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가라 하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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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3:1 그때에 그들이 다윗에게 고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와 싸우고 타작마당들을 강탈하나이다, 하니
삼상23:2 그러므로 다윗이 {주}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하매 {주}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삼상23: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유다에서도 두려운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친다면 얼마나 더 많이 두려우리이까? 하니라.
삼상23:4 그때에 다윗이 {주}께 여전히 다시 여쭈니 {주}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시므로
삼상23:5 이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고 그들을 쳐서 크게 살육하니라. 이와 같이 다윗이 그일라 거주민들을 구원하니라.
여러분, 최근에 도전을 해본 일이 있나요? ( 몇 사람 정도 이야기 듣기 )
저도 최근에는 도전을 한 일이 손에 꼽을 정도로 없다고 느낍니다. 그나마 이제 도전이라고 할만한 것들은 필요가 있어 하게되었지만 성경통독반 교수목자와 개인구령 도전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하게도 두 도전에 대하여 하나님은 계속해서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부족함에도 써주신다는 걸 항상 느낍니다.
하지만 최근에 세상은 도전을 많이 꺼려하는듯 보입니다. 예전에는 도전, 골든벨이나 달리기하는 프로그램? 개콘에 달인과 같이 무모한 도전을 하고 이에 대하여 성공도 실패도 모두 그려주는 프로그램이 많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마 이제 최근에 흑백요리사 라는 프로그램도 어느면에서는 도전과 가깝다는 생각은 들긴 하지만 사회적 분위기는 도전보다는 현생활에 안주하는 것이 더 크다고 느낍니다. 뉴스에서도 젊은 직장인들이 더이상 승진하는 것을 포기하는 ‘의도적 언보싱’ 현상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높은 직급을 맡아 무언가를 책임지고 도전하는 것에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갑자기 이러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오늘 본문에서 읽은 것과 같이 다윗이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도전을 한 것에 대하여 나누고자 함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최근에 하나님 앞에 도전한 것이 언제인지, 그리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목은 [ 주께서 가라 하신다면 ] 입니다.
세상엔 구원이 필요하다
세상엔 구원이 필요하다
먼저, [ 세상엔 구원이 필요하다 ] 입니다.
본문 말씀 1,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삼상23:1 그때에 그들이 다윗에게 고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와 싸우고 타작마당들을 강탈하나이다, 하니
삼상23:2 그러므로 다윗이 {주}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하매 {주}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오늘 본문에서 그일라 사람들의 타작마당을 블레셋 사람들이 싸워 강탈하였다고 합니다. 그일라는 사해와 블레셋 지역 사이에 있는 곳입니다. 당시 사울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때에는 이 장소가 이스라엘 영토의 경계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는 말씀에 나온 것과 같이 타작마당이 있습니다. 타작마당이 있다는 것은 그곳에 작물이 난다는 것이고 수확할 것이 있다는 것은 그 마을에 부가 쌓여 있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 곡식과 재물들을 탐냈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재물이 있는 곳에는 탐내는 자가 생기듯 말입니다.
블레셋은 자신들에게 가까이 있고 타작마당이 있는 그일라를 강탈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에게는 여전히 변변한 무기가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다윗은 도망치면서 놉에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무기를 달라고 하나 그는 다윗이 무찌른 골리앗의 칼을 가리키며 가져가라 합니다. ( 삼상 21:4 )
그런 그일라의 상황을 들은 다윗은 주 하나님께 가서 여쭙습니다. 제가 가서 블레셋을 쳐야 할까요? 어쩌면 다윗이 그일라의 상황을 듣지 않았다면 그는 굳이 그 길로 블레셋와 싸우러 내려가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듣지 않았고 보지도 못한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고, 하물며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면서 넘어가도 되었을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들었고 그렇게 하나님에게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답은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라는 것입니다.
이 다윗의 상황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듣지 않았고, 보지 못하였고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면 절대 내 목을 들이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알아버렸고, 나에게 전해진 일이라면 그것은 분명 나에게도 책임이 나누어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문제를 듣고 그 길로 나아가 하나님에게 물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매일 매순간 복음이 필요한 곳에 서있습니다. 바로 이 세상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실 때 너무나 보시기에 좋다라고 하셨습니다.
창1:31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 그 저녁과 아침이 여섯째 날이더라.
이 세상은 창조된 것 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분의 영광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가 첫째 아담으로부터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고 죽음이 이 땅에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롬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블레셋이 그일라를 침범하여 약탈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죄가 침범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을 모두 자신과 함께 끌고 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라.
사탄은 자신과 함께 죄로 인하여 믿지 않는 자들을 함께 대려가고자 합니다. 벗어난 이야기이지만 때때로 지옥에 대하여 마치 사탄이 그곳에 권세를 잡았기에 사탄을 숭배하고 따라서 자기는 지옥에서 이득을 보겠다고 하는데 지옥은 사탄이 권세 잡은 곳이 아니라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로 징벌을 받는 곳입니다. 그냥 사이좋게 사탄과 함께 불에 영원히 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죄가 가져오는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또는 알아가기도 할테고.. 우리는 세상에 영혼들이 죄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알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파수꾼이 정찰에 실패하면 그 책임이 그에게 있듯 세상에 죄에 대하여 알릴 책임이 있습니다.
롬10:14 그런즉 그들이 자기들이 믿지 아니한 분을 어찌 부르리요? 자기들이 듣지 못한 분을 어찌 믿으리요? 선포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10:15 보내어지지 아니하였으면 그들이 어찌 선포하리요? 이것은 기록된바, 화평의 복음을 선포하며 좋은 일들의 반가운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함과 같으니라.
선포자가 없이 누가 죄를 용서받는 방법을 알 수 있을까요? 세상에는 복음이 필요하고 그것을 우리는 전하여야 합니다.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 구원을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임을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지나가는 한 사람에게, 내 주변에 구원받지 않은 친구에게, 나의 집에 들어가면 계시는 부모님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선한 행위, 아무리 올바른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은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온전히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주로 시인하는 것임을 전하고 구령해야 합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
롬3:22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救贖)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롬3:25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심을 통해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
롬3:27 그런즉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3:28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을 내리노니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느니라.
세상에 대하여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한 구원의 길임을 알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한다
둘째로, [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한다 ] 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에 필요성은 사실 우리 모두가 모르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저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삼상23: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유다에서도 두려운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친다면 얼마나 더 많이 두려우리이까? 하니라.
다윗이 이제 하나님에게 그일라로 가서 그들을 구원하라 하셨을 때, 어찌 알았는지 다윗의 사람들은 다윗에게 우리가 유다에 있어도 이렇게 두려운데 그일라로, 그 블레셋과 맞닿은 경계로 가서 싸우면 얼마나 더 두렵겠나요! 하면서 반대를 표현합니다.
사실 당연한 반응이기는 합니다. 그들이 반반한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울이라는 왕이 집권하는 이스라엘에서 다윗을 따라 나온 무리에 불과하며 블레셋과 싸우다가 사울에게 발각되어 그들에게 잡히면 전쟁에서 이겨도 죽게 될 판이였습니다. 상황은 당연히 두려운게 맞습니다. 안두렵다면 전두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두려워한다면 당연합니다.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다가가 너 죄인이고 죽으면 영원히 불타는 호수에서 고통받는거야. 이 말을 한다는게 쉽나요? 게다가 그 길로 관계가 망가진다면 회복할 수나 있을까요? 차라리 모르는 사람 붙잡고 복음 전한다면 그 정도야 가능하지 않을까? 이에 대하여 저번에 나눈 적이 있지만 CFM 공연으로 인하여 회장으로서 에타와 학교 홈페이지에서 받는 비난을 견뎌낸다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상황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듣는 사람은 기분이 나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세상과 반대된, 너는 죄인이야 라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여러 취향을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우리는 죄라고 단정하고 그것을 피해야 한다고 합니다. 종교는 내 안에 평안과 주변에 안녕을 위한 것이고 내면의 명상 정도가 적당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구원은 한 길, 예수 그리스도 뿐이며 다른 길은 사망이라 전하고 돌이켜 오라고 말합니다. 상황적으로 긍정적일 수 없습니다. 두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가지 강한 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고, 예수님이시며 하나님이시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가능하시다.
하나님은 가능하시다.
마지막으로 [ 하나님은 가능하시다 ] 입니다.
삼상23:4 그때에 다윗이 {주}께 여전히 다시 여쭈니 {주}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시므로
삼상23:5 이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고 그들을 쳐서 크게 살육하니라. 이와 같이 다윗이 그일라 거주민들을 구원하니라.
주변에 반대에 다시 다윗은 하나님에게 여쭙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일라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입니다.
‘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겨주리라 ’
하나님이 블레셋 사람들을 다윗의 손에 넘겨준다고 하십니다. 싸우는 자는 다윗과 그의 무리들인데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을 넘겨주신다고 합니다.
제가 길거리 복음 전할 때,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청년은 다신론이였습니다. 신들이 많은데 다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창세기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당연하게 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혹시 그 창세기를 사랑의 관점으로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런 적은 없다고 하였고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창세기 교제로 배워온 내용을 정리하며 전했습니다. 보시기에 너무 좋은 이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고,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나누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얼굴도 모르는 사형수 대신 죄가 없는 내가 죽어주겠다고 말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변화시켜주셨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그 희생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심을 보았습니다.
저번에 나눔에 이야기 했던 한 초등학생은 자신이 천국에 갈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다름이 아닌 자기는 착한 일을 많이 한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단 한개의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한개가 있다고 말했고 저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막7:20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7:21 속에서 곧 사람들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 간음, 음행, 살인,
막7:22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 악한 눈, 신성모독, 교만, 어리석음이 나오는데
막7:23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하시니라.
그리고 말씀을 더 보여주고 읽도록 했습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친구는 천국에 갈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답했습니다. 저는 천국에 못갈거 같아요 지옥에 갈 것 같아요. 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씀이 일하심을 보았습니다.
분명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저희는 상황 앞에서 무력합니다. 두렵기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능하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블레셋을 넘겨주신다고 하십니다. 세상에 복음을 들고 전할 때, 동일하게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명령 가운데 그 격려의 메세지가 함께 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28:19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마28:20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은 우리가 전하고 가르치고 침례를 베푸는 사역이 이루어지는 이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 곧 우리와 “함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라고 명하실 때, 순종하고 전하며 핍박받고 넘어지고 있을 어느 때라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이 일하는 그 순간에 성령님께서 중보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는데 지치지 않길 바랍니다. CFM은 모이기만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길 원합니다. 공연 시즌이고 캠퍼스 CFM으로 가게 되면 다른 곳에 믿지 않는 영혼들을 만나게 되고 이야기도 나누게 됩니다. 게다가 우리는 학교로 나가면 믿지 않는 친구들과 섞여 지냅니다. 저도 어제 친구들이 할로윈이라고 같이 만나서 놀자고 합니다. 아마 가면 가면라이더 분장이라도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톡방에 말했습니다. 말씀 나눌거라고 나는 말씀을 전하고 너희에게 밥도 사줄테니 교회나 와보라고. 작기도 하고 카톡 몇줄일 뿐이였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그 친구들의 마음에 틈탈 수 있길 기도하며 말해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복음 선포자로서 주신 사명이 있음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되는대로 선포하고 초대하고 함께 기도하고 .. 주님이 부담을 주실 때,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써주세요! 하며 나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잘 준비되어지길 바랍니다.
사6:8 또한 내가 [주]의 음성을 들었는데 이르시기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하시더라.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라.
주께서 부르실 때, 주께서 가라 하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가.. 나를 보내소서! 하고 담대히 나아가는 CFM이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빌 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