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30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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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8:20–24 (NKRV)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우리들은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자리에 나온 것도 선택을 한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인간은 하루에 크고 작은 선택을 100가지 이상 한다고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의 모든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5분 더 잘 것인가? 아닌가?
점심을 먹을 때도 무엇을 먹을 것인가 매일같이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살아갈 때 우리는 선택을 잘 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잘못된 선택에 대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선택입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달라 질 것입니다.
백화점이나 아울렛에 가면 푸드 코트가 있습니다. 푸드코트에는 여러 종류의 음식을 주문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문하는 곳 옆에는 어떤 음식인지 진짜처럼 만들어논 가짜 음식들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너무 맛있어보이게 진짜보다 더 맛있게 보이게 만들어 놓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짜입니다. 아무리 맛있어 보이게 잘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 중에서도 진짜 신앙인이 있는 반면에 모조품 신앙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와 모조품은 어떻게 구분 할 수 있는가?
어떤 말을 하는가로는 모조품 신앙인인지 참 신앙인인지 구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매순간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지, 결정적인 순간에 무엇을 선택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모조품 신앙인인지 참신앙인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는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지, 자신의 욕심을 선택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말을 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믿음의 고백을 한다해도 그것만으로는 확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한대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삶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하나님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내게 손해가 되고, 내가 실패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승리의 길입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 한 분 앞에 서야 할 때가 찾아 옵니다. 건강, 재물, 친구들 같이 도피처가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 모조품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때를 생각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겠지만, 진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그때 가장 큰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과 환경일지라도 하나님만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유명한 이야기 입니다.
바로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대결입니다.
재물을 놓고 서로의 신에게 기도를해 재단에 불이 떨어져 재물을 태우면 그 신이 진짜 신임을 입증하는 대결입니다.
그런데 대결을 하기에 앞서 엘리야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당시 이스라엘 사람의 신앙을 잘 보여주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향한 엘리야의 말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야가 인천공항교회 성도들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에 한마디도 못하였지만, 오늘 수요예배를 드리는 성도님들은 네~! 제가 하나님을 선택하여 따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실 것 같습니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의 승리 입니까? 엘리야의 승리 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승리 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처음부터 대결자체가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진짜와 모조품은 원래 대결자체가 안된느 것입니다. 아니 비교 자체가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길고 짧은건 대봐야 안다” 하지만 그건 어느정도일때나 그렇지 누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대결을 합니까? 그건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엘리야의 차례에서 엘리야는 심지어 재물에 물까지 부었습니다. 그만큼 엘리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재단에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이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고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때때로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실패하는 것 같아 보일 수 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것이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엘리야의 상황도 마찬가지 입니다.
엘리야는 한명이었고 바울선지자는 450명 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지금 당장의 현실을 보면 엘리야가 밀리는 상황입니다. 아니 지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1:450명의 대결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1:450명의 대결을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던 450명이 이기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1명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때부터는 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을 선택하는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큰 복입니다.
저희 첫째가 어렸을 때,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어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원래 다들 첫째는 이런 저런 고생을 합니다. 그래서 성인이 된 자녀에게 부모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였어…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어…’
출산한지 4-5개월 되던날 밤에 첫째 울음소리에 깼습니다. 잠을 깨어 열을 재어 보니 39도 40도 이렇습니다.
첫 아이라 뭘해도 처음인 부모인지라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습니다. 칭얼대는 아이를 안고 저희가 한일은 핸드폰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4개월 열 40도, 아이가 열이 날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등등을 검색했습니다.
그런데 다행인것은 대한민국에서 저희 아이만 어린 나이에 열이 나는 것이 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사람의 의견을 듣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우리에게 이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힘들어하는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성경속에 믿음의 선배들이 겪었던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어떤 상황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선택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때의 결과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룻기가 그렇습니다.
룻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엘리멜렉이라는 유다 베들레헴 사람이 아내인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살게 됩니다.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았습니다.
남은 두 아들은 모압에 살았기 때문에 모압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중에 하나는 오르바이고 다른 한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룻 입니다.
그들이 거기서 10년쯤 살다가 그만 아들 2명이 죽게 됩니다.
그러는 중에 모압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봐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자신을 따라오지 말고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 합니다.
이는 친정으로 가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집에 가서 새로운 결혼을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다시말해 새롭게 결혼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두 며느리 다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른다고 했다가 재차 나오미가 단호하게 각자의 길로 가라고 말하고 나서는 오르바는 자신의 어머니집으로 갔고
룻은 끝까지 남아 시어머니를 따라 유다땅으로 들어갑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선택하였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는 해피엔딩입니다. 유다땅에서 보아스라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여 잘 살았다는 것입니다.
룻기서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것은 룻기 1장 1절입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로 시작이 됩니다.
사사시대는 왕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선택해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렇게 타락하고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을 선택한 소수의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선택한 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는 것임을 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악한 시대와 타락한 시대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말세라고하고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사시대보다 더 타락한 시대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룻기의 말씀처럼 나의 상황과 환경은 문제 되지 않습니다. 나의 욕심을 선택하며 살아갈때는 나의 상황과 환경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상황과 환경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하나님이 그 삶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룻만 그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니엘도 힘든 상황과 환경 일지라도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당시 왕인 다리오 왕 이외의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진다는 법령이 세워졌을 때도 다니엘은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당시 다니엘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 였습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자신의 목숨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여 담대하게 하루세번 창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런 다니엘의 모습은 믿지 않는 사람이 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그렇지만 신앙인으로써 위대한 선택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선택한 백성을 절대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결과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사자의 입을 막아 자신의 목숨을 위한 선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목숨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오히려 다니엘에게는 어려운 환경과 상황이 간증거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의 상황과 환경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해 보이지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상황과 환경속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그 삶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고 자기자신을 다시말해 자신의 유익만을 선택한다면 그 삶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할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선택하여서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적으로 보면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당시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괴롭히고 성전을 짓밟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원수같은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나는 자신의 욕심으로는 니느웨가 계속 악하여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 좋겠다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요나 자신의 뜻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선택하여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갑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습니까?
요나는 물에 빠져 물기기 뱃속에서 3일을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나옵니다.
이들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헌금하기로 하였는데 이들은 땅을 판 돈 얼마를 감추고 자신들이 그것들을 취하였습니다. 이들의 선택은 하나님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들의 결과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들의 삶속에서 늘 하나님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선택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 이 질문 하나면 됩니다. “과연 하나님이라면 이 순간 어떻게 하셨을까?” 우리는 이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때때로 사람들의 조언이나 말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선택에 최종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내가 선택한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과 비추어볼 때 일치한다면 그 선택은 바른 선택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 선택의 기준이 되면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과 복을 택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 부분적인 순종을 하려고 합니다. 순종하기 쉬운 것은 하고, 어려운 것은 안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부분적인 순종은 불순종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선택 할 수 있는 두번째 방법은 버리는 것입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내가 고르는 것일 수 도 있지만, 반대로 다른 하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객관식 시험을 볼 때 잘 모르는 문제가 있을 때 문제를 잘 푸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보기를 지워가는 것입니다. 오답일 가능성이 가장 확실한것부터 하나씩 지워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선택은 고르는 것일 뿐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을 버리면 됩니다. 다시말해 나의 것을 버리면 됩니다.
내생각, 내유익, 내경험, 내욕심 이처럼 나의 것을 버리면 하나님의 것만이 남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것, 옳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좋지 않고 옳지 않은 것을 과감하게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버리는 것에 인색합니다. 버리면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버리면 하나님께서 더 풍성한 것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 주십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사도바울은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버렸습니다. 심지어 배설물로 표현하였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린 이유는 단 하나 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하기 위해서입니다.
한국인 선교를 위하여 만주에서 일하다가 신사참배 반대로 1941년 10월 일본 경찰에 연행된 미국 장로교 소속의 헌트 선교사가 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입니다. 겨울이 되면서 날씨가 추워져 생활하기가 곤란하여 이불을 넣어 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외투 한벌만으로 딱딱하고 찬 감방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한다는 소문이 감옥 안에까지 퍼져 술렁거리던 어느 날 헌트 선교사는 소장실에 불려갔습니다.
소장실 입구에는 전에 감옥 측에 부탁한 이불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몸집이 큰 일본인이 책상에 앉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당신 미국에 돌아가기를 원합니까? 물론 우리가 당신을 보낼 것이라는 약속은 못하지만 그러나 만약 갈 수 있다면 미국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이전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감옥에서 많은 모욕과 고난을 받은 뒤 이 나라를 떠난다는 조건으로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문 앞에 있던 이불을 바라보았습니다. “미국이냐? 아니면 저 이불을 가지고 한없는 감방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냐?”
헌트 선교사는 선택하였습니다.
“나 자신의 안전만 생각한다면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로서 나는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보내신 것을 확신하며 따라서 내가 있어야 할 그곳에 있기를 원합니다.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 삶의 최상의 선택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떤 상황과 환경일지라도 하나님만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을 선택하셔서 그 삶속에 하나님의 것으로 풍성하길 바랍니다.
-기도
참 좋으신 주님 매순간 주님을 선택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쳐 올지라도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주님의 길을 선택하며 세상이 아닌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저희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보시기에 참 좋은 기쁜 저희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