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하기를 배우라(빌 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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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하기를 배우라(빌 4:11-14)
<서론>
11월은 감사의 계절입니다. 오늘부터 추수감사주일까지 3주간, 감사에 대하여 상고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익숙한 듯 낯 설은 단어자족 自足」에 대한 것입니다. 한자대로 푼다면 「스스로 넉넉하게 여긴다」입니다.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넉넉하게 여기는 것」에 익숙합니까?
지금 내 수입에 만족하십니까? 남편 아내 자녀가 항상 마음에 쏙 드십니까?
음... 저를 포함한 여기 있는 대부분의 분들이 ‘그렇지 못하다’고 마음속으로 답하고 있을 겁니다.
연봉 5000만원인 사람은, 연봉 6000만원옆 동료가 부럽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또한 연봉 1억 원상사를 몹시 부러워합니다.
과거 다같이 못 사는 시대에는 「다 그런가보다」하고 살았는데, 상대적 빈곤이 확연한 이 시대엄친아 「엄마 친구 아들」은 말이야! 이것도 했다하더라 저것도 했다더라하며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나 스스로가 아니라 타인에 의하여 강제로 자족을 빼앗겨 버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처럼 자족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애自己愛(narcissism, self-love)」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애지금까지 어떤 정신의학자도 그 원인을 밝히지 못한, 타락한 인생들 모두에게 있는 인격 장애입니다.
우리 모두는 「나는 언제나 주변 사람들보다 월등하고 유능해야한다」는 강박에 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등수(고딩시절 450명 중, 50등까지 게시)를 매기고, 회사에서는 업무실적을 따집니다.
나보다 돈 잘 벌고 잘 생기고 똑똑한 사람못 견디고 불편해 합니다. 그런 내가 불만족스럽습니다.
이러한 자기애(self-love) 때문에 발생하는 인간 비극에 대하여 생철학자 니체는 「운명을 사랑하자」라는 의미의 「아모르파티 amor fati」를 말했습니다.
니체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염세주의의 대가입니다. 그는 어차피 인생의 운명불행 고통 고난이기에, 원망 불평 좌절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들을 찾는 것자기의 인생을 사랑하는 운명애(運命愛 아모르 파티)라는 것입니다.
그럴듯합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낙천주의의 말이 아니라 염세주의의 말입니다.
그들은 「자족」을 덮어 놓고 순응 하는 것으로 말하며, 「그냥 받아들이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할까요? 꼴사나운 사람수긍하기 싫은 환경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인가요?
<나르시스즘>이든 <아모르 파티>이든, 이들의 방식으로는 스스로 만족; 자족하기 불가합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본론>
1. 자족하기를 배워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자족하기를 배우라」고 말합니다.
나르시스즘은 「세상이야 어떻든 제 잘난 맛으로 사는 것」을 자족이라고, 니체는 「불행한 상황을 덮어 넣고 순응하며 그나마 좋은 점들을 찾아내는 것」이 자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11)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빌립보교회어려운 형편 중에도, 몇 차례(빌 2:25; 고후 11 :9) 바울을 재정적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지원을 못하다가 다시 도움을 주었습니다.
자비량선교사로서 언제나 금전적 어려움에 노출되어있던 바울에게, 빌립보 교인들은 더없이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자신이 궁핍할 때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기분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하는 것을 배운 사람으로 「늘 감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바울의 말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12a)와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안다”(12b)는 말씀으로 설명됩니다.
비천에 처할 줄 안다」는 원어적으로 「물의 수위를 낮춘다」혹은 「산의 높이를 낮춘다」는 의뜻으로 「겸손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겸손해 지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아니죠!
물의 수위를 낮추거나 산의 높이를 낮추는 일은, 현대과학기술로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고대 사람들에게는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복음만을 위해 살아간 바울에게, 비천함 혹은 부요함은,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적 환경에서 불가항력적으로 가지게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배부름 배고픔 풍부 궁핍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온갖 것모든 것을 통하여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바울이니까 가능한 거 아닌가?」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경험이 있고, 공부도 많이 했고, 탁월한 리더이자, 훌륭한 선생님이기도 했으니까, 잘 참아내고 잘 적응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매년 여름 더위겨울 추위를 겪지만, 그 때마다 더워 죽겠다 추워죽겠다 하면서 도데체 더위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좀처럼 추위로 오는 오한을 괜찮은 것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불가항력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재난과 같은 궁핍함과 비천함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여기고, 자족하는 것은 아무나에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그런 것일까요? 바울은 지금,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수양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자족하기를 배우라」는 바울의 권면은, 그리스도인이라면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만족이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자급자족이 아니라 하나님 의존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기반을 인격적 자질에 두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인격수양입니다.
나 스스로완전히 나약하고 모든 것에서 부족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깨닫고 인정하는 것믿음입니다.
자족」은 「나의 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런 고백과 믿음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2. 자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밝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이 말씀은 성도들이 많이 오해하고 있는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소위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러한 확신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본문을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의 강조점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입니다.
13절을 통하여 바울은, 모든 「능력의 원천」인 「예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우리의 실존을 인정하는 고백이 있어야만, 우리는 예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형편)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자체」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능력이 필요해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를 구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우리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족하는 사람으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족하기를 배우라」는 바울의 당부는, 인격을 수양하여 인생의 달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으라」는 너무나 당연한 권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은 사람은, 자신만을 위한 과욕을 부리거나, 나는 안 된다는 식의 좌절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과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거룩한 목표를 바라 보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전 12:10)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족하기를 배우라」는 바울의 당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라」는 당부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배우려하고, 사랑하는 이를 의존하기 마련입니다. 자족은 예수 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자기애(narcissism) 혹은 운명에 대한 사랑(amor fati)에서 시작된 자기만족은, 착각이고 스스로를 기망하는 것이기에, 한계에 부딪치고 결국 좌절하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을 배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자족은 감사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자족을 배운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게 변화 될까요? 자족하는 그리스도인 삶은 자연스레 「감사」로 이어집니다.
바울은 자신을 후원한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14)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칭찬이기보다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잘 하였도다」는 고대 파피루스 편지나 문헌에서 자주 자주 사용한, 감사(Thank you)의 뜻을 전하는 관용구입니다.
우리 번역에는 다소 권위적인 뉴앙스가 있지만, 「주신 선물 너무 고마워요」라고 의역 할 수 있는 「정중하고 사려 깊은 감사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족하기를 배운 그리스도인은 모든 형편(상황)에서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감사는 어떻습니까?
「만일(if)의 감사」는 아닌가요? ‘만일 〇〇한 조건을 들어주신다면, 감사 하겠습니다’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감사입니다.
때문에(because of) 감사」는 아닙니까? 돌이켜 보며 ‘좋았던 일’에만 감사하는 태도는, 반대로 생각해 보면 ‘좋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원망이나 불평할 수 있는 불완전한 감사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inspite of) 감사」이어야 합니다. 환경과 상관없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인정하고 믿는 감사참 감사입니다.
바라기는 「모든 것에서 능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인한 자족을 배우고」 그 「자족함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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