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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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아버지, 미가엘 찬양대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렸습니다. 이 찬양을 기쁘게 받아주시고, 이 찬양의 가사와 같이 ~ 하는/고백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하나님 말씀 앞에 섭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가 말씀앞에 겸손히 아멘하게 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 감화 하시사 이 말씀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들려주시는 음성으로 받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정말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은혜’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라는 단어의 정의를 잘 몰라서 오해한 나머지, ‘은혜’라는 아주 귀한 단어를 오용하고 남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몇 가지가 있는데요. 우선 우리는 ‘감정’과 ‘은혜’를 혼동합니다. 우리가 대부분 설교 후에 “은혜 받았습니다~!” 할 때는 대부분 설교가 좋았거나, 즐거웠거나, 감동적이고 임펙트가 있었을 때,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설교 듣고 ‘기분이 좋아졌을 때’, 우리는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만약 어떤 설교자가 30~40분 내내 진짜 성경이야기만 하면, 우리는 솔직히 ‘은혜 받았다’라는 말보단, (사실 그런 설교가 진짜 ‘은혜받는 설교’지만, 우리는 대부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렵다, 지루하다, 졸려 죽을뻔 했다”라고 반응하게 됩니다.
수련회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수련회 때 눈물 콧물을 범벅이 되어야 ‘은혜 많이 받고왔다’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은혜’는 감격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감정이 반드시 포함이 되지만,
문제는, 수련회때 눈물이 안나면 “이번엔 은혜 못 받았다”라고 단정지어버린다는게 문제라는 것이죠.
이렇게 ‘감정’과‘ ‘은혜’를 구분하지 못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냐면, 은혜의 근거가 ‘감정’이 되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의 주체가 ‘내 자신’이 되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았네, 못 받았네’를 내가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죠.
제가 불신자라고 하고, 여러분들께 이 질문을 해볼테니 속으로 한번 대답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막 은혜,은혜 하는데, 은혜 받는다는게 뭐야?”, “은혜가 필요하다는게 도대체 뭔 말이야?” 혹시, 여기에 대해 명확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고, 그냥 “은혜가 은혜지, 뭐긴 뭐야”하며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오늘 성경적인 ‘은혜’에 대한 개념을 반드시 알고 가야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깨닫는 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 에베소서 2장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찾아보고, 그 은혜를 받는 사람의 삶의 신앙은 어떠해야 하는지까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로 은혜란 무엇인가? ‘자격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사도바울은 1절부터 3절까지 통해서 우리의 과거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는데요,
눈으로 쭉 따라오시면, 1절에=“허물과 죄로 죽었었고”, 2절에=“사단의 영, 불순종 영에 사로잡혀 있었고”, 3절=“하나님의 진노를 받기 일보직전의 상태”,
그러니까, 우리는 원래 당장 지금 심판받고 지옥가도 아무런 문제가 안될 죄 범벅 아니, 범벅이다 못해 죄로 완전히 죽어버린 상태에 놓여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4절 보시면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큰 사랑’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무한하신 크기를 의미합니다.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고, 무한히 사랑하셔서,
5절,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물로 주고 우리를 그와 함께 살리셨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괄호로 부연설명을 하면서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게 된 건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제가 좀 더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매우 깊은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그 광경을 본 어떤 사람이 “아이구 큰일이다!” 하며, 어서 올라오라고 긴 사다리를 내려줬는데, 이 사람이 사다리를 내려줘도 잡고 올라오질 못합니다.
왜인가 하고 봤더니, 얼마나 깊은 곳에 쎄게 떨어졌는지 의식을 잃어버린 것이죠.
그러면 이렇게 의식을 잃어버려서 본인이 구덩이에 빠져있는지도 모르고, 사다리를 내려줘도, 밧줄을 내려줘도 잡고 올라오지 못하는 이 사람을 구덩이에서 꺼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직접 내려가서 그 사람을 들쳐업고 올라와야 합니다. 지금 바울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현실적인 비유를 들기 위해 의식을 잃었다고 표현 했지만, 원래는 의식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완전히 죽었던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기에,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있는 구덩이로 직접 내려오셔서 우리를 들쳐 업고 구덩이 밖으로 데리고 나오셨다.
우리가 그 구덩이 밖으로 빠져나오게 되는데 있어서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이 말씀하고 있는 바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무한하시고 무조건적인 크신 사랑 덕분에, 우리가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어떠한 공로도 없이 다시 살아나게 됐다”는 것, 이 모든 것을 함축해서 두 글자로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1절부터 5절까지 말씀을 통틀어서 ‘은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성경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은혜란 무엇이냐,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고 성경에서는 ‘은혜’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구원안에 이 의미가 담겨져있는 것이죠.
그래서 ‘은혜’ 안에는 우릴 향한 하나님의 ‘사랑’, ‘오래참으심’, ‘긍휼이 여기심’, ‘자비하심’, ‘인도하시고 보호하심’, ‘함께 하심’ 등등 구원 안에 담겨있는 모든 것들로 파생되는 되는 것이죠.
반드시 이 개념이 들어가야 합니다. 다 까먹어도 이것만큼은 반드시 오늘 기억하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자격없음’. ‘자격없는 자에게 베푸심’, ‘자격 없는데 받았음’. 이게 ‘은혜’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설교를 듣거나, 집회 후에, 뜨거운 찬양 후에 “은혜 많이 받았다”라는 말은 “오늘 끝내주게 좋았다”, 감정표현의 의미가 되어선 안됩니다. 반드시 구체적인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 말씀을 통해서, 목이 쉬어라 부르짖는 기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부르는 찬양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자격 없는 사람인지”, “내 죄가 얼마나 큰지”,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았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가 무엇을 끊고 다시 결단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는 것이 ‘은혜받았습니다’라는 표현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반대로 또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를 사모합니다”라는 고백도 막연한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제가 하나님 없이 어떻게 살겠습니까?”라는 겸손한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 이 자격없는 죄인 외면치 마시고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님 나를 외면하시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아버지 내 죄악을 따라 처벌하지 마시고 나에게 자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아버지, 한량없고 무한하신 사랑으로 나를 덮어주시옵소서”. 하며
이런 정확한 내용을 담아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호소하는 것이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를 사모합니다’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해도 저 고백이 없다면, 은혜받은 자 다운 모습이 삶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감정’이었을 것이고,
비록 눈물은 흘리지 않았어도, 격한 감정의 요동침이 없었을지라도 저 고백을 담아 내 삶이 은혜받은 자 답게 변화되고 결단있는 삶이 있다면 그게 바로 진정한 은혜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는=사랑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은혜는 감정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삶으로 드러나게 됨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2 마지막으로 은혜에 대하여 하나만 더 살펴보길 원합니다. 은혜란 무엇이냐, 둘째로, 은혜는 ‘선물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은혜에 대한 개념’을 정의했습니다. ‘자격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은혜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여러분, 자격도 없는데, 아무런 대가도 없이, 좋은 것을 받는 것을 우리는 무어라 합니까? 맞습니다. ‘선물’이라고 합니다. 우리 8절 읽겠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아멘.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은혜’가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왜 이런 독특한 표현을 했을까 하면, 아무래도 에베소 교회 안에, 구원을 은혜의 선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라고 자랑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9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가 쓰여졌을 당시,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신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고, 아주 당연하게, 유대교에서 있었을 시절의 습관을 따라,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율법도 준수해야지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자신의 구원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높은 확률로 유대교출신 신자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자신들의 기준에 볼 때, 열심히 하지 않는 이방인 신자들을 향해,
자신들이 구원에 있어서 얼마나 더 월등하고 자격있고 잘났는지를 자랑하고 다녔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도바울은 구원에 있어서는 단 0.01%의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나 공로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선물’의 개념을 가져옵니다.
즉, 바울은 8~9절 말씀을 통해서 구원을 ‘선물’이 아닌 ‘보상’으로 생각하는 ‘공로주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선물’과 ‘보상’을 명확하게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물’과 ‘보상’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물은 받기 위해서 자격이나 조건이 필요하지 않고,
보상은 반드시 자격과 조건을 갖춰야만 받는 것 아니, ‘얻어낼 수 있는’ 논공행상의 원리가 주어지는게 보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물’과 ‘보상’의 개념을 종종 혼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상’ 시스템에 너무나 많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논공행상의 원리가 적용되는 세상이죠.
예를 들어서, 내가 원하는 학교를 가려면 열심히 노력해서 공부를 해야지만 갈 수 있고,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려면 열심히 노력해서 훈련을 해야지만 금메달을 얻을 수 있겠지요.
반드시 노력을 해서 자격을 갖춰야만, 내가 원하고 바라던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보상’의 삶에 너무나 많이 노출된 나머지, 우리는 ‘선물’과 ‘보상’을 착각하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어릴적부터 즐겨 부르는 동요에서도 발견됩니다.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뭘 안주신다고 하죠? “선물을 안주신대”.
왜 이 동요에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일까요? 선물이래 놓고, 이 아이는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거저받을 수 없습니다.
이 아이가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떠한 거센 풍랑 앞에서도 ‘햇님반 사나이 가는 그길에 눈물따윈 없으리/ 소나무처럼 부러질지언정 갈대처럼 휘지 않으리’ 하며 두 주먹을 꽉 쥐고! 울음을 참는 해병정신을 발휘해야만 합니다.
이게 선물일까요? 선물이라면, 이 아이가 울던 울지 않던, 이 아이가 예뻐서 그냥 주는게 선물 아닐까요?
또 하나 생각해보죠. 이 자리에 부모이신 성도님들은 자녀들에게 이런 말을 한번씩 해보셨을겁니다. “너 이번에 시험 점수 몇 점 이상 맞아오면, 너가 갖고 싶어 했던 최신 핸드폰 선물로 사줄게”.
여러분, 이 역시 엄밀히 말하면 선물이 아니죠. 진짜 선물로 사줄려면 이 아이가 백점을 맞아오든 빵점을 맞아오든 그냥 내 새끼니까 사주는 것이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삶 속에서 선물과 보상의 개념을 구분하지 못하고 한 번에 묶어서 생각하는 바람에,
우리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으려면, 누군가가 베푸는 호의를 받으려면, 반드시 최소한의 노력이나 자격을 갖춰야만 얻을 수 있다고 자동적으로 치환해서 생각해버립니다.
다소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운 예화를 들었는데, 웃자고만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뭐냐면,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선물과 보상을 햇갈려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로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죠. 이것을 우리는 ‘공로주의’라고 부릅니다.
겉으로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지만, 행동과 사고방식에서는 나도 모르게 공로주의적 신앙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를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자격없음’을 의미한다면, 공로는 반대로 ‘자격있음’을 의미합니다.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공로주의적 신앙에는 대표적인 다섯 가지의 특징들이 있는데, 제가 쭉 소개해드릴테니 어디에 해당되시는지 점검해보면 좋겠습니다.
1) 첫째로 공로주의 신앙은 자기만족을 위한 공로를 쌓습니다.
모든 공예배참석, 성경읽기, 새벽기도 풀참 등 자신의 신앙생활의 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규칙적일수록 내 자신이 더 의로워지고, 강도 높은 신앙생활이 하나님께 더 인정받고 점수따는 이유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성실하게 다 해내면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고, 어쩌다가 빼먹으면 죄책감을 느낍니다.
2) 두 번째로 공로주의적 신앙은 영적 우월감에 빠집니다.
그래서 언제나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하고 평가합니다. “저 집사님은 무슨 중직자라는 사람이 미스바 기도회 한번을 안 나와, 무슨 새벽기도를 한번도 안 나와? 나는 적어도 새벽기도는 나올려고 노력한다. 솔직히 내가 저 사람보단 신앙 좋지”.
3) 세 번째로는 이게 제일 대표적입니다. 공로주의 신앙은 언제나 ‘보상심리’가 있습니다.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마치 신앙생활을 마일리지 카드 적립 식으로 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평소보다 많은 액수를 헌금하면서 “이번엔 하나님께서 좀 감동하셔서 응답해주시겠지?”, “우리 자녀가 잘 되겠지?”하며 하나님께 보상을 기대합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는 무엇이냐면, 그러다가 자신의 헌신과 열심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하나님께 서운해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상처받고, 심지어는 신앙생활을 중단해버리기까지 합니다. 안 갚아 주시는 하나님 따윈 필요없다는 것이죠.
4) 네 번째로 공로주의 신앙은 고난을 행위의 결과로 여깁니다.
삶에서 고난이나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내가 죄가 많아서, 내가 최근에 십일조를 빼먹어서, 내가 최근에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내게 이런 불행이 닥친거야”라고 생각하며 고난의 원인을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찾아 깊은 절망에 빠지는 것도 공로주의 신앙입니다.
5) 마지막 다섯 번째로 공로주의 신앙의 가장 불행은 이것입니다. 자신의 구원에 대해 불안해 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믿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못 살고, 죄 짓고 살 때, 불안해집니다. “이러다 나 천국 갈 수 있을까? 구원이 취소되는 것 아닐까?” 하며 구원의 확신과 평안을 얻고자 뭔가를 더 하려고! 하는 태도가 바로 공로주의입니다.
우리 가운데 혹시 이 중에 하나라도 해당되는게 있다면, 우리는 지금 선물이 아닌 보상으로, 은혜가 아닌 공로로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다섯가지에 다 해당된다면, 그건 여러분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얼마나 기복주의와 공로주의와 치성의 종교를 가르쳤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반성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오늘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가 회복해야할 진정 은혜받은 자의 신앙생활, 은혜주의 신앙생활을 무엇일까요? 이 역시 다섯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첫째로 은혜주의는 자신이 자격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공로주의와 다르게 언제나 겸손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하나님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살아있는 것도, 교회에서 헌신할 수 있는 것 조차도, 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 덕분이라는 자각이 있습니다.
2) 둘째로, 은혜주의는 예배에 대한 태도도 다릅니다. 공로주의는 예배를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은혜주의는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감사해서 예배를 합니다.
자기 만족과 위안을 위해서 강도높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으로 움직입니다.
3) 세번째로 은혜주의는 공로주의와 다르게 타인에 대해 은혜로운 태도를 보입니다. 상대방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구원받은 자임을 알기 때문에, 자신도 하나님 앞에선 죄인이고 자격없는 사람임을 알기에, 부족한 사람을 보고 비난하고 정죄하기 보다는 사랑과 이해와 용서로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소위 이런 것이죠. “권사님, 저 사람 이번에 어쩌고 저쩌고 그랬다네요”, “아유, 우리도 똑같어, 우리라고 잘난거 하나도 없어, 하나님 보실 때 똑같아” 하는거죠.
4) 네번째로 또 은혜주의는 고난을 해석하는 것도 다릅니다. 공로주의는 자신이 열심히 하지 않아서 고난이 찾아왔다 생각하며 더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은혜주의는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해석합니다.
즉,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 내게 더 큰 은혜를 베푸실 것을” 신뢰하며,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는 태도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오히려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5) 마지막 다섯번째로 가장 중요한데, 은혜주의는 언제나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구원이 나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또, 구원이라는 것이 나의 행위 때문에 손바닥 뒤집듯 뒤집히지 않고,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며 은혜 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선물로 준 100만원짜리 기프트 카드를 버리고, 500점 쌓인 포인트 카드를 들고 백화점에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듯이,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자격없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을 공로의 보상으로 바꾸지 않는 자들 되시길 바랍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을 육체로 마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은혜로만! 겸손하고 자유롭고 사랑가운데서 신앙생활 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모든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면서, 오직 우리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기독교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들, 이슬람, 힌두교, 불교, 유교, 천주교 등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들은 반드시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의 공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심지어는 카톨릭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공로가 만나 의로워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수많은 종교들 중에서 인간의 공로 없이 오직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로만 구원받는 종교는 기독교가 유일무이합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보상의 종교이고 인간이 신을 향해 구원을 향해 올라가야하는 종교이지만,
보상이 아닌 선물의 종교이고, 인간이 찾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찾아 내려오는 은혜와 사랑의 종교는 기독교가 유일무이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진리라고 하는 것이고, 그래서 기독교 아니,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단호하게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은혜로 부름받고 모인 공동체,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수성가족 여러분, 은혜는 ‘자격없는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은혜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은혜가 날마다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입술을 통해서 진정 듣고싶어하시는 고백은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라는 겸손한 고백이며, 그 고백이 있는 자가 진정 ‘은혜받은자’라는 것을 기억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보상이 아닌 선물로, 공로가 아닌 은혜로 살아가는 모든 수성가족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은혜의 깊은 의미: 우리의 삶 속에서의 은혜의 실체
은혜의 깊은 의미: 우리의 삶 속에서의 은혜의 실체
요약: 은혜는 하나님이 의롭지 않은 우리에게 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비입니다. 이는 우리의 능력이나 공로와는 무관합니다.
적용: 은혜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믿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우리 삶의 큰 힘이 됩니다.
교훈: 은혜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의 중심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열매입니다.
이 본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있는지: 은혜는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요소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이 은혜의 정수를 이룹니다.
큰 아이디어: 우리의 약점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추천 연구: 성경에서 은혜의 개념에 대해 깊이 연구해보세요. Logos를 통해 로마서 5장 1-21절의 주해를 살펴보거나 에베소서 2장 1-10절의 배경과 문맥을 이해하는 것도 좋습니다. 또한, 은혜의 적용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비교해보는 것도 유익합니다.
1. 은혜의 요약: 마음에 새기다
1. 은혜의 요약: 마음에 새기다
에베소서 2:8-9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주어집니다. 이 은혜는 누구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비를 신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계획을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2. 은혜의 여정: 소망을 품다
2. 은혜의 여정: 소망을 품다
로마서 5:1-2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즐기게 되고, 은혜 안에 서서 소망을 품게 됩니다. 아마도 당신은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은혜는 삶의 여정에서 당신에게 평화와 안정감을 제공합니다.
3. 은혜의 영상: 강함 속 약함
3. 은혜의 영상: 강함 속 약함
고린도후서 12:9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 속에서 강림합니다. 아마도 당신은 자신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기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은혜는 당신의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신다는 확신을 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