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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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새벽설교>
고린도전서 9:1-18
“내 상이 무엇이냐?”
2024. 10. 25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내 상이 무엇이냐?”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있는 권리들을 다 내려놓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헌신하는 삶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단락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본적인 권리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은 기본적으로 평등권, 자유권, 참정권 사회권, 청구권이 있다고 명시하고 있어요.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지는 권리들이 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권리를 갖고 있어요. 바울은 사도였기 때문에, 사도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가 갖는 권리들이 나오는데요. 오늘 본문 4절부터 6절을 먼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4–6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이 말씀에 보면, 사도에게 있는 3가지의 권리를 지금 말하고 있어요. 하나는 먹고 마실 권립니다. 먹고 마실 권리. 이것은 뭐냐면,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받아서 생활할 수 있는 권립니다. 오늘날로 보면, 사역자들이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는 거죠.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생계적인 걱정을 교회가 처리해주는 거예요. 만약에 이게 안 되면, 사역자들은 투잡을 해야 돼요. 낮에는 사역을 하고, 밤에는 돈을 벌어야 됩니다. 그래야 생계가 되니까.
그래서 사역자들이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교회가 생계비를 주는 겁니다. 이것은 사실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신 거예요. 누가 복음 10 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파송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 있으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자, 누가 복음 10장 7절 말씀인데요. 누가복음 10: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아멘.
어느 집에 전도하러 가면,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도 일종의 노동이기 때문에, 그 대가를 받으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에게 사례비를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역자들이 사례비를 받는 것도 당연한 거예요. 사도들도 마찬가지, 사도들도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생계비를 지원해줘야 돼요.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죠. 생계비를 지원받는 권리, 먹고 마실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또 바울이 무슨 권리를 포기했습니까?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를 포기했죠. 다른 사도들이나, 주의 형제들이나 게바는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있었었요. 그러니까 당연히 바울도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있죠. 여기서 아내를 데리고 다닌다는 것은, 사역 현장에 동행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목사님이 사모님과 함께 심방을 간다든지, 목사님이 설교하면, 사모님이 피아노 반주를 한다든지. 이렇게 사역을 같이 할 수 있잖아요. 그런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바울은 그 권리도 포기했어요. 바울이 재혼을 하면 충분히 그 권리를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신으로 산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사도에게 무슨 권리가 있습니까? 일하지 아니할 권리죠. 사도들은 생계비를 받으면서 사역에 전념할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일도 안 해요. 그런데 바울은 일을 했다는 겁니다. 바울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천막 만드는 일을 했어요. 이 일로 돈을 벌어서 선교비를 충당한 겁니다.
이처럼, 바울은 사도로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들을 다 포기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거예요. 사례비도 안 받고, 아내도 없이, 일을 하면서 사역을 한다는게,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존경 받을 일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칭찬을 해줘도 모자랄 판에, 이것을 가지고 비난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 봐 볼까요? 고린도전서 9: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나를 비판하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사도의 권리를 포기한 것을 놓고 비판하는 자들이 있다는 거예요. 아니, 내가 사례비를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안 받겠다는데. 이걸 뭐라고 한단 말이에요.
여러분, 도대체 왜 이 사람들은 바울을 비판했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바울이 진정한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권리들을 행사하지 못한 것이라고 여긴 거예요. ‘사도라면 당연히 이런 권리들을 누려야 되는데, 포기를 한다? 이거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 포기한 거 아니야? 진짜 사도가 아니라서 그런 거 아니야?’
이렇게 바울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이런 의심이 생기는가 하면, 고린도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 때문입니다. 거짓 사도들이 들어와서 바울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트렸어요. ‘바울이 진짜 사도가 아니라더라.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다더라. 바울이 추천서도 못 받았다더라.’ 속닥속닥하면서 뒷담화를 하고, 신뢰를 잃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울은 분명하게 사도가 맞습니다. 누가 추천서 써줘서 사도가 된 게 아니에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바울을 지명하여 사도로 세우신 겁니다. 그 누가 뭐래도, 바울은 사도예요. 그렇지만, 바울은 자기가 가진 사도의 권리들을 과감하게 포기한 겁니다.
자기가 돈이 많아서 생계비를 포기한 것도 아니고, 고자라서 아내를 포기한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게 좋아서 일하는 것도 아니에요. 바울은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포기한 겁니다. 자, 그 이유가 오늘 본문 12절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9: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아멘.
바울이 권리를 쓰지 않고, 범사에 참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권리가 혹시라도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모든 권리를 미련없이 포기했다는 겁니다.
바울은 오직 복음 전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어요. 만약에 복음 전하는 일에 내 권리가 도움이 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아무 거리낌 없이 권리를 행사했겠죠. 하지만 방해가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과연 어떤 방해가 있었길래, 바울은 모든 권리를 포기한 것일까요? 우선적으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죠. 주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헬라 철학에 깊이 물들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헬라 세계에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자기 철학사상을 설파하고 돈을 받는, 방랑 교사들이 많이 있었어요. 길거리 공연을 하고 돈을 받는 사람들처럼, 길거리에서 철학을 말하고 돈을 받는 겁니다.
바울은 복음이 그런 길거리 철학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이 싫었던 거예요. 내가 복음을 전하고 돈을 받으면, 저 길거리 철학자들하고 뭐가 다르냐? 사람들이 복음을 구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냥 돈 주고 한번 들어볼 만한, 흔해빠진 하나의 철학으로 여기는 것을 경계한 겁니다.
또한 바울은 교회에 재정적인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고린도교회에 바울 말고도 여러 사도들이 방문을 하는데, 그 때마다 생계비를 줘야 된단 말이죠. 안 그래도 교회가 힘든데, 나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올바른 본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여겼어요.
사도라고 해서 당연히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교회를 위해서 권리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라는 본을 보이고자 한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바울도 그 본을 받아서, 예수님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본을 다른 사도들과 믿음의 형제들이 물려받기를 원한 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권리들이 있지만, 그 권리를 누리지 않고 포기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결혼할 권리가 있고, 재혼할 권리도 있고, 심지어 이혼할 권리도 있어요. 또 우상의 제물을 먹을 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리들을 우리가 분별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요.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들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에 덕일 끼칠 수 있는 일인가, 고민해야 돼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분명히 받을 상급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권리도 좋지만, 그러나 하늘의 상급에 소망을 두시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은 이 땅에 누리는 권리에 집착하지 않았어요. 자기 사명을 다 완수한 후에, 주님이 주실 상급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1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고린도전서 9:18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아멘.
바울이 받을 상이 있어요. 그것은 곧, 내 권리를 포기하고, 값없이 복음을 전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 그 자체가 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길에 끝에 예비된 의의 면류관이 있기 때문이죠. 사명자는 맡은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택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먼 훗날 나를 칭찬하시고 영원한 상급을 주실 것을 기대하며 충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이 가진 권리를 잘 분별하여서, 복음전파에 불필요한 권리는 절제하고, 나에게 주실 하늘의 상급을 기대하며, 이 땅에서 주의 일에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