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찬양하라(시14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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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좋아하십니까? 어릴 적 학교에서 매일 일기를 써서 일주일에 한 두번씩 검사를 맡곤 했습니다. 당연하게도 하루를 기록하는 일은 제게 너무 버거웠습니다. 저의 시 사랑은 아마 그 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시에는 다른 문학과는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독특한 구조들도 그렇고 단어와 표현 하나에 담겨진 의미와 힘들을 느끼는 그 매력에 저는 시를 참 좋아합니다.
성경에도 시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시편과 잠언 전도서와 아가서가 시에 해당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시편의 마지막 5편의 찬양 시 중 두 번째 시입니다. 이 다섯 편의 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인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마치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147편의 기자는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선포합니다. 두 할렐루야 선포 사이에 이유가 들어가 있는데, 이 일이 ‘선하고, 아름다우며,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마땅한가? 사 43:21 / 우릴 지으시고 부르신 이유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 일은 선하고 아름다운가? 찬양하고 찬송하는 대상, 다시 말해 예배의 대상이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2절 이하에서 기자는 우리의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고 또 아름다우신지, 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지를 노래합니다.

2-3절.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회복의 하나님이시다.

2-3절에서 시편의 기자가 노래하는 하나님은 구원과 회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앞으로의 고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70년간 포로로 붙잡혀 있었습니다. 전쟁을 겪고 또 포로로 잡혀있었던 이들은 상심했고 깊은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상심이라는 단어 속에는 깨어지다, 부수어지다, 멸망하다라는 뜻이, 상처라는 단어 속에는 고통과 괴로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비록 자신들의 죄악 때문이지만 마음이 조각나고 고통과 괴로움에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지켜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레스왕을 통하여 70년의 포로기 생활에 끝을 선포하시고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너진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시며 성전을 복원시키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다시금 모으십니다. 나라와 성전이 세워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각나고 괴로웠던 그 마음도 회복되고 고쳐졌음을 시편 기자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의 기자가 말하는 첫 번째 찬양의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깨어진 이스라엘을, 고통과 괴로움 뿐이었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그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고 회복시키는 이 선하고 아름다운 은혜의 역사는 오늘도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기에 우리 또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세 가지 시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시제의 연관성을 참 좋아합니다. 저와 아내가 식당을 선정할 때에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저는 새로운 곳이나 메뉴를 고르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는 것이고, 아내는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아내는 이미 성공했던 과거의 경험으로 오늘도 그것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다음에도 동일한 선택할 것입니다. 그래서 식당선정에 있어 저는 실패를 거듭할지언정 아내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희가 가는 식당은 늘어갑니다. 왜냐하면 제가 성공하면 식당 선택의 지경이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는 과연 하실 수 있으신 분인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던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조각난 내 마음을 만지실 수 있으신 분인가? 하나님께서 무너진 내 삶을 회복시키실 수 있으신 분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이 상처 가운데에서 건지실 수 있으신 분이신가? 혹시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이 나를 채울 수 있지는 않을까? 하나님을 대체할 만 한 것은 없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실 수 있으신 분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이미 하셨다.’는 것만큼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조각난 내 마음과 삶을 만지시고 회복시킬 수 있으신 분이신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자이시며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확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실 수 있는 분이신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로 확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신 분이시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건지실 수 있는 분이심에 틀림이 없으십니다.
또한 우리는 제가 식당을 고를 때처럼 실패할 일이 없습니다. 성경책 안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선택한 실패의 결과들이, 시행착오들이 이미 소개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는 그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지금도, 앞으로도 동일하게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신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의와 생명으로 건지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우리의 삶을 고치시고 상심한 마음과 쓰라린 상처를 싸매어 회복케 하실 것입니다.

4-5절.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이어 4-5절에서 전능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시편이 기록될 당시 하늘은 아주 맑아서 별들이 많이 보였을 것입니다. 별을 세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불가능으로 여겨집니다. 별을 세는 것은 창세기 15장에서도 등장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에 별을 보여주시며 셀 수 있나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눈과 능력으로는 셀 수 없는 그 별들의 수 만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많아질 것을 약속해주시는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그런데 시편의 기자는 우리는 셀 수 없으나, 위대하시고 능력이 많으시며 지혜까 무궁하신 하나님께서는 세시며 심지어는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신다고 고백합니다.
창세기의 말씀을 배경삼아 이 말씀을 볼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큰 위로와 감격을 느꼈을 것에 틀림없습니다. 위대하시고 능력이 많으시고 지혜가 무궁하신 하나님께서 별처럼 많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세시고 또 그것들을 이름대로 부르십니다. 땅의 이쪽부터 저쪽까지 흩어진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을, 갓 태어난 갓난아이부터 시작해서 지긋한 나이의 노인의 이름까지 하나 하나 다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에는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 사람과 나 사이에 관계가 생겼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 나를 부른 대상에게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기 전에는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도, 예배를 드릴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어쩌면 살아가는 하나의 몸부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인격적이심을 알고 믿고 또 경험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나를 알고 부르신다는 이 고백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잊고 살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저 백성 1이나 그리스도인 1로 알고 계시거나 부르시지 않으셨다는 그 은혜를 다시 한 번 나눕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나의 삶과 이름을 기억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보통 누군가를 부를 때는 그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위대하심과 전능하심과 무궁하신 지혜로 우리의 삶의 위치를, 신앙의 위치를, 마음의 깨어짐을 알고 그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한 시편의 기자는 내가 새벽 날개를 치고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그곳에서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붙드신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 부분이 남에게 보이고 싶은 부분이던지 그렇지 않던지 우리 삶의 모든 곳에 편재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붙드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어져 산산히 흩어지고 상처입었을 때 우리에게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소리보다 위로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를 부르는 소리는 구원과 회복의 소리요,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소리입니다.
별들을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상황과 위치를 아시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를 이스라엘로, 회복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전능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6절. 하나님께서는 낮은 자를 세우시는 하나님이시다.

6절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세우시고 또 낮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심하고 또 상처입은 자들의 특징은 스스로를 챙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서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거나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전쟁과 오랜 포로생활에 지친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겸손하다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살펴보면 유순한, 고개를 숙이는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내려놓고 여호와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자가 겸손한 자 입니다.
반대로 악인은 죄악 가운데에 있는자를 의미합니다. 특별히 악한 행위를 하지 않아도 말씀이 아닌 내 뜻과 능력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가 하나님의 눈에는 악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대로 행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했으며 위기의 순간들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군사력이나 정치력을 의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낮추셨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포로생활을 겪으며 그들은 섬기던 우상이 자신들을 구원하지 못하며 자신이 소망이라 여기며 의지했던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겸손해졌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기 때무입니다. 겸손케 된 이스라엘은 이제 여호와께서 붙드시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도 이러한 경험들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마치 내가 만들어 낸 것인 양 여길 때가 있는 것을 봅니다. 뼈 아픈 경험이지만 우리는 삶 속에서 악인이 되기도 하며 그 가운데 우리를 낮추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은혜인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심판이 아닌 사랑의 손길이라는 것이며, 그 손길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겸손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는 억지로 나를 깎아내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음을 드러내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자는 찬양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겸손한 자가 되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겸손한 자로 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붙들어 세우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들을 낮추시는 하나님이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7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7절에서 시편 기자는 다시 감사의 마음으로, 악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찬양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 말씀 앞에서 예배와 찬양을 대하는 저의 마음과 예배를 점검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또 감격하며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있는가? 혹시 그저 익숙함에 노래하고 또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가?
찬양의 가사를 뜯어보면 눈물나게 아름다운 가사들이 있는가 하면, 주님 앞에 내 생명 드리리라와 같이 흠칫하며 믿음으로 고백하게 되는 가사들도 있습니다. 찬양에는 독특한 힘이 있습니다. 때문에 단순한 노래말을 음정에 맞추어 부르거나 악보대로 연주하는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찬양은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곡조있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양의 가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하며 동시에 성경적이어야합니다. 그 가사로 고백하는 우리의 마음 또한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진정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통해 선포되어지고 또 고백되어지는 아름다운 고백들을 들으시고 또 삶 가운데에 들린 대로 행하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8-9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시고 먹이시는 분이시다.

8-9절에서 우리가 감사하며 찬양할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통해 풀을 자라게 하시고 들짐승부터 까마귀 새끼에 이르기까지 모든 만물들을 돌보시고 또 먹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돌보심과 먹이심에 대한 지혜는 욥기 38-39장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모든 만물들을 하나님께서 입히시고 먹이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본문입니다. 들짐승과 까마귀 새끼를 위하여 세상을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르짖음에, 우리의 목마름과 허기를 가만히 보고 계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위해 우주를 운행하여 주십니다. 이는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일상을 주시고 입히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11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

마지막 10절과 11절은 6절과 연관되어있습니다. 힘이 센 준마와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는 것은 군사적인 표현입니다. 힘이 센 말로 이루어진 기병들과 억센 다리를 가진 보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기쁜 것이 아닙니다. 위대하시고 능력이 많으시며 지혜가 무궁하신 하나님 앞에서 군사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인자하심을 바라는 것이라고 시편의 기자는 고백합니다.
세상은 다른 사람보다 힘이 센 말들과 굳센 다리를 가져야만 성공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학생 때에는 외모나 성적, 스펙으로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가져야 하는 더 많은 기준들이 생겨납니다. 세상은 우리가 마치 전쟁터에 놓여있는 것과 같이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고, 내가 가진 것에서 소망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며 외적인 것에 집착하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으로 살 때에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낙심하며 불안해지기 마련입니다. 언제나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가치관에 그리스도인들 또한 많이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세상이 말하는 대로 힘을 얻어 그 힘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누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조금은 안타까운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말미암아 세상 속에서 외적인 요소들로 하나님의 높여주심을 경험하는 것 또한 좋은 일이겠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 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그분의 뜻과 행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자하심을 바라는 것은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에 베드로를 향해 당장 열 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부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부르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낮은 자로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쁨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경외하며 자신이 아닌 인자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을 사셨습니다. 또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기쁨으로 산 자들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외관의 화려함이나 힘이 아닌 우리 마음의 중심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외관이나 화려함을 취하는 분이셨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편의 한 말씀이 우리에게 찬양의 이유가 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여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아멘.
세상이 말하는 군사력과 가치관에 우리의 소망을 두지 않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둠으로 여전히 찬송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찬양이 끊일 수가 없는 삶임을 말씀을 통해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회복이시며 우리를 기억하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겸손케 하시고 붙드시는 분이시며 돌보시고 먹이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을 구할 때에 기뻐하시며 나타나 도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역사가 우리의 교회와 삶의 현장 가운데에 그대로 나타날 줄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찬송하고 예배하며 하나님을 기뻐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놀라운 일들을 우리 삶에 이미 시작하셨으며 지금도 역사하시며 앞으로도 이루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이 이보다 더 좋은 때가 없을 때에도, 내 마음이 상심되고 상처로 빼곡할 때에도 하나님은 찬양의 이유가 되십니다. 교회에 빈자리가 많아도,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찬양의 이유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고 아름다우시며 찬양받기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과 드려지는 예배 가운데에 선하시고 아름다우시며 찬양받기 마땅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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