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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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오늘부터는 데살로니가 전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의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데살로니가전서의 장소인 데살로니가의 배경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지금의 그리스의 북쪽인 마케도니아의 주도였습니다. 주전 315년경에 마케도니아의 왕이 26개의 마을의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면서 도시로 형성이 되었고,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 왕의 아내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마케도니아는 주전 168년경에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해서 로마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전 146년경에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한 주가 되었고,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주의 주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주의 주도이자 로마의 주요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바울 당시 데살로니가에는 12만명 정도의 사람이 살았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도시였는데, 고대 도시는 현대 도시와 완전히 그 규모나 환경이 달랐습니다.
도시의 크기가 작아서 인구밀도가 아주 높았습니다. 안디옥은 데살로니가와 같이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도시인데, 도시 길이가 3.2킬로 폭은 1.6킬로였고, 그곳에 15만명이 살았습니다. 1핵타르안에 200여명이 산다고 생각해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크기와 높은 밀도 안에서 대부분은 5층짜리 연립주택에 살았습니다. 가난할수록 높은 층에 살았습니다.
난방장치, 수도시설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수로시설에 의해서 물을 공급받았지만, 물의 양이 적을 때는 한 곳에 오래 고여있다가 도착할 때도 있어서 오염된 물을 공급받는 날이 많았습니다. 창문은 그냥 뚫려 있어서 천이나 가죽으로 대 논 것이 다였고, 화장실은 따로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길거리에 구덩이를 파서 화장실로 했었는데, 연립주택같은 경우에는 요강을 썼었었고, 급하면 창문밖으로 그냥 내다 버렸습니다.
도시는 먼지와 쓰레기 더미, 벌레 천지였고, 곳곳에 하수와 배설물이 넘쳐났습니다. 때때로 영유아나 낙태된 태아 등 인간의 시체도 제대로 치워지지 않은 상태로 유기됐습니다. 그결과 도시는 전반적으로 악취에 시달렸고, 위생에 아주 취약한 곳이었습니다. 도시가 악취가 가득찼다는 것은 감염병의 온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병이라도 돌면 도시 거주자의 1/3~2/3가 한꺼번에 사망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되면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방에서 사람들이 대거 새롭게 유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이 갑자기 이사를 오면 범죄율도 올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도시는 밤에 함부로 나가면 안되는 곳이었습니다. 때때로 폭동도 일어나고, 전쟁시에는 완전히 점령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도시 인구는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했습니다. 이런 곳에 데살로니가인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도시는 노숙인과 빈민 고아와 과부로 가득차 있었고, 생존권에 늘 위협을 받는 곳이었고, 아이들 키우기가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현대의 도시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도시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그나마 살아갈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는 신분, 계급, 지위가 존재 했었기 때문에 신분, 계급, 지위의 월장이 도시에서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지배를 받는 속국의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 살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곳인데, 신분의 상승이 일어나고, 지위의 상승이 일어나니 도시에 사람들이 몰리고 몰렸습니다. 이런 곳에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기간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세워졌다고 하면 건물을 떠올리기 쉽지만, 당시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가르키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모임이나 회합을 가리킬때 사용하는 보통명사였습니다. 한국은 가르칠 교, 모일 회자를 써서 가르침에 무게를 둬서 이 에클레시아를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에클레시아는 무역상들의 회합, 교육 모임 등등 일반적으로 모임이나 회합을 가리킬 때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십자가가 있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 자체를 가리켰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는 말은 데살로니가인의 모임, 데살로니가인의 공동체, 데살로니가인의 회합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그런 모임이나 공동체가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무역상들의 모임, 교육인들의 모임, 철학자들의 모임 등등 여러모임은 그들이 모여있는 그들만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모임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는 모임을 보면 그들에게도 다른 모임들과 같이 그들만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교회라는 모임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의 하나님 아버지라는 부분입니다. 어떤 모임을 보니 그 사람들은 무역을 말하는게 아니고, 교육을 말하는게 아니고, 철학을 말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내 죄를 용서해주신 분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셔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게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게 됐는데,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 사람이 나 뿐만이 아니라 저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었다고 하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서로 모이게 되어서 하나의 모임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 사람들,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분의 자녀 삼아주신 그 감격을 깨달은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복을 누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임들과 달리 교회라는 모임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예수가 주이시며 메시아로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부분입니다. 당시에 주라는 단어는 로마 황제에게만 사용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로마의 황제가 더이상 주가 아니고,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관에 더는 복종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민족이 구약 시대부터 기다려온 분입니다. 깨지고 망가진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세상을 심판하고 회복하는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였고, 그 메시아를 주로 받아들여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살아가려는 다짐과 결단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안이라는 말은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나타낼 때 안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던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소속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캐나다에 이민와서 오랫동안 살면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에 소속감을 가지고 삽니다. 한국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캐나다에서 살기 때문에 새로운 소속감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더이상 데살로니가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산다고 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고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 공동체였다는 것이죠. 데살로니가는 어떤 도시 였습니까? 열악한 환경, 신분상승을 위해, 또는 살기 위해 모여든 곳이었습니다. 그곳 생활에 지배를 받으며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주로, 메시아로 받아들여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살지만 더이상 로마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소속되어 새로운 소속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는 왜 모여있게 된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주로, 메시아로 받아들인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캐나다에 살지만, 이 땅에서 살지만 우리는 새로운 정체성을 하나님과 예수님께 발견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더이상 이 땅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소속되어 새로운 소속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교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찾기 위해 이 새벽에 모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맺기 위해 기도의 자리로 나왔습니다. 이 기도시간이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속되어 새로운 소속감으로 오늘도 이 땅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