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열 명의 나병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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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 17:11-19(신약 125쪽)
설교제목: 예수님과 열 명의 나병환자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향하여 축복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함께 예배해서 감사합니다.’
# 서로 인사 후
감사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인터넷 기사를 통해 알게 된 편지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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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103동 주민 여러분!
저희는 208호 거주자입니다.
다음 주 월요일, 4년 동안 살던 이 아파트에서 이사를 갑니다.
살면서 늘 감사한 마음이었지만
이사를 앞두고서야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장애인 주차구역은 장애인 운전자를 위한 공간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우리 동 주민들은 심각한 주차난에도 불구하고
늦은 시간까지 장애인 주차구역을 비워주셔서,
4년간 큰 불편함 없이 생활하였습니다.
따뜻한 배려에 진심 담아 깊이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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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접한 분들이 이러한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데요.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런 게 진짜 명품 아파트의 인품이다”, “당연한 건데 감동적이다”, “편지도 고맙지만 주민들의 배려도 너무 감동적이다”, “당연한 것에도 감사함을 표현하는 분이다”, “저 글을 읽은 아파트 주민들도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을 것 같다”
우리 성도 분들은 어떠신가요? 같은 마음이신가요? 그런데 최근에 언제 감사해보셨나요? 혹 평소에 얼마나 많이 감사하며 살아가시나요? 또 주로 누구에게 감사하며 살아가시나요? 혹시 오늘 우리는 감사의 삶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사에 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감사해야 할까요? 또 어떻게 우리는 감사해야 할까요? 오늘 성경이야기를 통해 이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보여줍니다. 차근차근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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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장 11절의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목적지에 두고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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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으로 보면 이는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이 절정을 향해감을 말해줍니다. 마치 사계절의 절반을 지난 가을처럼 예수님의 사역은 다가올 겨울을 앞두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고 머지 않아 겨울이 닥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에게는 사역의 시간이 얼마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중요한 시기에 묘하게도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다고 말합니다.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곳은 남은 시간을 보내기에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곳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언제고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곳입니다. 당시 예수님과 같은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는 경계심을 발동시킵니다. 마치 우리로 치면 남한과 북한의 경계에 있는 민통선의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사이는 좋지 않았습니다. 둘 사이의 적대감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서로 말을 섞지도 않았고 심지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의 땅을 일부러 피해 가기도 했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런 겁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데 그 중간 지점에 있는 사마리아라는 도시를 일부러 피해서 지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는 그렇게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을 지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사역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이곳을 지나시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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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주목해 볼 것은 성경은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신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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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리상으로는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로 가는 방향이 맞습니다. 이는 일부러 사마리아 지역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 가신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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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장 12~14절의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예수님은 한 마을에서 나병환자 열 명을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이었음에도 사마리아지역을 통과하신 것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만나기 위해서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누구일까요? 성경은 그들의 이름은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그들의 이름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그들이 처한 상황은 이러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는 동네 밖으로 나가 살아야 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격리되고 소외됬습니다. 마치 초기 코로나 환자처럼 행동반경과 사회활동을 철저하게 접근제한 받았습니다.
코로나가 유행하던 초기에 확진이 되셨던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선 핸드폰으로 위치추적이 가능한 앱을 설치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격리기간 동안에 외부활동이 철저하게 제한되는 데요. 혹시라도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외출을 할까봐서요. 핸드폰의 위치가 오랫동안 한 곳에 멈춰있으면 담당자가 전화를 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방역을 한 덕분에 코로나로부터 탈출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좋게 말해 보호지 나쁘게 말하면 구속 또는 가택연금에 해당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님 당시에 나병환자들의 처지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나병이 의심되는 순간에 격리 조치를 당하고 나병이 확인되는 순간에 동네서 추방당합니다. 같은 나병환자를 제외하고는 사람들과 결코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나병환자는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소외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나병환자들에 관해 주의 할 점이 있습니다. 일전에 전도사님이 오후 예배 설교를 통해 이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요. 성경의 나병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나병 또는 한센병과는 그 종류가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병은 전염성이 강한 피부병이라고 보시는 것이 좋은데요.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한센병은 쉽게 전염되지 않습니다.
레위기 13-14장에 이에 관한 규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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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로 ‘짜라아트(צרעת)’, 헬라어로 ‘레프로스(λεπρός)’라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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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은 매우 전염성이 커서 피부뿐만 아니라 ‘의복’이나 ‘건물’에까지 전염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동네 밖에서 살면서 사람들이 가까이 올 때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치며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했습니다.
코로나 초기의 상황을 떠올려보시면 더욱 잘 이해가 될 텐데요. 전염의 위험과 그에 따른 불안감으로요. 초기 코로나 환자를 아픈 사람으로 대하기보다 피해야될 위협으로 여겼던 슬픈 기억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난 나병환자들에 관한 사람들의 태도 또한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마치 죄로 인해 하늘로부터 큰 벌을 받았다고 여겨서 사회적 냉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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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10명의 나병환자는 멀직이서 예수님을 부릅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환자들 또는 귀들린 자를 치유하셨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의 불행한 처지를 벗어나게 해주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음을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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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장면에서 잘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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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성경에 선생님으로 나오는 이 단어를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 ‘에피스타타(ἐπιστάτα,)’라고 하는데요. 이는 성경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만 사용한 용어입니다. 이러한 용어 사용을 볼 때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을 제자와 같이 믿고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나병환자들의 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담은 표현이기도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참 감사한 것은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의 요구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그 호칭 속에서 그들의 간절함과 믿음을 보셨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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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이 있습니다.
앞서 레위기 13~14장에는 나병에 관한 자세한 규정을 소개하고 있다고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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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규정에 따르면 나병환자가 나음을 얻었다고 판정받기 위해서는 제사장에게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여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따르는 것에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병환자들은 제사장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병이 나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즉시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병고침을 받고 제사장에게 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로부터 생각합니다. 예수님 또는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를 해결해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나가야 합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마치 오늘 성경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아왔고요. 또 예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나병을 고칠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구경꾼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삶을 살아내는 것에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때 우리는 기적을 경험하게 됨을 오늘 성경은 말해줍니다.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셨으니 이로써 행복한 결말로 이야기가 끝나면 될 것 같은데요. 오늘 성경 이야기는 아직 더 해야할 이야기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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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장 15~18절의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열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 돌아온 것일까요? 혹시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던 것일까요? 그는 아직 병이 완치 되지 않았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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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자신의 병이 완치되었음에 기뻐하고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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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이와는 대조적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 일로 불쾌한 듯 보이는데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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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사람이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은 왜 이렇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시는 것일까요? 혹시 예수님은 나머지 아홉명이 꽤심하다거나 은혜도 몰라서 섭섭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일까요? 인간적인 도리로 보자면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똑같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감사를 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에 불과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셨으니 충분히 인간적인 감정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반응에 따져 묻고 싶기도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10명의 나병환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에 갔다가 온 것일까요? 만약 제사장에게 가기도 전에 예수님께 돌아왔다고 하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머지 아홉명이 행동을 꼭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둘째, 10명의 나병환자가 감사를 드리는 것은 자발적으로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예수님이 병이 나으면 감사드리러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 도리로 보면 당연히 예수님께 감사를 표해야 한다고 하겠지만요. 그것을 어긴 것이 큰 문제라 할 수 있을까요? 가령 제가 누군가에 선물을 주고서 그 사람이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얘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낸다면 좀 이상한 일 아닐까요? 꼭 고맙단 말 들고자 선물하려는 것은 아닐테니 말입니다.
셋째, 나병환자는 사회로부터 격리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오랫동안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떠나 있어야 했습니다. 이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보다 먼저 가까운 이들을 만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 큰 은혜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요. 관계의 정도를 생각한다면, 나병환자들에게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더 보고 싶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저의 생각을 우리 성도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병환자 편을 들고 있는 제가 이상한 것인가요? 제가 느끼기엔 예수님이 좀 야박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으신가요? 그런데 사실 저도 그렇게 믿지만 우리가 믿기로 예수님은 결코 야박한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결론은 제가 이상한 것이라 해야겠습니다. 아니 사실은 제가 어리석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이라 말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절대로 야박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그렇게 보여질 수 있게 반응하신 것은요. 어떤 의도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이것이 아마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 1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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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주목해 볼 단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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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는 헬라어로 ‘알로게네스(ἀλλογενὴς)’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성경전체에서 딱 이 구절에서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성경에서는 어떤 단어를 강조할 때 주로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합니다. 하나는 강조할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는 반대로 강조할 단어를 최소한으로 쓰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방인이라는 알로게네스는 최소한의 사용을 통해 강조되고 있습니다. 본래 이방인이라는 말은 유대인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입니다. 특별히 성전의 출입을 금하는 대상을 표현할 때 이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예수님은 유대인이 아닌 그 이방인을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러 온 그가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마치 이와 비슷한 말하기 방식입니다. ‘아니, 요즘 세상에도 그런 사람이 있단 말이야’ 이러한 표현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 대상을 주목하게 합니다. 아마도 이는 그를 교훈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홉 명의 나병환자가 어딧냐고 물으신 것은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아홉명의 행동이 괴씸해서 그들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아홉 명과는 대조되는 이 한 사람을 주목해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야박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교훈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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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장 19절의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그 한 명의 나병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제가 생각할 때 오늘 성경 이야기에서 가장 이상한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병을 치유해 주셔서 감사를 드리러온 한 나병환자에게 믿음과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마치 ‘안녕하세요’ 했는데, ‘사랑합니다’라고 받아치는 이상한 모양새입니다. 왜 예수님이 감사하러 온 사람에게 갑자기 구원을 얘기하시는 도통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앞서의 경우처럼 예수님께서 이 말씀하신 것이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은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감사를 드리는 것은 믿음으로 인함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한 나병환자의 감사를 표현하는 반응에 관해 믿음의 이야기를 하고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무 뜻없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면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감사와 믿음이 관계가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감사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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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병환자가 드린 감사를 헬라어로 ‘유카리스톤(εὐχαριστῶν)’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 감사를 받는 대상은 대부분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사도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 감사한 때를 제외하고 감사는 모두 하나님과 예수님께 돌려져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유카리스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실 때는 모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만 나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용례를 기준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믿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겠을까요? 최소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하나님께 감사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감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이로부터 감사에 관해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이라면요. 반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감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감사할 줄 아는 인품 좋은 사람들을 세상 속에서 만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요. 세상 사람들의 감사와는 구별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하나님께만 올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득 이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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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단순히 문자적으로 보면요. 삶의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라는 정도의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은 감사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왜 감사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일 정도로 중요한 일인지 하는 생각이 들곤했는데요. 앞서 말했듯이 성경에서 말하는 감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들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 믿음이 감사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당연히 감사도 그만큼 중요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앙 안에서 감사하는 삶을 이룬다는 것은요. 늘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부터 출발을 하는 것이고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행하는 감사는 이렇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생각하고 그속에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때로 내가 예상치 못한 또는 나를 힘들게 하거나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여러 일이 내게 닥쳐 올 수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사와 믿음이 우리를 놀라운 곳으로 인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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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다시 오늘 성경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신 예수님의 반응을 생각합니다. 그냥 성경을 읽을 때는 예수님의 반응에 적잖은 실망이 올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이 감사하지 않았다고 그걸 문제 삼으시니 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다소 옹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주십니다. 신앙 안에서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오늘 이야기 밖에서 주어지는 또 다른 교훈을 이야기하며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주로 예수님의 행적을 다룬 성경책 네 권이 있습니다. 곧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고 이를 복음서라고 분류해서 부릅니다. 이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때로 연결되거나 독립되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복음서에만 고유하게 나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물이 포도주로 바뀐 기적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과 열 명의 나병환자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행적이라는 공통사항을 다루면서도 독립된 이야기를 하는 것에는 어떤 목적이 있습니다. 그 독립된 이야기를 통해 그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은 예수님의 특별한 관심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 이야기를 통해 누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 누가는 오늘 성경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위치한 곳을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사이로 보여줍니다. 이는 복음이 이방지역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더욱이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나병환자를 사마리아인이고 그가 구원에 이르는 장면을 보여주는데요. 이는 이방인도 구원에 이르게 됨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구원하시는 온 인류의 구원자 이심을 나태고 있습니다.
혈통으로 따지자면 우리도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성경 이야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이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통해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는 오늘 성경 이야기에 나오는 나병환자처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구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와 도움으로 얻은 구원입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것을 안다면 우리가 이것에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오늘도 주님을 향한 감사의 삶을 이뤄가시는 우리 귀한 성도 분들 다 되시길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