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치유자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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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가복음 7:31-37(신약 66쪽)
설교제목: 우리의 치유자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 곧 장애를 가진 사람을 치유한 사건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살펴보고 이를 통한 성경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치유의 기적을 베푸신 것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가복음은 앞선 이야기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많은 환자들과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신 이야기들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오늘 성경 이야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장면은 이러합니다.
첫째, 이 치유의 사건은 이방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31절에 보면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을 지나 데가볼리 지방을 거쳐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을 때’ 일어난 사건으로 소개합니다. 이는 앞선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친 이야기’와 뒤이은 ‘8장의 칠병이어 곧 떡 7개와 물고기 2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놓고 보면요. 갈릴리 호수를 건너기 전 이방지역에서 여행하던 중에 일어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치유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둘째, 이 치유사건에서 예수님은 특이한 행동을 하십니다. 33절~34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의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그 사람의 혀에 발라줍니다. 더욱이 아람어로 열려라는 뜻을 가진 ‘에바다’라는 말로 그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앞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말씀만으로 치유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또 이전과 달리 침을 바르는 등의 행동을 생각해 봅시다. 더욱이 성경 전체에서 딱 1번 사용된 에바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까지 생각해 봅시다. 이 치유의 사건은 다른 사건과 다른 특이한 구석이 많습니다. 자세히는 몰라도 이는 어떤 의미와 상징을 담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마지막 셋째, 이 치유 사건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37절에 보면 ‘심히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히라고 사용되는 헬라어 단어 ‘휘페릭페릭소스’도 성경 전체에서 딱 1번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람들을 치유하신 기적을 베푸신 것이 처음은 아닌데도요. 사람들이 이렇게 심히 놀랐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치유 사건이 이전의 사건과는 다른 차이가 있음을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통해 오늘 성경 이야기에 나타난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해 볼 수 있을까요?
첫째, 예수님은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사역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유대지역 특별히 갈릴리와 예루살렘 지역에서 이뤄졌지만요.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찾아가서 그들 가운데 귀신들린 자 병든 자를 치유하셨습니다. 달리 보자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육신적인 차원을 넘어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성경 이야기에 나오는 장애인을 치유하신 방법은 이전과 달리 좀 독특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당시 사회에서는 있을 법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행동은 분명 이전의 치료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에바다라는 유일한 표현을 외치는 모습도 성경에서 유일합니다. 학자들은 이것이 예수님이 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으로 설명을 하는데요. 이를 통해 예수님의 사역이 단지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것 또는 영적인 차원의 문제로까지 연결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예언한 구원자입니다. 이 치유 사건에 사람들의 반응은 심히 놀랐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심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용어는 성경 전체에서 딱 1번 사용된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이 치유 사건에 관해 사람들이 매우 놀랐음을 강조해서 말해주는 것인데요. 그 까닭을 학자들인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온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의 치유는 이사야 35장 5~6절의 말씀을 반영합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이사야 35:5-6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는 구약시대에 포로로 잡혀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구원자가 오심을 예언하는 이사야의 노래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이 치유 사건에 사람들이 놀랐던 까닭은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그분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구원자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우리의 치유자가 되시며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말입니다.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그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놓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입니다. 사실 이미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많은 환자들이나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셨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많은 이들을 치유하시는 능력을 지닌 분임을 아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치유가 구원과 연결되고 있음을 보았으면 합니다. 이는 단지 예수님이 의사처럼 우리의 병든 몸 또는 마음을 치료해주시는 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해 주시는 분임을 깨닫게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오늘 성경에 나오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는데요. 그가 육신의 문제만 해결받았다면, 그것으로 사회에 복귀하는 것이 충분했을까요? 그가 언제부터 그와 같은 장애를 겪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과거부터 오래된 일이라면, 단지 육신의 질병을 낫게 되는 것으로 사회에 잘 적응하여 살아갈 것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예전 담임목사님이 설교 중에 예화로 해주신 얘기가 있는데요. 과거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있을 때, 어떤 미국인 할아버지가 노예시장에서 당시 시세보다 매우 비싼 값을 치르고 여자 아이를 사게 됩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사실은 그 여자 아이를 노예로 삼으려 했다기 보다는 풀어주려고 했기에 그 아이를 사고나서 자유를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자발적으로 할아버지의 노예가 되기로 합니다. 설령 자유를 얻는다고 해도 고향이 아닌 타국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가 그 여자 아이를 딸로 키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것은 육신의 건강함과 또 다른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저 귀 먹고 말 더듬은 사람의 육신의 문제만 해결해줬다면요. 그는 사는 것이 좀 편리해졌을지는 몰라도 이전보다 더 잘 살았을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자신의 장애를 통해 도움을 받으며 생계를 꾸려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장애마져도 없으니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장애를 가졌던 이가 삶의 어려움을 겪었다거나 치유함을 받은 후에 어떤 문제를 겪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은 정확히 알 수 없는 문제일 수 있지만요. 앞서 예수님이 그의 치료에서 본 것처럼 손가락을 넣고 침을 바르는 등의 행위를 한 것은 단순히 육신적 치료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그에게 에바다 곧 열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1차적으로는 그의 닫힌 귀에 적용되는 말씀이지만, 더 나아가서는 이는 영적인 차원의 열림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치유를 통해 사람들은 그냥 의사로서의 예수님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예언된 구원자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치유 행위가 육체적인 것 이상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러 얘기를 했지만 우리가 기억했으면 하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치유자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문제를 예수님은 해결하실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리하여 바라건대, 오늘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그것을 해결한 능력이 부족할 지라도 예수님은 능히 그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오늘 성경 이야기에 나오는 치유받은 사람처럼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