앞에 음식을 베푸니 그 사람이 이르되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 라반이 이르되 말하소서
엘리에셀이 주인 아브라함의 명을 받고 이동한 거리가 가나안에서 하란까지 무려 900킬로입니다. 지난 여름에 켈거리여행을 운전하고 다녀온 후 며칠은 그 피곤함을 떨치느라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무려 900킬로는 이동한 엘리에셀입니다. 그리고 리브가를 만난 그 저녁에 리브가의 집에서 씻을 물고 음식을 베풀어줍니다. 얼마만에 맛보는 음식이며 휴식입니까? 그런데 그는 씻지도 먹지도 않고 먼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먼저 들어달라고 말을 합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리브가가 다음날 결혼을 하겠다고 승낙한 후에 라반이 이제 다 결정되었으니 며칠 쉬었다가 가라고 권면했을때도 , 그 권면을 거절하고 바로 귀향길에 오른 그의 모습을 보면 또 한번 확인이 됩니다.
엘리에셀은 자신이 현재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에게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조금씩 대답의 형식은 달라고 하나같이 부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이유는 부자가 되면 좋은 집도 살수 있고 좋은 차도 살수 있고 좋은 곳 을 여행할수도 있고 여가도 즐길수 있어서 행복해질수 있을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을 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냥 쭉 선을 긋든 삶은 각자의 선의 형태로 살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삶은 선이 아니라 점입니다. 순간의 사진들이 모여 하나의 동영상이 되듯이 , 순간순간의 점들이 모여 선처럼 보일뿐, 우리 인간의 삶은 선이 아니라 점일뿐입니다. 인간의 삶은 어제도 내일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오늘만 존재할뿐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비극적인 부분은 항상 무엇만 있으면 행복해질거라는 기대만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돈만 조금더 있으면, 직장만 좀 더 안정되면, 자녀들이 대학만 졸업하면, 내가 영주권만 따게 되면,,,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렇게 내일을 기대하면서 사느라 정작 오늘을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때는 대학을 위해 행복을 미루고 대학때는 취직을 위해 행복을 미룹니다. 취직후에는 결혼을 위해 행복을 미루고 결혼후에는 자녀를 위해 행복을 미룹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은퇴한 후에 비로소 이제는 행복해야지 하는데 이제는 몸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미래의 일로만 행복을 미루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일을 지나치게 그리워하거나 아쉬워하느라 오늘의 행복을 미루기도 합니다. 그때 내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며 깊은 좌절로 고통스러워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이 모든것들의 치명적인 단점은 오늘을 살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문학가 니코스 카잔차스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인공 조르바는 노인 한명이 살구나무 묘목을 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인에게 다가가 나무의 과실을 얻기도 전에 삶이 먼저 끝날수도 있는데 왜 힘들게 묘목을 심느냐고 묻자 노인으로부터 “자신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매일을 살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듣습니다. 그러자 조르바는 호탕하게 웃으면 말합니다.
“저는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삽니다”
저는 이 두말이 다 같은 의미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죽지 않을것처럼 오늘을 살고 또한편으로 내일 죽을것처럼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에 집중하며 살수 있고 오늘당장 행복을 누리며 살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해야할 시간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최선을 다해 살아야 시간도 어제도 아닌 내일도 아닌 바로 이순간 오늘 , 우리가 지금 맡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먼 미래를 계획하느라 오늘의 행복을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 과거의 화려함을 추억하느라 오늘의 소중함을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엘리에셀은 과거에 붙잡히지 않았습니다. 인생추락의 쓴 뿌리를 부둥켜 안고 신세한탄하면 운명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어진 하루를 최선으로 충성으로 살았습니다.
그런그를 성경은 아브라함의 집의 모든 소유를 맡은 자라고 믿음직스럽고 충성스러운 복된 사람이었다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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