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제 눈의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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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가복음 8:11-21(신약 67쪽)
설교제목: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제 눈의 안경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알게된 뉴스기사 한 토막이 있는데요. “‘제 눈의 안경’ 과학적으로 입증돼”가 그것입니다. 제 눈에 안경이다라는 속담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도 제 마음에 들면 좋아보인다’라는 것인데요. 해당 기사는 2015년에 나온 것인데요.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 또는 미인의 기준에 관해서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는 연구를 소개합니다.
대략의 내용은 이러한데요. 하버드 대학과 웨즈리 대학에서 공동연구 한 것에 따르면요. 35,000명을 대상으로 일란성 쌍둥이 547쌍과 이란성 쌍둥이 214쌍에게 200명의 얼굴을 보여주고 선호도에 따라 등급으 매기도록 했다고 합니다. 연구 결과는 일란성 쌍둥이라도 선호하는 미인의 기준이 달랐다고 하는데요. 이는 미적인 선호도가 유전적인 요인이 아니라 환경적인 요인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알게 했습니다. 또한 가족이라도 미인의 선호도가 달랐던 것으로 볼 때, 미인의 기준은 개인의 경험에 따른 영향임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제가 왜 이러한 기사를 소개하고 이런 얘기를 하냐면요.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려고 하거나 우리가 관심하는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런 거죠. 제가 결혼을 준비하던 무렵에 있었던 일인데요. 저희 교직원들은 화요일과 토요일에 경건회 및 회의를 합니다. 주로 목양실에 모여서 함께 말씀을 나누고 회의를 하는데요. 유독 그날따라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담임목사님이 반지를 끼고 있다는 것이었고요. 반지를 왼쪽 검지에 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담임목사님은 저보다 일찍이 결혼을 했고 오랫동안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는데요. 물론 반지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요. 그날 따라 그것이 왼쪽 검지에 끼고 있었다는 것을 유심히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에 그것이 제 눈에 들어온 까닭은요. 그때쯤 제가 결혼반지를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통해 저는 제가 관심하는 것에 눈이 머물고 마음이 쏠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방금 소개해드린 기사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검증해준 것인데요. 우리가 다들 눈이 두개 달리고 똑같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관심과 생각의 기준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눈에 안경이다’라는 속담이 있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데로 세상을 바라보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이야기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봅니다. 그 결과로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역을 하시는 것인지를 나타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많은 환자들과 귀신들린자를 내쫓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했음에도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며 그들이 쓴 안경으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분으로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은 깊은 탄식을 하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그 말뜻을 오해하고 자신들에게 떡이 모자라는 것에 관해 수근거렸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제자들의 생각에는 이랬습니다. 앞서 칠병이어 곧 떡 7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4천명을 먹이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어고 많은 떡이 남았는데 미쳐 챙겨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제자들이 예수님과 나눠먹을 떡 정도는 챙겨야했는데, 겨우 1개만 챙긴 것이 염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반응에 답답해 하시면서 왜 깨닫지 못하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은 떡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는 비유하자면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안경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보고 가지고 있는 생각이 누룩처럼 크고 빠르게 번져나가는 것에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이런 거죠. 바리새인은 당시에 존경받는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따라 산다고 여겨지는 그들이었지만, 실상은 하나님과 무관한 자기들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무수한 예수님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하며 예수님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또한 헤롯은 당시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권력자였고 그로말미암아 예수님에 관한 정보도 세상의 다른 어떤 이들보다는 많이 수집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정보가 곧 힘’이라고도 하니까요. 그럼에도 그 역시도 종교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관한 여러 소문과 정보를 접했을텐데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불행한 것은 바리새인과 헤롯 모두 영향력 있는 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들의 문제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파급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마치 누룩이 빵을 크게 부풀리듯이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못된 생각을 심어주고 그것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들의 눈으로 자신을 또는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쓰고 있는 안경을 고쳐쓰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잘못된 정보를 주고 있고 왜곡된 세상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훗날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알게 될 것이지만요. 아직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오늘 성경 이야기는 보여줍니다.
저는 이 성경 이야기를 살피면서 이것이 꼭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 또는 바리새인과 헤롯만의 문제인가를 생각합니다. 혹시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문제이지도 않을까 합니다. 우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그저 한 시대의 위대한 스승정도로 여겨질지 모릅니다. 이른바 4대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 정도로 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관한 이해는 예수님의 사역과 그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없게 합니다. 예수님을 훌륭한 선생님 정도로 여기는 이상 그분이 우리 삶에 주인이 되지는 않을테니까요. 그러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떨까요? 우리는 분명 같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겠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정말로 우리가 같은 하나님을 믿고 그에 따라 살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때가 많습니다. 가령 세상에는 왜 이렇게 많은 기독교의 교파가 있을까요? 또 제가 알기로 우리나라에만 200개가 넘는 교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교파라는 것은 예를 들면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 하는 식의 구분이고요. 교단은 장로교 안에서 예수교 장로회, 기독교 장로회 또 그 안에서도 고신, 합동, 통합이런 식으로 나눠지는 것을 말합니다. 분명히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이렇게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큰 얘기하지 않더라도요. 사실 한 교회 안에서만 보아도 우리는 서로 다른 마음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음을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각자 개성이 있고 삶의 자리가 다르니깐 방식에 차이는 어느 정도 인정을 하는데요. 신앙생활의 본질에 해당되는 부분에 있어서 차이가 발생할 때 당혹스럽긴 합니다. 가령,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의 뜻을 쫓아 살아야 할텐데, 내 마음과 내 방식을 통해 여전히 신앙생활하시려는 분들이 있어요. 참 안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아직 신앙생활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그래도 좀 나을텐데요. 수십년이 지나고 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그렇다면 참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의 탄식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잘못된 이해가 예수님에게서 탄식을 쏟아놓게 합니다. 이는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긴다는 바리새인에게서 또 예수님과 동거동락하던 제자들에게서도 나타난 현상입니다. 과연 나는 아니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요?
바라건대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탄식 앞에서 우리이 신앙생활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의 말씀과 그 분의 뜻을 따라 살기보다 내 눈에 안경을 쓰고 신앙생활을 한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이제는 온전히 예수님을 바라보며 신앙생활하는 우리 귀한 성됨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