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27 주일오후예배: 누가복음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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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33 의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저와 함께 지금까지 교회라는 주제로 말씀을 살피고 있었는데요. 오늘이 종교개혁기념주일인 만큼 오늘은 교회와 종교개혁이라는 제목으로 교회라는 주제를 종교개혁을 통해서 살피려고 합니다.
종교개혁의 후예인 우리에게 종교개혁은 너무나 익숙합니다. 그러나 오늘 다시한번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새기고 특별히, 종교개혁가들이 교회를 어떻게 개혁하려고 했는지를 살피고 종교개혁의 후예인 우리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다시 무장하면 좋겠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교회의 왕권은 교황에게 있었다.
우선 우리는 중세에 대한 편견을 어느정도 깰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적지 않게 중세에 대한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을 수가 있는데요. 바로 중세 교회 전체가 타락한 교회였다는 편견입니다. 종교개혁 직전의 교회는 타락한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세 교회 전체가 어둠의 시대였다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세 교회 전체가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할 때 교회 내에서 교회 쇄신 운동들이 중세 시대에 걸쳐 항상 있었습니다. 물론 종교개혁을 지나 현대 교회에 있는 우리의 관점으로 봤을 때 중세의 교회 쇄신 운동 중 하나인 수도원 운동이나 교황 제도와 같이 모든 것이 다 맞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가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교회가 힘썼다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라고 해서 완벽하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지 중세 교회 때에도 교회는 타락의 길을 걷지 않고자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중세 유럽 사회 또한 안정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기는 것은 교회가 노력했는데, 왜 사회까지 안정이 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중세 유럽 사회는 종교와 사회가 한몸처럼 통합되어 갈등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세 유럽 사회는 그야말로 기독교의 사회였습니다. 모든 국가가 기독교를 믿고 있었고, 왕의 책봉도 항상 교황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중세 유럽은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야, 독일, 오스트리아 등등 각기 다른 여러 나라로 되어 있었지만, 로마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보면 마치 큰 하나의 나라와 같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신앙과 상관없이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 자동 등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교회는 막강한 영향력과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법과 군대를 가졌다면, 교회에게는 종교 재판소가 있었습니다. 종교 재판소에서 영적 벌을 받으면 국가나 사회에서도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 교회가 종교 재판으로 공무원 한 명을 권징하면 여론의 압력과 파문 때문에 그는 어떤 사회생활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반이 무너졌습니다. 더 나아가 사회에서 사람들은 그와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을 비롯하여 교황이 내리는 “파문”은 막강한 영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강력한 교황권을 바탕으로 중세 유럽 사회는 안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5세기가 되자 이런 안정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전에는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다면, 이 시기가 되자 지방 영주들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한 겁니다. 특히 이 당시 유럽에서 최강대국이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힘이 약해지고 지방 영주들의 영향력이 커진 것이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스페인과 프랑스와 잉글랜드도 점점 로마 천주교회의 간섭으로 독립하려고 하였습니다. 스페인 왕은 교황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나라 성직자를 스스로 임명했습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이것을 별게 아니라고 느껴질 수는 있겠으나 성직자를 임명한다는 것, 다시 말해 사제를 서품한다는 것은 오직 주교와 교황에게만 있던 권한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법을 보시면 신부와 주교가 미사를 집전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신부와 주교 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주교에게는 사제를 임명하는 서품권이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성직자를 임명한다는 것은 아주 큰 권한입니다. 그런 권한을 한 나라의 왕이 행사한다는 것은 곧 교황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죠.
그러다가 14-15세기에 프랑스는 교황으로부터 독립하고 잉글랜드도 그 유명한 헨리 8세가 교황이 아니라 스스로 교회의 최고 머리가 되어 로마 가톨릭 교회와 단절합니다. 이렇게 국가가 교회의 권위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들이 생기게 됩니다.
거기다 중세 말기에 와서는 그 이전까지 굳건하던 교황 제도가 약화됩니다. 교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일들이 교회 내에서 자꾸만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교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심지어 교황 자체가 부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교황은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선출되었고, 반드시 독신해야 하는 사제가 여러 아내를 두고 자식들을 몰래 낳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또한 교황청에서는 흥청망청 파티를 하고, 추기경을 독살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딸과 근친상간을 하여 자식을 낳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교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교황들이 부패하였음에도 왜 교회는 교황 제도를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교회를 다스리는 왕권이 교황에게 있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황이라는 그 인물 자체가 교회를 다스리는 왕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교황은 아까도 말했듯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천국 열쇠를 유일하게 소유한 영적 권위자입니다. 더 나아가 교황의 다른 직함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법에 보시면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칭하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을 대리자로 세우셔서 교회와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중보자였습니다. 따라서 교황은 곧 왕권을 쥐고 있는 교회의 머리였습니다. 이 교황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사제들이 교회를 다스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중세 말기 로마 가톨릭은 인간이 주인이 된, 인간이 왕권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렇게 인간이 교회의 주인이 되자 그 내부가 아주 지독하게 썩었다는 건데요. 가장 중요한 예배가 부패하였씁니다. 미사를 집례하는 사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는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성직자는 예배에서 설교하기 위해 연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고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남겼던 교훈을 5분 정도 읽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심지어 이 당시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었는데, 어떤 성직자는 라틴어를 모르면서 예배 가운데 몇 가지 라틴어 문장만 외워 사용했습니다. 마치 주문 외우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그냥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되었고, 예배의 내용을 중요시하지 않고 예배 자체가 우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배가 우상이 된 것뿐만 아니었습니다. 양인 신자들의 목자인 사제들은 목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 양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해야 하는데 사지로 내모는 나쁜 목자가 되었습니다. 신자는 자신의 죄를 사제에게 고백하고 사제는 그 죄를 사죄해주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에 대한 벌을 해결할 수 있지만, 모든 벌을 다 해결할 수는 없다면서 남은 벌을 해결하려면 기도, 선행, 고행, 성지순례, 헌금 같은 덕행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그 벌의 종류와 강도를 결정해서 명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 여기에서 파생하여 천국에 ‘선행 잉여창고’가 있다고 가르치면서 어떤 성인은 자신을 구원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선행을 했기 때문에 그 잉여 선행은 천국창고에 보관되었는데, 보통 사람은 자신이 받아야 할 벌을 다 해결하지 못하고 죽지만 죽고 난 후에도 그 벌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연옥에서 그 벌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교황청은 이것을 죽기 전에 이 벌을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유명한 면벌부를 만들어 돈을 받고 팝니다. 우리가 ‘면죄부’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상 면벌부가 더 정확합니다. 죄를 해결해준다기 보다는 연옥에서 받아야 할 벌을 삭감해주는 증서로 로마 가톨릭이 팔았기 때문입니다.
이 연옥교리에 관하여 당시에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죽은 친척들이 연옥에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금고 안에 동정 한 닢이 떨어질 때 한 영혼이 연옥에서 뛰어오른다.”라는 말을 하면서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의 그림을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주면서 면벌부를 사게 만들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하는데, 마리아를 숭배하게 만들고, 교회를 위해 훌륭한 업적들을 남긴 성인들을 숭배하는 것이 만연했습니다. 성물이라는 것도 만들어 숭배하게 만들고, 성지순례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종교개혁 직전의 중세 로마 천주교회는 국가 위에 군림할 정도로 흥왕했지만, 영적으로는 암흑 속에 있었습니다. 이 모든 부패는 말씀의 암흑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군림하셔서 이 교회를 다스리셔야 하는데, 인간들이 주인이 되어 교회를 다스렸기 때문에 암흑기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바른 예배는 사라지고 오히려 예배가 우상이 되어 버리고, 바른 가르침도 사라져 신자들을 잘못된 길로 오도하게 되었고, 결국 교회가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부패한 교회를 다시 올바른 교회로 회복시킬 필요가 있었고, 종교개혁가들이 그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2. 종교개혁가들은 교회의 왕권을 하나님, 특별히 그리스도께 다시 돌리려고 했다.
그 시작이 바로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그 유명한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루터는 사실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여 개혁할 생각까지는 없었습니다. 처음에 그가 95개조 반박문을 제시한 것은 성경이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데 한번 이것을 놓고 이야기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것을 교황의 권위에 대한 전면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루터를 파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제 완전히 회복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고 판단하고 교황과 로마 가톨릭 교회를 정죄하기 시작하였고, 모든 종교개혁가들이 이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을 이야기할 때 ‘이신칭의’만을 기억할 수도 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당시 행위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미신적이고 우상숭배적인 것들이 생겨난 로마 가톨릭 교회를 향해 루터가 로마서 말씀에 따라 구원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받는다는 이신칭의로 종교개혁가들이 구원론만을 바꾸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이 개혁하고자 했던 것은 더 정확하게는 그 구원이 베풀어지는 곳인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교회를 개혁하여 로마 가톨릭에 의하여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바로 잡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풀자면, 인간이 주인이 된 교회를 종교개혁가들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신 교회로 만들고자 했다는 겁니다. 바로 교회의 왕권을 교황이 아니라 하나님, 특별히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되돌리려고 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말씀처럼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장 33절은 마리아를 찾아온 천사 가브리엘이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나실 것을 예고하면서 그분은 영원히 교회를 왕으로 다스리실 분이심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가르치는 에베소서에서 또한 교회의 머리, 즉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누가복음의 말씀처럼 모든 종교개혁가들은 인간이 주인이 된 교회를 오직 그리스도만이 다스리시는 교회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왕권을 쥐시고 교회를 다스리시는 것만이 올바른 교회이며 참된 교회라는 것을 종교개혁가들은 개혁을 통해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루터는 교황이 요구한 회의에서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과 협상하기 위해 슈말칼트 신조라는 것을 작성하였습니다. 그 신조에서 루터는 교회를 단순히 요한복음의 말씀에 따라 “거룩한 신자들과 그들의 목자의 목소리를 듣는 어린 양”으로 정의하였습니다. 루터는 말씀에 기초한 신자들의 모임을 교회로 정의한 후에 그것을 성직자의 권위 아래 거행되는 의식에 기초한 중세의 교회와 대조시키면서 지금도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였습니다. 루터는 교회의 거룩은 성경에서 벗어나 성경을 넘어서서 만들어낸 모든 행위들에 교회의 거룩이 있지 않고 오직 교회의 거룩은 하나님의 말씀과 참된 믿음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공교회라는 것은 복음이 순전히 설교되고 거룩한 성례가 복음에 따라 집행되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가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말씀과 성례, 더 정확하게는 복음 설교와 성례가 참된 교회를 나타내는 표지라는 겁니다.
종교개혁가들이 교회을 개혁하는 과정이 다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종교개혁가들은 말씀과 성례가 참된 교회의 표지라는 것에는 일치를 보였습니다. 그들이 말씀과 성례가 참된 교회의 표지라는 결과가 도출된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교회와 세상의 왕권을 두려고 하였고 그러한 생각에서 시작되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교회와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를 알기 위해 성경을 보니 교회를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례로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사도라는 직분을 후계자들이 잇는 것 자체가 교회가 해야할 일이 아니라 사도들이 행했던 직무인 사도적인 가르침과 성례를 행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할 일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루터는 이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게 되었고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그의 일생 전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서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설교하는 것에 무게를 둔 루터는 교회를 구체적으로 다스리는 것은 교회의 직분자들이 해야할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교회를 다스리는 것, 즉 치리권은 교회 직분자들이 아니라 세상 정부에게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마 그가 개혁을 하는 과정 속에서 세상 정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세상 정부를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고, 교회의 직분자인 교황이 교회를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는 이 모든 상황이 그가 치리권을 세상 정부에게 주었습니다. 루터는 “교회법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말씀이 선포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말씀 외에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다스리시는 방법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교회의 직분을 오직 말씀의 직분인 목사만을 남겨두었습니다. 여기에서 루터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루터는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교회를 통치하셔야 하고, 사람이 교회를 통치하면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이 교황으로부터 교회의 치리권을 빼앗고 교회의 직분인 장로를 통하여 교회를 치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정부에게 치리권을 주어 교회를 치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교회 회중에 대한 권징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는 않고 죄가 드러난 신자들에게 목사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천국 열쇠의 직무를 행사하며 회개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권징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루터는 교회의 왕인 교황으로부터 치리권을 빼앗아 세상의 왕인 정부에게 치리권을 넘겨주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루터의 한계가 있었지만, 그가 개혁한 모든 것을 결코 폄하해서는 안됩니다.
이 루터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 바로 우리 개혁주의 장로교의 밑바탕이 된 칼빈입니다. 칼빈도 루터와 같이 “교회에서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셔야 하고 권위와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셔야 하며, 또한 이러한 권위는 오직 그의 말씀으로만 시행되고 운용되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루터와 달리 칼빈은 사람의 사역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상태로 임재하여 거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사람들의 사역을 사용하셔서 일종의 대리자로서 그의 뜻을 입으로 우리에게 공개적으로 선포하게” 하시기에 자신의 통치를 위한 도구로서 인간을 주님께서는 사용하심을 성경을 통해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시에 칼빈은 “그렇다면 주님이 직접 교회를 통치하실 수도 있지 않느냐?”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답변으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하셔서 교회를 통치하시는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하였습니다. 칼빈은 먼저 성소에서 응답하시는 것과 똑같이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응답하심으로 그리스도 자신을 대변하는 자로 세우시고, 잍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교회를 돌보신다는 것을 선언하시기 위해 사람들 중 몇 사람을 취하셔서 사자로 섬기도록 하셨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비록 직분자가 나머지 교회 지체들보다 못한 연약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을 전할 때에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순전하게 받는다면, 바로 여기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겸손을 실천하고 훈련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직분자로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바로 성경에서도 대표적으로 베드로와 바울이 비록 사도이지만 연약한 죄인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이들의 가르침을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일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임으로 경건과 순종이 드러났듯이 말입니다. 바로 직분자 자체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가르침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향하게 만드는지에 초점이 있었고, 이들의 가르침이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가르침이라면 비록 연약하더라도 이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땅의 교회를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는 방법으로 사도적 직분과 목회의 직분을 사용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직분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다스리신다고 보았기 때문에 직분을 굉장히 중요시여겼고, 구체적으로 성경을 따라 직분을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칼빈은 직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로마 가톨릭과 목사만을 직분으로 보았던 루터의 한계를 균형있게 하여 교회의 바른 직분관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직분을 바르게 세워 그리스도께 왕권을 되돌려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를 통치하시게끔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개혁교회가 지금 그토록 강조하는 목사, 장로, 집사라는 교회의 삼중직이 여기에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목사만을 교회의 직분으로 남겨두었지만, 칼빈은 말씀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바른 말씀이 선포되도록 교회를 질서있게 만드시기 위하여 치리권을 세상 정부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자에게 치리권 또한 주셨다는 겁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과 같이 직분들의 권위에 있어서 차등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이 가장 위에 있고 그 밑에 추기경, 주교, 신부의 순서로 계급적인 직분이었지만, 칼빈은 교회의 모든 직분들은 주님께서 맡기신 역할만 다를 뿐 서로 동등한 권위를 지니며, 모두 모임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지금 장로교 정치 원리인 당회, 노회, 총회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러한 교회 치리 원리에서 파생하여 권징도 구체적으로 교회 내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는 벌을 주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 사랑이 없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칼빈이 교회에서 시행하는 권징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님을 말하였습니다. 그는 권징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중을 하나로 묶고 사람들을 믿음 안에 거하도록 유대감을 제공한다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교회가 권징을 시행하는 목적이 세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의 명예를 더럽히거나 거룩한 성찬을 분별없이 먹고 마셔서 성례를 모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둘째, 교회 안에 있는 선한 사람들이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셋째, 죄를 지은 완고한 죄인이 회개하도록 돕기 위해서 권징을 교회가 시행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이 교회에 있기 때문에 권징을 시행한다는 겁니다. 자녀를 가지신 부모님들이라면 잘 아실 겁니다. 아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그 아이를 혼내거나 심지어 매를 드는 행위가 그 아이를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동생들을 바르게 인도하시기 위해 교회의 직분자들을 통해 권징을 시행하십니다. 칼빈이 말한 권징을 시행하는 세 번째 목적을 다시 한번 말하자면, 완고한 죄인을 교회에서 내보내도록 권징을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도록 돕기 위해서 권징을 시행한다고 한 것처럼 권징은 모든 신자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시행하는 겁니다.
바로 칼빈이 부패한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고자 한 것도 인간이 왕권을 쥐고 주인이 된 교회를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리고자 함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고 대표성을 띄고 있는 루터와 칼빈 두 사람이 행한 교회 개혁을 살펴보았지만, 모든 종교개혁가들이 교회의 왕권을 그리스도께로 돌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후예들인 우리는 오늘 다시 한번 이러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새겨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종교개혁이 있었던 16-17세기로 회구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이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왕권을 어떻게 하면 실행하실 수 있는지와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나타내야 한다는 겁니다. 특별히 교회 내에서는 직분자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분자들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실현할 수 있는 직분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이 개혁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왕권을 실행하시는 교회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직분자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교회가 지금 장로 선출을 준비하고 있는 과정 중에 있는데, 이것을 위해 새순교회에 속한 모든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좋은 장로가 선출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새순교회를 다스리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교개혁가들의 후손들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의 후손이라는 것은 단순히 개신교회, 장로교회 안에 속했다는 의미 그 이상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의 후손들이라는 것은 그들이 개혁하려고 했던 교회를 21세기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교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시대에도 교회는 중세 로마 교회처럼 부패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우상이 될 수 있으며, 이 예배당 안에 각종 미신과 주술, 그리고 우상으로 가득찰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각종 재물들, 그리고 나의 자아와 인간에 대한 연민 등등 다른 모든 것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심지어 불신자들보다 더 못한 수준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게 될 것이며 겉으로는 괜찮게 보일지는 몰라도 안은 썩어 문들어져 부패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가 없는 우리의 생각과 얕은 소견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모은 종교개혁가들이 공통적으로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다스리시는 수단인 말씀과 성례를 중요시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통해 사역하시는 수단인 직분도 중요시하였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를 다스리셔야 합니다. 그렇기에 개혁자들이 주창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를 기억하며 항상 성경으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실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며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교회를 다스리시도록 만드는 것에 전념하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만이 이 교회를 통치하시는 왕권을 가지심으로 이 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가시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면서 이 놀라운 복을 누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같이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교개혁가들이 개혁하려고 했던 것은 교회 개혁, 바로 교회를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왕권으로 통치하시도록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이 있었지만 교회에는 여전히 부패할 수 있는 요소들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부패하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항상 주권과 왕권을 가지시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시간 같이 기도합시다. 우리가 종교개혁가들의 정신을 되새기며 우리 새순교회, 더 나아가 고신교회와 이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보내주신 직분자들이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직분자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더 나아가 앞으로 우리 교회에 있을 장로 선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치리를 실현하는 장로가 세워지도록 기도합시다. 이 시간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