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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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열왕기하 2:1-11
“역사의 중심을 향하여”
2024. 10. 27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역사의 중심을 향하여”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 또는 소설을 보면, 그 안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주연들이에요. 영화의 스토리 전체를 이끌고 가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주연. 또 하나는 조연입니다. 영화에 등장은 하지만, 핵심에서 비켜서 있어요. 그래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들이죠.
오늘 본문에도 주연과 조연이 등장합니다. 먼저 주연은 엘리야와 엘리삽니다. 이 두 사람이 오늘 본문의 사건을 이끌고 가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본문의 사건이 무슨 사건입니까? 그 유명한, 엘리야의 승천 사건이에요. 엘리야가 맡은 사명을 다 끝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로 올려지게 되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자, 그런데 엘리야가 하늘로 올려지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중요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뒤를 이어서 선지자가 될 후계자를 세우라는 명령이었어요. 그만 둘 때 그만 두더라도, 후임은 세워놓고 그만둬야죠.
그래서 엘리야가 자기 후계자를 찾아가는데요. 하나님께서 이미 그 사람을 지명해놓으셨어요. 자, 열왕기상 19장 15절, 16절을 봐 볼까요? 열왕기상 19장 15절, 1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아멘.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총 세 명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어요. 첫번째는 하사엘입니다. 이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서 아람의 왕이 되게 하라고 하셨어요. 두번째는 예후,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번째가 바로 엘리사죠.
이 세 사람은 현재 북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는 아합 왕조를 멸망시킬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합력해서 아합 왕조를 무너트리도록 하신 거예요.
여기서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제7대 왕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북이스라엘 왕 중에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되는 왕이에요. 열왕기상 16장 33절에 보면, 그를 이렇게 평가해요. 열왕기상 16장 33절에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그의 악행이 심했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악인이었다는 거예요. 그만큼 아합이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 왕도 악했지만, 그 아내도 못지 않게 악했어요. 그 아내가 누굽니까? 이세벨이에요. 자기가 믿는 바알을 가져와서 남편이 바알 숭배를 하게 만든 여잡니다. 그리고 비선실세처럼 나라에 온갖 패악을 부렸어요. 또 심지어 엘리야의 목숨을 위협해서 엘리야가 저 멀리 호렙산까지 도망을 치게 만든 여자예요.
남편 못지 않죠. 남편이나 아내나 똑같이 사악해요. 그런 자들이 나라를 다스리니까 나라 꼴이 어떻겠습니까? 백성들은 바알이며, 온갖 우상숭배에 빠져있고, 배부른 자들은 더 배부르고, 약자들은 더 고통받는 악순환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하여서, 세 사람을 준비시키신 겁니다.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 하사엘은 아람의 왕인 벤하닷의 신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외부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역할을 해요. 그리고 예후는 지금 북이스라엘의 왕인 아합 왕의 군대 장관이었어요. 이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내부에서 공격을 해요.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본래부터 권력의 중심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었던 거죠.
하지만 세번째 인물인 엘리사는 달라요. 엘리사는 권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어요. 여러분, 엘리사가 본래 뭐 하는 사람이었는지 아십니까? 엘리사는 본래 농부였습니다. 농부.
자, 열왕기상 19장 19절을 봐 볼까요? 열왕기상 19장 19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9절 시작,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아멘.
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나러 갔을 때,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었어요. 밭을 가는 농부였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에게 소가 몇 마리 있습니까? 소가 열두 겨릿소가 있죠. 겨릿소는 소 두 마리가 하나의 쟁기를 같이 메고 밭을 가는 것을 뜻합니다. 한 겨릿소당 소가 두 마리에요. 그러니까 열두 겨릿소는 소가 스물네 마리죠.
소가 한 마리만 있어도 웬만큼 사는 집이거든요? 그런데 소가 스물네 마리면 집이 얼마나 부유한 집이겠어요? 아마도 그 일대에서 제일 가는 부자였을 겁니다. 엘리사가 지금 그 많은 소를 거느리고 밭을 갈고 있어요. 물론 혼자서 밭을 갈고 있는 것은 아니죠. 엘리사는 열두번째 겨릿소를 몰고 있고, 나머지 열한 겨릿소는 하인들이 몰고 있었을 겁니다.
어쨌거나 엘리사가 부잣집 아들이에요.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분깃을 물려받고, 평생 농사 일을 하면서 평탄하게 살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인생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요. 선지자 엘리야가 찾아온 겁니다. 엘리야가 밭으로 들어오더니, 뭐 무슨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대뜸 겉옷을 벗더니 엘리사의 머리에 던져버렸어요.
황당하죠? 일하고 있는데 와서 시비 거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엘리사가 그 즉시 엘리야를 따르기로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겉옷을 엘리사 위에 던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기로 결단을 했을까요? 여러분, 겉옷을 머리에 던지는 것은,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위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셨지만, 엘리야의 수중에 기름이 없었기 때문에. 기름 대신 겉옷을 머리 위에 부은 거예요. 엘리사가 이것을 알아챈 거죠.
엘리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겉모습만 보면 누구라도 그 사람이 엘리야라는 것을 알 수가 있거든요. 엘리야는 몸에 털이 많은 사람이었고, 항상 가죽 띠를 허리에 메고 다녔어요. 엘리야가 이 시대의 굉장히 영향력 있는 인플루언서였기 때문에, 보기만 하면 그가 엘리야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엘리야가 자기 겉옷을 나의 머리에 던진 거예요. 그 순간에 엘리사는 자기 인생에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리고 생각을 떠올리는 즉시, 결단을 내렸습니다.
만약에 엘리사가 깨닫지 못하고 ‘뭐야!’ 하고 겉옷을 치워버리고 계속 밭을 갈았다면, 이 사건은 그냥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버렸을 겁니다. 그랬다면 그가 역사의 중심에 다가가는 일 없이, 평생 밭이나 갈면서 살았겠죠.
물론 그런 인생이 더 행복한 인생일 수도 있을 겁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가업을 물려받아 평탄하게 인생을 살면서 가정을 이루고 나중에 자기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그런 인생이야말로 행복한 인생일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정말 놀랍게도, 엘리사는 그런 인생을 거부합니다.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평탄하고 행복한, 그 인생을 거부해요. 겉옷이 자기 머리 위에 떨어지는 그 순간에, 그는 이미 마음에 결단을 내렸어요.
열왕기상 19장 20절에서, 우리는 그의 결단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20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아멘.
엘리야의 겉옷이 자기 위에 던져진 그 짧은 순간에, 엘리사는 결단하고, 즉각적으로 자기가 몰던 소를 버렸습니다. 마치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자기 배를 버렸던 것처럼, 엘리사도 자기 소를 버렸어요.
그런데 단순히 소만 버린 게 아니죠. 엘리사가 뭐라고 말을 했습니까? “나를 내 부모와 입 맞추게 하소서” 부모와의 작별을 말하고 있어요. 단순히 소만 버리는 게 아니라, 부모와 작별하고,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삶의 기반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했듯이, 엘리사도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내가 엘리야를 따라가리라! 내가 나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역사의 중심을 향하여 가리라!’
할렐루야. 우리에게 이러한 결단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결단의 순간들이 찾아와요. 그 때 우리가 결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나에게 유익한가를 놓고 결단하는 게 아니에요.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를 놓고 결단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엘리사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나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리라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엘리사는 일생일대의 결단으로, 부잣집의 후계자가 아닌, 선지자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에요. 언뜻 보기에는 화려하고, 백성들에게 존경 받는 길인 것 같지만, 말로 표현 못할 고뇌와 고통이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일찍이 그것을 경험했어요.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호렙산까지 도망을 쳤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비를 내리게 하고, 또 갈멜산에서 영적 싸움을 승리하는 등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냈지만, 그는 결국에 도망자 신세가 됐어요.
여러분, 사역의 길이 이렇습니다. 때로는 대단한 일들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실패를 맛보기도 합니다. 항상 승승장구 하는 게 아니에요. 형통할 때도 있지만, 사실은 잘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나의 유익을 쫓아서 갔더라면, 형통한 길을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나님의 원하시는 쪽을 쫓았더니, 그 길이 실패의 길이에요. 그러면 낙심하고 좌절하게 되죠.
바울을 예로 들어 볼까요? 바울이 사역의 길을 갈 때, 특별히 그가 2차 전도여행을 갈 때, 그는 본래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을 들렀다가 아시아 지역으로 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것을 막고, 밤중에 환상을 통하여 바울을 마게도냐 지역으로 건너가라고 하셨죠.
이 내용이 사도행전 16장 6절에서 10절에 기록된 내용이에요. 사도행전 16장 6절에서 10절을 봐 볼까요?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노란 글씨만 보면요.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아시아 지역으로 가려고 갈라디아 땅을 지나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는데, 이때 또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밤에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그때 바울이 깨달은 거예요.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아 지역이 아니라,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서 그곳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요.
그런데, 마게도냐 지역으로 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귀신 들린 여자를 마나서 귀신을 쫓아줬다가, 누명을 쓰고, 매를 많이 맞고, 감옥에 갇히잖아요. 이 귀신 들린 여자는 노예였는데, 귀신의 힘으로 점을 쳐서 돈을 벌어다가 주인에게 바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귀신이 떠나버려서 더이상 점을 못 쳐요. 주인 입장에서는 수입원이 사라진 겁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바울을 고발한 겁니다. 그러니까 부지불식간에 바울과 일행이 잡혀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요.
자, 사도행전 16장 22절, 23절을 봐 볼까요? 사도행전 16장 22절, 23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분명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왔는데, 결과가 이게 뭡니까? 여기 오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어요. 황당하죠.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우리를 장밋빛 인생으로 인도하시는 게 아니라, 장미가시 인생으로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도 그 길을 가시겠습니까? 결단하시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결단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그 길을 가야합니다. 내가 계획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셔요. 우리는 우리의 계획, 우리의 생각 다 내려놔야 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야 합니다.
만약에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계획대로 아시아 지역에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물로 그곳에서도 나름대로 역사가 일어났겠죠. 그러나 마게도냐 지역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만날 자를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기도하고 찬송했어요. 그랬더니,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 문이 열리고, 발에 묶인 차꼬가 풀렸습니다. 그때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죄수들이 모두 탈출한 것으로 착각하고, 자결을 하려다가 바울의 외침을 듣고 멈췄죠. 그리고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그와 그의 온 집안 식구들이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역사입니다. 바울이 오지 않았다면, 간수가 구원받는 일이 없었을 거예요.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폭풍 속으로 인도하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역사의 중심을 향하여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길에 때로는 많은 어려움과 유혹들이 있겠지만,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담대하게 끝까지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는데요. 서론이 많이 길었죠? 오늘 본문을 보면, 엘리야와 엘리사가 마지막 여정을 함께합니다. 엘리야가 승천하기 위해서 승천 장소인 요단강을 향해 가는 마지막 여정이에요.
그런데 엘리야가 요단강에 가기까지 총 세 번 장소를 옮깁니다. 맨 먼저 길갈에서 벧엘로 옮겨가고, 그 뒤에 여리고로 갔다가, 마지막을 요단강으로 가요. 순서대로 다시 보면, 길갈, 벧엘, 여리고, 요단강. 순차적으로 이 네 개의 장소가 나와요.
먼저 길갈이 나오는데요. 먼저 오늘 본문 열왕기하 2장 1절을 우리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절 시작, “여호와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아멘.
엘리야와 엘리사가 길갈에서 여정을 시작했어요. 자, 그런데 갑자기 출발하자마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갑자기 엘리사에게 여기에 머물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 2절 내용인데요. 2절 말씀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아멘.
엘리야 갑자기 뜬금없이, 엘리사에게 ‘너는 여기 머물라’ 라고 말했어요. 아니, 나에게 겉옷을 던져서 데리고 올 때는 언제고, 이제는 더이상 따라오지 말라는 거예요. ‘너는 여기 머물라’
하지만 엘리사가 소를 버리고 가족을 떠나서 여기까지 온 마당에, 떠날 리가 있습니까? 엘리사가 뭐라고 대답을 해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여호와의 살아계심, 그리고 엘리야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를 했죠. 이것은 절대로 떠날 수 없다는 결단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여호와는 영원토록 살아계시는 분이죠. 엘리야의 영혼도 마찬가지예요.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아요.
다시 말해서 영원불멸한 것을 두고 맹세를 했기 때문에, 그 맹세가 영원토록 변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겁니다. 그만큼 지금 엘리사의 각오가 확고하다는 거예요.
자, 그런데요. 엘리야가 장소를 이동하는 동안에 계속해서 엘리사에게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길갈에서 한 말을 다른 장소에 갈 때마다 계속해요.
길갈을 떠나서 두번째 장소가 어딥니까? 벧엘이죠. 벧엘에 도착을 했는데, 똑같은 말을 또 해요. ‘너는 여기 머물라’
자, 오늘 본문 4절이죠. 4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매” 아멘.
장소만 바꼈다뿐이지, 하는 말이 똑같아요. 엘리야는 ‘너는 여기 머물라’ 라고 했고, 엘리사도 똑같이 대답을 하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런데 이게 여기서 또 끝이 아니에요. 이제 이들이 여리고로 가는데, 여리고에서 또 똑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니까,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가니라”
총 세 번, 똑같은 대화가 있었어요. 길갈에서, 벧엘에서, 여리고에서. 장소가 바뀔 때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그곳에 머물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도대체 왜 엘리야는 계속해서 머물러 있으라고 말을 했을까요? 그냥 끝까지 데리고 가지, 왜 가는 곳마다 너는 여기에 머물라는 말을 했을까?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그 이유는, 엘리사에게 이제라도 포기하고 돌아가라는, 일종의 시험을 하기 위해섭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역의 길이 쉬운 길이 아니에요. 험난한 길입니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는 길이에요.
그런데 엘리사가 과연 그 길을 갈 준비가 되었는지, 엘리야로서는 확신이 없어요. 엘리사가 부잣집 아들이거든요. 그가 농사일이나 해봤지, 목숨의 위협을 받아봤겠습니까? 그가 집에서 귀한 아들로 대접을 받고 살면서 언제 핍박을 받아 봤겠습니까?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엘리사에게 말하는 겁니다. ‘혹시라도, 포기할 거면, 지금 미리 포기해라. 내가 요단강까지 가서, 승천하고 나면, 그때는 기회가 없다. 빼도박도 못하고, 네가 선지자의 삶을 살아야 되는데, 그 전에 지금 포기해라.’
이것이 바로 세 번이나 반복해서 엘리사에게 머물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아직은 포기할 기회가 있다는 거예요. 포기하려면 지금 해라. 엘리사의 결단을 시험하는 겁니다. 네가 정말로 선지자가 될 각오가 되어 있느냐?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여정의 경로를 지도로 보면요. 엘리야의 의도가 선명하게 보일 겁니다. 화면에 지도를 보시면, 첫번째 장소인 길갈 바로 오른쪽에 요단강이 있죠. 어차피 요단강에 갈 거면, 그냥 길갈에서 오른쪽으로 바로 가면 돼요. 길갈하고 요단강하고 약 16km 정도 떨어져 있거든요. 이 정도면 걸어서 네다섯 시간이면 가요.
그런데 길갈에서 요단강으로 안 가고 어디로 갑니까? 정반대쪽에 있는 벧엘로 가죠. 그리고 유턴해서 여리고로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요단강으로 가요.
지도로 보니까 경로가 이상하죠. 뺑뺑이 돌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바로 요단강으로 가면 되지, 굳이 벧엘 갔다가 여리고 갔다가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그러나 바로 여기에 엘리야의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단강으로 가기 전에, 엘리사를 시험하기 위하여서 일부러 엉뚱한 장소로 데리고 다니는 거예요. 길갈, 벧엘, 여리고, 총 세 번의 시험을 하는 것이죠.
우리는 이 모습에서 성경 속에 등장하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는데요. 바로 룻입니다. 룻기 1장을 보면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합니다. 남편도 다 죽고, 자식도 없이 시어머니 모시고 사느니, 집에 돌아가서 새로운 삶을 살라는 거예요.
그런데 두 며느리가 그것을 거부하고 어머니와 함께 있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다시 두번째로 말을 해요. 집으로 돌아가라. 두 번째 말했을 대, 첫째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떠나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룻은 떠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시 세번째로, 나오미가 말을 합니다. 돌아가라. 하지만 룻이 끝까지 돌아가지 않고, 시어머니를 따르겠다고 하죠. 나오미가 그 결심을 보고, 더이상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내용이 룻기 1장 18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룻기 1장 18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아멘.
나오미가 룻에게 세 번 돌아가라고 말했지만, 룻이 끝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나오미가 그 결심을 본 거예요. 그래서 더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하기를 그치니라”
여러분, 룻이 시어머니를 따르는 것이 결코 쉬운 결단은 아니었을 겁니다. 남편도 죽고, 자식도 없는데 그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어요.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서 새출발 하는 것이 낫죠. 시어머니가 먼저 그렇게 하라고 해주니까, 나이스 땡큐 아니에요?
그런데 룻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험난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죠. 온 나라에 기근이 들어 있는 가운데, 남자 없이 여자 둘이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룻은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엘리사도 결단했어요. 그리고 세 번에 걸쳐서 자기를 시험하는 엘리야에게, 그 결단이 절대로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세 번에 걸쳐서 맹세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룻의 결심을 보고 말하기를 그쳤듯, 엘리야도 엘리사의 결심을 보고 말을 그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데리고 요단으로 갑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엘리야가 놀라운 이적을 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오늘 본문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아멘.
엘리야가 자기 겉옷을 벗어서 돌돌 말아서 물을 쳤어요. 그랬더니, 과거 모세 앞에서 홍해가 갈라졌던 것처럼,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땅이 드러났어요. 그 땅을 두 사람이 걸어서 건너갔습니다. 여기서 ‘마른 땅’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바싹 말라서 물기가 전혀 없는 땅을 뜻합니다. 만약에 아직 물기가 있어서 질퍽질퍽했다면 건너가기가 힘들었겠죠. 그러나 그 땅은 걷기에 전혀 지장이 없도록, 완전히 바싹 마른 땅이었어요. 땅의 모든 수분이 완전하게 좌우로 갈라진 겁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불편 없이 요단강을 건너갔어요.
이제 여정이 끝나고,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을 했습니다. 이곳에서 엘리야가 하늘로 올려지게 될 건데요. 그 전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무엇을 구하는지를 물어봅니다. 자, 오늘 본문 9절이죠. 9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아멘.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기 위해서, 무엇을 구하는지를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엘리사가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를 갑절이나 구했어요. 옛날 개역성경에는 영감을 갑절이나 구했다고 돼있는데요. 히브리어 원문과 비교해보면, 사실 옛날 성경의 번역이 더 정확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역사라는 말이 없어요.
그래서 이 말을 보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을 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당신의 영의 두 배의 몫이 나에게 있게 하소서”
당신의 영의 두 배의 몫.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두 배의 몫”을 요구했어요. 이것은 진짜로 어떤 두 배의 능력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엘리야가 보여주었던 놀라운 역사들이 있는데, 나도 그런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주세요. 이게 아니라는 거예요.
엘리사는 능력을 구한 게 아니라, 뭘 구했어요? 성령. 엘리야와 함께하신 성령을 구한 겁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행한 일들이 그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임을 알았어요. 그래서 성령이 함께하시면, 나도 엘리야처럼 능력 있는 사역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은 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특별히 성령을 두 배나 구했어요. 여러분, 이 말은 내가 엘리야보다 두 배 뛰어난 선지자가 되고 싶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장자의 권한을 요구하는 거예요.
신명기 21장 17절에 의하면, 장자에게는 아버지의 유산이 두 몫이 가거든요. 다른 아들이 한 몫을 받을 때, 장자는 두 배를 받아요.
그러니까 지금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장자의 권한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단순히 당신의 제자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장자로서, 당신의 사역과 당신의 능력을 계승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말이에요.
본래는 부잣집에서 아버지의 수많은 소를 상속받아야 할 엘리사가, 지금 엘리야의 아들로서 진정한 합법적 계승자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사 외에도 선지자의 제자들이 등장을 하죠. 이 사람들은 엘리야의 제자들은 아니에요. 엄밀히 따지면, 이 사람들은 이때 당시에 있었던 선지자 학교의 학생들입니다. 선지자 학교의 전통은 과거에 사무엘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을 하는데, 오늘날의 신학교 같은 학습 공동체라고 보면 됩니다.
물론 오늘날의 신학교처럼 체계적인 기관은 아니었어요. 지도하는 선지자가 있고, 그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모여서 하나의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그것이 선지자 학교가 되는 겁니다.
아마도 엘리야가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사역을 하던 중에, 기회가 될 때마다 선지자 학교를 다니면서 강의를 해줬던 것 같아요. 일종의 초빙교수로서 신학생들에게 세미나를 해준 거죠. 그래서 어쩌면 이 사람들에게도 엘리야의 유산에 대한 지분이 있을 수 있어요.
만약에 엘리사가 길갈이나 벧엘이나 여리고에서, 더이상 엘리야를 따르지 않고 머물렀다면, 어쩌면 이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엘리사 대신 새로운 후계자로 지목됐을 지도 모릅니다. 일종의 상비군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이 사람들도 자기 몫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엘리사가 끝까지 엘리야와 함께 했고,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받을 장자의 몫을 구함으로써,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그가 엘리야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것을 증명하게 됩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엘리야와 함께하지 않았어요.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야와 엘리사가 벧엘과 여리고에 도착했을 때, 엘리야에게 수업을 들었던 제자들이 찾아오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엘리야를 찾아오지 않고, 엘리사를 찾아와요. 당연히 교수님을 찾아와야 될 텐데, 교수님이 아니라, 그의 후계자를 찾아온 거예요.
자,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벧엘에 있는 제자들이 찾아오는데요. 3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이르되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
벧엘에 있던 선지자 학교의 제자들이 찾아왔어요. 교수님이 이제 곧 승천하신다고 하니까 마지막으로 인사 드리려고 찾아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사람들이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사를 엘리사를 찾아왔어요.
그리고 엘리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여러분, 지금 이게 무슨 말일까요? ‘당신은 아시나이까? 우리는 아는데, 당신은 아느냐? 무슨 뉘앙스인지 아시겠죠. 지금 자기들의 지식을 뽐내고 있는 겁니다. 나중에 여리고에 가서도 똑같아요. 여리고에 있는 제자들도 와서 똑같은 말을 합니다. 당신은 아느냐?
여러분, 이 사람들은 선지자 학교의 제자들입니다. 많은 것을 배워서 알기는 많이 알아요. 하지만 이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요. 엘리사하고 본질적으로 다른 게 있어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들은 엘리야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머물러라, 머물러라 해도 끝까지 따라갔어요. 하지만 제자들은요, 알기는 잘 알아요. 하지만 엘리야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제 곧 선생님이 승천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가시는 길을 따라가지 않아요. 왜 따라가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엘리야를 따르기가 겁이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겁이 나요. 혹시라도 내가 선지자의 후계자가 되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까봐.
선지자의 제자로서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실제적으로 사역의 현장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은 겁니다. 그냥 내 지식을 뽐내면서 내가 사는 동네에서 평탄하게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혹시라도 내가 덜컥 선지자의 후계자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하겠어요? 감당이 안 돼요.
지금 온 나라가 바알 숭배에 물들어 있고, 이세벨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있는 이 무서운 시대에, 선지자가 되고 싶지가 않아요. 제자로만 머물로 있고 싶은 겁니다.
벧엘에 있는 제자들이나, 여리고에 있는 제자들이나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마침내 요단강에 도착했을 때, 이 사람들은 저 멀리 서있죠.
이것이 7절 내용이에요. 자, 7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선지자의 제자 오십 명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서 있더니”
벧엘과 여리고에서 제자 오십 명이 찾아왔어요. 그리고 저 멀리서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마치 연극을 바라보는 관객들처럼, 무대 밖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보고만 있어요. 저 역사의 현장, 그 중심을 향하여 가지 않고, 그냥 변두리에 있어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조연들의 모습입니다. 영화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스토리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엑스트라들이에요. 그러다가 나중에 영화가 끝나고 출연자 이름이 올라갈 때, 행인1, 행인2, 이런 식으로. 있었는지도 몰랐던 존재를 자막으로만 알게 되는, 딱 그 정도의 사람들인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이 시대 가운데, 역사의 변두리에 서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당당히 역사의 중심에 서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역사의 중심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역사의 중심은 다른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이 바로 역사의 중심입니다. 그곳에서 어떤 폭풍이 불어닥친다 할지라도, 그곳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면, 우리는 그곳으로 가야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바울이 자기 계획을 버리고 마게도냐 지역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그리고 엘리사가 미래가 보장된 삶을 버리고, 엘리야를 따랐던 것처럼, 우리들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나를 인도하시는 곳이 어디든지, 담대히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라고 하는 무대 위에서, 그 무대의 감독이신 주님의 sign을 따라, 최선을 다하여 최고의 무대를 펼쳐보임으로써,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