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할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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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용용체는
각종 SNS를 통해
연인 뿐만 아니라
친구든 가족이든
선생님이든 누구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크든 작든 갈등이 생겼을때
사용하면 좋은 방법이라고
소개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제 아내와 해봤습니다.
원래는 싸울 것 같다면
존댓말을 쓰자가
둘 사이의 원칙이었어요.
그런데 용용체로 바꾸면
뭔가 더 재밌을 것 같아서
금방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바꿔봤습니다.
처음엔
나름대로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금 용용체 쓸 기분 아니야
지금 이 상황에서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
사소한 것들은 가능하지만
감정의 골이 약간이라도 깊어지면
아무 소용 없어지는 것이 용용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용체라는 것이
유행을 했었다는 것은
저는 조금 다르게 해석했어요.
그 방법이 쓸모 있냐 없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쩔 수 없이 생길 수밖에 없는
감정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의미한다고 해석했어요.
살아가다보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던지
상대방의 감정보다는
내 감정이 더 중요하다던지
아니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상황과 환경이 갈등을 만들었다던지
다양한 이유로 갈등이 생깁니다.
그 갈등을 풀어내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은 연구와
방법을 개발해냈어요.
그런데, 해결되지 않았죠.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과 사람이 화해를 하는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청소년들을 상담하다보면
자주하게 되는 말 중 하나가
‘마음의 문제는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지으신 이가
사람의 생각도 마음도
모든 것을 알고 계시죠.
그리고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죠.
누군가와 형식적으로,
겉으로만 화해하지 않고
진정으로 화해하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오늘 말씀을 통해 알아봅시다.
무엇을 자랑하는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고린도의 교회에서는 교회 안에서
다툼과 갈등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이 처음에 보낸 편지인
고린도 전서, 교린도 교회 사람들이
이 편지를 받고서도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갈등과 분열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민했죠
갈등과 분열이 왜 자꾸 반복될까?
그러다가 이런 결론을 내렸어요.
그러면서 12절 말씀을 통해 이렇게 말해요
2 Corinthians 5:12 NKSV
그렇다고 해서 또 다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여러분에게 치켜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대답할 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겉으로 누군가에게 거창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자랑을 했다는거죠.
그러다보니 고린도교회 안에서
사람들끼리의 갈등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너네 겉으로만 멋져보이려고 자랑하지 말아라
혹은 진짜 능력도 많고 재능도 많다고 해도
그것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히려 너희들이 자랑해야할 것은
따로 있다면서
다른 것을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14절과 17절 말씀 읽어볼까요?
2 Corinthians 5:14 NKSV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
2 Corinthians 5:17 NKSV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랑해야할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뭘 잘했고,
얼마나 성공했으며,
얼마나 뭘 가지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에
휘어잡힌 존재들이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무너진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자랑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윤리적인 잘못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을 말합니다.
항상 내 생각이 제일 소중하고
내 감정이 제일 우선이고
그러다보니 하나님보다 내 인생을
더 높은 순위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입니다.
자기 중심성.
그 죄의 문제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셨다는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면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단순하게 바보 호구처럼
무조건적으로 남을 위해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의미에요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자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로써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전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
새롭게 태어난 존재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말
들어보셨죠?
사람은 고쳐쓰는 거 아니라는 말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러나 그 말은 틀렸습니다.
예수님을 자랑해보세요.
사람은 무조건 변화되게 되어있습니다.
진정으로 진득하게 하나님을 믿고자
발버둥친 친구들,
예수님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된 친구들,
이미 모두 경험했을거에요.
나 많이 변했구나
예수님의 사랑을 자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2. 새롭게 함으로써 무엇이 좋은가?
그렇다면 새롭게 태어난 존재,
새로운 피조물은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걸까요?
15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2 Corinthians 5:15 NKSV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자,
인간의 삶에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툼도, 갈등도, 시기와 질투도,
사람의 삶을 어지럽게 만드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갈 때,
오히려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삶이
온전하게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랬을때,
우리 삶의 온전한 화해가
시작됩니다.
온전하다는 말을 먼저 정의해야겠어요.
온전하다는 건 완전한거랑 다른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어요.
완전한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흠도 잘못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완전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은
우리에게 흠도 약점도 연약함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내가 나에게 무언가를 더 바랄 수 없는거에요.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도 무언가를 더
바라지 않는거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부족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기가 의롭다고 혹은 나는 잘못 없다고
큰소리 뻥뻥치는 존재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나의 의로움도, 상대방의 의로움도
바라지 않는거에요.
Romans 5:8 NKSV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날 위해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품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게 됩니다.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온전한 삶을 살아가다보면
우리 삶에는 열매가 맺힙니다.
어떤 열매가 맺힐까요?
2 Corinthians 5:18 NKSV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화해는 선택이 아니라
직분이라고 말합니다.
직분은 내가 맡아서 마땅히 해야할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화해는 선택이 아니라 책임을 가지고
마땅하게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화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내가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하는 거에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주셨는데,
우리가 그 손길을 붙잡지 않으니까
자꾸 이 사람하고 삐걱대고 저 사람하고 삐걱대고
계속해서 갈등만 생기는거죠.
친구들과 문제가 생겼나요?
교회 안에서 사람들과 문제가 생겼나요?
내가 누군가를 싫어하고 미워하나요?
자신의 감정에 속지 마세요.
사실 하나님과 제대로 된 화해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3. 어떻게 가능?
그렇다면 우리가 얼른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겠죠?
어떻게 해야할까요?
세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11절 말씀 읽어봅시다.
2 Corinthians 5:11 NKSV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알기에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환히 드러났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에도 우리가 환히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양심에 하나님이 훤히 드러나면 됩니다.
우리의 삶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이 비춰지면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12절입니다.
2 Corinthians 5:12 NKSV
그렇다고 해서 또 다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여러분에게 치켜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대답할 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돈이나 능력이나
명예나 권력 뿐만 아니라,
나의 생각도, 내 감정도
그 어느 것도 앞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에게는 없었던 것이지만
거저 받은 선물인
오직 예수님의 사랑만 자랑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것입니다. 13절입니다.
2 Corinthians 5:13 NKSV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입니다.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라는 말 들어봤어요?
하나님을 향하여 곱게 미치시면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자랑하는 삶입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내 주변의 이웃들을 향해서
온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그 삶이 온전하게 변화가 됩니다.
그랬을때,
우리의 삶에
화해가 시작될 수 있어요.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는
진리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명확하게 존재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우리가 기억하고 가슴에 새길때,
우리는 온전하여질 수 있습니다.
나의 것을 자랑하는 인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인생은
반드시 변화됩니다.
나에게 더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더 바라지 않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그저 사랑하며 살아가야합니다.
그러다보면 내가 용용체를 쓰지 않아도,
억지로 화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화해의 열매가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전도사님도 화해하지 못한 사람과
화해를 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이번 한 주간은
우리의 삶에
화해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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