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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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고린도전서 9:19-27
“사람을 얻기 위하여”
찬송가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2024. 11. 1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사람을 얻기 위하여”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자기가 가진 사도의 권리를 포기했다고 말을 했습니다. 특히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받는 권리를 포기했어요.
바울은 정말로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 전하는 데 도움이 될까? 늘 고민하고 연구했어요. 그 연구의 결과가 생계비를 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헬라 세계는 뭔가를 가르치면,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한 세계거든요. 그래서 철학가들이 길거리에서 철학을 말하고 돈을 받아요. 바울은 복음이 그와 같이 돈을 내고 듣는,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절 돈을 받지 않은 겁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교회에 진짜 사도도 아닌 거짓 사도들이 수시로 찾아와서 생계비를 받아가고 있어요. 교인들이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와가지고 복음도 아닌 이상한 것을 가르치고, 강사비 명목으로 받아간단 말이죠.
그래서 바울이 이러한 나쁜 전통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생계비를 받지 않는 본을 보이는 겁니다. 왜 복음을 전하면서 돈을 받냐? 예수님은 아무런 대가 없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셨는데, 너희는 뭔데 돈을 받냐?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바울은 일절 돈을 받지 않고, 직접 일을 해서 선교비를 충당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데, 복음이 하나의 철학으로 취급되지 않도록, 그리고 교회에 재정적인 부담을 주지 않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자, 그러면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사도로서의 권리만이 아니라, 또다른 권리를 포기했다고 말을 하는데요. 그것은 자유인으로서의 권립니다. 자유인으로서의 권리.
자, 오늘 본문 19절을 우리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아멘.
바울은 자유인이에요. 그런데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절을 보면, 바울이 분명히 내가 자유인이라고 말했거든요.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내가 자유인이 맞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19절에서, 내가 자유인이지만 스스로가 종이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종이 된 겁니까? 19절 끝에,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할렐루야.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더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려고, 스스로 종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신이 가진 자유인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자유인으로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다 포기하고, 스스로 종이 되었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라면 바울처럼 복음 때문에 자기 권리를 포기하실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겠다고, 스스로 노예가 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진짜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니죠. 그만큼 내가 낮은 자세로, 핍박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겸손하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바울은 다른 철학가들처럼 거들먹거리지 않고, 권위가 있는 척하지도 않았어요. 여러분, 만약에 바울이 마음만 먹었으면, 교주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치유의 은사, 축귀의 은사, 예언의 은사. 바울이 얼마나 많은 은사를 갖고 있었습니까? 교주가 되겠다고 마음만 먹었으면, 나라를 하나 세웠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바울은 스스로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겸손하게, 섬김의 자세로서 복음을 들고 사람들에게 다가갔어요.
그런데, 밑에 20절부터 말씀에 보면, 그가 그냥 단순한 종이 된 것이 아닙니다. 맞춤형 종이 된 거예요. 각 사람에게 각각 눈높이를 맞춰서, 그 사람에게 꼭 맞는 종으로서 다가갔어요. 이것이 그의 전도전략이었습니다.
자, 오늘 본문 20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아멘.
바울은 먼저 내가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서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 라고 말을 합니다.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 여러분, 바울은 본래 유대인이에요. 그런데 유대인이면서 유대인 같이 되었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이상한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은 유대인으로서의 종교적 정체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전히 율법에 매인 채로 철저히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유대인의 정체성. 바울은 유대인이면서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멍에를 벗고 자유롭게 되었거든요. 하지만 내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스스로 다시 율법의 멍에를 메고, 그들에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유대인들에게 다다갈 수는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율법에 매인 유대인의 모습으로 저들에게 다가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20절 끝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 라는 말로 다시 한번 강조해요. 내가 이미 “은혜 아래”에 있지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꺼이 다시 “율법 아래”에 있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정도로까지 각오를 하고 있어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결단이죠. 자, 그런데요. 이것이 끝이 아니에요. 밑에 21절에는 또 뭐라고 말을 합니까? 내가 “율법 없는 자 같이 되었다” 라고 말을 하죠. 오늘 본문 21절, 같이 읽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아멘.
율법 없는 자에게는 바울이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겠다고 말하고 있어요. 율법 없는 자, 이는 곧 이방인들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자의 모습으로 다가가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는 똑같이 이방인의 모습으로 다가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서, 그 사람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모습으로, 다가가겠다는 거예요.
22절에도 같은 맥락입니다. 22절에서는 또 어떤 모습이 되겠다고 합니까? 약한 자와 같이 되겠다고 말을 하죠.
여러분, 이처럼 바울이 여러 모습으로 자기를 변화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제목처럼, 사람을 얻기 위하여 이렇게 하는 거예요.
자, 오늘 본문 22절에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데요. 22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아멘.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몇 사람이라도”
그래서 바울이 유대인도 되었다가, 이방인도 되었다가, 약한 자도 되었다가, 하는 겁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타협이에요. 우리가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절대로 타협할 수 없지만, 진리가 아닌 문제는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는 겁니다.
바울이 그렇게 타협을 한 거예요. 율법을 자기 목숨처럼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똑같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가고, 반대로 율법을 안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가가는 겁니다. 사람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맞춰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꼭 전도하고 싶은 태신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술을 좋아해요. 그러면 그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 내가 술을 따라 줄 수도 있는 거죠. 복음을 전하면서 그 사람에게 맞춰주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술을 마시면 안 돼요. 우리가 눈높이를 맞춰주는 거지, 나까지 거기에 동참하라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살인자를 전도하겠다고, 똑같이 살인을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신앙양심상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안 해야 돼요.
바울이 우상숭배자들 전도하겠다고, 똑같이 우상숭배를 한 게 아닌 것처럼, 우리는 본질을 지키면서 전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죠. 2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아멘.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오직 복음에 참여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내가 복음을 전한다면서 죄를 짓는다면, 힘들게 일만 하고, 정작 아무런 상을 못 받는 일이 벌어질 수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27절 말씀에 가서 보면, 바울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7절도 같이 읽어 볼까요? 고린도전서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아멘.
내가 실컷 남에게 복음을 전파해놓고, 정작 내가 버림을 당할까, 그것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매사에 복음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주의하고 조심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울이 구원에서 버림을 당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번 받은 구원은 빼앗길 수 없는 거예요. 바울은 구원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상급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겁니다.
여러분, 구원과 상급은 다른 거예요. 구원은 영원한 생명이죠. 반면에 상급은 구원 이후에, 하늘에서 받는 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구원은 동일하지만, 상급은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위대한 조직신학자인 루이스 벌코프는 상급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천국의 기쁨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성경을 통해 볼 때 분명하다.” 천국의 기쁨에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또 헤르만 바빙크라고 하는 신학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만, 찬란함과 영광에서 차이가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히 상급에 차이가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은 똑같이 받아도, 천국에서 받는 상급은 각각 달라요.
고린도전서 3장 8절에도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을 했어요. 고린도전서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아멘.
상을 다 똑같이 받는 게 아니죠.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받는 겁니다. 많이 일하면 많이 받고, 적게 일하면 적게 받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 목사님들이, 천국에서 어떤 사람은 좋은 집에 살고, 또 어떤 사람은 반지하에 산다, 라고 하는 말이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 천국에서 반지하 살겠습니까마는.
어쨌거나 여러분, 상급이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기왕이면 큰 상급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이 상급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끝까지 경주한 겁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같이 읽은 27절 본문에서 “버림을 당한다”는 말의 헬라어 본 뜻이 “실격을 당하다”라는 말이에요. 달리기 경주를 하다가 결승선 앞에까지 다 와서 실격을 당해버리면, 상을 못 받는 거예요.
바울은 실격당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달려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죠. 혹시라도, 내가 여러 모양으로 맞춰서 복음을 전하다가, 내가 잘못된 길로 빠질까봐.
바울도 사람인 이상, 유혹에 넘어갈 수가 있단 말이에요. 술 마시는 사람 전도하다가, 내가 술을 마실 수가 있고. 음행을 하는 사람 전도하다가, 내가 음행을 할 수가 있어요. 내가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날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달려가다가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에도 동일하게 채찍질을 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까지 왔으면 됐지, 좀 쉴까?” 이게 아니라, 한번 달렸으면 끝까지 달리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끝가지 경주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그리고 우리에게 주실 상급을 기대하며, 복음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가운데 우리가 복음이 아니라 죄에 참여하는 일이 되지 않도록, 더욱 스스로를 절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선한 싸움을 끝마치는 그 날에, 하늘에 쌓인 많은 상급을 받아 큰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