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삶
데살로니가전서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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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바울은 실라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성령께서 아시아 지역에서 더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고, 밤에 마케도냐에서 사람이 와서 자신들을 도우라는 바울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케도니아로 떠났고, 빌립보를 거처 데살로니가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는 주후 48-50년 경이었습니다. 이때 데살로니가인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51-52년 경에 바울은 이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데살로니가가 로마의 속국의 주요도시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로마의 정치,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는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는 신분, 계급, 지위가 있던 나라였기 때문에 도시에 모여든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문제도 분명있었지만 도시에서는 신분, 계급, 지위의 역전이 일어나는 곳이라 보다 나은 기회를 잡기 위해서 모여든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민을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보다 더 나은 삶을 새로운 곳에서는 이뤄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나라를 이동하지 않습니까? 지방에서 도시로 옮겨가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그런데 더더욱 로마의 정치와 문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곳이라면 단순히 지방에서 도시로 이사가는 것의 의미를 넘어서서, 로마라는 대제국의 이점을 얻기 위해서 나라에서 나라를 옮기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데살로니가에 이미 살던 사람들이나, 데살로니가로 모여든 사람들에게서 는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고 싶어하는 목적이 강하게 들어나는 특징이 있었을 것입니다. 도시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면 신분과 계급과 지위의 상승이 일어나는 곳이니, 당대에 최고로 힘이 세고, 정치, 경제, 문화에서 가장 발달된 로마라는 나라의 가치관을 더 잘이해하고 그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그 당대의 사람들에게 특히나 도시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했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강하게 세상을 따라 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로마의 황제가 주가 아닌, 로마가 주가 아닌, 예수를 주로 받아들이고, 더이상 로마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가치관이 바뀌고, 그리고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도시에 놀라운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이런 변화가 찾아온 사람들이 제각이 흩어져 산 것이 아니라 서로 모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인의 모임,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에클레시아, 데살로니가인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모임이나 공동체를 뜻하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보통명사였습니다. 무역상들의 모임, 교육인들의 모임, 철학자들의 모임처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였습니다. 모임이라는 단어에 특별한 뜻이 있는게 아니라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특성에 의해서 그 모임이 다른 모임들과 구별이 되는 것이죠.
도시에 살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를 주와 메시아로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에클레시아에는, 그들의 모임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었을까요? 첫번째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행위가 있는 특징이 있었다고 합니다. 본문의 믿음의 역사라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역사는 행위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다섯가지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많은 가르침 중에 마태는 예수님의 다섯가지 가르침을 선별해서 기록을 해두었는데, 수많은 가르침 중에서 5가지를 선별해서 기록해두었다는 것은 그 다섯가지 가르침이 그만큼 중요한 가르침이라는 것이죠.
다섯가지 중 첫번째 가르침이 산상수훈입니다. 첫번째 가르침의 마지막과 두번째 가르침의 서론이 같은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것은 듣고, 행함에 대해서 입니다. 간헐천이 생기면 물이 범람하는 곳에 사람들이 집을 짓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기가 되면 어차피 물이 범람하는 곳이니 어리석게 이런 지대에 집을 짓지 않고 높은 지대에 집을 짓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는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잘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때 받아들이는 행위가 믿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또하나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깊이 이해해서 행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행위 또한 중요하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잘 듣지 않거나 듣기는 들어도 행동을 하지 않으면, 실천하지 않으면, 받아들인 진리대로 살아내지 않으면 물이 범람하는 곳에 집을 짓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믿음의 행위가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진리를 잘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만큼 그 진리대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인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 행위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진리대로 살아냄이 없나를 좀 살펴보면 받아들인 내용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라는 뗄감이 부족하니 열을 발생시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잘 배우지 않으려고 하고, 배워도 자기식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이면 진리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행위가 약하거나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그리고 메시아로, 즉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믿고, 믿은만큼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두번째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이는 특징은 사랑의 수고였습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했다고 하는 것이죠. 사랑에도 수고가 필요합니다.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하나님의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서 모이기 위해서는 사랑을 실제로 보여주는 수고를 더 해야합니다.
당시 도시는 현대도시와는 달리 열악한 위생, 불안한 치안 등등 여러모로 아주 살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족 하나 살아가기 빠듯한 삶에서 다른 사람들과 모임을 이루고 살아가려면 서로 얼마나 많은 배려와 이해와 더 나눔이 있어야 했겠습니까?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수고를 하면서까지 사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프랑스 파리에서 불교가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좋다고 하는 붐이 일어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유행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 빡빡한 도시생활에서 종교의 긍정적인 역할이 있다고 하는 것이죠. 이렇게 종교에서 긍정적인 것을 얻어가려고만 하는 인식이 강하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다면 서로 사랑의 수고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랑을 받은 것은 좋아하나 수고하면서까지 사랑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피해가 가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서로 불편하게 사랑하면서 관계를 맺으려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제 한국에서 한강이라는 여성작가가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작가는 고통을 주제로 그동안 글을 써서 세계의 문학상으로 지속적으로 상을 받아오다가 어제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이 작가는 고통을 서로 나누는 것이 지극한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작가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깊이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서로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깊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그 사람의 고통의 짐을 덜어주려고 하는 것이죠. 상대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수고는깊은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짐으로 인해서 고통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와서 그 고통을 내려놓고 쉼을 얻으라고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이 있는 자들과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먼저 고통이 있는 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사랑의 수고가 무엇인지 예수님은 몸소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세번째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에 대한 소망이었나 보니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본문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에 대한 부분입니다. 소망에도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사느냐에 따라 삶의 모양이 달라집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로 받아들인 예수님이 메시아의 역할을 하실 분으로 받아들이고 살았습니다. 메시아는 깨지고 망가진 이세상을 심판하시고, 회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주가 되신 메시아를 바라고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저버린 이 세상을 심판하시며 그러나 사랑으로 회복하시는 메시아를 역할을 학수고대하며,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신분에 변화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분의 변화가 있을 수 있고,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건강과 치안의 문제라는 실존의 문제 속에서 살아갔지만, 이런 것에 종속되어 삶의 소망을 실존의 문제에 무게를 두고 산게 아니라, 오히려 강하게 대두되는 삶의 희망을 메시아께 두고 인내하며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소망의 인내가 있었던 것이죠.
심판하시고 회복하시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회복하실 일을 바라며 그 소망이 사그라 들지 않도록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보다, 캠핑카를 사는 것을 더 바라고, 자식들이 전문직종을 가지 것에 더 큰 소망을 가지고 살고, 노후에 삶이 중요해서 노동에 더 큰 비중을 두면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예수를 주로, 예수를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며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은 그것이 믿음에 행위를 하고, 사랑에 수고를 하고, 소망의 인내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부터 이렇게 믿음에 행위를 하고, 사랑에 수고를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하며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를 주와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관계안에서 예수님과 관계안에서 어떻게 살았냐면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나라, 예수님이 주인인 나라, 예수님이 심판과 회복을 하셔서 다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하시려는 하나님 나라을 받아들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은 믿음에 행위가 있고, 사랑에 수고가 있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소망하며 살아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초림하셨을 때부터 종말은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그리스도로 오실 때까지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더이상 이 땅의 가치관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삶을 배우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이 땅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행위가 있고, 사랑으로 수고하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주인되시는 예수님이 메시아로 다시 오셔서, 이 땅을 심판하시고 회복하시기를 인내하며 바라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