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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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 6:26-35(신약 153쪽)
설교제목: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감사합니다. 오늘 당신과 함께여서 행복합니다.’
# 축복후
설교에 앞서 한 편의 영상을 보려고 합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알게된 다큐멘터리 영화인데요. 유튜브에서 가져온 2014년에 개봉한 영화 ‘목숨’의 일부 장면입니다. 함께 영상을 시청하고 얘기를 이어가겠습니다.
# 영상: 4분 35초
참 마음이 아려오는 영상이지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사실 삶에 관해 생각했는데, 삶을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레 죽음으로 생각이 옮겨갔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 사이에서 삶이라는 것이 보다 선명해지고 더 의미 있어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관련해서 방금 본 영상은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로 유튜브를 살펴보다가 찾게 된 영상이었는데요. 여러 유튜브 영상들이 유명한 인물들에 관한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보다 그 유명인에 대한 관심이 더 집중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제에 더 관심을 둘 만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방금 영상을 통해 보게 되었는데요. 이 영상을 통해 죽음으로부터 삶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하였습니다.
찾아보니 영화 포스터에 이런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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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좋은 걸 잊은 당신에게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 어쩌면 우리가 죽음을 잊고 살아서 현재의 삶에 관해 무덤덤하게 또는 주의를 기울이며 살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이 삶이 언젠가 끝이 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렇게 죽음을 통해 우리는 삶을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삶에 관해 또는 그와 관계된 신앙생활에 관해 고민하려고 합니다. 차근차근 오늘 성경 이야기를 해설하면서 이에 관해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대체 오늘 성경 이야기는 삶에 관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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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이야기는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이러한 표현이 7번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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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라고 합니다. 이를 영어로 ‘I am’이라 하고 우리말로 ‘나는 ~이다’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에고 에이미 7개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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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 8:12).’, ‘나는 양의 문이다(요 10:7).’, ‘나는 선한 목자다(요 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 15:1).’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독특하게도 예수님을 이렇게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으로 소개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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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 본래 이 말은 히브리어로 기록이 되어 있지만, 이 말을 헬라어 옮기면 에고 에이미가 됩니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은 출애굽기에 나타난 장면을 통해 예수님이 모세에게 나타난 그 하나님이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표현을 일곱 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종종 성경은 7이라는 숫자를 상징적으로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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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7일 동안에 이뤄진 일입니다(창 2:2)’.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이었습니다(창 7:2).’ ‘여리고 성은 제 7일에 일곱 번 돌았더니 무너졌습니다(수 6:15).’ 그 외에도 더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7이라는 숫자를 사용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완전한 것임을 7이라는 숫자로 표현합니다. 노아의 방주에 정결한 동물이 완전히 들어간 것을 7이라는 숫자로 표현합니다. 여리고 성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7이라는 숫자로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7번의 에고 에미미를 통해 표현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성경 이야기에 나오는 에고 에이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그 옛날 유대 땅에 나타나 사회운동을 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한 인물이 아닙니다. 여전히 오늘 신자인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하나님이시고 성경에 기록된 그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하는 지가 이로써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뜻은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는 배경을 살펴보면 이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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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 사건’ 곧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신 기적’을 잘 아실 겁니다. 이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피해 떠나십니다.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 쫓아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26~27절까지의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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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26-27(신약 153쪽)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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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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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성경에서 ‘떡’이라고 나오는 말의 원래적 의미는 ‘밥’입니다. 다시 말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예수님이 아니라 ‘밥밥밥밥밥밥밥’이 가득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했던 시대임을 생각할 때, 이러한 사람들의 열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에 변화를 주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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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예수님은 어쩌면 사람들의 머리 속을 가득메우고 있을 밥의 이미지를 둘로 구분해서 보여주십니다. 같은 밥이라도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나면 썩어버리지만,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 영원한 양식 곧 떡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34~35절까지의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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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34-35(신약 153쪽)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에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람들의 떡 곧 밥에 관한 관심을 예수님을 향한 관심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의 화술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특별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그냥 떡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는 것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성경 단어 공부를 좀 해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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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는 신약학 박사이고 우리 교단 목회자로 현재 과천영광교회를 섬기는 우진성 목사님의 글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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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생명’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는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프쉬케(ψυχή)’ 둘째는 ‘비오스(βίος)’ 셋째는 ‘조에(ζωή)’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는 ‘조에’이지만, 이 단어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단어를 모두 살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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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프쉬케는 ‘생물학적 또는 육체적 목숨’을 뜻합니다. 우리가 흔히 살아 있다와 죽었다를 판단할 때, ‘숨을 쉰다’, ‘목숨이 붙어있다’라고 합니다. 그에 걸맞는 헬라어 단어가 ‘프쉬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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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사용된 예를 하나만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 10:15)’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때에 사용된 ‘목숨’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프쉬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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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비오스는 ‘생명 유지를 위한 활동이나 살림’을 뜻합니다. 앞선 오병이어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먹는 떡 더 정확히는 밥의 문제에 관심했듯이 생계를 위한 활동이나 그것을 유지해줄 살림을 헬라어로 ‘비오스’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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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사용된 예를 하나만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을 요구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살림을 나눠주었다(눅 15:12)‘고 성경은 기록하는데 여기서 ‘살림’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비오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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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셋째, 우리가 주목해 볼 조에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뜻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지만 앞선 프쉬케나 비오스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요. 조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생명입니다. 제가 이해한 방식으로 달리 말해보자면 프쉬케와 비오스가 육적인 생명에 관계된 것이라면 조에는 영적인 생명에 관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해한 수준에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눈에 보여지는 것으로는 이런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숨을 쉬고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치 자동차가 시동이 걸리고 움직여지는 상태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가령, 우리는 ‘얼빠졌다’, ‘정신이 나갔다’, ‘몽롱하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요.
이는 우리에게는 육체의 기능과는 다른 영적인 차원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것은 육신적인 것 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까지도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자동차가 시동이 걸리고 움직일 수 있어도 운전자가 제대로 운전하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생명에는 육적인 차원이 있을 수 있고 영적인 차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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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말씀하실 때, 사용된 단어는 조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차원에 관한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분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육적인 차원에 관심이 없으시거나 그것을 공급해 주실 수 없는 분이 아닙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도 사람들의 육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셨고 그것에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육적인 문제에 관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생명의 떡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저는 이를 통해 우리 삶의 두 가지 모양에 관해 생각해 봅니다. 육적인 삶의 모양이 그 하나이고 영적인 삶의 모양이 다른 하나입니다. 육적인 삶의 모양은 앞서 말한 ‘프쉬케와 비오스’에 해당하는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육신의 필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체에게 있어서 1차적으로 중요한 삶의 모양일 것입니다. 제때에 필요한 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면 우리의 목숨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모양이 육적인 삶만이 아닌 영적인 삶도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을 ‘조에’의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해보려 합니다. 어쩌면 이 영적인 삶 곧 신앙생활은 육신의 필요를 직접적으로 채워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 먹고 배부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특별한 무엇을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생계를 보장해주거나 노동을 멈추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보면 신앙생활은 우리의 생계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심지어는 낭비된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언젠가 육체가 쇠잖아여 질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열심히 생계 활동을 하고 이를 할 수 없는 때가 왔을 때,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통해 생명을 유지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유지에 가장 중요한 생계 활동을 뒷전에 미루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계 활동에 방해를 받는 일이 됩니다. 더나아가 이는 시간 낭비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먹고 사는 문제 곧 생계유지의 문제만이 우리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생계문제가 해결된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삶에 문제가 없지 않으니 말입니다. 또 만약 먹고 사는 문제만이 중요했다면, 우리에게 예술이라는 것은 불필요 했을 것이고 종교를 비롯하여 신앙생활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오늘도 우리를 이곳으로 발걸음 하게 했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이 우리의 이해를 도울 것입니다. 만약 내게 남은 삶이 일주일이라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전과 같이 생활하시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은 같은 방식의 삶을 살지 않으실 것이라 여겨집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 내 삶이 죽음 앞에서도 지속되고 반복되어도 괜찮다고 여겨진다면, 나는 분명 좋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일 겁니다. 적어도 내 삶에 내가 만족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의 삶을 벗어나고 돌이키고자 한다면, 내 삶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제 얘기가 혹시 오해를 불러일으킬까봐 덧붙입니다. 우리에게 신앙생활만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계 활동이 분명 필요합니다. 문제는 생계활동만이 우리의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것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삶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방식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을 통해 예수님은 스스로를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육신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관계된 것임을 앞서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관심하시는 것은 영적인 차원의 문제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고자하시는 것 또한 이 영적인 차원의 문제임을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무관심하지 않으시지만,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영적인 차원의 문제임을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서 먹고사는 것 이상의 삶말입니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방식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살아갑니까? 혹시 그것이 먹고 사는 문제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만 관심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 너머의 삶을 꿈꾸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이 바로 이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게 생명을 주시는 떡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오늘 우리의 관심이 영적인 것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필요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이 우리의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에 관심하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은 더 풍성해 질 수 있습니다. 오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 관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